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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대종사
왕가위 감독, 송혜교 외 출연 / 아트서비스 / 2014년 2월
평점 :
절판
사물의 슬픔
꽃단추 / 손택수
내가 반하는 것들은 대개 단추가 많다
꼭꼭 채운 단추는 풀어보고 싶어지고
과하게 풀어진 단추는 다시
얌전하게 채워주고 싶어진다
참을성이 부족해서
난폭하게 질주하는 지퍼는 질색
감질이 나면 좀 어떤가
단추를 풀고 채우는 시간을 기다릴 줄 안다는 건
낮과 밤 사이에,
해와 달을
금단추 은단추처럼 달아줄 줄 안다는 것
무덤가에 찬바람 든다고, 꽃이 핀다
용케 제 구멍 위로 쑤욱 고개를 내민 민들레
지상과 지하, 틈이 벌어지지 않게
흔들리는 실뿌리 야무지게 채워놓았다
ㅡ 손택수 시집 < 나무의 수사학 > 실천문학사
다들 경험하셨으리라. 애인과의 첫날밤, 떨리는 손끝으로 애인의 실크 블라우스에 달린 단추를 풀 때 시간이 더디게 흘러간다는 것. 들뜬 마음에 조금이라도 빨리 풀어헤치고 싶으나 그럴수록 쉽게 풀어지지 않던 그 하얀 단추. 아직도 생각난다. 명주실로 짠 실크의 감촉이 아이스크림보다 부드러웠다는 사실도. 손택수 시인의 < 꽃단추 > 를 읽을 때마다 몇몇 장면들이 생각나곤 한다. 생각해 보면 : 참을성이 부족해서 / 난폭하게 질주하는 지퍼는 민망한 구석이 있다. 옷이 가지고 있는 질감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지퍼는 열고 닫는 개패(開閉) 기능만 있을 뿐 채움과 비움(풀어헤치는)이 없다.
좋은 목수는 쇠못을 사용하지 않고 나무의 결대로 가구를 만들듯이 좋은 옷을 만드는 사람들은 쇠 지퍼가 있을 자리에 단추가 있는 옷을 만든다. 날마다 단추를 끄르고(풀고) 맺는(채우고) 행위는 마치 인생과 같아서 인연을 끊고 맺고를 반복한다. 그런 점에서 단추는 조금 불편하고 조금 더 느리지만, 그래서 인간적이다. < 生 > 이 채워 놓는 단추의 기능이라면, < 死 > 는 풀어놓는 단추의 기능이다. 시인은 무덤가에 핀 노란 민들레를 단추에 비유한다. 시인의 상상력이 빛을 내는 순간이다. 지상과 지하, 묘와 관, 생과 사의 틈 사이로 찬바람 분다. 찬바람 든다고 옷을 여미듯이 시인은 무덤가에 핀 민들레 노란 꽃단추를 채운다.
떨어진 단추 하나가 영화의 주요 소재로 등장하는 영화가 있다. 왕가위 감독이 연출한 무협 영화 << 일대종사, 2013 >> 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에피소드는 " 단추 " 장면일 것이다. 이 영화를 보고 나서 확신한 것은 왕가위 영화라는 문화 상품은 철저하게 유물론적 세계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철저한 유물론자다 . 아내가 있는 엽문(양조위 분)과 가문의 무예를 전승하기 위하여 결혼을 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한 궁이(장쯔이 분)는 서로 사랑하는 마음만 간직하고 있다. 다만, 그 마음을 말하지 않을 뿐이다. 세월이 흘러흘러 두 사람은 다시 만난다. 남자는 가족과 재산을 잃는다. 여자는 가족과 건강을 잃는다.
남자에게 남은 것은 어쩔 수 없는 맹세이고, 여자에게 남은 것은 돌이킬 수 없는 다짐이다. 남자의 맹세와 여자의 다짐은 어쩔 수 없고 돌이킬 수 없다는 점에서 후회에 닿는다. 남자는 여자에게 단추 하나를 내민다. 오래 전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기 위해 장만했던 새 외투에서 떨어져 나간 단추다. " 그곳에 가기 위하여(당신을 만나기 위해) 외투 하나를 장만했었소. 하지만 전쟁통에 가지 못했소. 살림이 궁하여 외투는 팔았소. 남은 것은 외투에서 떨어져 나간 단추 하나요. 당신에게 주고 싶소. " 여기서 우리는 단추라는 물질(물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다.
목 마른 선비에게 내민 조롱박(에 담긴 물) 위에 뜬 버들잎이 우물가 처녀의 고운 마음이 반영된 물질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듯이 말이다. 남자가 내민 단추는 자본주의적 시선으로 보자면 교환 가치 없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것에 불과하지만 그것은 비가시적인 마음의 가시적 현현이라는 점에서 두 사람에게는 매우 중요한 정표다. 이처럼 왕가위 영화를 관통하는 멜랑꼴리한 정서는 사랑한다는 고백(말)보다는 사물을 통해 전달된다. 관객은 단추를 통해서 모노노 아와레(物ものの哀あわれ : 보고 듣고 만지는 사물에 의해 촉발되는 정서와 애수, 일상과 유리된 사물 및 사상과 접했을 때, 마음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적막하고 쓸쓸하면서 어딘지 모르게 슬픈 감정을 말한다 )를 발견한다.
10년 전 그때 만났더라면 눈에 익었을 그 남자의 외투에 달린 단추. 여자는 처음 보는 단추를 지긋이 바라본다. 여자와 남자가 연을 맺지 못했듯이 옷의 왼편과 오른편을 맺지 못하고 떨어져 나간 단추를 보면서 여자는 깊은 슬픔에 잠긴다. 남자가 뒤늦게 연을 맺자고 준 단추를 여자는 돌려준다. 마음만 간직할 뿐이다. 왕가위의 고백은 늘 이렇다. 일본의 국민 작가 나쓰메 소세끼는 외국 문학 작품 중에서 i love you 라는 문장을 어떻게 번역할까를 두고 고민하는 학생에게 다음과 같이 의역하라고 했다. " 달이 참 밝네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