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와 빨강
편혜영 지음 / 창비 / 2010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편혜영을 좋아했다. <아오이 가든>을 보고 아, 이 작가 장편 꼭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떻게 읽어야 할지를 모르겠다. 가슴에 싸한 바람이 분다. 정호승 시인은 외로우니까 사람이라고 했다. 갑자기 다 읽고 그 시가 생각났다.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속을 걸어가라.  

갈대숲에서 가슴 검은 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퍼진다. 

그런데 정말 이 작품과 이 시가 어울리는 지를 모르겠다. 외로우니까 사람이 아니라 후회하니까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 같고 그렇게 사는 게 사람의 삶이 맞냐고 묻는 것 같은데 나는 거기에 그럼 어떤 삶이 사람에게 맞는 삶이냐고 반문하게 되기 때문이다. 아, 편혜영의 작품이 점점 내게 버거워짐을 느낀다. 이렇게 어렵게 쓰지 않아도 현대인의 고립과 단절에 의한 고독은 뼈가 시리게 절절히 전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다. 아직도 편혜영은 아오이 가든의 고양이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은 아닌지 그런 생각도 들었다. 

C국으로 연수를 가게 된 주인공은 C국에 오자마자 곤경에 처한다. 그 나라는 전염병이 확산되서 난리가 났고 쓰레기 처리로 골몰을 앓고 있다. 일이 꼬이느라 그가 유일하게 알고 있던 본사 직원 몰은 문제가 생겼다며 휴가라고 생각하고 기다리라고 하고 연락이 두절된다. 게다가 그가 사는 아파트가 전염병때문에 격리되어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가 된다. 그때 그는 떠나면서 집에 개를 남겨두고 왔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가방을 잃어버려 연락이 막막한 가운데 전처와 재혼하고 다시 이혼한 친구 유진의 직장에 전화를 걸어 부탁을 한다. 거기서 그는 놀라운 사실을 전해 듣게 되는데 그의 집에서 개와 전처가 살해된 걸 발견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용의자로 자신이 추적되고 있다는 사실도. 

작품이 주인공의 이때부터 가게 되는 내리막길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그 사이사이 주인공이 내보이는 사랑에 대한 그리움, 사람에 대한 그리움, 작은 것에 대한 소중함을 깨닫는 과정을 담아내고 있다. 아무리 외로워서 사람이라지만 외롭지 않을 수 있었다는 걸 알게 된 순간 후회가 밀려오고 그래봐야 소용없는 일이지만 그래도 누군가 내 이름 불러줄 이를 찾아 공중전화에 매달리게 한다. 작가는 주인공을 통해 사랑이, 때론 사람이 원하는 사랑이 작은 소통과 내편이라는 믿음에서 오는 이해라고 말한다. 젊은 시절 작은 마누라와 좋은 시절 다 보내고 늙고 병들어 조강지처를 찾은 남편의 병수발을 드는 할머니에게 밉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그 할머니 말하기를 밉다고 친구를 버리는가 하셨다. 아마도 이 주인공이, 아니 우리가 원하는 무조건적인 사랑은 이런 뭘 해도 그저 나를 받아주는 친구가 있었으면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지만 말이다. 알고 있기에 더 원하는 것 아닐까 싶다. 

이 작품은 끊임없이 쥐가 등장한다. 주인공이 고립되게 된 원인도 쥐를 잘 잡아서였다. 사람들은 쥐가 병을 옮긴다고 생각하며 쥐를 잡는데 노숙자, 부랑자가 되고 다시 하수도까지 내려가 쥐와 같은 생활을 하게 된 주인공이 결국 취직하게 된 곳이 쥐잡는 곳이다. 쥐는 이 작품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일까? 사람들은 전염병이 쥐로 옮겨지는 것이 아님을 안다. 그러면서도 쥐를 잡아달라고 하고 쥐를 잡는다. 이유는 위약효과때문이다. 쥐가 안보이면 그만큼 나아진 거라고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다. 쥐는 또한 주인공과 같다. 주인공의 내면이다. 보이는 쥐 한마리는 그의 희망이지만 안보이는 수많은 쥐는 그 안에 그도 알고 있지만 내 보이지 않는 절망이다. 인간은 그렇게 절망을 부여잡고 작고 덧없는 희망 하나에 매달려 사는 존재다. 쥐처럼 끈질기게 말이다. 

작가는 작품을 통해 붕괴하는 현대인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망가진 채 살아가는 이들. 죄의식을 던져버리고 고립된 곳에서 쥐의 끈질긴 생명력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단지 살아가기만 할뿐이라고. 주인공은 아내와 좀 더 다른 나은 관계로 발전할 수 있었는데 스스로 안좋은 쪽으로 가고 말았다. 늘 그런 자기의 쓸데없는 고집이 후회를 만든다는 걸 알면서도 후회를 할망정 달라지지 않았다. 자신이 용의자로 잡히는 줄 알고 탈출했을 때도 그는 잘못된 선택을 했다. 부랑자가 되어서도 마찬가지였고 그 안에 살아가는 또 다른 많은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앞으로도 인간은 단지 산다는 것 하나만 가지고 잘 살고 있다고 자위할 것이다. 그게 인간이다. 감히 인간이 쥐보다 낫다 말할 수 있을까. 작가의 뼈 있는 이야기에 눌려 오늘을 보내지만 내일은 나도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살거라 생각하니 그저 답답하기만 하다. 사람이 무어라고 그렇게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인지. 사람, 별거 아닌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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