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 전집 1 - 시 김수영 전집 1
김수영 지음, 이영준 엮음 / 민음사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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쪼잔한, 김수영

 

 

모든 것'은 날씨 때문이었다. 더워도 너무 더워. 각하 때문에 밥맛 없는데 폭염 때문에 입맛도 잃었다. 밥만 먹으면 더우니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내놓은 해결책'이 냉면이었다. 8월 내내 냉면만 먹었다. 점심도 냉면, 저녁도 냉면, 새벽 3시에도 냉면 ! 요리 과정'은 라면을 끓여 먹는 것보다 더 편했다. 비빔 냉면의 경우는 양념장을 잔뜩 해놓는다. 삶은 계란도 미리 삶아놓는다. 면만 끓이면 양념장에 얼음 동동 띄우고 삶은 계란'만 넣으면 끝이다. 아, 맵고 시원하며 달콤한 맛이란 ! 나중엔 양념장 만드는 노하우가 생겨서 양념장 만들 때 갖가지 과일로 새콤달콤한 맛을 더했다. 나중에는 무를 식초에 절여서 냉면 무'도 만들었다. 와우, 정말 끝내줬다. 그런데 문제는 장이다.

 

 

매운 맛에 쥐약인 나는 자극적인 양념 때문에 날마다 똥구멍에 불이 났다. 가래떡 같은 놈들이 똥구멍을 밀치고 나올 때마다 " 아... 이 빌어먹을 캡사이신 !!! " 하루에 화장실을 다섯 번 넘게 들락날락거리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엔 얼음의 과대 섭취도 한몫 했다. 그러다 보니 나의 괄약근은 과중한 업무에 과로가 쌓인 것 같다. 똥 눌 때마다 묵직한 것이다. 치질'인 것 같다. 앞이 캄캄하다.

 

 

- 어떻게 오셨죠 ?

- 음, 에험, 그러니깐......

- 말씀하세요.

- 똥구멍에 과부하가 생겼습니다.

- 아하 ! 항문 쪽에 이상이 생겼군요 ? 벗어요 !

- 네에 ?!

- 벗으라고요 ! 당신의 똥구멍을 보아야 진단을 내릴 것 아닙니까 !

- 부, 부부부끄럽습니다.

- 여기에 온 이상 더 이상 당신의 똥구멍은 그 똥구멍이 아닙니다. 대통령도 여기 오면 똥구멍을 벌려요.

- 그럼... 벗겠습니다. ( 벗는다 )

- 음, 당신 똥구멍'은 예쁘군요. 여기 오기 전에 미리 씻고 오셨구랴. 쯔쯔쯔. 당신의 괄약근 사이에 고춧가루가... 떼어드릴께요 ! 이건.... 서비스입니다. 허허허..... 혹시.... 손으로 직접 항문을 긁으신 적 있으신가요 ?

- 네 ?! 아,아아아니 어떻게 그런 말씀을 ! 제가 야만인입니까.

  똥구멍을 어떻게 직접 긁습니까 ! 사과하세요 !!!

- 사과... 못하겠는데요. 하하하하. 그렇다면 제가 직접 긁어드리죠.

  어때요 ? 시원하시죠 ? 이건 진료비 추가 항목에 포함됩니다.

 

 

이런 상상을 하고 있다. 앞이 캄캄하다. 하지만 똥구멍의 과로'가 비단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그만큼 읽었던 책을 다시 읽는 시간도 많아졌기 때문이다. 화장실'을 갈 때는 바지에 똥을 쌀지언정 반드시 책부터 챙기는 버릇이 있기 때문이다. 화장실에서 무엇인가를 읽지 않으면 감옥 같은거라.... 책이 없을 때는 유한락스통에 붙어 있는 유한락스 성분을 읽는다. 병이다, 병 ! 우선 변기에 앉으면 일단 아무 페이지'나 펼쳐서 읽는다. 주로 노란색 색연필로 밑줄 친 부분을 주로 읽는다. 오늘은 김규항의 B급 좌파 세 번째 이야기' 를 읽다가 공감 가는 부분이 있어서 소개한다.

 

 

 

지식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의 글을 읽으면서 가진 풀리지 않는 의문은 이 사람들은 왜 제 이야기는 안 하는 걸까 였다. 그들은 언제나 구름 위에 앉은 양 세상 이야기를 했고 제 이야기나 일상을 들먹이는 건 어딘가 품위 없는 짓이라 생각하는 듯했다. 김수영이라는 거의 유일한 예외를 빼놓고 말한다면, 내가 보기에 한국의 지식인들이란 뇌는 있으되 자의식은 없는 사람들이었다.

 

 

 

이 문장에 밑줄이 길게 그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크게 공감'을 했던 모양이다. 한국 문학 사상 가장 빛나는 업적에 속하는 김수영'의 글을 어린 나이에 읽다가 실망한 적이 있었다. 김수영, 이 양반 그렇게 쪼잔할 수가 없는 것이다. 십 원 하나 아까워서 벌벌 떨고, 아무 것도 아닌 것 가지고 화'를 잔뜩 내고, 뭐?! 뭐라 그랬더라 ? 자기는 사소한 것에 분노한다고 ? 하는 짓이 밴댕이 소갈딱지 ! 아니, 이게 무슨 위대한 작가인가 !

 

 

그런데 나이가 들어서 그의 산문을 다시 읽었을 때 그가 왜 이 시대 최고의 지성인'인지를 새삼 깨닫게 되었다. 그는 언행일치'를 완벽하게 실천한 문인 중 한 명이었다. 그는 모든 불의에 대하여 분노했다. 그리고 단 한 번도 자신이 내뱉은 말과 글'에 위반하는 행동을 한 적이 없는 지식인이었다. 그 스스로도 등단 작가이면서 한국의 등단 제도'를 신랄하게 디스'한 문장은 지금 보아도 압권이었다. 그는 잘못된 것을 고치기 위해서는 자신의 기득권을 내려놓을 용기도 있던 사내였다. 그가 비록 쪼잔하게 앵앵거려도 이 사소함은 위대했다. 김수영의 시도 위대했고, 산문도 위대했고, 김수영이란 인물 자체도 위대했다.

 

 

오늘 화장실에 앉아서 김수영을 다시 생각했다. 평준화 교육을 주장하던 유시민과 조국의 자녀가 특목고 출신이라는 사실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 변명이랍시고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다더라, 라고 말할 때 김수영이 깨어 있었다면 어떻게 화를 냈을까 ? 황석영이 노벨상 욕심 때문에 각하와 손잡고 아시아 몽골 대연합'을 주장했을 때, 그리고 김지하'가 아시아 공동체 구상'을 천명했을 때, 그럴 때마다 드는 의문은 왜 항상 거창해야 하는가 이다. 대작가여서 거창한 사회 운동'을 선언하는 것일까 ?

 

 

천명 운운하지 말고 노무현처럼 고향 내려가서 농사 지으면, 행동으로 실천하면 그게 운동이고 천명 아닐까 ? 사소한 것은 절대 사소한 것이 아니다. 찌질해도 배울 건 많다. 그래서 나도 고백하련다. 나... 솔직히 말해서 똥구멍이 간지러울 때 정말 손가락으로 긁고 싶었다. 팬티 위로 긁는 것이 아니라 내 가운데손가락으로 시원하게 긁고 싶었다. 그, 리고 긁었다. 정말 시원하더라. 물론 손은 씻고 이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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