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근두근 내 인생
김애란 지음 / 창비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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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편의 가족 서사(극) : 두근두근 내인생, 삼부자.

 


 

애란 장편소설 < 두근두근내인생 > 에 대한 반응이 좋다. 독자는 물론이거니와 평단 또한 칭찬 일색이다. 놀라 다시 본다, 라는 성석제의 기막힌 40자 평이 있는가 하면 요즘 잘 나가는 젊은 평론가는 역시 김애란이라며 엄지 세 개‘를 올린다. 하지만 이 착한 가족극은 몇몇 눈에 띄는 장점에도 불구하고 단점이 많은 작품이다. 그녀가 내놓은  단편집에 비하면 이번 장편소설은 기대 이하’다 !


소설 속 주인공은 모두 피터팬 증후군을 앓고 있는 환자‘처럼 보인다. 주인공 부모에게는 세월에 따른 자각의 과정이 없다. 17살 때 고속버스에 올라타서 34살 때 버스에서 내려온 인물 같다. 그뿐인가 ? 이웃집 할아버지는 항문기에 집착하는 꼬마 한스 같다. 공교롭게도 유일한 어른은 조로에 걸린 주인공 소년’이다. 그들은 모두 항문기로 퇴행 중인 노인이거나 질풍노도의 시기에 머문 철없는 부모이거나 혹은 너무 늙은 애어른‘이다. 자기 나이에 맞는 인물은 아무도 없다. 한 편의 명랑만화’를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문제는 고착으로 인하여 이 아이들의 사회성‘이 결여되었다는 점이다. 사회성이 결여되었으니 등장인물들은 모두 명랑하고, 유쾌하며, 긍정적이다. 사회에 대한 인식은 계급에 대한  자각을 경험하게 되는데 이 명랑한 아이들에게는 그러한 성숙한 비판의식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냥 대책 없는 무비판성‘은 작가로써 치명적 결점이다. 그녀는 거리’를 은폐한다. 꼴랑 보여주는 것은 골목길이다. 거리가 사회화된 영역이라면 골목길은 사회화가 거세된 낭만적 장소이다.

 

소설가는 어떤 식으로든 당대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이 소설에는 그것이 없다. 명랑’하기만 하면 장땡인가 ? 심각할 때 심각할 줄 알아야 하는데 심각할 때도 주인공들은 웃는다. 으, 하하하하하 !  내가 보기엔, 김애란의 < 두근두근... > 은 3분 발성법으로 1시간짜리 창‘에 도전한 느낌’이 든다. 그것은 마치 3분짜리 콩트를 60분 분량으로 늘린 것 같은 느낌이라는 말이다.   

뷰, 티블 마인드- 하다.

 

 

 

 

 

 


 

 

 

 

면 손창섭의 < 삼부녀 > 는 나쁜 가족극‘이다. 근친 욕망이라는 이름의 총천연색 만화경’처럼 화려하다. 일본 도까이 에이브이 성인 공작소‘라면 이 원작을 입수해서 근사한 포르노를 찍었을 것이 분명하다. 주인공은 소라 아오이 ? 손창섭은 이 소설에서 에둘러 이야기하는 법‘ 이 없다. 읽다 보면 막장도 이런 막장이 없다. 이 작품은 1970년 주간여성에 연재된 장편소설인데 과연 이러한 내용의 소설이 검열 없이 연재되었다는 점이 신기할 따름이다. 그런데 정말 신기한 점은 생생하다는 것이다. 40년이나 지난 작품이 2010년의 당대성을 획득한다는 사실은 거의 기적처럼 보인다. 그러니깐 손창섭은 40년 앞을 내다보고 이 소설을 쓴 것이다. 그는 너무 앞서간 인물이었다.


간단하게 내용을 정리하자면 이렇다. 가족은 해체된다. 아내는 바람나서 도망가고, 딸들도 모두 아버지를 부정하고 집을 나간다. 이제 남은 것은 늙은 수컷‘과 텅 빈 집이다. 소설은 해체된 가족’을 새로운 방식으로 복원한다. 위기를 겪은 가족의 복원이 아닌, 새로운 인물들로 교체하는 것이다. 스폰서를 하는 조건으로 아내의 빈자리‘를 젊은 여자가 채우고, 딸의 빈자리 또한 다른 젊은 여자’가 채우는 방식이다. 계약 가족이다. 문제는 두 여자 모두 아버지의 남근을 빨고 싶다는 것이다. 그녀들은 끊임없이 유혹한다. 가짜 아내는 딸의 욕망을 견제하지만 나무라지는 않는다. 가짜 딸은 시도 때도 없이 아버지의 침실을 노린다 !


하지만 유사 가족 관계 안에서 불협화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유사 가족 제도는 평화‘ 롭다, 놀랍게도 ! 손창섭이 보기에 혈연 중심적 가족주의’는 모두를 불행하게 만든다. 그래서 그는 해체를 주장한다.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는 것이다. 대안가족의 탄생이다. 박정희가 군화발로 동토를 철권통치하는 시대에 손창섭은 성적으로 도발을 한다. 엿 먹어라,  페니스 !


그는 남근 중심의 숨 막히는 한국 유교 사회‘를 혐오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남근과 대한민국을 동일시했고, 그 속에서 광기의 소국’을 발견했다. 그래서 조국을 야반도주했는지도 모른다. 이 위대한 소설가는 끝끝내 조국을 등진 채 일본에서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


 

김애란 장편소설이 후진 이유는 한심할 만큼 무비판적 태도에 있다. 그리고 그보다 더 한심한 것은 김애란 소설의 문제점을 지적하지 않는 평단의 알 수 없는 침묵‘이다. 정, 말 이 소설은 놀라서 다시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소설인가 ? 많이 팔리면 장땡인가 ? 김애란을 손창섭과 비교하는 것 자체가 불경스러운 일이지만 손창섭의 치열한 현실 인식에 비하면 김애란은 지나치게 낙관적이어서 뻔뻔하다.

 

 

착한 사람들만 등장하는 소설은 좋은 소설이 아니다. 갈등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갈등이 없으니 봉합이 없고, 봉합이 없으니 트라우마가 없다. 대충 그까이꺼 대강 웃으면 이와요. 그, 런 겁니까 ? 아아,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 그겁니까 ? 물론 나쁜 사람만 등장하는 소설 또한 좋은 서사'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나쁜 사람만 등장하는 서사가 차라리 좋은 사람들만 등장하는 서사보다는 훌륭한 작품이 나올 확률이 높다. 소설이란 근본적으로 어두운 면을 집요하게 탐구하려고 하는 만화경이 아니었던가 ? 김애란은 그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나는 김애란이 잘 팔리는 소설가가 되어 신경숙을 따르기보다는 당대의 현실에 고민하는 공선옥'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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