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의 방향
나이 20은 " 이십 세 " 라는 표현보다는 " 스무 살 " 이라는 어감이 더 어울린다. < 스무 > 라는 관형사에는 " smooth " 와 " sweet " 의 느낌이 나서 다방 커피 맛이 난다. 반면에 나이 30은 " 서른 살 " 이라는 표현보다는 " 삼십 세 " 라는 표현이 더 잘 어울린다.
스무 살이 달달하고 부드러운, 설탕과 프림을 넉넉하게 넣은 커피 맛이 난다면 삼십 세는 블랙커피 맛이다. 전자가 낭만에 빠져도 될 나이를 미각적으로 표현한 어감이라면 후자는 쓰디쓴 현실을 냉정하게 바라보고 직시해야 된다는 현실 인식으로 읽힌다. 그렇기에 < 스무 살을 지나 삼십 세에 도달한 사람 > 은 철이 든 사람이고 < 이십 세를 지나 서른 살 > 이 된 사람은 철분이 부족한 사람이다. 하지만 시대가 변하여 스무 살 낭만을 이야기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 한국 교육은 10대부터 치열한 승자 독식의 사회에서 경쟁해야 된다고 가르친다. 네가 죽지 않으면 내가 죽는 베틀로얄인 것이다. 낭만 따위는 지나가는 민들레에게 주시라. 뭐, 이런 분위기'이다.
대한민국 청춘은 독고다이 인생인 셈이다. 독고다이가 " 죽을 때까지 홀로 간다 " 는 뜻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 독고 > 가 < 고독 > 으로 읽힐 법도 하지만 한국인은 고독과는 거리가 먼 민족성을 가지고 있다. 10대들은 또래 중 한 명이 " 튀 " 면 침을 " 퉤 " 뱉는다. 요즘 등골브레이커로 등장한 10대 롱패딩의 색깔이 모두 똑같은 이유는 튀는 색깔의 옷이 자칫 튀려는 수작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한국인은 독고다이의 경제학(이면서 동시에 경쟁학)을 숭배하면서도 막상 獨孤( : 홀로 독, 외로울 고)한 자는 왕따라는 집단 폭력으로 응징하려는 모순된 폭력성을 보인다. 독고한 자를 독거(獨居)라는 형태로 가두려는 짓이 바로 이지메'이다. 이러한 모순은 세대를 초월하며 아파트라는 주거 공간이 부의 기준이 되는 나라가 전 세계에서 대한민국이 유일하다는 사실에서도 여실히 보여준다.
서구에서 아파트는 실패한 주거 정책이지만 유독 대한민국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집단과 조직에 대한 열망이 주거 형태와 맞물리면서 발생했다고 볼 수 있다. 아파트 입주민 회의에서 배달 노동자의 엘리베이터 사용을 불허하겠다는 방침을 놓고 토론을 진행한 예가 좋은 사례'이다. 이제 십 대는 이십 세를 거쳐 삼십 세에 도달해야 된다. 불행은 바로 그것이다. 삼십 세'가 빛나기 위해서는 스무 살'이라는 낭만적 성장통을 겪을 때에만 가능한 것인데 이 낭만성이 제거되다 보니 한국 사회는 빠르게 인간성을 잃고 있다. 골리앗이 다윗을 때리는 행위는 인정도 없고 사정도 없는 무자비한 폭력에 불과하지만 다윗이 골리앗과 싸우려 하는 행위는 무모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낭만적이다.
진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싸울 수 있는 용기는 낭만이다. 그런 의미에서 노무현은 낭만적인 사람이다. 그는 스무 살을 거쳐 삼십 세가 되어 어른이 되었지만 낭만을 잃지 않은 정치가였다. 투석(投石)의 방향에 따라 선함과 악함이 바뀐다. 다윗이 골리앗을 향해 던진 돌팔매는 선한 행위이지만 바리새인들이 간음한 여자를 끌고 나와 돌팔매를 하려는 짓은 악함이다. 남자들이 남혐이라는 이유로 여자들을 향해 돌을 던질 때마다 예수의 말을 빌려 말하고 싶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그리고 노무현이었다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 내가 사랑하는 여자에게 돌을 던지란 말씀입니까 ? "
■ 본문과는 상관없는,
영화는 볼 때마다 다르게 다가온다. 영화 내용이 변했을 리는 없으니 내 마음이 변한 것이 분명하다. 이처럼 그때에는 " 불변 " 이라 믿었던 마음이 지금에는 " 가변 " 이 되어 돌아온다. 영화 << 봄날은 간다 >> 에서 유지태가 이영애에게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_ 라고 말했을 때, 이 대사가 끔찍해서 이 영화를 싫어했었는데 지금 다시 볼 수 있다면 어쩌면...... 이 대사 때문에 이 영화가 좋아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마음은 항상 가변이니까. 내 마음 속 영원불변한 불후의 명작이라 믿었던 영화가 어느 순간 촌스럽게 느껴지는 경우도 있다. << 아비정전 >> 이 그런 경우였다. 일종의 권태기가 찾아온 것이다. 장 비고 감독이 1935년에 연출한 흑백 영화 << 라탈랑트 >> 를 20년 전에 시네마떼끄에서 보았을 때는 아무 감흥이 없었다. 세계 걸작 고전을 본다는 의무감과 보았다는 쾌감만 남았던 영화였다. 이 영화를 다시 본 곳은 10년 전 낙원동 아트시네마였다. 그때도 이 영화는 내게는 지루한 영화였다. 그리고 어제 유튜브를 통해 다시 보았을 때 내 마음은 그 전의 냉정과는 사뭇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매우 아름답고 섬세한 영화였다. 영화를 보는 내내 흔들렸다. 어느 장면에서는 울컥해서 한지에 스며드는 농도 옅은 먹물처럼 눈물이 눈가에 번지기도 했다. 감상의 기준이 그때그때 다 다르다면 그때그때 선택했던 행위도 새로운 평가를 받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하는 이가 내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애원할 때 냉정하게 돌아섰던 내 마음은 옳았는가. 다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치맛자락을 붙잡고 애원했을 때 내 슬픔과 연민은 정확한 판단이었나 ? 판단은 늘 불확실해서 결정도 늘 옳은 것은 아니다. 십 년 후에 다시 << 라탈랑트 >> 를 보았을 때 지금 내가 느꼈던 이 설움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을까 ? 모를 일이다. 그때 나는 그 여자를 사랑했던 것일까 ?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