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내주러 왔습니다 !
한때 프로야구 엘지 트윈스의 찐팬으로서 " 욕하면서 보는 타성 " 에 젖었던 때가 있었다. 볼 때마다 지는지라 어머니는 내가 야구를 볼 때마다 타박을 하셨다. 지는 거 뻔한데 왜 보면서 화를 내니 ? 처음에는 나도 내가 왜 욕하면서 야구를 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결국에는 엘지 트윈스에 대한 희망을 접고 욕하면서 보는 국내 프로야구와 결별하게 되었다. 안녕, 프로야구 ! 특히, 엘지 트윈스. 이 개새끼들 !!!
이것이 끝인 줄 알았다. 나는 어느새 장르를 바꿔 고약한 심보를 프로야구에서 국내 영화로 옮겼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훌륭한 영화를 욕하면서 본다는 것은 아예 불가능해서 관람객들이 저주를 퍼붓는 영화를 주로 보게 되었다. 특히, 영화 << 엄복동 >> 이 기억에 오래 남는다. 극장 안내 직원이 " 즐거운 관람 되십시오 ! " 라고 말했을 때 나는 영화관 안으로 입장하면서 속으로 이렇게 말했다. " 아니오, 혼내주러 왔습니다. " 이 영화는 내가 0.3초에 한 번씩 욕을 했던 망작이었다. 자전거를 탄 엄복동이 힘찬 질주를 하기 위해 엉덩이를 들어 올릴 때마다 그의 클로즈업된 힙업을 보며 분노했다. " 이게 영화냐 ! "
내가 극장에서 내지른 일갈은 한때 광화문 광장에서 촛불을 든 시민들이 " 이게 나라냐 ! " 라고 외쳤던 말과 늬앙스가 비슷했다. 잠 못 드는 어제도 그런 영화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했던 날이었다. 내 눈에 들어온 것은 2009년작 << 페어 러브 >> 였다. 이보다 좋은 먹잇감은 없었다. 친구가 죽자마자 그의 딸과 연애를 시작하는 50살 남자와 아버지가 죽자마자 아버지의 친구와 사랑에 빠진 25살 여자. 캬, 막장도 이런 막장이 또 있을까 ? 이게 막창이야 곱창이야 ! 늙은 남자가 어린 여자를 만나 운우지정을 나눈다는 불알후드의 성적 판타지가 레이망에 포착되자
나는 눈 덮인 킬리만자로 밑에서 먹잇감을 찾아 어슬렁거리는 하이에나가 되어 영화가 시작되기 전부터 물어뜯을 준비에 깊은 에로스를 느꼈다. 오냐, 금니빨 빼고 모두 다 씹어먹어주마 ! 더군다나 내가 싫어하는 배우인 안성기가 주연이지 않은가. ▶ 버튼을 눌렀다. 오프닝부터 몸속에 내재되었던 욕 에너지가 괄약근을 지나 중추 신경 4번 통로를 통해 뇌하수체에 전해졌다. 으하하하. 엄복동 이후로 오랜만에 다시 볼 거대한 망작이로구나. 하지만 예측은 완전히 벗어났다. 욕 에너지를 오른쪽 간뇌의 뇌하수체에 전달하기 위해 잔뜩 오므렸던 괄약근이 풀리고 말았다.
나는 점점 이 영화에 빠져들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이 영화는 매우 잘 만든 멜로드라마'였다. 안성기의 능청스러운 연기는 장면 곳곳에서 빵빵 터진다. 주책맞을 수도 있고 징그러울 수도 있는 그들의 로맨스는 어차피 사랑은 미친 짓이 아니냐, 라는 반문과 함께 묘하게 삶에 대한 통찰을 선물하고 있었다. 또한 감독이 로맨틱 멜로라는 장르를 비트는 솜씨가 제법 훌륭했다. 그리고 등장 인물 모두 개성이 뛰어나서 허투루 버릴 만한 캐릭터도 없었다. 영화를 보다 보면 왜 영화 제목을 << 러브 어페어 >> 가 아닌 << 페어 러브 >> 로 정했는지 이해가 간다.
소심한 남자는 " fair " 를 " affair " 로 끌어올린 만큼 용기 있는 사내가 아니다. 페어와 어페어 사이에서 망설이던 연인들은 결국 안전한 페어를 선택하면서 영화는 끝난다. 어느새 나는 반평생 한 번도 안 해본 남자의 변두리 페어 러브'에 삼삼칠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당혹스러웠다. 혼을 내주러 왔으나 오히려 혼이 나고 만 꼴이었다. 그래. 이런 반격, 나쁘지 않다. 그게 바로 욕하면서 보는 재미 중 하나이니깐 말이다. 나는 당분간 이 고약한 소비의 취향을, 엉뚱한 파토스를, 어페어보다는 페어의 찌질함을 지지할 생각이다.
앞으로도 망작만 찾아 욕하면서 보련다. 재미있는 영화 따위는 당신이나 보세요. 기꺼이 양보하리다. 내 레이다에 걸려들면 나는 괄약근에 힘을 주며 이렇게 말하리라. 혼내주러 왔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