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 이사를 온 우리 동네에 작은 도서관이나 문고가 생겼음 좋겠다고 바랐다.
시립도서관까지 매번 버스를 타고 다니기가 좀 번거롭다는 게으름을 서서히 느끼기 시작했기 때문이다.그러다 작년 12월 초쯤이었던가! 드디어 근처 아파트내 작은 도서관이 개관한다는 소식을 듣고 반가웠었다.이름도 소소하게 '바람꽃 작은 도서관'이었다.
좋다고 달려가 보았더니 음....말 그대로 작긴 작았다.
그래도 책들이 모두 새 것이었다.그게 너무 좋았다.
처음엔 죽어라고 바닷마을 다이어리 시리즈 만화책과 허영만 화백의 '커피 한 잔 할까요?' 의 만화책을 빌려와 열심히 읽었다.재밌기도 했지만 새 책이어서 내가 처음 넘긴다는 기쁨이 무척 좋았다.
일주일간의 대여기간이 사뭇 부담스럽다라고 느껴질즈음 도서관 사서분과 형식적인 대화가 오가기 시작했었다.
-책을 빨리 읽으시네요?
=만화책이니까요!(속마음-대여기간을 보름으로 늘려 주시던가요?)
만화책이 지겨워질 무렵 이젠 글밥책으로 빌려볼까?
고르다가 김연수의 '청춘의 문장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 책이 처음 나왔을적 그래 나는 반가워 했었지! 읽어봐야 하는데~~ 라는 생각만으로 시간을 보냈었구나! 한 육 년정도 지났겠구나! 뭐 그렇게 혼자서 생각하며 책을 챙겨와 읽기 시작했는데 10년이 훨씬 지난거다.출간한지 10주년이 지났다고 다시 '청춘의 문장들+'이 나온 것도 작년의 일!
나는 그저 표지만 바뀌고 나온 것인줄 알았더니 그게 아녔다.
'컵라면의 3분은 그처럼 길었고 서기 2천년은 그토록 빨리 찾아왔으니까...'
작가가 써 놓은 이 문장처럼 나의 기분도 딱 그런 느낌이었다.
13년의 시간은 컵라면이 익어가는 3분 그시간과 비슷할 수도 있구나!
깊은 깨달음을 안고서 책을 읽어나갔는데 13년 전의 케케묵은 책이란 느낌없이 바로 엊그제 같은 일들을 듣고 있는 듯한 착각속에서 꽤나 재미나게 읽히더라!
동갑은 아니지만 엇비슷한 시대와 장소를 살아왔었기에 책에 대한 몰입도가 깊었을 것이다.
얼마 전 스무 살에 만났었던 친구를 만나 잠깐 그시절을 회상하고 즐거웠던 아련함을 가지고 이 책에다 그것을 애써 덮어 버렸으니 더욱 더 몰입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의 문장들이 눈에 가득 들어 차, 내처 도서관으로 달려가 '청춘의 문장들+'도 또 빌렸다.
사서는 내게 묻는다.
-읽을만 하던가요?
=(당황스러워 이럴땐 어떤 말을 해야하나? 3초간 고민을 좀 했다)
그냥 저냥 읽을만 해요.^^
단 하루가 지난 일이라도 지나간 일은 이제 우리의 것도, 살아 있는 것도 아니다. 시간을 되돌릴다고 하더라도 그 눈빛을 다시 만날 수 없다. 우리는 이미 발을 동동거리며 즐거움에 가득 차 거리를 걸어가던 그때의 그 젊은이와는 아주 다른, 어떤 사람이 됐기 때문이다. 세월이 흘렀기 때문에 우리가 변한 게 아니라 우리가 변했기 때문에 세월이 흐른 것이다. 어찌할 바를 모르겠지만, 결국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청춘의 문장들,123쪽)
내가 기억하는 청춘이란 그런 장면이다.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애매한 계절이고, 창문 너머로는 북악 스카이웨이의 불빛들이 보이고 우리는 저마다 다른 이유로, 다른 일들을 생각하며, 하지만 함께 김광석의 노래를 합창한다. 잊어야 한다면 잊혀지면 좋겠어. 부질없는 아픔과 이별할 수 있도록. 잊어야 한다면 잊혀지면 좋겠어.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그대를. 하지만 과연 잊을 수 있을까? 그래서 내 기억 속 그 정릉집의 모습은 거대한 물음표와 함께 남아 있다. 그건 아마도 청춘의 가장 위대한 물음표이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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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의 한가운데에는 키가 작은 사내 하나가 통기타를 메고 노래를 부르며 서 있었다. 그게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본 김광석이었다. 그날, 나는 김광석의 그 노래와 완벽하게 소통했다. 그 느낌은 죽어도 잊지 못할 느낌이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그 날, 유리문을 열자마자, 유리문을 열고 조금 걸어나오자마자, 참으로 푸른 밤이구나는 생각을 하자마자, 내 귓전으로 들려오던 노랫소리 귀에 들리는 듯하다. 예술이란 결국 마음이 통하는 게 아니라 몸이 통하는 것이라는 걸 깨닫던 그때의 일들이 어제인 듯 또렷하다.
청춘은 들고양이처럼 재빠르게 지나가고 그 그림자는 오래도록 영혼에 그늘을 드리운다. 김광석은 젊어서 죽고 2003년을 기점으로 나는 김광석이 살아보지 못한 나이를 살게 됐다. 정약용의 시 중에 다음과 같은 게 있다.
어느새 가을 멀리 가버렸으나
숲나무엔 가을 뜻 아직 남았네
적막한 바위 틈엔 물기 마르고
맑은 시내 어귀에 뗏목 깔렸다
나무꾼은 상수리 밤톨 줍고
스님은 우물에서 무를 씻네
석양빛 아직 아니 사라졌는데
등나무엔 초등달 벌써 올라와
어느새 청춘은 멀리 가벼렸으나 내 마음엔 여전히 그 뜻 남아 있는 듯, 지금도 나는 김광석의 노래를 들으면 몸이 아파온다. 석양빛 아직 아니 사라졌는데 등나무에 벌써 올라선 초등달처럼 그렇게 가버린 사람들이 나무나 많기 때문이다.청춘은 그런 것이었다. 뜻하지 않게 첮아왔다가는 그 빛도 아직 사라지지 않았는데, 느닷없이 떠나버렸다.
(청춘의 문장들,138~142쪽)
청춘의 문장들은 내 눈에 더 잘 읽힌다.
분명 눈이 침침하여 한밤중에 문장을 읽다보면 눈이 빠질 것처럼 피로하지만,
지금은 청춘이 아니므로 문장들이 눈에 와 박히는 듯하다.
청춘시절에는 할일이 없어서,할 것이 없어서 빈둥대며 게으르게 책을 읽었다면,
지금은 할일이 너무 많아서,생각할 것들이 너무 많아
잠깐 멍 때리다 보면 하루가 금방 가버린다.
체력이 딸려 절로 피곤하니 책 읽는 것이 여의치 않음에도 문장들은 왜 자꾸 눈에 들어차는가!
이 책은 그냥 저냥 심심풀이로 읽을만한 책이 아님을 알고 있다.
하지만 사서의 물음에 그냥 저냥 읽을만 하다고 쉽게 말해버렸음을 금방 후회했다.
그래서 무언가 나의 느낌을 강하게 표현하고 싶었다.
그래서 뜬금없는 고백을........
="실은 좋아하는 작가에요."
뜬금없는 고백을 해버린 내가 무안하게시리 사서는 아무말이 없었다.
그리고 고개 숙인 사서앞에서 별안간 얼굴이 빨개져 버렸다.
작은 도서관 사서는 제발 나에게 질문을 하지 않았음 좋겠다.
그러려면 도서관에 많은 사람이 드나들어야 할텐데.....홍보가 덜 되었는지 인적이 드물다.
도서관을 들어가면 늘 방명록에 이름과 나이를 기록해야만 한다.
나는 이것이 너무나도 싫지만 내 나이를 마구 휘갈겨 적고 온다.
적어 놓은 내 나이가 결코 청춘이 아닌 중년의 나이라는 것을 이 삼일에 한 번씩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들이 참 신기하면서 싫다.
하지만 <청춘의 문장들+>을 읽고 나니 이젠 자신있게 내 나이를 적어 놓고 올 수 있을 것같다.
=지금 이 마음으로 스무 살로 돌아가면 그때와 다른 삶을 살겠죠.스무 살 때 그걸 알았더라면 그런 식으로 달라졌겠죠. 그때 타임머신 같은 걸 타고 20년 뒤에 내가 어떻게 사는지 보고 왔더라면 훨씬 조급하지 않게 살았을 것같긴 해요. 시간이 얼마나 많이 남았는지 알 테니까 만사를 느긋하게 대했을 것 같아요. 스무살 때는 너무 조급했어요. 마치 서른 살 이후가 없는 사람처럼요. 매사에 빨리 해야 한다는 생각이 많았는데, 그렇게 때문에 오히려 늦어진 것들이 참 많아요. 인생의 지혜는 대개 역설로 이해되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그러니까 서른 이후에도, 마흔 이후에도 이렇게 살 줄 알았다면 얼마나 여유로운 20대를 보낼 수 있었을까요? 하지만 지금 문제는 그런 게 아니고, 우리가 얼마나 더 살지는 모르겠지만 일흔 두 살 정도까지 산다고 칩시다. 그럼 일흔 한 살쯤 되어서 비슷한 질문을 받으면 또 비슷하게 대답할 거 아니겠어요? 그런데 이제는 일흔 할 살의 내가 마흔다섯 살의 내게 무슨 말을 할지 짐작이 가요. 아마도 인생은 너무나 길다고 말하겠죠.(웃음) 그렇게 30년 뒤의 나를 상상한다면 지금 뭘 해야 하고 뭘 하지 말아야 할지 너무나 분명해지죠.
(청춘의 문장들+, 47쪽)
작가와 같이 나이 들어간다는 것은 기분이 묘하면서 좋다.
그만큼 더 많은 공감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의 스무 살적 친구와도 옛날 이야기와 현재의 이야기를 주거나 받거니 하면서 20년이란 시간을 그네가 왔다,갔다 하듯 우리의 눈빛들도 멍~ 해졌다가,제정신으로 돌아와 또렷했졌다가 무한 반복을 했다.옛친구와 대화를 할적엔 기억력이 좋은 친구가 존경을 받거나,미움을 받거나 둘 중 하나인 듯하다.나는 존경과 미움을 동시에 받았다.물론 나의 기억이 정확한건지 잘 모르겠는데 친구가 너무 기억을 잊고 있는 것들이 많아 확인이 잘 안되니 대화의 주축은 나의 기억을 되살려 친구에게 들려주는 식이 되었다만 여튼 같이 나이 들어가기에 공감할 수 있는 것들이다.
스무 살 친구를 만났었고 이 책들을 동시에 읽으니 '청춘의 문장들'은 옛 동창을 만난 듯한 기분이다.내 청춘을 기억해 주는 문장이었고,내 청춘을 소환해주는 문장들이었다.
또한 옛문장들을 작가의 관점으로 재해석해 주는 문장들이라 더 좋다.
그리고 지금 현 시점에 서 있는 내가 뭘 해야 하고,뭘 하지 말아야 할지 되짚어 주는 좋은 문장들은 역시 좋은 친구같다.
나도 다시 10년 후의 책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