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금치를 아욱국이라 불러도 좋다
못생긴 운동화(어글리 슈즈) " 발렌시아가 트리플 에스 팔라디움1) " 가격은 백만 원을 훌쩍 넘는다. 비싸지만 없어서 못파는 지경이란다. 운동화 가격이 십만 원을 넘기면 비싸다고 투덜대는 내가 보기에는 언빌리버블하다(내가 보기엔 운동화 적정 가격은 삼만 원이다).
그렇다 보니 발렌시아가 에스 신발을 신은 패피(패션피플)들은 인스타그램에 착장 사진을 올릴 때 이 운동화가 돋보이도록 옷을 입거나 운동화가 강조되도록 카메라 각도에 신경쓴다(바지 밑단이 운동화 끈을 가리는 것을 염려해서 바지 밑단을 양말 속에 넣은 녀석도 보았다. 쏘가리 같은 댓글 하나 남겼다. " 모내기 하냐, 농번기 때 모내기 해 ?? " ). 나, 발렌시아가 운동화 신은 남자야 ! 그러니까 그네들에게 있어서 주인공은 운동화이고 엑스트라는 옷이다. 웩 더 독 ! 당연히 패션 보조 용품인 악세서리에 불과했던 운동화가 주인공이 되다 보니 전체적인 균형과 조화에 균열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것은 마치 깍두기 형님들이 금목걸이가 강조되도록 옷을 배치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런 것을 두고 나는 " 졸라 촌스러운 페티시 패션 " 이라고 부른다. 우리, 제발 호스트와 게스트는 구별 좀 합시다아. 중요한 것은 그 사람만이 가지고 있는 시그니처'다. 이 시그니처를 아우라라 불러도 좋다. 옷차림에 대한 글을 쓰다 보니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자꾸 보그 병신체처럼 외래어를 쓰기 되는데.......... 좋다 ! 아우라 대신 아욱국이라 부르겠다( 그리고 시그니처는 시금치라 부르겠다). 사람들이 종종 착각하는 것은 < 유행 > 과 < 개성 > 을 혼동한다는 점이다.
유행하는 옷을 즐겨 입는 사람을 개성 있는 사람이라고 착각을 하는데 유행과 개성은 서로 반대 개념에 가깝다. 왜냐하면 유행은 대중성을 기반으로 한 현상이고 개성은 말 그대로 개인의 시금치를 기반으로 한 아욱국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유행 따라 옷을 입는 사람을 두고 옷을 개성 있게 입는다, 라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중요한 것은 시금치와 아욱국이다. 유행에 따르지 않지만 누가 봐도 이 스타일은 그 사람 고유의 시금치라고 모두 다 동의할 때 그 사람의 패션은 아욱국을 얻는다. 시금치 없는 스타일은 스타일이 아니다.
문학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 시금치는 스타일을 만들고 스타일은 그 작가의 아욱국을 만든다. 문창과 중심으로 신인 작가를 뽑는 한국 현대 문학(문단)은 스타일이 모두 대동소이하다. 그 나물에 그 밥이라고 그 교수에 그 제자가 결국에는 작가가 되는 시스템이 한국 문단이다. 현대 젊은 작가들의 작품에서 각각 몇 문장을 발췌해 문장을 뒤섞으면 마치 한 사람이 쓴 작품처럼 보일 때가 많다. 쉽게 말해서 그들끼리 근친혼을 하다 보니 문장 분별력이 떨어진다. 그리고 분별력이 떨어지다 보니 변별력도 떨어지는 것이다. 개나 소나 전복적 상상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란다.
이 말은 작가 고유의 시금치가 없다는 것이고, 아욱국이 없다는 말이 된다. 당연히 한국 문학은 골라먹는 재미가 없다. 한국 문학이 경쟁력을 키우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시금치와 아욱국이다 ■
덧대기
사람들이 신형철 평론에 대해 엄지 척 하며 성찬을 하덴더 개인적으로 신형철 평론은 평론의 연성화, 평론의 감성화, 평론의 국뽕화, 평론의 멜로화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문장은 아름다우나 아름다운 문장이 평론의 덕목은 될 수 없다.
1) 옛날에 시골 개 한 마리 키운 적이 있었는데 몰골이 말이 아니어서 사람들이 무시하고는 했다. 이에 열받은 나는 아주 멋진 이름을 지어주었다. 개 이름은 " 드미트리히 라스콜리니코프 앙겔로 라흐마니 3세 " 였다(지금은 정확한 이름은 생각이 나지 않지만, 뭐 대충 이런 이름이었다). 이름이 길면 뭔가 고급스럽고 귀족스러운 느낌이 난다. 발렌시아가 프리플 에스 팔라디움이라는 네이밍도 이 전략을 구사한 것처럼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