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가까이에서 본 지네
1 파나 마나 한 파나마 모자 장수
파나마 모자를 원가로 파는 파나마 모자 장수가 있다. 예를 들면 파나마 모자를 십 원에 사서 십 원에 되파는 것이다. 고로 파나마 모자 장수는 파나 마나 한 파나마 모자를 파는 것이다. 묻지 않을 수 없다. 파나 마나 한 파나마 모자를 왜 파냐고 ! 같은 이유로 하나 마나 한 소리를 거창하게 말하는 사람을 보면 하나 마나 한 소리를 왜 하는지 이해가 안 간다. 대부분의 한국 에세이는 하나 마나 한 소리를 싸구려 감성으로 둔갑시켜 유통한다. 당신은 소중한 사람입니다 - 류'의 에세이 말이다. 김난도, 혜민, 이기주 에세이가 대표적이다. 독자들은 이런 책에서 " 위로 " 를 받지만 나는 기분이 " 아래 " 로 곤두박질친다. 깊이가 있는 글감은 깊이 팔수록 맑고 영롱한 샘물이 샘솟지만 감성 이기주의 에세이(미안해요, 이기주 씨이이 ~)는 파나 마나 우물이 아니라 똥물이다. 몇 번 선택 실수를 반복하다 보니 이제는 책 표지만 봐도 대충 돌아가는 꼴을 알 수 있다. 주먹 불끈 쥐고 외치게 된다. 내가 다시는 이따구 책에서 우물 파나 마라... 결론은 이렇다 : 파나 마나 한 모자는 안 파는 게 상책이고 파나 마나 한 우물은 애초부터 삽질 안 하는 게 상책이다.
2 차마 웃을 뻔하였다
김영민의 << 차마, 깨칠 뻔하였다 >> 는 선문답 같은 글이 많아서 문장 읽기가 녹록치 않다. 그래서 바짝 긴장하며 읽다가 싱겁게 끝나는 글이 있어서 종종 차마 웃을 뻔하였다. 뭐야, 싱겁기는. 독특한 유머 감각의 소유자 김영민 선생 ! 그런가 하면 산문이라 하기에는 리듬을 타는 운문에 가까운 글도 있다. 예를 들면,
누가 더 많이 아픈지 경쟁한다. 인간이다. 누가 더 억울한지 다툰다. 인간이다. 상대를 이해할 수 있어야 경쟁이 되지만 내 '생각' 속에서 이미 상대는 보이지 않는다. 인간이다. 너와 내가 맞물린 자리를 알아챌 때에야 비로소 화해이지만 그 자리는 늘 한 발 늦다. 인간이다. 상대의 마음이 깨어졌기에 나도 내 깨어진 마음을 붙안고 찾아올 수 있었을 뿐이다. 인간이다. '그리고(and)', 는, 이미 늦은 것이다. 인간이다
- 이미 늦은 것, 인간이다 205쪽
야금야금 읽기에 좋은 에세이'다.
3 가장 가까이에서 본 지네
옛날에 군대에서 참호를 파느라 삽질을 하다가 점심 먹고 풀밭에 누워 까무룩 잠을 잔 적이 있다. 이리저리 뒹굴다 보니 풀밭에 얼굴을 파묻고 잔 모양이었다. 코끝에서 바람이 스치는 소리가 들려서 눈을 떴다. 한 마리의 지네가 더듬이로 내 코끝을 더듬거리며 지나는 것이 아닌가 ! 가장 가까이에서 본 지네였다. 아, 놀라워라. 무서워서 오줌을 쌀 뻔했다. 몸은 경직되고 호흡이 빨라졌다. 내가 움직이면 지네가 덜컥 물 것 같아서 옴짝달싹도 못한 채 지네가 지나가기를 숨죽여 지켜보아야 했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오금이 저리긴 하나 돌이켜보면 그 감정은 혐오가 아니라 경외'에 가까웠던 것 같다. 그때 내 감정은 팜 파탈의 첫 등장을 지켜보는 느와르 영화 속 탐정과 같은 심정이었다. 그 치명적인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결국에는 파멸에 이르는 탐정처럼 말이다. 대체로 독이 있는 것은 아름답다. 지네가 더듬이로 나를 건들고 지나갔을 때, 그러니까 내 얼굴을 건방지게 더듬이로 희롱하고 농락했을 때, 내 몸은 지네의 에로티시즘으로 인하여 발기되어 온몸이 마비가 되었던 것이다. 사랑이라는 감점은 본질적으로 마비이자 맹목이다. 콩깍지가 씌이고, 호흡이 가빠지며, 넋 놓고 가만히 바라보게 된다. 그렇기에 나는 사랑이라는 감정에서 독(毒)을 읽는다. 상대에게 끌린다는 것은 그 대상이 독을 품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 숲길을 걷다가 독을 품은 뱀을 만나게 될 때의 신체 반응은 당신이 누군가를 사랑하게 될 때의 신체 반응과 동일하다. 어찌 할 줄 몰라 넋 놓고 바라보며, 때론 멀리 도망치고 싶지만 한발짝도 움직이지 못한 채 아름다운 대상에게 매혹된다. 그것이 사랑이다. 내게도 그런 여자가 있었다. 내가 사랑한 것은 그녀의 독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