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인 오르페와 백인 조르바











모든 단어에는 기본값이 정해져 있습니다. " 의사 ㅡ " 라는 단어의 기본값은 무엇일까요 ? 남성입니다. 이 단어에는 의사'는 남성이다 는 전제가 깔려 있죠. 남자 의사를 두고 남의사'라고는 하지 않잖아요. 반면에 여자가 의사인 경우에는 < 여의사 > 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표준 국어 사전에 등재된 단어죠. < 여기자 > 라는 단어도 마찬가지입니다. < 남기자 > 라는 단어 들어보셨습니까 ? 젊었을 때 여기자로 활동했던 사람이 나중에 소설가가 된 적이 있습니다. 그랬더니 되돌아온 응답은 < 여류 작가 > 였습니다, 응 ?


늙은 여자라는 뜻을 가진 < 노파 > 라는 말도 꽤 웃깁니다. 노인이라는 단어는 가치 중립적이어서 모든 성별에 사용할 수 있지만 애써 노파라는 특수 상황을 만듭니다. 모든 디폴트가 남성에 맞춰진 것은 아닙니다. < 무당 > 의 기본값은 여자'이지요. 여자가 주로 무당이 되었으니 말입니다. 그렇다면 남자가 무당이 되면 " 남무당 " 이 될까요 ?  그럴 리는 없습니다. 우리는 남성 무당을 < 박수무당 > 이라고 하죠. 박수가 무슨 뜻일까요 ?  박수의 어원은 몽골어로 박시'라고 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나열된 사례들을 살펴보면 단어를 만든 주체가 남성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차이를 부각하려는 의도는 명백합니다. 차별입니다. 마르셸 까뮈 감독이 연출한 << 흑인 오르페 Orfeu Negro, 1959 >> 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훌륭한 영화죠. 그런데 영화 제목이 이상합니다. 굳이 오르페가 흑인이라는 사실을 밝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  오르페가 백인이었다면 영화 제목이 << 백인 오르페 >> 가 되었을까요 ? 매우 이상한 강조법입니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그리스인 백인 조르바'라고 하지 않잖아요. 두 여성이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다.  한 명은 백인이고 다른 한 명은 흑인입니다. 흑인 여성이 백인 여성에게 묻습니다. 


" 너는 아침에 일어나 거울을 보면 뭐가 보이니 ? " 백인 여성이 대답합니다. " 여자가 보이지 ! " 그러자 흑인 여성은 기다렸다는 듯이 이렇게 말합니다. " 나는 아침에 일어나 거울을 보면 < 여자 > 가 아니라 < 흑인 여자 > 가 보여. 너에게 피부 색깔은 보이지 않아. 너는 그것을 보지 않아. 그럴 필요가 없거든. 그것이 바로 특권이 작동하는 방식이거든. 특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보이지 않지. " 그렇다면 남자는 아침에 일어나 거울을 볼 때 무엇을 볼까요 ?  남자는 거울을 볼 때 " 인간 " 을 봅니다. 


제가 이 자리를 통해서 하고 싶은 말은 특권을 누리는 사람은 그 특권을 보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특권이 발생하기 위해서는 먼저 차별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차별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차이가 강조되어야 합니다. 특권을 가진 사람은 차별이 보이지 않죠.  보편성이라는 말도 사실은 굉장히 폭력적인 개념입니다.  보편성의 핵심은 다수이고 다수는 주류를 형성합니다.  사회적 디폴트 값이라는 것도 사실은 보편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동진 영화평론가인지 영하팽뢴과인지 하는 사람이 영화 << 캐롤 >> 을 본석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 제가 느끼기엔, 테레즈한테는 동성애적인 사랑이 필요한 게 아니라 캐롤이 필요한 겁니다. 근데 하필이면 캐롤이 여자였을 뿐이라는 거죠. 그러니까 어떤 동성애를 다루는 영화에서는 상대방이 여자라는 게 핵심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동성애적인 정체성에서 내가 여자를 사랑하는 사람이야 라는 것이 그 사람을 말하는 가장 중요한 정체성이 될 수 있는 거잖아요. 최근에 개봉을 앞두고 있는 < 대니쉬걸 > 같은 바로 그 영화가 그런 영화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아닌 것 같아요. "  이동진은 아침에 일어나 거울을 보면 뭐가 보일까요 ? 당연히 휴먼이 보일 겁니다. 


네에, 그레이트 휴먼이 보일 거예요.  이동진은 캐롤을 여성이라는 소수성을 가진 인물이라기보다는 그냥 단순히 보편적 인간으로 바라보기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는 동성애적 사랑을 보편적 사랑으로 전환하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그가 거울을 통해 보는 것은 차별이 아니라 보편적 기본값이거든요. 이 영화는 이됭진 영하팽뢴가의 주장과는 달리 캐롤이 여성이어야지만 성립될 수 있는 영화입니다. 상업 영화는 이성애 중심 서사를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나마 동성애를 다루는 소수의 영화가 인디 영화 형태로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이동진은 그 꼴조차 보기가 싫었던 모양입니다.  


약자에 대한 배려도 없고 소수에 대한 이해도 부족한 인간이 영하팽론과랍시고 설치고 다니는 꼴을 보면 한숨이 나옵니다. 이런 부류의 인간들이 세상을 바라보면 이 세상은 차별도 없고 그레이트 휴먼만 존나 넘치는 세상이 보입니다. 아름답죠. 참, 아름다운 세상이에요. 니미 조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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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28 19:4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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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28 19:5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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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28 19:5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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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28 20:0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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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28 20:3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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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28 21:2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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