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바와 스파게티
첫 문장이 유명해서 그 소설이 유명해지는 경우는 없다. 대부분 소설이 유명하니까 첫 문장도 따라서 유명해지는 경우다. 첫 문장이 유명한 소설 하면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 설국 >> 도 만만치 않다. " 国境の長いトンネルを抜けると雪国であった。夜の底が白くなった。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 이 소설을 처음 번역하기로 한 번역가는 고민에 빠진다. 결국, 며칠 동안 한 줄도 번역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 이유는 문장의 주어가 없기 때문이었다. 번역가 에드워드 사이덴스티커는 하는 수없이 생략된 주어(TRAIN)를 만들어서 문장을 완성한다.
에드워드 사이덴스티커가 번역한 << 설국 >> 첫 문장 버전이다. " The train came out of the long tunnel into the snow country. The earth lay white under the night sky." 두 문장(일문과 영문)의 차이는 무엇일까 ? 나는 한글 번역본을 읽었을 때 설국 풍경을 바라본 주체는 기차가 아니라 기차에 탄 주인공 남성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이 문장에서 설경을 바라보는 시선의 주체는 주인공이다. 반면에 영문 번역가가 번역한 문장에는 시선의 주체가 무인칭이다. 이 차이로 인하여 시선의 높낮이가 달라진다. 전자는 사람의 시선 높이로 본 설국의 풍경이고, 후자는 높은 곳에서 내려다본 설국의 풍경이다.
영화감독이라면 전자의 경우는 카메라 감독이 삼각대에 고정한 째 기차역 풍경을 찍었을 것이고, 후자의 경우는 카메라맨이 크레인 위에 올라가서 하이 앵글로 풍경을 담았을 것이다. 영화에서 앵글의 변화는 매우 큰 의미다. 앵글은 곧 해석이다( : 하이 앵글이냐 로우 앵글이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진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온 기차역. 위에서 내려다 본 풍경이 더 아름다웠을까, 아니면 수평의 시선으로 바라본 풍경이 더 아름다웠을까 ? ...... 모르겠다. 우리는 생각을 표현하기 위해 언어를 이용하고 있다고 믿고 있지만 사실은 언어가 인간의 생각과 행동을 조종한다.
언어가 인간의 사고와 생활에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점(언어구조주의 철학 : 홈볼트, 소쉬르, 촘스키, 라캉)을 감안하면 저맥락 언어를 고맥락 언어로 번역하는 것보다 고맥락 언어를 저맥락 언어로 번역한다는 것이 더 어렵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소설을 쓸 때 제일 먼저 영문으로 초고를 작성하고 나서 그것을 일본어로 번역해 완성한다고 한다(고 한다). 그 사람이 사용하는 언어가 사고를 지배한다고 했을 때 일본인이 영문으로 소설을 쓴다는 것은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한글 문장 속에 김치와 된장이라는 단어는 자연스럽듯이 영어 문장 속에 양식 요리가 등장하는 것 또한 자연스럽다. 하루키 소설도 그것을 따른다.
<< 태엽 감는 새 연대기 >> 에서 오카다 도오루는 소바 대신 스파게티를 삶는다. << 양을 둘러싼 모험 >> 에서는 꽁치 대신 연어로 요리한다. 연어 뼈를 발라내 마리네를 만들고 로스트비프와 빵을 굽는다. << 댄스 댄스 댄스 >> 에서는 분홍소시지 대신 살라미로 요리를 한다. 어디 그뿐인가. << 노르웨이의 숲 >> 에서는 야키니쿠 대신 양파와 간장을 사용한 상큼한 스테이크를 굽고 모짜렐라 샐러드를 곁들인다. 양송이버럿 필라프와 토마토소스에 찐 스트라스부르 소시지는 덤이다. 햄버거조차 서양식이다. 그들은 교토 햄버거 대신 하와이 햄버거를 씹으며 소확행을 누린다. 하와이 햄버거가 등장할 때 나는 소리쳤다. " 하와이 ?! 오, 가와이 ~ "
심지어 그들은 고돌이 화투 대신 핀볼을 한다. 하루키 문학 속에 등장하는 양식의 범람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현상인지도 모른다. 영어 알파벳으로 구성된 문장 속에 소바, 덴뿌라, 전갱이, 야키니쿠, 고돌이 화투라는 단어가 들어가면 어색해지니 말이다. 영어로 글을 쓰고 양식을 요리하며 핀볼 놀이를 하면서 미국 재즈와 유럽 클래식과 로큰롤을 듣는 일본 작가가 쓴 소설은 일본 소설인가 ? 하루키 소설을 읽을 때마다 바나나가 생각난다. 겉은 노란데 속은 하얗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