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 기생충 >> 에서의 근세에 대하여
영화에서 " 지하실 : 지하 공간 " 은 대부분 은폐된 악덕이 사는 공간이다. 알프레드 히치콕의 << 사이코 >> 에서 지하실은 아들이 죽은 어머니의 백골을 숨긴 장소이다. 배우 안소니 퍼킨스이 연기한 나약한 아들은 죽은 어머니의 목소리(죽은 망령의 명령)을 거역하지 못한 채 살인을 대리하는 캐릭터다. 그는 어머니라는 타자의 욕망을 실천하는 집행자'이다. 하지만 죽은 어머니라는 망령의 명령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환청이기에 결국은 아들이 만들어낸 허구에 불과하다. 아들은 어머니라는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
영화 << 기생충 >> 에서도 지하 공간은 매우 중요한 공간이다. 이 영화에서 지하 인간, 근세(박명훈 분)는 박사장이 지하실에 가둔 자신의 원초적 욕망, id(이드)이다. 그것은 아무것도 모르고 날뛰는 천둥벌거숭이'이다. 박사장이 사회화 과정에 성공한 " 부르주아-자아 " 라면 근세는 구순기 이후의 사회화 과정에 실패한 " 원초적 본능(무의식의 욕망) " 에 가깝다(구순기 고착). 공갈 젖꼭지를 물고 바나나를 주식으로 삼는다는 캐릭터 설정은 그가 이유식에 머무는 갓난아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퇴행이 아니라 고착에 가깝다.
다시 말해서 박사장이 사회에서 성공한 자아를 대표한다면 근세는 성공한 자아의 이드'이다. 자아와 이드의 대립은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벌어지는 투쟁이다. 영화 << 기생충 >> 은 그것을 눈에 보이는 이미지로 시각화했을 뿐이다. 근세라는 캐릭터에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지점은 부호의 사용이다. 모스 부호는 점과 선으로 구성되었다는 점에서 언어의 기표라기보다는 약호에 가깝다고 보아야 한다. 라캉의 사유를 빌리자면 근세는 언어의 세계인 상징계 진입에 실패한 채 상상계에 머문다. 이 영화가 인디언 패티쉬에 집착하는 이유는 명백하다. 인디언은 문자 언어를 가지지 못했다.
공갈 젖꼭지, 바나나 이유식, 언어 습득 실패(옹알이)의 상징성을 종합하면 근세는 생후 6개월~18개월 사이의 어린아이'이다. 상상계가 언어와 주체가 형성되기 이전 무질서하고 불안정한 욕망이 들끓는 무의식의 세계이자 법과 규범의 지배에서 자유로운 공간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단계적으로 사회화 과정을 학습하지 못한 채, 판도라 상자가 열리자마자 용수철처럼, 불쑥 야외 파티장에 튀어나온 근세에게 성문법의 질서에 순응하라는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부르주아적 애티튜드에 익숙한 박사장에게 있어서 천방지축으로 날뛰는 근세는 자신의 쌍생아이자
지킬 박사의 하이드이며 프랑켄슈타인 박사의 nothing 이다. 근세는 인식의 세계로 뛰쳐나와 칼을 휘두른다. 물론 이 학살은 계획에 없는 일이다. 무의식의 다른 이름은 무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