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크맨
애나 번스 지음, 홍한별 옮김 / 창비 / 2019년 10월
평점 :
품절


                                   


소   문   과       권    력    :











풍문으로 들었어







네가 자초한 거야. 그 습관 고치라고 말했는데

길에서 걸으면서 책 읽는 거 말야


- 밀크맨 中



                                                                                  


아무개 아들 아무개가 내 가슴을 총으로 찌르고 고양이 같은 년이라고 하면서 나를 쏘려고 한 날이 밀크맨이 죽은 날이었다 ㅡ 로 시작하는, 소설의 첫 문장치고는 다소 산만한 느낌이 드는 << 밀크맨 >> 의 첫 문장은 작가를 꿈꾸는 예비 독자라면 반드시 참고해야 할 대목이다. 소설 도입부의 이 첫 문장 때문에 500페이지에 가까운 장편 전체에 긴장감을 주면서 끈질기게 독자의 목을 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레이먼드 챈들러(아마도....)는 독자가 지루하다 싶으면 일단 총부터 등장시키라고 충고했는데 애나 번스는 시작부터 " 총 - 찬스 카드 " 를 꺼내든 셈이다.  위기 상황일 때 꺼내드는 것이 < 비장의 카드 > 라는 점을 감안하면 애나 번스는 과감하게 첫 문장부터 총을 꺼내들어 승부수를 띄웠으니 변칙이라면 변칙에 가깝다.  애나 번스는 축구 경기에서 경기의 판도를 바꾸기 위해 경기 후반부에 교체 투입되는 히든 카드 " 조커 " 를 전반전 경기 시작부터 선발 출전시킨 것이다. 이 작전은 훌륭했다. 첫 문장 덕에 궁금증이 꼬리에 꼬리에 꼬리를 물게 되었다. 


왜 아무개 아들 아무개는 화장실에서 주인공 여자 가슴을 총으로 쿡쿡 찌르면서 고양이 같은 년이라고 욕을 했을까 ?  아무개 아들 아무개 씨의 진짜 이름은 아무개는 아닐 터이니 진짜 이름은 무엇일까 ?  밀크맨은 주인공과 어떤 관계일까 ?  밀크맨의 직업은 우유배달부인가, 진짜루 ??!  시작은 암살과 폭력이 난무하는 하드보일드 정치 스릴러'처럼 보였지만 읽다 보면 열여덟 소녀의 끊임없는 입말과 독백으로 이루어진 성장 소설이라는 점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주인공 " 나 " 는 가시적인 폭력 행위보다 비가시적인 소문이야말로 자신을 억압하고 착취하며 복종하게 만드는 폭력의 한 형태'라는 사실도 깨닫게 된다. 


" 나 " 에 대한 소문은 성별화된 위계질서를 지지하는 지역 공동체의 긴밀한 공조 속에서 각색되어 유통된다. 총보다 무서운 것은 말이고 격발된 총알보다 빠른 것은 소문의 속도다. 이 소설은 단 한 명을 제외하고는 등장인물을 모두 다 익명으로 처리했는데 익명 뒤에 숨은 소문의 폭력성을 강조하기에 더없이 좋은 수단이 되었다. 무엇보다도 이 소설의 화자인 " 나 " 가 입말이라는 형식을 빌려 토해내는 또래 언어'가 시종일관 무너지지 않고 끝까지 생생하게 전달된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읽다 보면 디스토피아 가상 소설처럼 보이지만 책을 덮고 뒤돌아서는 순간 이 세계가 한국 사회를 닮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걸으면서 책을 읽는 소녀가 꽃뱀으로 오해를 받는 가상의 사회보다 더 고약한 사회는 한 여성이 단지 브래지어 착용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브래지어 착용을 하지 않았을 뿐인데 이상한 여자'로 낙인을 찍어 기어코 살해하는 한국 사회다. 누군가는 설리의 죽음 앞에서 죄의식도 없이 이런 식으로 말을 할지도 모른다. 네가 자초한 거야. 그 습관 고치라고 말했는데, 노브라로 걸으면서 돌아다니는 거 말이야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