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여선 : 봄밤 Spring Night ㅣ 바이링궐 에디션 한국 대표 소설 55
권여선 지음, 전승희 옮김, 데이비드 윌리엄 홍 감수 / 도서출판 아시아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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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밤의 목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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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에 피는 꽃 중 가장 아름다운 꽃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봄밤에 가장 빛나는 꽃이 목련이라는 데 내 전 재산 500원을 걸 수는 있다(아님 말고). 모 시인은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느냐고 말했지만 이른 봄에 피는 목련이야말로 바람에 흔들리며 피는 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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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목련은 봄밤에 보면 찬란하다. 검은 밤과 하얀 꽃의 조화는 그 어떤 말로도 표현이 불가능하다. 쌀쌀한 날씨에 핀 꽃 봉오리는 찬란하다 못해 숭고하다. 김수영 시인의 시 < 봄밤 > 에는 목련이란 시어가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지만 소리 내어 읽다 보면 목련 핀 봄밤을 산책하는 시인의 모습이 떠오른다. 가난한 선비가 반딧불이를 촛불 삼아 캄캄한 밤에 책을 읽듯이 시인은 목련을 촛불 삼아 봄의 풍경을 읽는 것 같다. 가난한 시인의 단호한 정언 명령에는 세속적 욕망에 대한 거부와 종교적 수행이 엿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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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밤

김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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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강물 위에 떨어진 불빛처럼

혁혁한 업적을 바라지 말라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달이 떠도

너는 조금도 당황하지 말라

술에서 깨어난 무거운 봄이여

오오 봄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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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없이 풀어지는 피곤한 마음에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너의 꿈이 달의 행로와 비슷한 회전을 하더라도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기적소리가 과연 슬프다 하더라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서둘지 말라 나의 빛이여

오오 인생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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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앙과 불행과 격투와 청춘과 천만인의 생활과

그러한 모든 것이 보이는 밤

눈을 뜨지 않은 땅속의 벌레같이

아둔하고 가난한 마음은 서둘지 말라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절제여

나의 귀여운 아들이여

오오 나의 영감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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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여선 소설집 << 안녕 주정뱅이 >> 에 수록된 단편 < 봄밤 > 에는 술에 취해 봄밤을 걷는 중증 알코올 중독자 영경(女)이 등장한다. 그녀는 술에 취해 거리를 걸을 때마다 김수영의 봄밤을 낭독한다. 그것은 낭독이 아닌 주정이면서 동시에 속도에서 낙오된 자신을 향한 주문이다. " 강물 위에 떨어진 불빛처럼 / 혁혁한 업적을 바라지 말라 /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달이 떠도 / 너는 조금도 당황하지 말라 ㅡ " 여자는 하염없이 봄밤을 걷다가 목련 앞에서 걸음을 멈춘다. 그녀는 " 촛불 모양의 흰 봉오리를 매단 목련나무 아래에서 소리 내어 ㅡ " 운다. 봄밤과 목련이 만나는 지점이다. 나는 그녀가 슬퍼서 울었다기보다는 봄밤의 목련이 아름다워서, 그래서.... 무서워서 울었다고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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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는 << 두이노의 비가 >> 에서 아름다움의 본질에 대해서 이렇게 노래한다. " 아름다움이란 우리가 간신히 견디어내는 무서움의 시작일 뿐이므로 / 우리가 이처럼 아름다움에 경탄하는 까닭은, 그것이 우리를 경멸하기 때문이다(두이노의 비가 1 ) " 영경은 목련 앞에서 간신히 견디어내다가 통곡한다. 아름다움이 영경을 경멸하기 때문이다1). < 봄밤 > 을 읽고 났을 때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영화 < 오아시스 > 였다. 주정뱅이와 앉은뱅이의 사랑(봄밤)은 지적장애와 지체장애의 사랑(오아시스)과 겹치지만 결은 사뭇 다르다. 단편소설 < 봄밤 > 에는 영화 < 오아시스 > 에서 보이는 " 이기적 휴머니즘 " 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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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영경과 수환의 사랑은 서로에게 이타적이다. 요양원에서 영경과 함께 사는 수환은 알코올성 간경화로 죽음을 향해 치닫는 영경이 술을 마실 수 있도록 외출을 허용한다. 그녀는 봄밤의 목련에 취한다. 그것이 정취였는지 만취였는지 모르겠지만, 신파를 징글징글하게 싫어했던 내가 이 단편을 읽다가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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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영경을 연기한 한예리가 봄밤의 목련을 보며( " 봄밤의 목련 " 과 " 목련의 봄밤 " 에서 고민하다가 봄밤의 목련을 선택했다) 소리 내어 통곡하는 장면이 있다. 연암 박지원은 << 열하일기 >> 에서 호곡장( : 好哭場 )이란 표현을 사용했는데 마음을 비우기에 좋은 울음 장소라는 뜻2)이다. 늙은 목련나무 앞이 그녀에게는 호곡장이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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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구가 멸망하는 날, 단 두 권의 문학작품(소설과 시)을 타임캡슐에 넣어서 보관해야 한다면 나는 세르반테스의 << 돈키호테 >> 와 릴케의 << 두이노의 비가 >> 를 선택할 것 같다. 두이노의 비가는 백 번 넘게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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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박지원은 << 열하일기 >> ㅡ 호곡장 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사람들은 칠정 중에서 슬플 때만 울음이 나오는 줄로 알고 칠정의 모두에서 울음이 나오는 줄은 모르고 있답니다. 기쁨이 사무치면 울음이 나오고, 분노가 사무치면 울음이 나오고, 즐거움이 사무쳐도 울음이 나오고, 사랑이 사무쳐도 울음이 나오며, 미움이 사무쳐도 울음이 나오고, 욕망이 사무쳐도 울음이 나오는 법이지요. 응어리지고 답답한 마음을 풀어서 시원하게 하는 것으로는 그 어떤 것도 소리보다 빠르지 않으니 울음이란 천지간 우레에도 비교할 수 있지요. 지극한 정에서 울음이 터지고, 터진 울음이 사리에 맞는다면 웃음과 울음이 뭐가 다르겠습니까? 사람이 태어나 정을 풀어내면서 일찍이 이런 지극한 처지를 겪어 본 적이 없어서 칠정을 교묘하게 안배해서 울음을 슬픔의 짝으로 맞추어 놓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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