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터 키튼과 팡시울
버스터 키튼 영화를 보다 보면 가거도 우럭도 아니면서 울컥하게 되는 감정의 변곡점을 만나게 된다. 감독이 관객을 웃기려고 만들었으니 서해 갯벌 피조개처럼 피식 쪼개면( 쪼개다 : 소리 없이 입을 벌리고 웃다 ) 되지만 버스터 키튼 영화는 오롯이 웃기에는 너무 고급스럽고 진지하다. 그 당시에는 특수효과가 전무해서 모든 장면은 사고를 염두에 두어야 했으니 웃기려고 만든 장면들은 사실 두려움과의 싸움이었던 셈이다. 이 동영상 맨마지막에 나오는, 그 유명한 전설적 장면에서 집채 한 단면의 무게는 수백 킬로그램'이었다. 그러니까 스티로폼 따위로 관객을 속인 것이 아니라 실제로 집을 지을 때 사용되는 목재였다. 한치의 오차만 벗어났어도 버스터 키튼은 사망이었던 것이다. 그는 관객을 웃기기 위해서 두려움과 싸워야 했던 광대'였다. 그의 코미디가 숭고해지는 지점이다. 그를 볼 때마다 사형 선고를 받은 광대 팡시울1)의 마지막 무대가 생각난다. 지금 당신이 보고 있는 것은 웃음이 아니라 두려움의 결과'이다.
1) 나, 페루애는 한때 " 팡시울 " 이라는 닉네임'으로 활동한 적이 있다. 팡시울은 보들레르 시집 << 파리의 우울, 비장한 죽음 편 >> 에 등장하는 광대로 왕이 총애하는 어릿광대'였다. < 그 > 는 어릿광대였으나 현명한 영감이었고 총명했다. 보들레르는 팡시울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팡시울은 찬탄할 만한 광대이며, 거의 국왕의 친구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직업상 희극에 몸을 바치고 사람들에게는 진지한 일이 숙면적인 매력을 갖는 법이어서, 국가라거나 자유라는 관념이 일개 익살 광대의 뇌수를 폭압적으로 사로잡는다는 것이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어느 날 광시울은 불만을 품은 몇몇 귀족들의 음모에 가담했다. 임금을 폐하고, 사회에 물어보지도 않고 사회의 이전을 도모하고 싶어 하는 이 우울증 기질의 분자들을 권력에 밀고하는 갸륵한 인간들은 어디를 가나 있게 마련이다. 문제의 귀족들은 광시울과 더불어 체포되었으며, 꼼짝없이 사형에 처해질 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