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속성을 동물에게 투사하지 말라 :
갑수목장 논란을 보며
고양이를 보면 한국 사회가 보인다 라는 제목의 글을 쓴 적이 있다. 경향신문에서 4컷 만평을 연재하는 박순찬 화백의 < 장도리 > 에는 고양이 한 마리가 등장한다(자세한 내용은 링크 글 참조). 2015년 2월 즈음이었다. 장도리 만평에 고양이가 등장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도 많다. 덩치가 작은 데다가 인물 만평의 주인공은 아니다 보니 자세히 보지 않으면 보이지도 않는다.
일종의 듣보잡'이기는 하나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불명예는 아니다. 만평에 단골로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이 주로 악당이다 보니 이 만평에서 듣보잡이라는 신분 계급은 선량한 존재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만평 속 주인공으로 등장하느니 차라리 듣보잡으로 등장하는 것이 낫다. 이 고양이 이름은 냥도리로 길고양이'이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만평 속 악당보다는 몸집은 작은 냥도리를 찾는 재미로 장도리 만평을 찾기 시작했다. 그 재미가 솔솔하다. 캬아 ~ 냥도리는 박순찬 화백이 이집트 여행을 갔을 때 만났던 길고양이다.
식당에서 음식을 먹고 있는데 길고양이가 쑥도 아니면서 식당 안으로 쑥, 들어오더니 맞은 편 식탁 의자에 앉아서 나 한 입 너 한 입, 어때 ? _ 라고 제안을 했다는 것이다. 화백 입장에서 보면 이 상황은 << 동물농장 >> 에서나 나올 법한 일이다. 하지만 고양이의 여유로운 길 생활은 세계 여행을 다녀온 사람들에게는 익숙한 풍경이다. 세계의 고양이는 사람을 그렇게 무서워하지 않는 편이다. 반면에 한국의 고양이는 필사적으로 숨어야지만 살 수 있는 존재'다. 이 차이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 갑수목장 사건에서 수의대생을 비난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그가 만든 영상을 소비했던 구독자의 태도도 비판받을 대목이 있다. 길고양이보다는 품종묘에게 더 많은 사랑을 보내는 갑수목장 구독자의 태도가 마냥 좋게 보이지 않는 까닭은 고양이를 상품의 가치로 판단하려 했던 욕망과 겹쳐졌기 때문이다. 여기에 인간의 개입으로 만들어진 고양이 시점의 자막들은 고양이를 고양이 그 자체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의인화 장치를 통해서 판타지를 강화한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의인화'이다. 품종에 대한 집착과 짐승에게 옷을 입히고 미용을 강요하는 것도 의인화의 일종이다.
스스로 고양이 덕후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의인화된 영상을 소비한다는 것은 미덕이 아니라 악덕이다. 노벨상을 수상했던 콘라드 로렌츠는 동물을 의인화하지 말고 객관적 시선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강조한 적이 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 나는 인간의 성질을 동물 속에 투사하고 있지 않다. 반대로 우리 인간 속에 얼마나 많은 동물적 요소가 있는가를 보여줄 뿐이다. " 대한민국에서도 사람 눈치 보지 않고 당당하게 길을 걷는 고양이를 볼 수 있을까 ? 그런 날이 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