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드 창 지음, 김상훈 옮김 / 엘리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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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티와 양말






불안은 자유의 현기증이다

- 쇠렌 키르케고르





                                                                                                        성이 산부인과 진료를 받을 때 가장 신경 써야 하는 것은 팬티가 아니라 양말'이(라고 한)다. 진료대에 눕기 전에 팬티는 이미 벗은 상태이기에 의사와 간호사에게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거치대에 걸친 양말의 발바닥 상태인 것이다. 산부인과 진료실만큼 발바닥이 이토록 적나라하게 타인에게 폭로되는 곳이 또 있을까 ? 발바닥을 보여준다는 것은 밑바닥을 보여주는 것과 같다.


내가 아는 사람은 산부인과 진료를 받을 때에는 여분으로 항상 새 양말을 준비한다고 한다. 반면에 공황 장애가 있는 사람은 팬티에 신경을 쓴다. 갑자기 의식을 잃고 길바닥에 쓰러질지도 모른다는 공포, 그래서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 응급실에 실려가는 상상. 나는 항상 외출을 할 때 양말보다는 팬티에 신경을 쓴다. 낡은 속옷을 타인에게 들킨다는 것은 부끄러우니깐 말이다. 어쩌면 알몸뚱이보다 더 부끄러운 것은 더러워진 속옷인지도 모른다. 간밤에 꿈을 꿨는데 내가 있는 건물에 불이 났다. 건물 밖에서는 사이렌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고 방송사 기자들이 몰려와 취재 경쟁을 펼치고 있었다. 


꿈이란 요상해서 불길에 내 겉옷은 홀랑 타고 팬티만 남은 상황이 되었다. 그런데 속옷이 거지발싸개처럼 매우 낡고 지저분했다. 나는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 건물을 탈출해야 하는데 더러운 속옷 때문에 탈출을 미루고 있는 것이었다. 팬티를 입고 나갈 것인가 아니면 팬티를 벗고 나갈 것인가 ? 어떻게 할 것인가, 어떻게 할 것인가, 어떻게 할 것인가......  다행히도 꿈은 거기서 끊겼다. 눈을 떴을 때, 나는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팬티만 입고 잤는 데에도 보일러 온도를 높여서 실내 온도는 후덥지근했다. 나는 꿈속 딜레마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고민 끝에 내가 내린 결론은 팬티 벗고 뛴다. 단, 조건이 있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팬티 벗고 뛴다. 눈을 가린 채 뛰어도 당구공 같은 내 불알 두 쪽이 평형 감각을 유지하게 도와주리라. 낡은 속옷 빨랫감은 마당에 널지 않는 법이니까. 눈을 감고 다시 잠을 자기로 했다. 끊긴 꿈속으로 다시 들어가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꿈은 더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잠은 포기하기로 하고 테드 창 소설집 << 숨 >> 에 수록된 < 불안은 자유의 현기증 > 이란 단편을 읽기 시작했다. 단편 제목은 쇠렌 키르케고르의 그 유명한 문장을 빌렸다. 


키르케고르는 절벽이나 고층 건물 꼭대기에 서 있는 사람의 불안 심리를 다루면서 두 개의 공포를 분석한다. 하나는 떨어지면 어쩌나 하는 공포이고, 다른 하나는 거기서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이 낳은 공포다. 여기서 두 번째 유형의 공포(불안감)은 뛰어내릴 것인가 아닌가를 선택할 절대적 자유가 자신에게 있다는 각성에서 비롯된다. 그렇기에 키르케고르는 불안은 자유의 현기증이라고 말한다. 문득, 무기력(無氣力)은 무력(武力)의 현기증'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번개처럼 지나갔다. 그때였다. 


요란한 사이렌 소리와 함께 붉은 불빛이 창문을 뚫고 스며들기 시작했다.  알고 보니 내가 사는 빌라 전체가 사나운 맹수처럼 맹렬히 불타고 있었다.  6층에서 뛰어내린 이웃은 허리가 부러졌다. " 이런, 빌어먹을 !!! " 나는 비명에 가까운 고함을 질렀다. 왜냐하면 내가 사는 곳은 7층이기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아수라장이었다.  이웃의 불행을 즐기기 위해 불구경 나온 사람들과 불행을 어떻게 하면 스펙타클하게 연출할까 고민하는 방송사 카메라 기자들은 좋은 앵글을 잡기 위해 곳곳에 포진하고 있었다. 저 비참을 로우 앵글로 잡을 것인가, 하이 앵글로 각을 잡을 것인가.  


바보들, 기초도 모르다니....... 불행은 무조건 드론 각이야 !  전지적 시점은 항상 웅장하거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위에서 보면 수난극처럼 보이거든 .                     캄캄한 복도는 흥건히 젖은 소화용수로 인해 미끄러웠지만 나는 불알의 무게추에 의지하기로 마음먹었다. 팬티 벗고 뛰기 시작했다. 물론, 손으로 얼굴은 가린 채. 





스웨덴 한림원은 테드 창을 단 한번도 노벨문학상 후보군으로 뽑지 않았는데 이 선택을 볼 때마다 의문이 든다. 테드 창만큼 서사를 장악하는 힘을 가진 작가는 드물다. 중2의 성적 판타지에 집착하는 무라카미 하루키나 선승 흉내 내지만 속물 근성에서 벗어나지 못한 고은은 자주 노벨문학상 후보로 선정되면서 테드 창이 후보군에 없다는 사실은 매우 슬픈 일이 아닐까 ?  테드 창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드는 생각은 한국 작가의 빈곤한 상상력'이다. 상상력의 확장에 막혀서 어쩔 수 없이 리얼리티에 집착할 때 촌스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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