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는 극복의 대상이다. 장애인의 성공 서사는 곧바로 관람객의 자기 반성으로 이어진다. 장애를 가진 저 사람도 저렇게 열심히 노력하는데 우리는...... 관찰의 대상이 되어버린 장애인들 사이에서 비판이 일기 시작했다. 과연 장애는 극복의 대상인가 ? 어쩌면 비장애인은 자기 계발을 위한 소재로 장애를 이용하는 것은 아닌가 ? 그때부터 나는 장애를 다룬 영화들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오재형 감독이 연출한 다큐멘터리 << 소영의 노력 >> 은 뇌병변(?) 장애를 가진 소영의 무용담(舞踊談)이다. 소영은 무용극의 무용수다. 카메라는 소영이 무대에 오르기까지의 과정을 관찰한다. 영화 전반부는 소영에 대한 인물 정보와 무용극에 대한 소개가 제한적일 뿐만 아니라 무대 장면도 거의 생략되어 있다. 이것은 감독의 단단한 다짐처럼 보였다. 장애인의 극복 서사를 관객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다는 다짐 말이다. 영화 전반부의 카메라가 장애를 가진 소영을 관찰하는 시점이라면, 무대가 끝나고 난 후의 일상을 다룬 영화 후반부에서 카메라는 소영의 손으로 들어온다.
제 3자의 시선으로 관찰당하던 그녀는 이제 자기 자신을 자기 손으로 직접 보여준다. 그 어떤 시선의 간섭도 없다. 이때부터 마법 같은 일이 벌어진다. 미래에 대한 불안과 고민을 고백하는 말보다 감동적인 것은 얼굴이다. 영화에서 멋진 대사보다 오래 남는 것은 정직한 얼굴이다. 거리 조절에 실패해 촛점이 흐려진, 해상도 낮은 몇몇 얼굴에서는 칼 테어도르 드레이어의 잔다르크를 떠올렸다. 소영의 어머니는 방구석에서 아무거나 찍는다고 영화가 되냐며 타박을 늘어놓았지만 관객은 어머니의 핀잔이 틀렸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소영은 훌륭한 무용가이자 연출가이며 좋은 시민이다. 이 영화는 내가 올해 본 가장 아름다운 독립 영화'다.
종종 배우 한 명이 영화 전체를 씹어먹는 경우가 있는데 이 영화도 그렇다. 그녀는 전동 휠체어에 의지하지 않은 채 홀로 서서 걷는다. 균형을 잃고 넘어지기도 한다. 춤을 추기 위해서는 다리의 힘을 길러야 하고, 다리의 힘을 얻으려서 흔들리며 걸어야 한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춤이야말로 흔들리면서 걷는 예술이 아닐까. 도종환의 시가 떠올랐다.
흔들리며 피는 꽃
-도종환시 (1990)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시인의 말처럼 흔들리지 않고 걷는 사람 어디 있을까. 이 세상 그 어떤 사람도 다 흔들리면서 걷고 있다. 당신도, 그리고 우리 모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