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비와 화폐





드라큘라는 독점 자본가'를 대표한다피 는 화폐 에 대한 은유다그러니까 드라큘라는 “ 피 를 빠는 것이 아니라 호주머니에서 “ 화폐 를 뺏는 것이다드라큘라는 사람 목숨을 빼앗는 데는 관심 없다그는 인간을 자신의 노예로 부리기 위해 이용할 뿐이다그는 필요한 만큼만 빨아먹는다그가 치사량에 가까운 피를 흡혈하지 않고 현기증이 일어날 정도(소량의 피)만 흡혈하는 이유는 그들을 살려두어야지만 피(화폐)를 계속 공급받을 수 있다는 데 있다

드라큘라가 귀족 계급이라는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그는 금을 투자하는 사업가로 소개된다. 그뿐이 아니다. 하수인으로 등장하는 조나단 하커는 부동산업자이고, 인격화된 자본인 드라큘라 백작이 즐겨 읽은 책은 애덤 스미스의 << 국부론 >> 이다.  피를 훔친다(착취한다,강탈한다)는 점에서 그는 피도 눈물도 없는 고리대금업자'인 셈이다.  또한 흡혈귀가 강할수록 살아 있는 사람은 약해진다는 설정은 독점 자본이 강할수록 서민은 생활고에 시달린다는 것과 맥락을 같이 한다. << 자본론 >> 에서 맑스는 " 자본은 흡혈귀처럼 오직 살아 있는 노동을 빨아먹어야 살 수 있으며

더 많은 노동을 빨아먹을수록 더 오래 사는 죽은 노동이다 " 라고 지적한다. 드라큘라가 자본가를 대표한다면 좀비는 노동자 계급을 대표한다. 그들은 죽은 자'이기에 더 이상 자본 상품을 구매할 능력이 없는 소비자일 뿐만 아니라 노동력을 생산할 수도 없는 노동자이기도 해서 무능자이기도 하다. 강신주가 중앙일보 칼럼에서 서울역 노숙자를 향해  "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죽어 있는 좀비처럼 보인다 ㅡ " 라고 지적한 것은 평소 자본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했던 그가 철저하게 자본주의 입장에서 화폐 경쟁에서 밀려난 노동자를 좀비로 취급했다는 점에서 논리 모순이다.

좀비 떼의 출현은 경제 공황에 따른 기층민의 폭동을 연상하게 만든다. 소비 능력과 생산 능력이 모두 전무한 좀비는 주권자로서 국가와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없다. 그러니까 좀비 영화 장르는 철저하게 자본주의적 욕망을 따른다. 이처럼 좀비 영화 장르는 프로이드 정신분석학보다는 마르크스 정치경제학에 가깝다. 좀비물이 전무했던 한국 영화'에서 연상호 감독의 << 부산행, 2016 >> 이 천만 관객이라는 기적을 연출한 것은 동시대적 불안이 반영된 탓이다. 1%의 독점 자본이 99%의 노동자를 지배하는 " 헬조선 " 이라는 신조어가 2014년에 탄생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좀비 바이러스가 서울역 노숙자 집단에서 발생했다는 설정으로 시작하는 연상호 감독의 영화 << 서울역 >> 은 강신주의 서울역 노숙자 발언과 일맥상통한다. 좀비는 독점 자본의 축적 위기로 인한 불황이  주기적으로 발생한 2000년대 이후  되살아난다. 주로 미국에서 생산하던 좀비물이 한국에서도 인기를 끌고 있는 현상은 자본주의의 파국이 전지구적 위기로 확장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본가의 송곳니에 피(화폐)를 빨린 기층민은 좀비가 되어 신선한 피와 살점을 찾아 어슬렁거린다. 좀비는 살아 있으나 죽은 목숨이거나 혹은 죽은 거나 다름없지만 마지 못해 사는 불가촉천민이면서 동시에 파산자'이다. 

연상호 감독의 좀비 3부작 마지막 편인 << 반도, 2020 >> 가 1000만 달러가 든 트럭을 중심으로 사건이 전개된다는 점에서 이 영화 또한 정신분석학보다는 정치경제학에 대한 욕망으로 읽힌다. 좀비는 자본의 노예라기보다는 자본의 독점에 희생된 사람들이다. 반면에 헬조선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는 이곳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돈의 노예가 되어야 한다. 영화는 그들이 금융 자본 천국이자 심장인 미국으로 떠나는 장면으로 끝난다. 그들은 반도에서 탈출하는 데 성공하지만 그것이 성공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좀비 아포칼립스는 다중 채무자의 몰락 때문에 다다르게 되는 세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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