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다는 행위는 오롯이 혼자의 힘'이다.
2003, end.
남들이 참고서를 살 때, 나는 그 돈을 모아서 월간 키노'를 샀다. 수학의 정석 대신 영화의 정석'을 공부한 것이다. 형편이 되는 대로 샀다. 돈 있으면 사고, 돈 없으면 뛰어넘었다. 주로 스페셜 에디션으로 편집되는 알짜배기 특집이 몰리는 12,1,7,8호'를 사는 통에 봄 가을'은 통째로 안 산 경우가 많았다. 내가 키노 구입에 적극적이지 않았던 이유는 정성일 때문이었다. 재수없게 잘난 척을 어찌나 그리 하던지, 당시 편집장이었던 정성일이 하도 까불 때'라서 반항심이 컸던 모양이다. 꼰대의 냄새가 물씬 풍겼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키노 자체만 놓고 보면 매우 중요한 참고 자료'다. 지금도 이만한 영화 자료는 드물 것이다. 전무후무한 영화잡지'다.
며칠 간, 책을 정리하다가 그만 키노'를 건드리고야 말았다. 낡은 사진첩처럼, 추억의 책장처럼 < 키노 > 잡지를 들춰본 것은 아니다.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궁금하지 않다. 이미 읽었던 내용이고, 이미 10년, 20년 전의 영화 이야기'이니 무엇이 궁금한가. 내가 궁금한 것은 내가 가지고 있는 키노의 내용이 아니었다. 내게 없는 키노가 궁금한 것이다. 95년도 7월 호에는 어떤 내용이 있는 것일까 ? 99년 10월 가을에 개봉한 영화는 무엇이 있을까 ? 궁금한 것이다. 그래서 중고 서적을 이리저리 뒤져서 10년 전 영화 잡지'를 구매했다. 95년이면 17년 전 잡지다.
주문하고 나서 곰곰 생각하니, 정말 미친 짓 같다. 20년 전의 월간 잡지 '를 사는 이유는 무엇일까 ? " out of sight out of mind " 라는 서양 격언이 있다. 어찌나 쉬운 단어로 이루어진 문장인지, 나 같은 알파벳 까막눈'도 잊지 않고 자신있게 쓸 수 있는 몇 안 되는 문장이다. 보이지 않으면 마음에서 멀어진다는 뜻인데, 이 격언을 들을 때마다 피식 웃는다. 사실 보이지 않으면 마음에서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간절해진다. < 섬 > 이 아름다운 이유는 멀리 있기 때문이다. 지평선이 아름다운 이유도 마찬가지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은 이루어진 사랑'보다 아름답다.
읽지 않은 책'을 읽는 행위는 무인도 섬을 향해 가는 행위'와 동일하다. 읽는다는 행위는 본질적으로 혼자의 힘이다. 그 시간은 오롯이 섬이 되는 순간이다. 섬이란 유행과는 거리가 멀어서 오래된 고딕 양식의 클래식 정장' 같다. 그러므로 베스트셀러 목록은 수상한 목록'이다. 혹여, 실망하여도 어쩔 수 없다. 또 다른 섬으로 떠나면 되니깐 말이다. 그동안 수천 개의 < 섬 > 을 돌아다녔다. 섬을 접기도 하고, 밑줄을 긋기도 했으며, 섬을 베개 삼아 잠을 자기도 했다. 맘에 드는 섬도 있고, 맘에 들지 않는 섬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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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열심히 옛날 신문을 읽었다. 언제부터인가 남산/용산 도서관'에 가면 정기간행물실에 가서 10,20,30년 전 신문을 읽기 시작했다. 재미있는 거라. 하루종일 읽은 적도 있다. 낄낄거리며 웃으면, 사람들이 나를 우스운 사람으로 오해하기도 했다. 옛날 신문을 보며 웃다니, 말이다. 옛날 신문을 보며 울기도 했다. 엉엉 울면, 사람들이 나를 우스운 사람으로 오해하기도 했다. 언제부터인가 신문을 볼 때는 웃지도 않고 울지도 않은, 무표정한 표정으로 읽기 시작했다. 그러자 사람들은 나를 정신 나간 사람으로 오해하기도 했다. 에라이, 시부랄 ! 그럼 내가 어떻게 해야 하냐 ?
옛날 신문을 읽었어 : http://myperu.blog.me/201685764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