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와 빨강
편혜영 지음 / 창비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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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편혜영을 좋아했다. <아오이 가든>을 보고 아, 이 작가 장편 꼭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떻게 읽어야 할지를 모르겠다. 가슴에 싸한 바람이 분다. 정호승 시인은 외로우니까 사람이라고 했다. 갑자기 다 읽고 그 시가 생각났다.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속을 걸어가라.  

갈대숲에서 가슴 검은 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퍼진다. 

그런데 정말 이 작품과 이 시가 어울리는 지를 모르겠다. 외로우니까 사람이 아니라 후회하니까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 같고 그렇게 사는 게 사람의 삶이 맞냐고 묻는 것 같은데 나는 거기에 그럼 어떤 삶이 사람에게 맞는 삶이냐고 반문하게 되기 때문이다. 아, 편혜영의 작품이 점점 내게 버거워짐을 느낀다. 이렇게 어렵게 쓰지 않아도 현대인의 고립과 단절에 의한 고독은 뼈가 시리게 절절히 전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다. 아직도 편혜영은 아오이 가든의 고양이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은 아닌지 그런 생각도 들었다. 

C국으로 연수를 가게 된 주인공은 C국에 오자마자 곤경에 처한다. 그 나라는 전염병이 확산되서 난리가 났고 쓰레기 처리로 골몰을 앓고 있다. 일이 꼬이느라 그가 유일하게 알고 있던 본사 직원 몰은 문제가 생겼다며 휴가라고 생각하고 기다리라고 하고 연락이 두절된다. 게다가 그가 사는 아파트가 전염병때문에 격리되어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가 된다. 그때 그는 떠나면서 집에 개를 남겨두고 왔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가방을 잃어버려 연락이 막막한 가운데 전처와 재혼하고 다시 이혼한 친구 유진의 직장에 전화를 걸어 부탁을 한다. 거기서 그는 놀라운 사실을 전해 듣게 되는데 그의 집에서 개와 전처가 살해된 걸 발견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용의자로 자신이 추적되고 있다는 사실도. 

작품이 주인공의 이때부터 가게 되는 내리막길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그 사이사이 주인공이 내보이는 사랑에 대한 그리움, 사람에 대한 그리움, 작은 것에 대한 소중함을 깨닫는 과정을 담아내고 있다. 아무리 외로워서 사람이라지만 외롭지 않을 수 있었다는 걸 알게 된 순간 후회가 밀려오고 그래봐야 소용없는 일이지만 그래도 누군가 내 이름 불러줄 이를 찾아 공중전화에 매달리게 한다. 작가는 주인공을 통해 사랑이, 때론 사람이 원하는 사랑이 작은 소통과 내편이라는 믿음에서 오는 이해라고 말한다. 젊은 시절 작은 마누라와 좋은 시절 다 보내고 늙고 병들어 조강지처를 찾은 남편의 병수발을 드는 할머니에게 밉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그 할머니 말하기를 밉다고 친구를 버리는가 하셨다. 아마도 이 주인공이, 아니 우리가 원하는 무조건적인 사랑은 이런 뭘 해도 그저 나를 받아주는 친구가 있었으면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지만 말이다. 알고 있기에 더 원하는 것 아닐까 싶다. 

이 작품은 끊임없이 쥐가 등장한다. 주인공이 고립되게 된 원인도 쥐를 잘 잡아서였다. 사람들은 쥐가 병을 옮긴다고 생각하며 쥐를 잡는데 노숙자, 부랑자가 되고 다시 하수도까지 내려가 쥐와 같은 생활을 하게 된 주인공이 결국 취직하게 된 곳이 쥐잡는 곳이다. 쥐는 이 작품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일까? 사람들은 전염병이 쥐로 옮겨지는 것이 아님을 안다. 그러면서도 쥐를 잡아달라고 하고 쥐를 잡는다. 이유는 위약효과때문이다. 쥐가 안보이면 그만큼 나아진 거라고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다. 쥐는 또한 주인공과 같다. 주인공의 내면이다. 보이는 쥐 한마리는 그의 희망이지만 안보이는 수많은 쥐는 그 안에 그도 알고 있지만 내 보이지 않는 절망이다. 인간은 그렇게 절망을 부여잡고 작고 덧없는 희망 하나에 매달려 사는 존재다. 쥐처럼 끈질기게 말이다. 

작가는 작품을 통해 붕괴하는 현대인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망가진 채 살아가는 이들. 죄의식을 던져버리고 고립된 곳에서 쥐의 끈질긴 생명력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단지 살아가기만 할뿐이라고. 주인공은 아내와 좀 더 다른 나은 관계로 발전할 수 있었는데 스스로 안좋은 쪽으로 가고 말았다. 늘 그런 자기의 쓸데없는 고집이 후회를 만든다는 걸 알면서도 후회를 할망정 달라지지 않았다. 자신이 용의자로 잡히는 줄 알고 탈출했을 때도 그는 잘못된 선택을 했다. 부랑자가 되어서도 마찬가지였고 그 안에 살아가는 또 다른 많은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앞으로도 인간은 단지 산다는 것 하나만 가지고 잘 살고 있다고 자위할 것이다. 그게 인간이다. 감히 인간이 쥐보다 낫다 말할 수 있을까. 작가의 뼈 있는 이야기에 눌려 오늘을 보내지만 내일은 나도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살거라 생각하니 그저 답답하기만 하다. 사람이 무어라고 그렇게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인지. 사람, 별거 아닌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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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모른다
정이현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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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모를 익사체 한구가 발견되면서 작품은 시작된다. 하지만 작가는 그 사건에 빠져들 틈을 주지 않고 한 가족의 이야기로 넘어가고 있다. 또 다른 아이 실종이라는 좀 더 현실적인 문제에 집중하게 만든다. 도대체 이 미스터리한 익사체의 발견이 책의 내용과 어떤 관련이 있다는 건지, 관련이 있기는 한 것은 분명한데 작가의 무심한 시선은 깊숙히 파고들 틈을 주지 않는다. 하지만 이 사건은 이 책을 관통하는 핵심이자 '너는 모른다'를 가장 잘 반영하는 짧지만 강렬한 것이었음을 다 읽고 난 뒤 알게 된다. 그런 점에서 작가의 공들인 흔적을 볼 수 있었다.  

현대의 가족 구성은 다양하다. 현대인의 정체성 또한 다양하다. 하지만 주어진 것에 불평하는 건 자기만 손해다. 부러우면 지는 거라는 말이 괜히 유행일까. 가족을 태어나면서 내 마음에 드는 구성원으로 골라 태어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어쩔 수 없는 거에 자꾸 목을 매면 후회하는 건 본인뿐이라는 걸 등장 인물들이 질리도록 돌아가면서 되새김길하듯이 각인시키고 있다. 참, 이렇게 가족으로 만나기도 쉽지 않을텐데, 그래도 이정도면 나쁜 구성은 아닌데 불만은. 푸쉬킨의 말을 하지 않았던가.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고. 뭐 이 정도가 각각의 인물들에게 필요하지 않았나 싶은 작품이다.  

아버지란 어떤 존재여야 하는 지 알지도 못한 채 아버지가 되어 돈만 벌어다주면 자기 할 일 다하는 거라 생각하고 무슨 일을 하는 지도 모르게 은밀한 사업을 하는 아버지가 있고 한국에서 화교로 살며 눈치보는 일에 질려 마음을 드러내지 않고 무심으로 일관하는, 그러면서 대만에 있는 옛 애인과의 관계를 끊지 못하고 있는 새엄마, 부모의 이혼으로 상처입고 애정결핍증 환자처럼 사랑에 목을 매며 자학하는 인생을 사는 큰 딸, 그림자처럼 살아가려 애쓰지만 쌓이는 스트레스를 풀지 못해서 방화를 일삼는 아들, 어리지만 집안 분위기와 태생적 수줍음으로 마음을 열지 않다가 사라지는 작은 딸. 작은 딸 유지의 실종으로 이들 가족의 문제는 표면에 드러나고 그러면서 서서히 가족의 모습을 갖춰가는 아이러니한 모습을 보여준다. 

아이가 실종되어 가족 구성원은 패닉 상태에 빠진다. 아버지는 의심가는 이들이 있고 자기가 하는 일이 발각될까 두려워 경찰에 신고하지 않고 탐정을 고용한다. 엄마는 여기저기 아이의 친구에게 전화를 해보지만 정작 아이의 관심사가 무엇이었는지, 아이에게 고민이 있었는지 알지 못한다. 오빠는 그날 자신이 집에만 있었더라면 하고 자책에 빠져 전단지를 들고 돌아다닌다. 같이 살지 않는 의붓언니는 예전에 자신이 모의한 동생을 납치해서 아버지에게 돈을 뜯어내자는 것을 남자친구가 실행한 건 아닌지 전전긍긍한다. 그리고 대만에서 엄마의 남자친구가 아이의 실종 소식에 다급하게 찾아온다.  

이를 통해 작가는 독자들에게 가족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느냐고 묻고 그 물음에 깨닫기를 바라는 것 같다. 하지만 속을 뒤집어 보여준다고 한들 먼지 한톨까지 다 알 수는 없는 일이고 다 안다고 무조건 좋은 일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가족이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가족이란 사랑하는 존재들이다. 믿음의 가장 최소 단위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남자와 여자는 사랑을 해서 결혼을 한다. 그렇게 믿자구. 그 사랑을 토대로 아이를 낳고 기른다. 사랑과 믿음으로 부부는 하나가 되고 부모와 자식은 서로의 울타리가 되어 준다. 서로가 서로에게 맨 몸을 보여주고 자신의 등을 보여주며 무방비 상태임을 언제나 드러낼 수 있는 이들이 가족이고 그렇게 쉴 수 있는 곳이 가정이어야 한다. 그런데 이들은 너무 많은 갑옷을 입고 보여주지 않은 채 그 갑옷에 짓눌리기고 있다. 자신이 갑옷을 입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말이다. 

작품은 '너는 모른다'로 흠뻑 젖어 있다. 너는 모른다고 등장 인물들은 저마다 외친다. 그렇게 외칠거면 알 수 있게 속 좀 보여주고 살 일이지 너는 나를 모른다고 하소연만 하고 있으니 답답하기만 하다. 그러는 너는 나를 알려고 해봤냐고 묻고 싶다. 자신도 보여주지 않고 남도 알려 하지 않는 대화가 단절되고 소통부재를 겪고 있는 가족이 불쌍하다. 이해와 연민은 가슴에서 빼놓고 무심함과 상처주기만 남은 사람들처럼 가족이 남보다 못하게 살고 있는 모습이라니. 어떻게 어린 아이가 전화할 수도 없게 만드는 지. 적어도 엄마, 아빠, 언니, 오빠라면 위험에 빠졌을 때 전화할 수 있는 이들이어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 이들은 아직도 모르는 것만 같다. 안타까운 일이다. 

작품 안에는 가족 말고도 생각해볼 문제들이 내제되어 있다. 우선 우리는 이미 단일민족이 아니었다고 말하던 어떤 사회학자였나 인권운동가가 생각나는데 그의 주장의 근거가 바로 화교의 존재였다. 화교의 역사는 잘 모르겠지만 백년은 넘게 우리나라에 있지 않았나 싶다. 그들은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하지는 않았지만 우리가 이 땅에 살게 한 이들이고 6.25전쟁이 일어났을때 이 땅을 위해 목숨 걸고 같이 싸운 같이 산 사람들이다. 하지만 우린 그들은 늘 이방인 취급했고 그들의 존재를 무시했다. 다문화 가정이 늘어난다고 이제와서 단일민족에 대한 재고가 필요하고 인식전환이 필요하다고 말하지만 우린 진작에 단일민족이라는 꼬리를 버렸어야 했다. 우리 이웃에게 상처를 주고 그들을 배척하기 위한 명분으로 이용되는 단일민족이라면 그것은 추한 우리들의 자화상일뿐이다. 옥영과 밍의 대만인도 한국인도 아니게 되어버린 그들의 모습속에서, 유지를 왕따시키게 만드는 부모들의 모습속에서 잔인함을 본다.  

또 한가지 이 작품을 통해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장기 기증에 대한 문제다. 아픈 내 자식은 소중하다. 하지만 내 자식 살리자고 남의 자식이 어찌되든 상관없어서는 안된다. 어떻게라도 좋다는 건 정말 아니다. 모른 척 하면 안된다. 그로 인해 음성적 매매와 납치, 살인이 일어나기도 한다고 한다. 가난한 나라에서는 그렇게라도 먹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고 지켜주지 않는 어린 생명들은 누군가에 의해 끌려갈 수도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영화로도 나왔었다. 아픈 딸을 위해 마춤 아이를 갖고 그 아이를 낳아 언니에게 기증을 해줬으면 하고 부모는 바라지만 아이는 거부한다는 내용의 <마이 시스터즈 키퍼>를 보라. 그런 부모의 행동이 아픈 딸을 정말 잘 알고 한 행동인지를. 순리를 거스르는 일은 옳지 않다. 이건 너는 모른다는 한마디로 끝날 일이 아니다.  

진작에 알았더라면 움추리지 않았을텐데 진짜 시련이 닥쳐야 인간은 삶에 대해 생각을 하게 된다. 그동안 바라던 것들이 얼마나 덧없고 공허한 것이었는지 깨닫게 된다. 하지만 그런다고 달라지는 것 또한 없다. 산다는 건 그저 사는 것일뿐이다. 고슴도치처럼 제 몸을 부풀려 가시를 세워봐야 상대방이 상대를 안하면 헛수고라는 걸 민망해하며 알게 되듯이 그런 것이다. 인간관계의 본질을 따져봐야 별거 없다. 그래봐야 부부는 부부고 부모 자식간은 부모 자식이고 형제는 형제다. 그 굴레가 굴레든 축복이든 덫이든 관계는 살면서 잘 만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인간의 관계에서 절대적 고립과 단절이란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좋게 생각하며 살기를. 인간 관계 꼬아봤자 나만 피곤하다. 너도 모르지만 나는 더 모르지 않는가.   

처음 사건은 마지막에 와서야 의문이 풀린다. 하지만 그 의문은 또 다른 의문을 낳는다. 이들의 시련이 과연 진짜 시련이었을까 하는. 아버지는 이용을 당했다. 그는 그것을 여전히 아내와 아이들에게 말하지 않는다. 경고조차 하지 않는다. 만약 그가 경고만 했더라도 사건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이게 끝일지 시작일지 책을 덮은 나는 모르겠다. 위험한 이들이 언제 어디서 나타나게 될지 모를 일이니까. 그러니 안타깝지만 이들의 <너는 모른다>는 현재진행형이고 독자인 나는 걱정이 될 뿐이다. 거기에 무심한 이들은 밍에 대해 궁금해하지도 않고 있다. 정말 난 이들을 모르겠다. 언제까지 너만 모른다고 할지를. 나만 모르는 걸까. 작가에게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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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의 달을 쫓다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14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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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어릴 적에 난 세상의 주인공은 나라고 생각했다. 세상은 내가 있어 존재하고 내가 세상의 중심이라고. 그런데 왜 내가 다른 사람에 대해 모르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세상의 주인공인 나는 모든 걸 다 알아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에. 그러다 나이를 먹고 변함없이 나는 주인공이지만 세상의 주인공은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세상의 많은 주인공 가운데 하나일 뿐이고 거대한 시나리오 속에서 보자면 무명씨 1일뿐임을. 

이 작품은 그런 평범한 사람들의 부딪침 속에서 깨닫게 되는 소소하고 작은 일상의 미스터리와 비일상의 흥분과 두려움을 담아내고 있다. 시즈카는 이복 오빠 겐고의 여자 친구인 유카리로부터 오빠의 행방불명 소식을 듣고 함께 오빠를 찾으러 나라로 떠난다. 하지만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던 시즈카는 유카리는 이미 죽었고 자신과 함께 오빠를 찾으러 나선 사람이 겐고와 유카리의 친구 다에코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도대체 다에코가 겐고를 찾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여행의 끝이 어떻게 될지 시즈카는 내내 불안해 한다. 그러면서 점차 시즈카는 다에코에게 동화되는 자신을 느끼게 된다. 

온다 리쿠는 어떤 방식으로든 인간의 노스탤지어를 자극한다. 그의 작품을 읽으면 자신의 기억 속에서 무엇이라도 하나 끄집어내 회상하게 된다. 나는 이 작품을 읽으며 고등학교2학년때 수학여행을 갔던 경주가 생각났다. 처음 기차를 타고 가던 기분, 창 밖으로 보이던 낯선 풍경들, 집에 돌아오던 길의 왠지 모를 서먹함까지 이십년도 더 된 일들이 눈 앞에서 주마등처럼 지나감을 느꼈다. 이 작품은 여행을 통해 주인공과 독자 모두에게 자신이 잃어버린 것에 대해, 잊고 산 것에 대해 마주보게 한다. 그것을 찾는 과정, 마주하게 되는 과정이 미스터리이자 일상 속 비일상, 현실 속 비현실이 공존하게 되는 길이기도 하다.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은 세 사람이다. 시즈카, 다에코, 겐고. 하지만 그 밖에 더 많은 인물들이 늘 그렇듯이 삶 속에서 등장했다 사라지는 것과 같이 등장을 해서 주인공도 되고 조연도 된다. 자신의 인생에서조차 자신이 주인공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살아온 여행과 비일상을 두려워하는 시즈카, 늘 당당하고 쿨함을 보여주지만 겐고에게는 여리게 느껴진 다에코, 겐고의 연인이자 다에코의 친구였던 그들의 추억 속에서만 존재하게 된 유카리, 어머니에게 받은 상처가 커서 어딘가 과장되게 자신의 미소를 포장하는 겐고. 이들의 모습은 불안전하고 아슬아슬하다. 그들은 저마다 비밀을 가슴에 품고 있다. 그 비밀이 시즈카를 통해 하나씩 밝혀진다. 시즈카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주인공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얼마나 자기 자신을 알고 있을까? 또한 얼마나 자신과 친한 사람들, 가족, 친구에 대해 알고 있을까? 아마도 죽을 때까지 알 수 없을 것이다. 그저 안다고 생각하고, 모른 채 무심하게 넘기며 살아가게 되는 것이 산다는 것이 아닐까 싶다. 온다 리쿠는 늘 이렇게 사람들의 소소한 삶에 미스터리를 부여하고 모든 진실을 토해내게 만든다. 몰라도 좋을 것들을 회피하지 말라는 것이 작가의 모토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알아도 뽀족한 수도 없고 아는 순간 그래도 이야기는 이어지고 살 사람은 살아야 하는 것인데도 말이다. 어쩌면 작가도 주인공은 모든 것을 다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지도 모르겠다. 그 모든 것을 좋든 싫든 감수하는 것이 주인공된 자의 몫이라고 말이다.  

여행과 미스터리, 과거와 현재, 그리고 이어질 이야기가 끊이지 않고 계속되는 작품이다. 인생은 토끼를 따라 이상한 나라로 여행을 떠난 앨리스의 이야기와 같다. 우리 모두는 토끼를 따라 간 앨리스다. 호기심에, 또는 그것이 최선이라 따라 가지만 어디선가 토끼는 사라지고 자기 혼자 여행을 하게 되는 것이 바로 인생이라고 작품은 보여주고 있다. 여행을 가기 전에는 설레기도 하지만 약간 두려운 것도 사실이다. 낯선 곳을 간다는 건 일종의 도전이고 모험이니까. 하지만 여행을 할 때는 매료되기도 하고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되기도 하고 여러가지 느낌을 갖게 된다. 작품은 그런 사람들이 가질 느낌을 잘 묘사하고 있고 특히 나라라는 도시를 잘 담아낸 작품이었다. 인생이라는 여행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만들고 있다. 그리고 사이 사이 수록된 작품과 연결되는 듯, 인생을 생각하게 하는 동화같고 잠언같은 짧은 이야기들도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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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09-06-09 2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찌찌뽕 저랑 별점이 같네요.. 작가의 작품치고도 범작인듯 해요.

물만두 2009-06-10 11:20   좋아요 0 | URL
여러 작품이 생각나는 수수한 작품이었어요.
 
루머의 루머의 루머 내인생의책 푸른봄 문학 (돌멩이 문고) 5
제이 아셰르 지음, 위문숙 옮김 / 내인생의책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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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 사건이 연이어 뉴스에 보도되고 있다. 그리고 학생들의 성적 비관이나 왕따 문제로 인해 자살한 사건도 계속 나오고 있다. 그런 사회 현상과 맞물려 이 작품을 읽게 되니 좀 묘한 느낌이다. 루머에 의해 자살한 여학생이 남긴 테이프가 배달된다. 그 안에는 그녀가 자살하게 된 이유들과 원인을 제공한 아이들의 이름이 거론되고 있다. 클레이는 해나를 좋아했지만 좋아한다고 고백하지 못했다. 그런 그는 무슨 잘못을 해서 이 테이프를 받게 된 것일까?

테이프를 다 듣고 다음 사람에게 전달하라는 메시지가 있다. 만약 전달하지 않는다면 복사본 테이프가 공개될 거라고 협박하고 있다. 해나 베이커는 이미 죽었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다는 거지? 클레이는 해나가 남긴 지도의 별표가 표지된 곳을 따라가며 해나의 녹음된 진짜 이야기를 듣는다. 해나의 녹음된 이야기와 그 이야기에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고 해나를 생각하며 이해하려 애를 쓰는 클레이의 이야기가 교차되며 전개된다. 테이프 한 면이 한 챕터를 이루며 전개된다. 마치 두 사람이 서로의 생각을 나누는 듯한 느낌을 갖게 만든다. 

루머로 인해 괴로워하고 따돌림에 속상해 하고 누구도 믿지 못해 친구 사귀는 것조차 겁이 나는 해나와 그 루머를 퍼트린 아이의 마음은 전혀 다르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입장이 다르듯이. 무심코 던진 돌에 개구리가 맞아 죽어도 돌을 던진 아이는 그걸 모른다. 안다고 해도 그저 그런가 보다 하고 만다. 루머에 대한 파장을 알았다면 그런 일을 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은 또 그저 생각일 뿐이다. 루머는 그래도 누군가의 입을 통해 퍼져나가고 피해자는 해나와 같은 피해자는 늘 있게 마련이니까.  

죄책감을 가져야 하는 아이들이 이런다고 죄책감을 갖는다면 애초에 그렇게 뻔뻔하게 학교 생활을 하지는 않았을 거다. 누군가 잡아줬으면 좋겠다고? 잡아달라고 말은 왜 못했니? 자살이 그것보다 쉬워서 그랬니? 살다보면 고비라는 게 있게 마련인데 그 고비를 넘지 못하고 말았구나. 그런데 난 네 아픔에 공감은 하지만 네 자살에는 공감하지 못하겠다. 아이들이 너에 대해 루머를 퍼트려서 널 괴롭혔다면 너도 마찬가지로 누군가를 믿지 않았으니까.  

테이프 속에서 들려오는 자살한 여자 아이, 자신이 좋아했던 여자 아이의 목소리를 듣는다는 건 끔찍한 일이다. 단 하룻밤을 새워 자살까지 이르는 해나의 과정을 들으며 클레이는 자책한다. 그리고 눈물을 흘린다. 우린 모두 알 수 없는 존재들이다. 해나가 아이들이 자신에게 그러는 걸 이해하지 못했듯이 이 테이프를 듣는 아이들도 해나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어쩌면 클레이와 달리 원망하는 아이들이 더 많지 않을까 생각된다. 왜냐하면 인간은 누구나 방어적이고 이기적이니까. 그래도 마음 한편으로는 클레이와 같은 아이들이 더 많기를 기대한다. 

루머를 퍼트린 아이는 재미로, 장난으로 그랬지 모른다. 그리고 루머를 하나의 힘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루머에 대해서는 피해자만의 일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걸 인식해야 한다. 누구나 피해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 하나쯤이야 라는 생각보다 내가 한 작은 말실수가 누군가를 벼랑끝에서 밀어버리는 결과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조심할 수 있는 사회 분위기가 조성되었으면 한다. '나'와 '너'는 결코 다른 인물이 아님을 루머의 루머의 루머를 통해서 이해했으면 하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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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마모에 - 혼이여 타올라라!
기리노 나쓰오 지음, 김수현 옮김 / 황금가지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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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쉰아홉이라는 나이는 내가 공감대를 형성하기 어려운 나이다. 그 나이의 평범함, 그 나이의 고민, 그 나이의 생활이라는 모든 것은 내게 십칠년이라는 시간 뒤에 겪게 될 일들이다. 내가 십칠년 전 나의 마흔 둘을 알 수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런 내가 이 책을 읽은 것은 순전히 작가가 기리노 나쓰오라는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책 소개를 봤으면서도 나는 내심 '에이, 설마. 그래도 기리노 나쓰오 작품인데 미스터리가 없겠어?’ 하는 생각을 가졌었다. 진짜 없었다. 끝까지.

쉰 아홉에 갑자기 남편이 죽고 혼자가 된 조용히 살림만 하던 평범한 가정 주부 도시코는 당황할 수 밖에 없다. 남편은 갑자기 죽고 오랫만에 미국에서 돌아온 아들은 아버지의 죽음을 애도하기보다 재산 상속을 이야기하고 딸은 딸대로 자신만의 삶을 살아가기 바쁘다. 위로해 주는 친구들의 이야기도 들을 때만 위로가 될 뿐이고 혼자 있으면 막막하게 혼자 늙게 된다는 것이 두렵기만 하다. 이때 어이없게도 남편이 자신 몰래 십년이나 바람을 피웠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도시코의 혼란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고 그 과정에서 도시코는 홀로서기를 시작한다.

책을 읽는 틈틈히 엄마에게 물을 수 밖에 없었다. 엄마는 이미 지나버린 나이, 도시코보다 열살은 더 많지만 남편이 있고 자식이 있는 엄마가 아무런 경험이 없는 나보다는 이 책에 더 공감하리라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엄마? 엄마라면 남편이 갑자기 죽었는데 자식이 재산 상속이니 같이 살겠다거나 하면 어떨 것 같아?"
"자식이 어렵다면 아무래도 도와줘야겠지만 대놓고 그러면 싫지."
"엄마는 아버지가 죽고 나서 아버지가 바람 피운 걸 알았다면 어떨 것 같아?"
"배신감 느끼겠지. 하지만 죽었는데 어쩌겠냐? 그래도 상대방 머리는 쥐어 뜯어 놓을 것 같아." 

그런데 엄마한테 질문을 하다가 느꼈다. 엄마가 아무리 나이가 많다고 해도 그 입장이 아니라면 도시코의 기분을 정확하게 이해한다거나 공감할 수는 없으리라는 것을. 작가는 도시코의 친구들을 통해 그런 점을 잘 나타내고 있다. 에이코, 미나코, 가즈요는 도시코의 고등학교 동창들이다. 에이코는 사십대라는 나이에 남편과 사별한 도시코와 같은 경험을 가지고 있지만 성격이 다르고 미나코와 가즈요는 아직 남편과 함께 잘 살고 있다. 비슷하면서도 다른 같은 나이, 같은 여성이라는 점에서도 차이가 나는 인생살이에 대한 미묘함을 평범한 인물들과의 비교속에서도 잘 나타내고 있다. 

또한 도시코 남편의 메밀국수 모임에서 만난 남자들, 나이가 든 남자들의 이야기 속에서 같이 늙어가는 사람들의 애환과 서글픔, 동지애, 나이에 지지 않으려는 몸부림을 느낄 수 있었다. 아내를 잃고 결혼 사기를 당한 남자, 도시코의 순진함을 유혹하는 플레이보이, 캡슐 호텔에서 만난 목욕탕 할멈의 이야기와 작은 인연, 그리고 커피숍에서 만난 낯선 여성과의 대화 등 작은 에피소드들이 모여 도시코라는 평범한 우리 주변의 조용한 아줌마의 심리와 변화를 담아내고 있다.

이 작품에서 가장 인상적인 면은 에이코의 호세님을 향한 열정이다. 일본 아줌마들이 욘사마에 빠지는 이유가 뭘까 생각했는데 아마도 나이가 든 뒤 찾아오는 고독때문인 것 같다. 그리고 또 하나 도시코가 남편의 애인에게 연민을 품게 되는 점이다. 죄 지은 죽은 이가 없는데 산 사람에게 독을 품어봤자 무슨 소용일까 하는 생각은 죽은 남편에 대한 그리움이 되어 돌아온다.  

마치 인생이 양파같아서 까도 까도 그 껍질이 그 껍질인 채 크기만 작아지고 눈물, 콧물 다 빼놓고 허무하게 사라지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러니 그냥 작아지면 작아진 채로, 눈물이 나면 나는 채로 그 사이 사이를 자기 나름대로 맘껏 보내보자고. 어차피 인생이란 별거 아니니까.  

책을 덮고 엄마는 얼마나 두려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에게 말해주고 싶다. "엄마, 걱정하지마. 도시코처럼 혼자 쓸쓸하게 늙지 않게 할게." 이 말이 엄마에게 얼마만큼 위로가 될지 모르겠지만 이 책을 읽은 독자들이 엄마에게 이런 말 한마디 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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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13 20: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1-13 21: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바람돌이 2009-01-14 0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리노 나쓰오가 이런 책도 썼군요. 상상이 좀 안가는... ^^

물만두 2009-01-14 09:54   좋아요 0 | URL
저는 설마했는데 진짜 이런 책을 썼더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