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조끼와 워마드
프랑스 노란조끼 시위가 대한민국에서 벌어졌다면 어떤 일이 발생했을까 ? 시위대가 가게를 약탈하고 자동차를 뒤집어엎는다면 한국 언론은 어떤 자세를 취할까, 그리고 국가는 ? 만약에 이명박근혜 정권 때 노란조끼 시위 같은 일이 발생했다면 국가는 계엄령을 발동했을 것이다. 박근혜 정권이 촛불시위라는 그 평화로운 집회 때에도 계명령을 준비했다고 하니 지나친 상상력은 아닐 것이다. 프랑스 언론이 노란조끼 시위를 보도하면서 보인 태도는 폭력적인 시위'는 대중으로부터 지지를 받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하면서도 시위가 발생하게 된 근본 원인'이 무엇인가를 들여다보아야 한다고 진단했다. 그러니까 프랑스 언론은 노란조끼의 폭력 시위에 대해 원인과 결과를 분리해서 접근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프랑스 언론은 노란조끼 시위가 제2의 68혁명 혹은 신자유주의에 저항하는 민중적 봉기라는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한국 언론이었다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접근법이다. 대한민국 언론은 시위가 발생하면 제일 먼저 계산기부터 두드린다. 뉴스 속보를 말씀드리겠습니다아, 삼 일째 이어진 금속노조 파업으로 인해 1조 3000억의 국가적 손실이 발생했습니다. 또한 시위 현장 인근 상인들은 잦은 시위로 인해 가게 문을 닫을 지경이라며 파업이 하루빨리 끝나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한국 언론은 시위대가 경제(불평등)가 어려워서 시위를 하는데 반대로 시위를 해서 앞으로 경제가 어려워질 것이라고 진단을 하니 원인과 결과를 도치해서 진단하고 있는 것이다. 시위 도중에 폭력 사태가 발생했다면 그 결과(폭력사태)에 대한 비판을 하되 원인은 따로 분리해서 진단을 해야 하지만 한국 언론 거개는 그렇지 못하다. 워마드 - 메갈 논란도 마찬가지'다. < 밖으로 내뱉은 말 > 이라는 것은 철저하게 결과의 산물이다. 이 결과는 < 안으로 삼킨 마음 > 이 원인이다.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은 명백하다. 여성이 밖으로 내뱉은 말에 대하여 그것을 강제로 제거하거나 제압한다고 해서 안으로 삼킨 마음마저 도려낼 수는 없다는 점이다. 전자는 가시적 현상학(결과)이고 후자는 내재적 심리학(원인)이다. 프랑스 언론이 노란조끼 시위의 폭력에 대해서는 우려를 표명하면서도 신자유주의에 저항하는 민중적 봉기라는 평가를 내리듯이 한국 여성이 < 내뱉은 말 > 과 < 안으로 삼킨 마음 > 은 따로 분리해서 분석하고 평가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나는 사회적 약자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든 지지할 생각이 있다. 나는 믿지 못하겠지만 변강쇠를 뛰어넘어 가르캉뒤아의 성기 사이즈를 가지고 있으나 당신이 그런 나를 소추라며 놀려도 기꺼이 받아들일 용의가 있다. 당신은 항상 옳다, 언제나 !
■ 덧대기
한국인의 여성관은 주로 < 남자는 배이고 여자는 항구 > 라는 시각이다. 여성의 정주성(定住性)을 강조한 것이다. 망부석(望夫石 : 정조를 굳게 지키던 아내가 멀리 떠난 남편을 기다리다 그대로 죽어 화석이 되었다는 전설적인 돌)은 있는데 망모석이 없는 이유이다. 여성은 주로 실(室)과 내(內)와 방(房)으로 묘사된다. 아내를 집사람, 안사람이라고 부르는 것도 여성을 집이라는 장소성으로 규정한 결과이다. 아내라는 말도 집 안쪽이라는 뜻이다. 그러다 보니 여성이 < 안 > 을 벗어나 < 밖 > 에 있으면 남성으로부터 표적이 된다. 한국 남성들이 흔히 여성을 조롱할 때 사용하는 표현인 " 할 일 없으면 집에서 밥이나 하라 ! " 는 말도 여성의 정주성을 강조한 것이다. 김승옥의 << 무진기행 >> 도 이와 똑같은 상황인식을 보여준다. 주인공 < 나 > 가 무진에 내려가 사랑을 나누는 여자 이름이 바로 하인숙이다. 이 이름은 여인숙을 떠올리게 만들고 이름을 도치하면 하숙인(집)을 연상케 한다. 여성의 정체성을 집이라는 장소성에 가두려고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 단편은 문체는 훌륭하지만 한편으로는 졸라 고리타분한 남성적 시각을 보여준다. 또한, 이 소설은 서울과 무진을 제국과 식민의 관계로 설정한다는 점에서 불편하다. 서울 사람(화자인 나와 여인숙은 서울에 거주하거나 서울에서 무진으로 내려간 사람이다)은 무진을 계몽이 필요한 장소로 설정하고 무진 사람을 속물로 규정한다. 이런 소설이 문학도들에게 숭배에 가까운 찬사를 받는 것은 우려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