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 설 쓰 고 앉 아 있 네 :
공지영은 성실한 사람 !
뉴스는 우둔한 자를 무장시키고
바보에게 권위를 부여하는 짓이다
- 플로베르
사기(꾼)은 성실하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는 직업군에 속한다. 남을 속여서 이득을 취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어서 사기꾼은 사기를 칠 대상에게 집중하게 된다. 칠(7)과 성의로도 부족하고, 팔(8)과 성의로도 부족하며, 구(9)와 성의로도 태부족이다. 오로지 열과 성의를 다해 성실한 태도를 취한다. 간이고 쓸개고 나발이고 난 네가 기뻐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 ~
비록, 이 연출이 교활한 연기이기는 하나 타인을 감쪽같이 속인다는 점에서 성실한 연기'다. 그래서 나는 성실한 사람보다는 차라리 게으른 사람이거나 타인에게 무심한 사람'을 신뢰하는 편이다. 영화 << 밀양 >> 에서 아들을 잃은 신애(전도연 분)가 느꼈던 분노는 자기 아들을 죽인 살인범이 신애 앞에서 보인 < 성실한 태도 > 때문이다. 영화 속 유괴 살인범은 속죄를 통해 신으로부터 구원을 받았다고 고백하지만 신애는 신이 인간에게 응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경험을 통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신은 본래 인간에 대하여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신애가 부정하고 싶었던 것은 神이 아니라 어쩌면 信( : 성실할 신)과 愛( : 사랑 애 )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신애가 보기에 자신이 처한 곤경에 대하여 슬퍼하는 사람 대부분은 모두 위선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위로는 진짜가 아니라 가짜 위로'이다. <<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 은 나이 서른에 교수가 된 금수저 여자와 나이 스물일곱에 세 여자를 죽여 사형수'가 된 남자가 서로 대화를 통해 사랑과 구원 그리고 용서를 얻는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소설'이다. 읽는 내내 기가 차서 백석의 당나귀처럼 흐엉흐엉 웃기만 했다. 세 번의 살해 행위와 세 번의 자해 행위1) 를 동일선상에 놓고서는 두 인물을 동일한 경험과 아픔을 공유한 운명론적 쌍생아로 설정한 대목에서 웃지 않는다면 우리 모두는 싸구려 통속극에 우네부네하는 얼치기요, 신파에 놀아나는 띨띨이'다.
내 몸에 상처를 입힌 것과 네 몸에 상처를 입힌 것을 똑같은 행위라고 말하는 것은 죄책감의 문제가 아니라 법 해석의 무지에 있다. 기초 얼개가 이토록 부실하니 마무리 공사가 제대로 될 리 없다. 사상누각인 셈이다. 인간에 대한 예의 운운하며 세 여자를 죽인 사형수도 용서해야 마땅하지 않느냐 _ 며 우네부네하는 공지영은 왜 이재명 따위는 용서 받지 못할 자로 낙인을 찍는 것일까 ?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산 그녀가 보기에 이재명의 한 점은 부끄러움의 결정적 증거'라고 판단한 것일까 ? 그깟, 한 점이 뭐라고. 김부선의 주장이 모두 진실이라고 치자. 그렇다고 해도 그가 사람을 죽인 것도 아니요, 사기를 쳐서 불로소득을 얻은 것도 아니지 않은가.
살인죄는 용서할 수 있지만 사소한 거짓말은 용서할 수 없다 ?! 나는 공지영이 실력이 형편없는 소설가'라고 생각하지만 매우 성실한 소설가'라는 데에는 동의한다. 그는 성실하다. 그는 지금도 방구석에 앉아 정의가 승리하는 소설이나 쓰고 앉아있을 것이다. 건투를 빈다.
1) 남자는 여자를 세 번 죽인 사형수이고 여자는 세 번이나 자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한 서른의 교수'다. 삶에 미련이 없어서 세 번이나 자살을 시도했다가 실패했다는 여자는 나이 서른에 그토록 얻기 힘들다는 교수 자리를 얻는다. 교수 자리 따기 위해 엄청 노력했다는 소리인데, 아니... 삶에 의욕이 없어서 자살을 세 번이나 했던 주인공은 왜 그토록 열심히 공부했을까나 ? 무기력과 닥치고 열공은 성격이 다르지 않나 ? 주인공은 밝은 미래를 위해 너무 열심히 열공하셨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