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모르면 가만히 있어 :
가만히 계세요 !
한국어 중에서 가장 흥미로운 단어 두 가지를 뽑으라 한다면 나는 < 아무 > 와 < 가만 > 을 뽑을 생각이다. < 아무 ㅡ > 에 대한 단상은 틈틈이 써놓은 글이 있기에 제외하고 오늘은 < 가만 ㅡ > 에 대해 내가 그동안 이 녀석을 스토킹 한 소회를 밝히고자 한다. 일종의 관찰 일기'인 셈이다 . 양 양(ㅡ壤)과 불미스러운 일로 고성이 오간 적이 있었다. 나도 쉽게 물러나는 성격은 아니어서 나중에는 고성이 철원까지 들릴 정도였다. 이 문장에서 웃는다면 당신은 내 유머 코드를 정확히 이해하는 몇 안되는 사람이다
그때 양 양'이 나에게 협박을 하며 했던 말이 " 이대로 가만 당하고만 있지는 않을 거야 " 였다. < 가만 > 이라는 부사가 움직이지 않거나 아무 말 없는 상태를 지시하는 단어이니 이제부터는 분주히 움직이며 사람들에게 아무 말'이라도 해야겠다는 다짐으로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아니나 달라, 그녀는 분주히 돌아다니며 사람들에게 아무 말(흉)이나 해서 나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동분서주, 발품을 팔며 흉을 보는 이를 이길 재간은 없었다. 아, 흉보는 일도 부지런해야 하는구나. " 가만히 있어 ! " 라는 말은 " 자리를 지켜( 혹은 분수를 지켜) ! " 라는 말과도 맥락이 통한다.
남의 일에 나서지( ㅡ stand up) 말고 자기 자리에 앉아( ㅡ sit down)서 일이나 해, 라는 의미이다. < 가만 > 은 장소와 분수를 내포하는 것이다. 이 언어의 욕망을 이해하면 남성이 여성을 비하할 때 흔히 사용하는 " 집에서 밥(이나 빨래, 애, 설겆이, 청소)나 해 " 라는 말의 행간을 제대로 분석할 수 있다. 여자의 자리는 집안'이요, 여자에게 집 밖 나들이는 분수도 모르고 주제 넘는 월경인 셈이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여자답다, 아이답다, 어른답다, 처녀답다 _ 라는 말속에는 자신이 소속된 자리에 가만히 있을 때 얻게 되는 칭찬이다. 여자의 자리, 엄마의 자리, 아내의 자리, 며느리의 자리'가 따로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장소라는 뜻의 그리스어인 토포스(topos)이다.
토포스를 구수한 한국말로 번역하면 " 가만(히 있는 삶) " 이다. 그리고 토포스(topos)의 반대말이 아토포스(atopos)이다. 아토포스는 어떤 장소(자리)에 고정되지 않은 것, 정체를 알 수 없는 것, 특정 지을 수 없는 것을 뜻한다. 여자의 자리를 벗어나서 여자다움에서 벗어나 자유를 획득하는 것이 아토포스'이다. 자유인이란 토포스에서 아토포스로 월경한 사람이다. 그런데 국가와 자본이 바라는 인물상은 토포스적 인간이라는 점에서 불온하다. 그들은 남의 일에 나서지 말고 자기 자리에 앉아 일이나 하는 일꾼을 바란다. 이 정언명령은 세월호가 침몰할 때조차 가만히 있으라 _ 라고 명령했던 무자비한 폭력을 닮았다. 최초의 아토포스적 인간은 소크라테스'였다. 아토포스의 유래도 바로 소크라테스에서 비롯되었다.
플라톤의 << 항연 >> 에서 사람들은 그를 아토포스라고 불렀다. 소크라테스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 나는 진리를 모른다. 하지만 내가 진리를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너도 진리를 모른다. 하지만 당신은 자신이 진리를 모른다는 사실을 모른다. 하여, 나는 당신보다 더 많은 것을 안다. " 그렇기에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너무 많이 알고 있는 사람보다 항상 앞선다. 히치콕 영화가 위대한 지점은 재미를 놓치지 않으면서도 철학적 질문을 던진다는 데 있다. 앨프리드 히치콕 영화를 관통하는 주제는 " 누명 " 이다. 그래서 히치콕 영화에는 " 누명 쓴 사내 " 가 자주 등장한다. 그는 특정 사건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를 뿐만 아니라 아무 관련도 없는 사내이지만 악당으로부터 "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사내 " 라는 오해를 받아서 그들로부터 쫓기게 된다.
악당은 <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사내 > 보다 <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사내 집단 > 이다. 그래서 악당은 주인공이 도착하는 것보다 항상 먼저 도착한다. 모른다고 하소연해도 통하지 않는다. 어찌하오리까 ? 아무 것도 모르는 남자가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사내라는, 누명을 뒤집어쓴다는 이야기 구조는 히치콕이 즐겨 다루는 아이러니'이다. 얼핏, 아무것도 모르는 남자와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악당의 대결은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 같지만 언제나 승리하는 것은 아무것도 모르는 남자'이다. 말을 해도 알아듣지 못하니 이길 방법이 없다고 한탄했던 진중권의 고백을 상기시키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아무것도 모르는 자는 어떻게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믿는 자'를 이길 수 있을까 ?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서는 소크라테스를 호명해야 한다.
어느 날, 소크라테스는 잠을 자다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목소리를 듣는다. " 세상에서 네(소크라테스)가 제일 똑똑하다 ! " 소크라테스는 이 목소리를 의심한다. 환청인가, 신탁인가 ? 그는 자신이 이 세상에서 가장 똑똑한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저잣거리에서 똑똑하다는 명성이 자자한 명사들을 찾아 나선다. 경주에 사는 유시민도 만나고, 월계동에 사는 진중권도 만나 논쟁을 펼치는 식이다. 그런데 그들은 논쟁을 펼칠 때마다 소크라테스의 논박에 진다. 소크라테스는 말했다. " 나는 진리를 모른다. 하지만 내가 진리를 모른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당신도 진리를 모른다. 하지만 당신은 당신이 진리를 모른다는 사실을 모른다. 하여, 나는 당신보다 많이 안다. " 그러니까 소크라테스의 힘은 < 나는 내가 모른다는 사실을 앎 > 이다.
그것이 히치콕 영화에서 < 아무것도 모르는 남자 > 가 <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악당 > 과 대결하여 이길 수 있는 힘이다. 이러한 방식은 자크 랑시에르의 << 무지한 스승 >> 과도 맥락이 통한다.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을 학생에게 설명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랑시에르는 스승은 학생에게 지식을 주입시키는 < 설명 > 보다는 본질에 대한 < 질문 > 을 던지는 것이 올바른 교육법이라고 주장한다. 소크라테스의 대화법, 히치콕의 unknown, 랑시에르의 무지한 교수법'이 말하고자 하는 본질은 많이 안다는 것의 허구'이다. 그것은 지식의 허구'이다. 현대사회를 지배하는 것은 전문가 집단이다. 그들은 사태와 세태를 분석하고 전문가의 이름으로 해결책을 내놓는다.
이들은 때론 독설을 내뱉는 언니가 되고 형이 되기도 했으며, 멘토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리고 이제는 힐링이랍시고 상처를 치유하는 영혼의 정신적 스승이 되기도 한다. 서로 다른 외양과 이름으로 불리지만 같은 얼굴이다. 그들은 자신이 속한 전문 지식을 바탕으로 무지한 제자를 가르치려고 하지만 진짜 무지한 자는 바로 자신이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렁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지식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