책을 읽다가 좋은 문장이 나오면 밑줄을 긋는다. 책을 다 읽은 다음에는 노란색으로 밑줄 친 부분만을 빠르게 다시 읽는다. 책을 덮는다. 봄 그리고 겨울, 여름, 가을’이 지나간다. 일 년, 이 년, 삼 년’이 흐른다. 책을 다시 펼친다. 다시 밑줄 친 문장을 읽는다. 읽다 보면 어느새 밑줄을 치지 않은 문장’만을 골라서 읽는 자신을 발견한다. 궁금한 것이다. 너희들은 그때 왜 내 맘에 쏙 들지 않았던 것이더냐.간택 받지 못한 문장’을 읽는다. 좋은 문장을 발견한다. 기쁜 마음에 밑줄을 긋는다. 책을 덮는다. 밥을 먹는다. 밥을 먹다가 영화를 본다. 영화를 보다 보면 종종 밑줄을 긋고 싶은 장면’을 발견하게 된다.
밑줄 긋고 싶은 영화(들)
밀리언 달러 베이비 : 스승이 제자의 간절한 부탁을 받고 병실을 찾아와 산소 호흡기’를 떼는 장면’이 나온다. 이 장면’은 극의 절정이다. 별다른 양념 없이도 맛을 낼 수 있는 몇 안되는 장면’이다. 관객을 펑펑 울리면 스코어’는 좋아진다. 이 장면에서 욕심을 내지 않는 감독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은 무뚝뚝하게 이 장면을 진행한다. 잠깐의 참회와 어두운 병실을 걷는 늙은 남자의 뒷모습만 보인다. 감독은 관객들이 펑펑 울지 않도록 이 씬’을 간결하게 묘사한다. 감독이 이 장면에서 원했던 것은 슬픈 동정이 아니라 아픈 공감’이다. 그래서 나는 이 장면’을 좋아한다. 아마도... 이 늙은 감독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면 펑펑 울 것 같다.
실미도 : 밑줄 아닌 밑줄을 긋고 싶은 영화’도 있다. 밑줄이 문장 밑에 그어지지 않고 땅에 그어지면 광기의 이데올로기’로 변한다. 영화 <실미도> 는광기어린 반공 이데올로기에 대한 고발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대중의 반공 이데올로기’를 돈벌이’에 이용한 영화’다. 나는 실미도’라는 제목에 밑줄을 긋고 싶다. 그러니까 지우개 대신 사용하는 경멸의 밑줄 말이다. 나에게 있어서 실미도는실미도가 아니라 실미도’다.
거울/안드레이타르코프스키: 여자는 직녀이고 남자는 견우’이다. 그들은 단 한 번 만난다. 남자가 여자의 집을 방문한다. 날이 밝으면 다시 떠난다. 여자는 남자’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바라본다. 갈대 숲 너머의 남자는 점점 작아진다. 그때 거친 바람이 분다. 바람은 갈대를 흔든다. 순간 갈대가 파도처럼 출렁거린다. 그리고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다시 평온을 되찾는다. 그 사이 남자는 보이지 않는다. 이 장면은 너무 아름다워서 기적’처럼 느껴졌다. 나는 평생 이 장면을 잊지 못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이 장면 속에 등장한 바람은 어떤 바람일까 ? 대형 선풍기를 동원했을까 ? 아니면 특수효과를 동원했을까 ?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기계적 장치의 도움을 받기에 숲은 너무나 광대했고, 특수효과’를 사용하기엔 지나치게 아름다웠으니깐.
타르코프스키의 자서전을 통해서 안 사실이지만 그 장면’은 우연이었다고 한다. 예상하지 못한 바람이었으며, 그 계절에 그런 바람이 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고 한다. 바람은 그렇게 느닷없이 영화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것은 낯선 사람이 생방송 중인 스튜디오’로 뛰어들어와 내 귀에 도청장치가 달렸다고 외쳤던 것과 비슷하다. 어떤 것은 해프닝이 되고, 어떤 것은 예술이 된다. 그게 인생이다. 고다르의 말을 빌리면 그것은 자연이 예술을 위해 마련한 작은 선물’과 같은 것.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 : 해리와 샐리는 서로 앙숙이다. 해리는 샐리가 꼬리를 빳빳하게 세우는 꼴을 이해하지 못하고, 샐리는 해리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드는 꼴’을 천박하게 생각한다. 앙숙인 그들이 연인이 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그들은 우연히 자주 마주치지만 이 우연이 운명이 될 것이라는 것에 대해서 확실하게 선을 긋는다. 그럴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아요, 손에 장을 지지지요 ! 그들은 결국 그 선을 넘어 결혼하게 된다. 해리는 손에 장을 지지지지지지진다..
아라비아의 로렌스: 책에 밑줄을 긋는 행위’는 역설적이게도 밑줄’을 칠 문장보다 밑줄을 치지 않을 문장이 더 많을 때 밑줄을 긋게 된다. 만약에 첫 페이지 첫 문장 첫 음절에서 시작해서 마지막 페이지 마지막 문장의 마침표’까지 밑줄을 그어야 한다면, 우리는 아예 밑줄을 긋지 않을 것이다. 밑줄이 길면 길수록 밑줄은 그 의미’를 상실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밑줄이 단 한 번도 그어지지 않은 책은 둘 중 하나다. 정말 형편없거나 너무 위대하거나. 나는 영화 < 아라비아의 로렌스> 에 밑줄을 긋지 않겠다. 4시간 40분 동안 밑줄을 긋고 있을 내 자신을 상상하면 골치가 아프기 때문이다.
http://myperu.blog.me/20112485211
베티블루 37.2 : 자신의 몸에 밑줄을 긋는 사람도 있다. 자살’이란 인생이라는 이름의 마지막 페이지의, 마지막 문장의, 마지막 마침표’에 밑줄을 긋는 행위’이다. 자살을 선택하는 사람은 문장 대신 마침표에 주저흔’을 남기는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몸에 밑줄을 긋는다.
러브레터:소수의 문장에 밑줄’을 긋는 행위’는 사랑 고백을 닮았다.그것은 지지, 동감, 환호, 동맹’이며 당신을 향한 연정이다. 밑줄은 혜진’이고, 문장은 민식’이다. 혜진은 민식’을 사랑한다. 그녀는 쇼바 잔뜩 올린 민식의 오토바이’와 개 짖는 소리’보다 우렁찬 배기통의 부르릉 소리와 평범한 경적’을 경멸하는, 적적한 밤 거리를 화려하게 수놓는빠라빠라빠라빰’을 사랑한다. 영화 < 러브레터 > 는 편지를 뒤늦게 발견한 소녀의 이야기다. 편지는 너무 늦게 도착했고, 사내는 너무 일찍 떠났다. 여기서 편지는 사랑 고백이 담긴 하나의 문장’이다. 그녀는 잘 계시나요 ? 라는 문장 아래 밑줄을 긋는다. 그 문장에 밑줄을 긋는다는 것은 저도 잘 있습니다, 라는 뜻이다. 사랑합니다 라는 문장에 밑줄을 긋는 것은 저도 당신을 사랑합니다 라는 뜻이다. 파인 탱큐, 앤드 유 다. 그들은 서로 화해한다. 손으로 쓴 글씨’를 통해 서로의 마음씨’를 읽는다.
http://myperu.blog.me/20127455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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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책은 좋은 여자’와 같고, 좋은 독서는 사랑하는 여자와 함께 걷는 산책과 같다. 그녀와 남산에 오른 적이 있다. 우리는 말없이 남산을 향했다. 걸으면서 그녀의 옆모습을 훔쳤다. 그녀는 아름다운 문장’이었다. 그 문장에 밑줄을 긋고 싶어서 그녀의 손을 잡았다. 나는 입 대신 손으로 사랑 고백’을 했다. 봄 그리고 겨울, 여름, 가을이 지나갔다. 일 년, 이 년, 삼 년이 흘렀다. 세월이 흘렀다. 책을 펼치는 날보다 덮는 날이 많아졌다. 문득 그 책 속에 있던 문장이 다시 읽고 싶어서 책장을 뒤졌으나 보이지 않았다. 그 문장이 담긴 책을 잃어버린 것이다. 내가 밑줄 친 문장들이 생각났다. 땀에 젖은 귀밑머리, 왼쪽 젖가슴, 숱이 적은 거웃, 촉촉한 동굴, 검은 머리, 앙상한 어깨, 무릎, 팔, 무릎, 팔. 나의 리타헤이워드, 나의 검은 동굴, 나의 예상치 못한 바람, 나의 러브레터. 내가 사랑한...... 모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