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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레이] 소리도 없이
홍의정 감독, 유아인 외 출연 / SM LDG / 2021년 2월
평점 :
품절
소리도 없이1)
초희는 몇 짤 ? 네에, 11살입니다. 어린 남동생도 있죠. 한국 사회에서 가장 이상적이라는 4인 가족입니다. 경제적 상황도 나쁘지 않은 모양입니다. 실수가 아니라면 유괴범이 가난한 집 아이를 납치할 리는 없으니까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딸이 납치되었으니 아버지의 마음은 오죽하겠습니까. 이 영화는 아버지가 인질범에게 복수를 하는, 그렇고 그런 << 테이큰 >> 유형의 아버지 복수극'일까요 ? 이 영화의 묘미는 장르적 클리셰를 비틀어버린다는 데 있습니다. 좌회전 깜빡이 켜 놓고 우회전 하는 경우죠.
창복(유재명 분)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초희 아버지는 납치범의 실수로 3대 독자인 막내아들 대신 딸이 납치된 것을 불행 중 다행이라고 여기는 사람입니다. 가부장 중에서도 진짜 가부장이죠. 그는 딸의 몸값이 너무 비싸다며 인질범과 가격을 놓고 흥정을 하기 시작합니다. 초희가 인질범에게서 풀려나는 일도 차일피일 미루어지지요. 납치 사건에서 시간이야말로 납치된 아이의 생명을 좌지우지하는 골든 타임'이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아버지는 납치된 딸을 방치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상황을 볼 때 아버지는 딸에 대하여 그닥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다면 초희는 어떤 아이일까요 ? 인질로 잡힌 아이는 눈치가 빠릅니다. 눈치가 빠르다기보다는 눈치를 본다는 표현이 적확할 겁니다. 초희는 평소에 어른의 눈치를 보는 것에 익숙한 아이입니다. 눈치를 < 보다 > 라는 사동사는 눈치가 < 보이다 > 는 피동사의 결과입니다. 눈치가 보이지도 않는데 어떻게 눈치를 봅니까 ? 그렇다면 피동사의 주체는 누구죠 ? 당연히 그 주체는 부모일 겁니다. " 눈치가 없는 아이 ㅡ " 가 사랑받는 아이일 수는 있으나 " 눈치를 보는 아이 ㅡ " 가 사랑을 받는 아이일 가능성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초희는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아이입니다.
초희는 인질범의 마음에 쏙 들도록 " 예쁜 짓 " 을 하죠. 예쁜 짓 ?! 예쁜 짓을 나열해 봅시다 : 방을 청소하고 빨래를 하고 문주(유아인의 어린 여동생)를 보살핍니다. 이 모든 행동은 진심이라기보다는 생존을 위한 연극에 가깝죠. 이 연극은 소꿉놀이와 유사합니다. 역할 놀이'를 하는 것이죠. 초희는 어머니 역할이고 태인은 아버지 역할입니다. 그리고 문주는 가짜 딸이죠. 초희는 밥상을 차려놓습니다. 문주가 제일 먼저 음식에 손을 대려고 하자 초희는 문주에게 밥상머리 교육을 합니다. " 오빠가 먼저 먹고 나서 먹자 ! " 우리가 이 장면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여성 차별의 교육화'입니다.
딸보다 아들이 귀한 대접을 받는 가정에서 자란 딸은 성차를 재현함으로써 자신의 목숨을 차일피일 연장합니다. 이것이 바로 딸이라는 잰더에게 부여되는 예쁜 짓의 정체죠. 이 영화는 얼핏 보기에는 태인이 중심이 된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초희가 주인공인 영화입니다. < 별주부전 > 이 아니라 < 토끼전 > 인 것이죠. 이 영화에 대한 수많은 논평이 존재하지만 대부분은 태인의 입장에서 이 영화를 이해합니다. 길티플레져 ? 참, 이상하지요. 별주부전에서 악당은 토끼를 납치한 별주부인데 우리는 오히려 토끼를 얄미운 캐릭터로 인식하고 있으니까요.
이처럼 어느 쪽에 방점을 두느냐에 따라 해석은 180도 달라지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프레임이자 이데올로기입니다. < 별주부전 > 에서 우리가 별주부에게 동조하는 이유는 가부장 사회에 길들여진 가해자(이거나 가해자의 서사에 익숙한 피해자)이기 때문입니다. 가해자 중심 서사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서 그 텍스트를 해석하면 토끼가 얄미운 녀석이 되죠. 이 영화도 마찬가지예요. 태인은 순수를 잃지 않은 어른으로 묘사되고 초희는 영악한 아이로 묘사가 됩니다. 초희가 배반한 것은 우정이 아니라 가부장의 통념입니다. 아이는 우여곡절 끝에 용궁을 빠져나옵니다.
하지만 아이의 표정은 밝지 않습니다2). 아이의 표정이 모든 것을 말해주죠. 이 영화는 놀라울 만한, 번개처럼 느닷없이 출몰한 훌륭한 데뷔작'입니다. 놓치면 후회합니다.
1) < 소리도 없이 > 무슨 뜻일까요 ? 영화 속 태인(유아인)은 듣기와 읽기가 가능하지만 말은 하지 못한다는 설정을 가진 캐릭터입니다. 프로이트 식으로 말하자면 " 구순기 고착 " 인 캐릭터입니다. 유아인은 누가 봐도 어른이 아니라 아이'입니다. 몸만 어른일 뿐이지요(반면에 눈치 백 단 아이는 일찍 철이 든 어른 같습니다). 프로이트는 이런 유형을 구순기라고 말하고 라캉은 이것을 " 상상계 " 라고 명명합니다. 상상계란 언어의 질서에 편입되지 않은 시기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아이가 말을 배우고 언어에 대한 감각을 익히기 전이죠. 그래서 제목이 < 소리도 없이 > 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 말도 없이 > 죠. 이 작품은 상상계와 상징계의 대립을 다룬 영화입니다. 상징계에 속한 아이는 상상계에 머무르는 어른을 속이고 무사히 학교로 귀환하죠.
2) 초희는 집이 아니라 학교로 귀환합니다. 대부분의 유괴 영화에서 납치된 아이들은 결국에는 집으로 귀환하는 결말을 가졌는데 왜 이 영화에서 초희는 집이 아니라 학교에 도착하는 장면으로 끝이 날까요 ? 라캉이 말하는 상징계(언어)에 진입하는 행위는 " 아버지의 말과 법에 복종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언어는 남성 중심적 사고에 기반하여 만들어졌습니다. 남성적인 것은 좋은 의미로 사용되고 여성적인 것은 부정적인 측면을 부각하죠. 한자를 보세요. 부수가 女인 한자치고 좋은 의미를 가진 한자는 별로 없습니다. 그것은 남성 명사와 여성 명사로 구분되는 언어를 가진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을 배운다는 것부터가 이미 잰더 차별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언어를 배우는 학교는 그 시작점입니다. 이 영화에서 초희는 남자 동생 대신 실수로 납치된 누나'입니다. 초희의 아버지는 딸의 몸값이 비싸다는 이유로 거래를 차일피일 미루죠. 사실상, 방치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만약에 납치된 아이가 남자 아이였다면 몸값을 가지고 흥정을 할까요 ? 우여곡절 끝에 아이는 살아서 학교로 돌아옵니다. 하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죠. 이 영화는 납치된 여자 아이의 해피엔딩처럼 보이지만 꼭 그렇게 보이지 않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푸코에 의하면 학교는 아버지의 법을 강제로 가르치는 훈육 장치에 불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