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아빠가 필요한 시대.

 

 

 

 

 

 

 

 

 

 

 

 

대한민국에서 가족이라는 키워드는 만병통치약'이다. 외로워도 슬퍼도 가족이다. 뭔가 막힌다 싶으면 " 가족이잖아 ! " 라고 말하는 순간 모든 것을 풀린다. 그래서 일일드라마'는 가족 이야기'가 끝날 줄을 모른다. 신경숙의 < 엄마를 부탁해 > 는 이명박 각하 시대의 불행이 엄마를 무시한 죄'라고 은연 중에 말하는 것 같다. 하지만 가족이 복원된다고 상황은 달라질까 ? 중요한 것은 가족이 아니라 계급이다. 그녀는 그것을 아주 철저하게 무시했다. 가족은 모든 것을 치유하는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이득재의 < 가족주의는 야만이다 > 는 제목 그대로 " 가족 신화 " 의 허구를 살벌하게 폭로한다. 그가 가족 주의의 병폐'에서 벗어나는 대안으로 제시한 것은 들뢰즈의 노마드 개념이다. 싸돌아다녀야 썩지 않는다는 것이다. 고인 물은 썩는 법이니 말이다.

 

 


 

 

 

 

 

< 7번 방의 선물 > 이 1000만 관객을 돌파했다. 동네 바보 용구'가 천만 관객을 울린 것이다. 흥행의 열쇠는 무엇이었을까 ? 중년의 남성들이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는 기사'가 봇물을 이루었으니 " 부성애의 재발견 " 인 것은 확실하다. 이 영화를 본 그날의 가족 풍경이 눈에 선하다. 다 큰 자식들은 아빠'를 쇼파에 앉히고는 이런 율동을 선보였을 것이다. " 아빠, 힘 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 ! 아빠, 힘 내세요. 우리가 있어요. " 참새처럼 글썽거리면서, 물개처럼 콧물을 훌쩍거리면서 부르는, 다 큰 딸은 커다란 가슴을 출렁거리고, 군대를 막 제대한 아들은 곰 같은 몸으로 촐랑거리면서, 아.... 이런 슬픈 가족의 풍경 !

 

 

그런데 < 가족의 재발견 > 은 용구 아빠'에 의해 촉발된 것'이 아니다. 이명박 정부 내내 우리는 " 엄마가 필요해 ! " 를 외쳤다. 그 촉매제'는 신경숙의 < 엄마를 부탁해 > 였다. 책만 보면 쳇 ! 이라며 혀를 끌끌 차던 사람들도 이 책은 사서 읽었다. 이 책의 서평 란에는 온통 눈물 바다'다. 종종 " 배송이 빨라서 좋아요 ! " 라는 이상한 감상평이 올라오기는 하나 주류는 엄마에게 잘하자, 이다. 그러니깐 이명박 정부는 엄마의 재발견으로 시작해서 아빠의 재발견'으로 끝나는, 매우 독특하며, 꽤나 신파적인, 일일 드라마 가족극에 충실한, 복고 취향의 정권'으로 기록될 것이다. 각하는 (기업)프렌들리'가 아니라 (가업)페밀리'적이다. 아마도 이명박이 욕심을 부려서 정권을 5년 더 연장했다면 오빠, 언니, 누나, 여동생은 물론이고 당숙에 당숙 조카의 재발견 시리즈'가 미친듯이 이어졌을 것이다. ( 아, 잡담은 집어치우자 ! 아빠는 사형을 당하고, 엄마는 집을 나갔는데 잡담이 웬 말인가. )

 

 

현상'이란 결핍'의 결과이다. 영화 < 배트맨 > 에서 고담 시민들이 초인적 영웅'에게 열광하는 이유는 초인적 영웅의 출현이 아니고서는 병든 고담 시티'를 구제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영웅을 간절히 원하는 사회는 병든 사회다. 건강한 사회'는 영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영웅 없이도 세상은 알아서 잘 돌아가지 않던가 ? 그것이 진정한 지방자치요, 풀뿌리 정치'이다. 건강한 사람의 면역 기능처럼 말이다. 지난 이명박 정부'에서 대한민국 국민들이 엄마와 아빠가 필요하다고 펑펑 우는 까닭은 무엇일까 ? 간단하다 ! 가족은 해체 위기'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가족이 결핍의 존재가 되는 순간, 우리는 가족을 복원하기 위해서 그들을 호명해야 한다. 그래서 다 큰 어른들이 엄마와 아빠 앞에서 슬픈 동화를 부르는 것이다.

 

 

이처럼 " 가족 " 이 강박적으로 호명되는 현상은 징조가 나쁘다고 보아야 한다. 이러한 현상을 마치 휴머니티의 복원이라거나 가족의 소중함을 알게 해주는, 건강한 사회가 되기 위한 섬세한 증후'로 읽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파란 신호등이 아니라 빨간 신호등이다. 이러한 현상은 마치 당 환자'가 급히 초콜릿'을 찾는 이치와 비슷하다. 오사마 빈 라덴'이 비행기를 뉴욕 쌍둥이 빌딩을 향해 돌진하면 콘돔은 많이 팔린다. 신문에서는 이러한 현상을 재난으로 인해 가족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는 분석을 내놓는다. 맞는 말이다. 가족 서사'가 강조된다는 것은 재난이 발생할 때이다. 헐리웃 모든 재난영화는 사실 해체된 가족을 복원하는 가족영화이다. 가족이라는 이데올로기'가 강조된다는 것은 이미 위기에 봉착했거나 위기일발이거나 둘 중 하나'이다. 이처럼 가족 이데올로기'의 강조는 위기의 증후'인 것이다.

 

 

< 7번 방의 선물 > 에서 용구'는 바보'로 나온다. 착하고 착한 우리 용구와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예쁜 딸. 하지만 용구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사형당한다. 아, 시발 ! 이 지점에서는 동네 굴다리 아래 컨테이너'에 살던 해병전우회 마초들도 눈물을 흘리고, 어버이 연합 가스통 할배'들도 눈물을 쏟는다. 안경을 고치는 척하지만 사실은 눈물을 훔친다. 훔쳐도 죄가 되지 않는 것은 눈물뿐이로구나. 아, 아아아. 보아라, 이 얼마나 아름다운 부성애냐. 그런데 이 슬픔'은 좀 묘한 구석이 있다. 멜랑꾸리'하기는 한데 뭔가 야리꾸리'하다. 대한민국 사람은 바보'가 나오는 영화'를 지나치게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 포레스트 검프 > 는 워낙 세계적인 흥행작이니 그렇다고 쳐도, 숀 펜이 나온 < 아이 엠 샘 > 은 수입사마저 예상하지 못한 대박이었다. 본토에서는 별 볼 일 없어서 천대를 받던 영화가 한국에 오면서 대박을 친 것이다. 바보 코드는 먹힌다. 적어도 대한민국에서는 말이다. 맨발의 기봉이는 어떤가 ? 백만불짜리 다리'를 외치던 조승우는 ? 영구의 원조인 < 여로 > 는 ?

 

 

한국인은 바보가 어눌하게 말하면 감동하고, 일반인이 잘못을 또박또박 지적하면 화를 낸다. 하지만 무조건 바보'에게 감동하는 것은 아니다. 착하다는 전제'가 깔려 있어야만 한다. 우리는 " 사람이 착하기만 하면 못 써 ! 독한 구석이 있어야 돼... " 라고 말은 하면서도 정작 바보는 백치일 만큼 착한 존재이기를 바란다. 착할수록 눈물은 곱하기'가 된다. 이러한 태도가 불쾌한 이유는 바보'나 장애인'을 대하는 이중적 잣대 때문이다. 리퀘스트 방송은 집요하게 마음씨 착한 장애인'을 부각시킨다. 아파도 엄마 마음 아플까 봐서 내색도 못하는 자녀의 깊은 성정'을 나레이터는 앵무새처럼 읽는다.

 

 

이 지점에서 반대로 한번 물어보자. 그렇다면 성질 고약한 장애인은 도울 필요가 없는 것일까 ? 만약에 둘 중 한 명에게 도움을 주어야 한다면 누구에게 사랑의 열매를 주어야 할까 ? 사람들은 대부분 당연하다는 듯이 착한 장애인'이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둘 다 공평하게 나누어야 한다. 그게 바로 복지의 기본이다. 성질 고약한 장애인 대신 착한 장애인에게 기부하는 행위'가 당연하다고는 생각은 잘못된 생각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편애는 장애인 주제에 성격마저 고약하네, 라는 태도가 은연 중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이명박 시대가 지나고 박근혜 정부가 들어섰다. 어쩌면 각하'야말로 한국 코미디 영화'의 공식을 몸소 증명해 보인 셀프 무비-바디'였다. 국민 대다수인 에브리바디를 혼자서 웃기고 울렸으니깐 말이다. 코미디 정권이라기보다는 신파 정권이라고 하는 게 맞는 말 같다. 이명박 시대의 서사가 어머니 신파라면, 박근혜는 시대는 아버지 신파'로 첫 번째 문장을 찍었다. 나는 그녀가 대통령 임기를 마칠 동안 아버지 신드롬'이 계속 이어지지 않았으면 한다. 가족 이데올로기'란 시대의 위기'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녀가 성공하길 바란다. 진심이다, 라고 말하고 싶으나 캄캄한 어둠뿐이란 사실을 잘 안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글 속에 늘 작은 반전을 숨겨두고는 했다. 이 글도 예외는 아니다. 나는 책을 읽지 않고도 서평을 쓸 수 있다고 생각한다. 피에르 바야르는 <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 에서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노하우를 가르쳐주었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영화를 보지 않고도 영화에 대해 말할 수 있다. 참고로 나는 이 영화'를 보지 않았다.

 

 

 

 

+

자기계발서의 경우는 한 권만 읽으면 읽지 않은 천 권의 자기계발서'를 읽은 것처럼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제목만 바뀌었지 내용은 동일하기 때문이다. < 디테일이 중요하다 > 란 책과 < 사소한 것에 목숨 걸자 >라는 책이 있다. 전혀 다른 소리를 하는 자기계발서(들) 같지만 사실은 디테일과 사소한 것은 같은 말이다. 일처리가 꼼꼼해야 된다는 주문 아닌가 ? < 어머니로부터 배우는 경영 철학 > 이란 책은 어떤가 ? 자상함이란 키워드는 결국 꼼꼼하다는 뜻이다. < 중요한 것은 성과가 아니라 인간이다 > 이라는 책도 결국은 인간에 대한 세심한 배려를 요구하는 것이다. 내가 자기계발서'를 전혀 읽지 않는 이유이다. 만약에 자기계발서'를 백 권 읽었다고 자랑하는 놈은 멍청한 놈이다. 나는 자기계발서를 한 권도 읽지 않았으나 그 책들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책을 읽지 않고도 그 책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이유이다.

 

 

 

피에르 바야르의 <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 도 읽지 않은 책이다 !! 내가 이 글에 숨겨둔 반전은 이 영화를 보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피에르 바야르의 책마저도 읽지 않았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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