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항에 대하여 1






피해자는 용서보다는 복수를 원합니다. 반면에 가해자는 복수보다는 용서를 원합니다. 비지니스 프랜들리한 용어로 표현하자면 소비자의 니즈 " 가 서로 다른 겁니다. 그렇다면 피해자도 아니고 가해자도 아닌 관객(혹은 독자)는 누구 편을 들어야 할까요 ? 당연히 피해자 손을 들어줘야 합니다. 하지만 기독교에서는 복수보다는 용서가 상위 개념'입니다. 그래서 종교 영화는 주제가 대부분 " 용서 " 이기에 피해자에게 용서를 강요합니다. 


신도여, 용서하면 마음의 평화가 찾아옵니다아. 할렐루야. 아멘.  옛 속담에도 때린 놈은 모로 자고 맞은 놈은 편히 잔다고 하죠 ?  정말 그럴까요. 오히려 맞은 놈은 분해서 잠 못 이루고 때린 놈은 발 뻗고 자는 것 아닐까요 ? 옛날에는 신분제 사회였습니다. 신분은 불변입니다. 주로 신분 높은 놈이 신분 낮은 놈을 때렸습니다. 복수의 기회따윈 없는 겁니다. 맞을 짓을 해서 맞으면 억울하지는 않죠. 이유는 없습니다. 그냥 조낸 맞는 겁니다. 그 시대는 맞짱이 불가능한 사회였죠. 그러다 보니 약자에게는 자기 위로의 기술이 필요했습니다. 


때린 놈은 모로 자고 맞은 놈은 편히 잔다는 속담은 바로 자기 위로의 기술이 반영된 것이죠. 그래야 억울해서 분통이 터지는 2차 피해는 막을 수가 있었던 겁니다. 기독교에서 용서하면 마음의 평화가 찾아온다는 주장도 이와 비슷합니다. 일종의 방어 기제인 셈입니다. (피해자가) 가해자를 용서해서 마음의 평화를 얻었다고 해서 가해자가 지옥에 빠지는 경우는 없습니다. 피해자의 용서로 인하여 가해자가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는 서사는 인간을 지나치게 순수한 시각으로 바라보거나 악인을 과소 평가하는 것입니다. 한 번 개새끼는 끝까지 개새끼일 뿐입니다. 


그래서 저는 제3자가 피해자에게 가해자를 용서하라고 말하는 이를 보면 시속 167km의 속도로 등짝 스매싱 열 대를 날리고 싶습니다. 며칠 전, 중앙일보 [ 중앙시평 ] 에 실린 김규항의 << 콤플렉스 민족주의와 역사 청산 >> 란 글을 읽고 나서 깜짝 놀란 적이 있습니다. 한때 안티조선일보 운동에 앞장섰던 b급 좌파 김규항이 여전히 글을 쓰고 있다는 사실에 한 번 놀라고, 그가 중앙일보에 칼럼을 연재하며 밥벌이를 하고 있다는 사실에 두 번 놀라고, 일베의 극우 논리를 그대로 베껴 쓰고 있다는 사실에 세 번 놀랐습니다. 칼럼의 시작은 << 백범일지 >> 를 읽고 나서 충격을 받았다는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김구는 한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 중 한 사람이다. 나는 그렇지 않은 축에 속하는데, 오래전 『백범일지』를 처음 읽으며 받은 충격 때문인 것 같다. 감옥살이의 고통스러움을 한껏 토로하며 그는 적는다. “아내가 나이 젊으니 몸을 팔아서라도 맛있는 음식을 들여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도 난다.”

[중앙시평] 콤플렉스 민족주의와 역사 청산



글을 읽다 보면 김구 선생은 마치 매춘부의 피를 빨아먹는 기둥서방 같은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가 이 책을 읽지 않고 일베의 주장을 그대로 베껴쓰기 했거나 아니면 휘뚜루마뚜루 읽었을 것이라 추정합니다. 하지만 인용한 문장이 나오는 전체 맥락을 살펴보면 다른 내용입니다. 내 기억으로는 김구는 상상할 수 없는 잔인한 고문으로 인하여 육체와 정신이 무너지자 정상이라면 상상할 수도 없는 생각을 하게 된다고 고백한 내용입니다(오래 전에 읽은 책이라 정확한 진술은 아닙니다만 대충... 이런 내용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굶다 보면 사람도 잡아먹습니다. 그렇다면 김규항은 왜 이 문장만 짜집기해서 사실을 왜곡하는 것일까요 ? 


그는 이 칼럼에서 김구와 같은 아버지 남성 세대들이 일본에 딸을 팔아서 굶주린 배를 채웠다고 주장하기 위해서입니다. 항일 독립 투쟁의 상징적 인물을 폄훼하고 일본군 위안부는 일본의 강제 동원이 아니라 한국인의 자발적 참여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고도의 기교입니다. 위안부 피해자는 한순간에 자발적 매춘부가 됩니다. 사실 왜곡으로 시작한 글은 억지 논리를 펼치기 시작합니다. 



일본 지배계급(제국주의 세력)과 조선 민중 사이에서 일이었다. 대다수 일본 민중 역시 전쟁에 동원되고 착취당하는 피해자였으며, 조선의 지배계급은 일본 지배계급과 공조하며 안락을 유지했다.
 

[중앙시평] 콤플렉스 민족주의와 역사 청산


그는 전쟁 범죄를 일으킨 일본인 전체를 가해자라고 규정하면 안된다고 말합니다. 소수의 가해자가 있을 뿐 대다수 일본인도 전쟁 피해자'라고 주장합니다. 전쟁에 동원되어 전쟁 범죄를 일으킨 일본 민중은 일본 지배계급의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는 거죠. 그렇다면 나치에 부역해서 처벌을 받은 수많은 독일인들도 피해자란 공식이 성립됩니다. 그들도 독일 지배계급의 명령에 따랐을 뿐이니 말이죠. 하지만 그는 20년 넘게 글을 쓰면서 나치 부역자를 피해자라고 주장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일로독불, 일본 국민이 하면 로맨스이고 독일 국민이 하면 불륜인가요 ? 


피해자와 가해자의 서사 중에서 가장 악질적인 서사는 가해자를 피해자로 둔갑시키는 것입니다. 가해자의 시선으로 사건을 재구성하는 이야기보다 더 악질적인 방식이죠. 김규항의 이 칼럼은 가해자를 피해자로 둔갑시킨 전형적인 곡학아세입니다. 가해자가 피해자가 되는 순간, 위안부 피해자는 복수는커녕 그 알량한 용서(할 수 있는 기회)조차 박탈을 당한 꼴이 되었습니다. 이 막장의 끝은 이렇게 끝납니다. 


민족은 실재하며 무시될 수 없다. 그러나 보편성을 잃은 민족주의는 언제나 예외 없이 악용된다. 콤플렉스 민족주의가 만연할 때, 지워지는 건 민족 내의 계급 현실이다. 그리고 계급 현실의 보편성에 기반을 둔 인류애다. 평범한 한국 노동자의 친구는 동족 이재용인가, 평범한 일본 노동자인가. 콤플렉스 민족주의를 벗고 보편적 인류애를 가진 개인들로 설 때도 되었다. 오늘 한국 시민은 당연히 그럴 만한 자격이 있다. 아이들은 처음부터 그렇게 살아가도록 도와야 한다. 그게 진정한 역사 청산이며 회복이다.


[중앙시평] 콤플렉스 민족주의와 역사 청산



그가 이 칼럼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한국 피해자와 일본 피해자의 피해자 연대'입니다. 일본 위안부 문제과 역사관에 대해 서술하던 그는 느닷없이 노동자'라는 이름을 거론합니다. 그리고는 보편적 인류애를 들먹이며 노동자 연대 (계급투표)를 역설합니다. 피해자라는 단어가 노동자로 바뀌었으니 노동자 연대는 곧 피해자 연대죠. 위안부도 피해자이고 일본 지배 계급에 의해 군에 동원된 일본군도 피해자이니 위안부와 일본군은 동지적 관계가 됩니다. 전쟁 범죄를 보편적 인류애로 전환하는 이 창발적 문장에 경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칼럼을 읽고 육두문자를 남발하고 싶지만 참겠습니다. 그래요, 우리 김규항 씨, 팔뚝 참..... 굵어요, 존나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