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홍상수 영화를 위한 새빨간 다이알로그

 

 

 

 

 

 

 

 

 

 

 

 

 

 

홍상수의 14번째 영화 < 그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 을 보다가 묘한 기시감에 시달린 적이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유준상과 예지원'이 나누는 대화'에서다. 그들은 안개 낀 남한산성'을 오르다가 바람에 펄럭이는 깃발을 본다. 예지원이 그 깃발을 바라보며 말한다. " 깃발이 얼마나 멋진 발명품이야, 이게 있으니 바람이 있다는 걸 알 수 있잖아. " 명대사'다. 깃발은 사람이 바람을 볼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발명품이란다. " 멋지다, 홍상수 ! " 그런데 극장을 나서는 순간부터 이 대사에 대한 묘한 기시감'이 들기 시작했다. 어느 영화 속 한 장면이었을까, 아니면 롤랑 바르트의 < 사랑의 단상 > 에 나오는 문장이었을까 ? 의문은 엉뚱한 곳에서 풀렸다. 엘리어스 카네티의 < 군중과 권력 > 에서 이와 비슷한 문장이 나온다. 다음과 같다.

 

" 깃발은 보여질 수 있도록 만들어진 바람이다. 깃발은 구름에서 잘라낸 작은 조각과 같은 것이다. 다만 구름보다 더 가깝고 색깔이 요란한 뿐이다. 그리고 깃발은 한곳에 매어져 있고, 그 형태도 언제나나 일정하다. 정말 그것이 사람들의 눈길을 끌게 될 때는 그것이 펄럭일 때이다. 여러 민족들은 마치 그들이 바람을 쪼개기라도 할 수 있듯이 그들 머리 위의 대기를 자기의 것을 규정짓기 위해서 깃발을 이용하는 것이다.  

 

- 군중과 권력 中

 

우연일까 ? 홍상수는 이 책을 과연 읽었을까 ? 감독과의 대화'가 있다면 꼭 물어보고 싶다. 알라딘의 기준에 따르자면 < 사회학 일반 > 으로 분류되는 이 책'은 사회학보다는 철학에 가까우며, 문장은 문학보다 더 문학적이며 시적이다. 이러한 모호한 경계는 카네티가 소설가이면서 시인이었고, 극작가였으며, 인류학자 그리고 사회과학자'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의문은 풀린다. ( 그는 그 누구보다도 뛰어난 사상가였다. ) 이러한 전방위적 재능'을 나는 아름다운 짬뽕이라 부르고 싶다. 프랑스에 롤랑 바르트가 있다면, 독일에는 엘리어스 카네티'가 있다. < 군중과 권력 > 은 독일판 < 텍스트의 즐거움 > 이라 할 만하다.

 

 

+  해원이 도서관에서 읽고 있는 책은 엘리아스의 < 죽어가는 자의 고독 > 이다.

 

 

 


 

 

 

1.

 

내가 옛날에 시나리오 속에 꿈 장면을 자주 집어넣었더니 누가 그러더군. 꿈은 레이몬드 챈들러'가 말하는 총잡이와 비슷하다고 말이야. 뭔 말이냐고 물었더니 챈들러가 건들건들거리며 이렇게 말했다는 거야. " 소설이 막힌다 싶으면 느닷없이 총잡이 등장시켜서 총 쏘고 사라지라구 ! " 꿈도 마찬가지라고 하더군. 막히면 그냥 꿈 장면을 등장시키면 된다고 말이지. 하지만 그것은 아마츄어나 하는 짓이라고 ! 챈들러 같은 거장이니깐 느닷없는 총잡이 타령이 먹히는 거지. 좆밥들은 씨알도 안 먹힌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야. 정말 맞는 말이다. 꿈 장면이란 적재적소에 등장하면 좋은 효과를 얻을 수 있지만 그냥 궁여지책으로 꿈이 등장하면 나쁜 효과만 초래해.

 

 

홍상수 영화를 보면 말이야. 꿈이 자주 등장하잖아. 작법의 정석대로 보자면 홍상수 시나리오는 빵점에 가깝지만 홍상수니깐 가능한 거야. 챈들러니깐 가능한 것처럼 말이지. 임재범의 삑사리'는 임재범이니깐 용서가 되는 거야. 개인적인 취향을 전제로 깔자면... 홍상수의 최고 걸작'은 [ 옥희의 영화 ]이거나 [ 북촌방향 ]이 될 거야. 세련된 맛으로 치자면 [ 북촌방향 ] 에 한 표를 던지겠어. 개인적으로 흑백 화면을 좋아하거든. 단지 그 이유야. 요즘은 애들이 영화를 보는 눈이 높아진 것 같아. 홍상수 하면 온통 차이와 반복 그리고 변주'를 이야기하더군. 좀 배웠다 하는 놈들은 들뢰즈와 데리다'를 거론하기도 하지.

 

 

또 어떤 놈은 보드리야르의 시뮬라크르'를 거론하며 원본과 복제의 관계'에 대해서 말을 하기도 해. 모두 맞는 말이야. 어차피 텍스트란 수용자의 몫이니깐 말이야. 그런데 내가 그들의 글에서 불만을 가지는 이유는 바로 글을 어렵게 쓴다는 점이야. 차이, 반복, 변주, 원본 없는 복제의 용어를 굳이 어렵게 설명할 필요가 있느냐는 거야.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한 이유는 나랏말쌈이 어려워서, 서로 사맛디 아니해서 그런 거 아니겠어 ? 이에 어여삐 여겨 한글을 맹가노니 7일째 되는 날 보기에 좋으셨던 거지.

 

 

내가 보기엔 홍상수 영화의 근작'들은 < 귀신들린 숲 > 에 대한 이야기인 것 같아. 효성 깊은 나뭇꾼은 한시 바삐 고개를 넘으려고 하지, 아들을 기다리는 노모 때문에 말이야. 그런데 날이 어두워지잖아. 사람들이 나뭇꾼을 말리지. 그 산은 밤에 귀신이 나온다고 말이야. 하지만 효심 깊은 나뭇꾼은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길을 떠나. 곧 산길은 어둠에 젖어들고.... 그런데 말이야. 가도 가도 계속 첩첩산중'이야. 아이구야, 갈 길 먼데 똥줄이 타지. 보다 빠른 종종 걸음으로 걸어도 상황은 벗어나질 못해. 나뭇꾼은 지쳐서 소나무 아래에 털썩 주저앉다가 깨닫게 되지. 저 소나무를 열 번 넘게 보았다는 사실?! 그러니깐 나뭇꾼은 제자리를 계속 돌고 있었던 거야 !

 

 

홍상수 영화는 바로 < 귀신들린 숲 > 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야. [ 북촌 방향 ] 에서의 북촌'은 일종의 " 귀신들린 골목 " 이야. 왔던 길을 계속 다시 오게 돼. 하지만 유준상은 자신이 왔던 길이라는 것을 잘 몰라. 귀신이 괜히 귀신이겠어. 홀리면 끝장 ! 바로 이 지점에서 반복'이 만들어지는 거야. 유준상은 귀신에 홀린 거야. 벗어나려고 하지만 결국은 북촌'으로 돌아오지. 이 기본 서사'가 반복되면 복제'가 되는 거야. 그리고 복제'가 재생산되면서 약간씩 변형이 이루어지면 변주가 되는 것. < 귀신들린 숲 > 에 대한 나뭇꾼의 태도'를 봐. 지나친 길을 또 지나가지만 그의 태도'는 전과는 약간씩 달라지기 시작하잖아. 세 번째 반복에서는 땀을 닦고 지나가다가, 다섯 번째 반복에서는 털썩 주저앉으면서 에라이, 시부랄 ! 이라고 숨을 헐떡이거든. 이것이 바로 변주'야 !

 

 

어때, 이해하기 쉽지 ? [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 에 나오는 서촌도 이 < 귀신들린 숲 > 과 비슷해. 거리에 버려진 담배꽁초는 일종의 특정 좌표'야. 나뭇꾼이 소나무가 있는 곳에서 출발하여 다시 그 소나무로 돌아오듯이 해원은 거리에 버려진 담배꽁초가 있는 곳에서 출발하여 다시 그 좌표'로 돌아오는 것이지.

 

 

자, 이제 마무리하자. 그렇다면 홍상수는 우리에게 무엇을 이야기하려는 것을까 ? 내가 보기엔 홍상수는 시지푸스 신화의 궤적'에 대해 말하고 싶은 모양이야. 사실 나뭇꾼과 시지푸스는 동일인물이야. 왜냐하면 이 둘은 모두 헛된 희망을 반복하고 있거든. 나뭇꾼은 계속 소나무 아래'로 돌아오고, 시지푸스의 바위 또한 계속 산 아래로 굴러떨어지지.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그들은 계속 헛된 노동에 지쳐가고 있는 중이야. 그것이 바로 인간의 고독이지. < 고도 > 는 오지 않아, 바위는 계속 구르고, 다시 소나무 아래'이지. 달라지는 건 없어. 인간이란 존재는 그런 존재야. [ 북촌방향 ] 에서 유준상은 마지막에 깨닫게 되는 것 같아. 자신이 귀신에게 홀렸다는 사실을 말이야. 그가 북촌 거리에서 고현정'과 만났을 때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 같아. 아, 나는 지금 귀신들린 북촌 거리를 헤매고 있었구나. 그러니깐 이 영화에서의 고현정은 소나무 같은 오브제'이지.

 

 

인간은 누구나 혼자야.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처럼 말이야. 혼자 이 귀신들린 산'을 빠져나와야 하고, 바위를 굴려야 하지. 존재론적 슬픔은 바로 이 고독에서 오는 것이야. 인간의 힘으로는 이 미궁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지. 형벌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죽음뿐. [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 에서 해원은 도서관에서 이런 책을 읽고 있었어. The Loneliness of the Dying / 죽어가는 자의 고독. 우린 그렇게 부조리한 상황 속에서 죽어가는 거야. 외롭게 말이야.

 

 

깃발은 바람을 보기 위해 만든 발명품이 아니야. 하늘을 보도록 고안된 발명품이지. 깃발을 쳐다보면 반드시 하늘을 보게 되어 있잖아. 태극기'도 마찬가지다.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 하라고 만들어놓은 것이 태극기 아니겠어 ? 결국 깃발이란 가장 먼 곳을 보라는 뜻이야. 하늘보다 더 먼 곳은 없으니깐 말이야. 유치환의 < 깃발 > 이란 시가 생각나네. 후훗.. 저 푸른 해원을 향해 흔드는, 노스텔지어의 손수건이라고 했던가 ? 나는 자꾸 저 푸른 옷을 입은 해원을 향해 흔드는, 노스텔지어의 깃발로 읽혀. 무슨 뜻이냐고 ? 아이구야, 아무 의미 없어. 영화를 너무 심각하게 보진 말자구.

 

 

 

2.

 

홍상수는 점점 너그러워졌다. 시니컬한 경멸은 어느 순간 인간에 대한 위로'를 품기 시작했다. 왜 아니 그러겠는가 ! 하고 싶은 영화를 눈치 안 보고 맘껏 만들 수 있는 감독'은 홍상수가 유일할 것이다. ( 예외가 있다면 김기덕 정도 ! ) 더군다나 그의 영화라면 노 개런티'라도 불사하는 배우들이 줄을 선다. 그리고 1000만 관객 동원 시대에 10만 관객만 동원해도 나름 선방이니 홍상수야말로 대한민국에서 가장 행복한 감독이다. 그러니 굳이 삐딱하게 세상을 볼 필요가 없는 것이다. 삐딱한 세상은 김기덕이 쫙 쥐고 있으니 수컷들의 쪼잔한 세상은 홍상수의 몫이다. 어떤 사람은 홍상수 영화가 항상 똑같은 상황극'이어서 짜증이 난다고 말하고, 또 어떤 이는 영화가 지나치게 난해하다고도 말한다. 그런데 그것은 홍상수의 잘못이 아니다. 적어도 몇 년 사이의 근작들은 감독의 잘못이 아니다.

 

 

홍상수 영화'가 같은 이야기를 계속 반복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 여자 만나 낮술 마시다가 모텔에서 따먹는 이야기의 무한 반복'은 그것이 바로 서사'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 천일야화 > 에서 세헤라쟈데'는 1001일 동안 1001 개의 이야기'를 왕에게 들려준 것이 아니다. 하나의 이야기를 변주의 방식을 통해서 천 개의 이야기로 만든 것이다. 솔직히 고백하자. 수컷은 여자 만나 술 마시며 즐겁게 놀다가 모텔 가서 따먹는 서사'가 가장 스펙타클한 것이다. 지구를 지키는 것은 슈퍼 영웅의 몫이지, 찌질한 수컷의 서사가 아니다. 그리고 홍상수 영화가 난해하다는 불만도 잘못된 지적이다. 난해하다는 것은 고도의 상징성이 압축된 형태'가 될 때 발생하게 된다. 행간을 읽는다는 것은 상징을 풀어 해석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홍상수 영화에서 < 상징 > 은 존재하는 것일까 ? [ 북촌방향 ] 에서 북촌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 [ 다른 나라에서 ] 우산이라는 오브제는 무엇에 대한 은유인가 ?

 

 

정성일처럼 비비꼬기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 다른나라에서'의 우산은 핵 전쟁에 대한 공포에 대한 은유죠. 핵우산을 상징하는 겁니다. " 좆 까라 그래라. 박찬욱의 영화는 고도로 응축된 상징의 세계이지만 홍상수 영화'에서는 그런 상징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북촌은 그냥 북촌이다. 문성근이 쏟아낸 문어'는 엘리트 먹물에 대한 조롱이 아니다. 그의 영화는 오히려 이런 상징 해석을 걷어내고 볼 때 흥미진진해진다. 14번째 작품 [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 은 [ 북촌 방향 ]의 속편 같은 소품이다. [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 대신 [ 서촌 방향 ] 이라고 영화 제목을 정해도 무방한 것처럼 보인다. [ 북촌 방향 ] 이 유준상의 남산 아래 북촌 유람이라면, [ 누구의 딸... ] 은 정은채의 남산 아래 서촌 유람'이다. 이래저래 생각하며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 필요 없다. 홍상수 영화를 관통하는 것은 등장인물들의 < 대상 분리 불안 장애' > 다. 홍상수 영화 속 등장 인물들은 모두 심리적 고아'다. 그들은 한곳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 노마드의 생을 주기적으로 반복한다.

 

 

[ 생활의 발견 ] 에서의 경주와 춘천, [ 밤과 낮 ] 에서의 프랑스, [ 북촌방향 ] 에서의 북촌은 주인공에게는 낯선 공간'이다. 그것은 노마드적 유람의 흔적이다. [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에서의 해원'도 제목이 말해주듯이 심리적 고아의 지위를 얻는다. 뿌리를 내린 삶이 가족의 형태라면, 뿌리없이 떠도는 노마드적 삶은 전형적인 떠돌이의 방식이다. 그래서 홍상수의 주인공들은 떠남과 도착 그리고 다시 떠남'을 반복한다. 길 위의 영화인 셈이다. 사실 홍상수 영화는 매우 이상한 방식의, 한정된 로드 무비'다. 이 길'은 카프카의 출구 없는 미로이기 보다는 보르헤스의 미궁에 가깝고, 토속적인 말투를 빌리면 돌고 도는 물레방아 같은 인생이다.

 

 

[ 누구의 딸... ] 에서 담배꽁초가 버려진 거리는 마치 귀신 들린 숲속 길'과 비슷하다. 나무꾼이 이 숲속을 벗어나려고 해도 결국은 원점으로 다시 돌아오듯이, 해원 또한 담배꽁초가 버려진 그 거리로 다시 온다. 어쩌면 [ 북촌방향 ] 이후의 길들은 모두 귀신들린 길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순환이며 동시에 반복이다. 왔던 길을 다시 오지만 정작 주인공은 그 사실을 모른다. 그냥 막연한 기시감에 시달릴 뿐이다. 그것은 귀신들린 숲을 헤매는 나뭇꾼과 비슷하다. 한참 지나고 나서야 나뭇꾼은 자신이 왔던 길을 계속 반복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 북촌방향 ]의 마지막 장면은 유준상이 무엇인가를 깨닫는 것 같은 표정으로 끝난다. 나는 지금 왔던 길을 계속 지나가고 있는 중이다 !

 

 

그것이야말로 인생의 지긋지긋한 허무'이다. [ 북촌방향 ] 의 주인공이 골목을 벗어나지 못하고 계속 그 길 위에 서 있듯이, 해원은 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흔한 말로 표현하자면 인생이란 다람쥐 첫바퀴이고, 고상하게 말하자면 시지푸스적 궤적'이다. 요즘 사람들은 죄다 먹물 티'를 내니 나 또한 loneliness한 시지푸스적 존재의 고독한 궤적'이라고 쓰겠다.

 

 

해원은 엄마가 캐나다로 떠남으로서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이 되었다. loneliness 한 해원이다. 해원은 이 분리'를 보상받기 위해서 성준과의 불륜 관계'를 다시 시작할 지 말아야 할 지에 대해 고민에 빠진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 곁'> 이다. 사랑이라는 것은 결국 애착 대상'에 대한 분리 불안'을 대체할 보상 심리 욕망인 것이다. 그것은 엄마의 침대에서 쫒겨난 여자아이가 애착 관계인 엄마 대신 품고 자는 곰인형'과 비슷하다. 해원에게 성준은 그런 존재'다. 성준은 엄마를 대신할 곰인형이다. 하지만 해원은 다섯 살 계집애'가 아니지 않은가 ! 그녀는 사춘기가 다가오면 이제 곰인형과 떨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다 커서도 쪽팔리게 곰인형을 껴안고 잘 수는 없는 노릇이니깐 말이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인물은 기주봉'이다. 이제 그는 홍상수 영화의 간달프 같은 존재이다. 압도적인 인장이다. 그는 지나가는 행인'으로 나와서는 항상 잽을 던지듯 툭툭 말 한 마디 던지고 간다. 마치 늙은 남자 요정 같다. 그리고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예지원과 유준상이 깃발을 보며 던진 대사'다. 깃발은 좋은 발명품이지. 유준상이 말한다. 예지원은 잠시 깃발을 보다가 말한다. 깃발은 바람을 보게 만들어요 ! 하지만 나는 예지원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바람을 보게 만드는 것은 깃발 외'에도 많다. 갈대도 바람이 지나가는 흔적을 남기고, 나뭇잎도 바람의 길을 보여준다. 내가 보기엔 깃발'은 바람을 보게 만드는 발명품이 아니라 하늘을 보게 만드는 발명품이다. 왜냐하면 깃발을 보면 자연스레 하늘을 보게 되기 때문이다. 아, 이토록 시적인 심상이라니. 내가 왜 아직도 애인이 없는지, 나 스스로도 이해를 못하겠다

 

 

 

 

 

오, 수정

생활의 발견 + 다른 나라에서

북촌방향

옥희의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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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진 2013-06-10 0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오, 여긴 댓글에도 비밀번호가 있네요. ㅋㅋ

저도 <해원>전에는 <북촌방향>이 가장 좋았어요. 시간이 뒤틀리고 녹아내리는 기분이었어요. 요즘 들어 홍상수의 영화가 왠지 알 수 없지만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귀신들린 숲'이라는 말이 딱 들어맞네요. 서울 북촌, 서촌에서 벌어지는 <블레어 윗치>같기도 하고. ㅋㅋ. 점점 더 흥미로워져요.

곰곰생각하는발 2013-06-10 00:55   좋아요 0 | URL
앗, 아진님 !!! ㅎㅎㅎㅎ. 이러게 내방하여 주시고 감사합니다.
저도 점점 홍상수 영화에 빠지기 시작해서 뭔가 좀 무섭다는 생각이 들ㅇ요.
고독을 들켜버린... 왜 그런 것 있잖아요. 술마시며 신나게 놀다가
집에 돌아와 불을 켤 때 느끼는 그 묘한 고독 있잖습니까...그런 게 느껴집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3-06-10 00:55   좋아요 0 | URL
앗, 아진님 !!! ㅎㅎㅎㅎ. 이러게 내방하여 주시고 감사합니다.
저도 점점 홍상수 영화에 빠지기 시작해서 뭔가 좀 무섭다는 생각이 들ㅇ요.
고독을 들켜버린... 왜 그런 것 있잖아요. 술마시며 신나게 놀다가
집에 돌아와 불을 켤 때 느끼는 그 묘한 고독 있잖습니까...그런 게 느껴집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3-06-10 00:55   좋아요 0 | URL
앗, 아진님 !!! ㅎㅎㅎㅎ. 이러게 내방하여 주시고 감사합니다.
저도 점점 홍상수 영화에 빠지기 시작해서 뭔가 좀 무섭다는 생각이 들ㅇ요.
고독을 들켜버린... 왜 그런 것 있잖아요. 술마시며 신나게 놀다가
집에 돌아와 불을 켤 때 느끼는 그 묘한 고독 있잖습니까...그런 게 느껴집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3-06-10 00:55   좋아요 0 | URL
앗, 아진님 !!! ㅎㅎㅎㅎ. 이러게 내방하여 주시고 감사합니다.
저도 점점 홍상수 영화에 빠지기 시작해서 뭔가 좀 무섭다는 생각이 들ㅇ요.
고독을 들켜버린... 왜 그런 것 있잖아요. 술마시며 신나게 놀다가
집에 돌아와 불을 켤 때 느끼는 그 묘한 고독 있잖습니까...그런 게 느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