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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근두근 내 인생
김애란 지음 / 창비 / 2011년 6월
평점 :
산타클로스, 김애란 그리고 당신
산타클로스는 선택적 복지의 상징적 인물이다. 그는 누가 착한 애이고 누가 나쁜 애인지를 분류한 후에 착한 아이에게는 선물을 주고 나쁜 아이는 선물을 안 주신다. 다시 말해서 착한 아이는 선물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나쁜 아이는 선물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나는 늙은 할배가 일말의 자비도 없이, 두말할 필요도 없이(세 말 하지 않겠어. 내 입만 아프니까), 우는 아이에겐 선물을 안 준다고 했을 때 기가 차서 웃음도 안 나왔다. 조건 없는 사랑을 강조했던 예수의 가르침은 온데간데없고 자신의 윤리적 판단 기준에 따라 < 받을 자격 > 을 논하면서 선별적 시혜를 하겠다니 웃긴 꼴이다. 더군다나 예수님 생일에 말이다. 만약에 예수가 산타 복장을 하고 선물을 나눠 주셨다면 웃는 아이와 우는 아이를 구별했을까 ? 지난 정권 때 중학교 무상 급식을 두고 < 선별적 복지 > 와 < 보편적 복지 > 논쟁이 뜨거웠다는 점을 상기하면 자유한국당은 산타클로스의 정신을 계승한 후예들이라 할 수 있다.
한국 사회가 장애인을 방송에 노출시키는 방식을 보면 역겨운 점이 많다. 비단, 집값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특수 학교 설립을 반대하는 동네 주민 따위(특수 학교 설립 반대를 외쳤던 동네 주민은 히틀러와 견줄 만한 악마의 성품을 지녔다)를 두고 하는 말은 아니다. 내가 김애란의 장편소설 << 두근두근 내 인생 >> 을 비판했던 대목은 김애란이 소설에서 장애인을 다루는 태도와 한국 사회가 장애인을 다루는 방식이 그닥 다르지 않다는 데 있다. 장애인을 단순하게 연민의 대상으로만 인식하고 대중으로부터 동정을 끌어내는 수단으로 착한 장애인 서사를 작동시킨다는 점에서
<< 두근두근 내 인생 >> 은 보수적이며 퇴행적인 소설'이라 할 수 있다. 내가 묻고 싶은 것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장애인은 왜 항상 " 착한 장애인 " 이어야 하는가 _ 라는 점이다. 나쁜 장애인은 사회로부터 의료 도움을 받으면 안되는 것일까 ? 평론가 신형철은 이 작품을 두고 입에 거품을 내며 " 김애란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가능한가 ? " 라며 온갖 성찬을 늘어놓았지만 그가 보다 총명한 비판적 사고를 가진 문학평론가라면 묻지 마 사랑가 타령 대신에 " 17살 소년 아름은 왜 반드시 착한 장애인이어야만 했는가 ? " 라는 질문을 던졌어야 한다. 그것이 비평가의 태도다.
김애란은 독자가 아름'에게 감정적으로 완벽하게 몰입할 수 있도록 주인공 소년을 착한 아이로 만들었는데 이 태도는 산타클로스의 선별적 복지 태도를 닮았다. 무엇보다도 이 작품은 " 착한 아이의 착한 마음을 지나치게 강조한 썅팔련도패밀리플롯의 거대한 착각 " 이라는 점에서 구질구질한 최루성 신파'다. 적어도 착한 아이만큼은 사회적 복지 혜택을 주어야 한다는 고정 관념에는 다음과 같은 기만이 숨겨져 있다(아래 발췌한 글은 허허 님 블로그에서 인용했다).
작년 겨울에 기초수급 가정의 학생에게 개인 후원을 하던 사람이 인터넷에 후원 후회의 글을 올린 것을 우연히 봤다. 후원자는 계절이 바뀔 때마다 수십만 원의 돈을 한 학생에게 후원해왔다고 한다. 돈 대신 학생이 원하는 물품으로 주기도 했단다. 그해 겨울엔 00 금액 한도 내에서 필요한 물품이 있냐고 하니 학생이 '롱패딩'을 말하더란다. 한 몇 년간 '국민 교복'이었잖나. 거리엔 걸어 다니는 김밥(검정롱패딩)과 떡가래(흰롱패딩) 밖에 없다고 할 정도로, 가난한 집의 학생도 친구들과 같은 옷을 한 번 입고 싶었던 모양이다. 후원자는 그 학생이 철딱서니가 없어서 기가 찬다느니, 나도 롱패딩 없다느니 하는 게시글을 올렸다. 그 밑엔 그 글에 동조하는 기초수급자 가정을 비방하는 댓글이 줄줄이 올라왔다. 가난뱅이들이 내가 낸 세금으로 국가 보조금과 문화카드를 받아 영화 보고 미술 학원 가더라, 우리보다 낫다..... 류의 댓글이었다.
- 가난한 사람들, 가난한 자들의 연민 중
이 사례에서 후원자가 원했던 것은 " 롱패딩 " 이 아니라 병든 할머니에게 드릴 " 보약 한 첩 " 따위가 아니었을까 ? " 키다리 아저씨, 무람된 말씀이오나 크리스마스 선물을 꼭 주셔야 하신다면 저의 롱패딩보다는 할머니의 영양제를 부탁드립니다아. 할머니 건강이 많이 안 좋으세요. 저는 헌옷 입어도 상관 없어요. 키다리 아저씨의 따스한 후원으로 무럭무럭 자라는 소녀 올림 " 후원자가 보기에 < 롱패딩 > 이라는 기표는 가난한 자에 대한 자신의 거룩한 동정과 연민을 배신하는 철딱서니에 불과한 것이다.
후원자는 가난한 아이가 자신을 물주 취급한다며 불쾌한 감정을 숨기지 않는다. 하지만 정작 이 폭로에서 드러나는 것은 후원을 가장한 도덕적 허세의 날것이다. 후원자가 후원하는 아이가 자신을 " 물주 " 취급하는 것 같다며 화를 내는 태도의 뒷면을 들여다보면 스스로가 그 아이를 " 물건(예쁜 인형) " 취급하는 마음의 반영이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후원 행위가 후원 대상에 대한 통제력을 정당화한다고 믿는 것이야말로 졸라 염치 없는 마음이다. 김애란의 << 두근두근내인생 >> 은 이 후원자의 마음에서 쓰여진 소설 같다. 소설 속 아름은 후원자인 김애란의 마음이 반영된 예쁜 인형이다.
그렇기에 아름은 롱패딩 입고 싶어용 _ 따위의 철딱서니없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김애란도 그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그도 그 후원자의 마음으로 이 소설을 썼기 때문이다. 이런 소설에 대하여 대한민국 문단이 앞다퉈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늘어놓는 것을 보면 한심하기도 하고 측은하기도 하다. 이 소설은 < 가난 > 이 배경이지만 정작 " 빈곤 " 을 다루지 않고, < 아픔 > 을 다루지만 항상 " 고통 " 은 외면한다. 전형적인 가난 포르노이다. 나는 롱패딩 입고 싶다고 고백한 그 11살 여자아이의 철딱서니를 지지한다.
하여, 나는 “ 나쁜 생각 ”을 지지하련다. 여성이 자유롭게 자신의 욕망을 말할 수 있는 자유를 지지하며, 장애인이 보행권을 문제 삼아 시민 사회를 향해 지랄‘을 떠는 태도를 지지하며, 도움이 필요한 주폭도 지지한다. 가진 것이 없으면 착하기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은 개나 주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