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의 여러 양상'에 대하여









숙대 레디칼 페미니스트의 트랜스젠더 A 씨 입학 반대 사태를 두고 리버럴 페미니스트가 성급하게 " 저것은 페미니즘이 아니다 " 라고 손절했을 때 꽤 웃기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우나 고우나 내 새끼이듯이, 저 혐오의 페미니즘도 결국에는 페미니즘의 한 분파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그 혐오를 경계하되 부끄러워 할 필요는 없다. 누군가 나에게 서프러제트 운동을 높이 평가한다면서 숙대 레디칼 페미니스트를 비판하는 것은 " 성깔의 모순 " 이라고 지적했는데,  나는 이 레디칼 페미니스트의 지적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레디칼 페미니즘과 서프러제트 운동을 동일한 성향으로 착각했기 때문이다. 익명이 보장되는 대자보라는 방식을 통해서 말로써 소수자를 혐오하는 폭력 방식과 여성 참정권을 위해서 몸으로 싸웠던 서프러제트의 폭력 중에서 어느 쪽이 더 폭력적일까 ?   레디칼 페미니즘은 " 급진적 - " 이라기보다는 " 근본주의 - " 에 가깝다. 





타임즈가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으로 뽑힌 스티븐 핑커의 <<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 를 읽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욕을 한 적이 있다. 이웃 여러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욕을 하면 그 욕은 뭣이다 ?! 그렇습니다. 쌍욕'입니다.                  나는 이 두꺼운 책을 읽는 내내 쌍욕을 한 바가지 퍼부었다. 그의 주장은 인간 본성은 원래 폭력적인데 역사와 과학의 진보로 인하여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폭력이 감소한 시대를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온갖 통계 자료를 끌여들여서 폭력으로 인해 사망한 사람의 숫자가 감소했기에 현대는 폭력의 시대가 아니라 평화의 시대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그가 놓치고 있는 것은 폭력의 양상이다. 옛날에는 총과 칼로 사람을 죽여서 땅과 재산을 탈취했다면 현대는 합법적 방식으로 폭력을 행사한다. 예를 들면 노조의 복직 투쟁으로 인해 다시 복직한 노동자의 책상을 화장실 앞에 두고 그 어떤 일도 시키지 않는 사측의 평화로운 관용은 폭력적인가, 비폭력적인가 ?  내가 보기에는 차라리 몽둥이로 뒤통수 때리는 것보다 이 행위가 더 폭력적이다. 과거에 비해 폭력이 감소하는 이유는 선한 천사의 숭고한 승리 때문이 아니라 폭력의 양상이 다른 얼굴로 둔갑을 했기 때문이다. 신체를 살해하는 방식보다 효과적인 것은 합법적 테두리 안에서 인격을 살해하는 방식이다. 그것은 진보의 결과가 아니라 진화의 결과다, 보다 더 나쁜 쪽으로 ! 스피븐 핑커는 팩트를 수집해서 나열한 후, 그것을 근거로 자신의 주장이 과학적이라고 말한다. 과학은 사실의 집합이라는 데 동의한다. 집이 돌로 지어지듯 과학은 사실로 이루어지니까. 그러나 돌로 쌓아 올렸다고 해서 반드시 집이 되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사실을 모았다고 해서 반드시 과학이 되는 것도 아니다. 앙리 푸앵카레의 말씀이시다. 핑커야, 좀...... 새겨 들어 !










무시와 방관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가 창조한, 심박한, 대따 훌륭한 폭력의 방식이다. 옛날에는 폭력을 행사하기 위하여 망치와 도끼, 총과 칼(혹은 몽둥이와 회초리 따위)을 들었지만 지금은 무시와 방관이 그 무엇보다도 폭력적인 도구가 되었다. 그것은 손에 잡히지 않고 눈에 보이지도 않지만 타격감과 상해 강도는 매우 높은 도구이다. 영화 << 기생충 >> 에는 눈에 보이는 폭력과 눈에 보이지 않는 폭력이 존재한다. 전자는 근세와 기택의 폭력이고 후자는 박사장(이선균)의 폭력이다. 죽어가는 두 사람(기정, 근세) 앞에서 코를 막고 인상을 쓰는 박사장의 비폭력적인 얼굴은 그 무엇보다 비인간적인 얼굴이며 폭력적인 얼굴이다. 그가 기택 가족과 근세 가족에게 보인 폭력의 이름은 무시'이다. 






영화 << 기생충 >> 이 부르주아 개인의 은밀한 무시와 방관을 다룬 영화라면 << 세월호 >> 는 국가라는 주권의 은밀한 무시와 방관을 다룬 사건이다. 이 사건은 국민의 S.O.S 요청에 대하여 국가가 인상을 찡그리며 코를 막고 팔짱을 낀 채 무시와 방관으로 국민에게 폭력을 행사한 결과이다. 폭력의 방식이 역사를 관통하면서 새로운 방식으로 진화했듯이 국가의 지배 방식 또한 국민을 억압하는 쪽에서 방치하는 쪽으로 변했다. 이 시대에 주권의 역할은 국민을 보호,탄압,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을 모호한 곳에 두는 것이다. 팽목항은 한국의 아우슈비츠이자 관타나모 포로 수용소'다. 스피븐 핑커의 논리대로라면 박근혜가 침몰하는 세월호에 대해 보인 무시와 방관은 비폭력적 애티튜드'에 해당된다. 스티븐 핑커가 사이비 과학자인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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