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모른다
정이현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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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모를 익사체 한구가 발견되면서 작품은 시작된다. 하지만 작가는 그 사건에 빠져들 틈을 주지 않고 한 가족의 이야기로 넘어가고 있다. 또 다른 아이 실종이라는 좀 더 현실적인 문제에 집중하게 만든다. 도대체 이 미스터리한 익사체의 발견이 책의 내용과 어떤 관련이 있다는 건지, 관련이 있기는 한 것은 분명한데 작가의 무심한 시선은 깊숙히 파고들 틈을 주지 않는다. 하지만 이 사건은 이 책을 관통하는 핵심이자 '너는 모른다'를 가장 잘 반영하는 짧지만 강렬한 것이었음을 다 읽고 난 뒤 알게 된다. 그런 점에서 작가의 공들인 흔적을 볼 수 있었다.  

현대의 가족 구성은 다양하다. 현대인의 정체성 또한 다양하다. 하지만 주어진 것에 불평하는 건 자기만 손해다. 부러우면 지는 거라는 말이 괜히 유행일까. 가족을 태어나면서 내 마음에 드는 구성원으로 골라 태어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어쩔 수 없는 거에 자꾸 목을 매면 후회하는 건 본인뿐이라는 걸 등장 인물들이 질리도록 돌아가면서 되새김길하듯이 각인시키고 있다. 참, 이렇게 가족으로 만나기도 쉽지 않을텐데, 그래도 이정도면 나쁜 구성은 아닌데 불만은. 푸쉬킨의 말을 하지 않았던가.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고. 뭐 이 정도가 각각의 인물들에게 필요하지 않았나 싶은 작품이다.  

아버지란 어떤 존재여야 하는 지 알지도 못한 채 아버지가 되어 돈만 벌어다주면 자기 할 일 다하는 거라 생각하고 무슨 일을 하는 지도 모르게 은밀한 사업을 하는 아버지가 있고 한국에서 화교로 살며 눈치보는 일에 질려 마음을 드러내지 않고 무심으로 일관하는, 그러면서 대만에 있는 옛 애인과의 관계를 끊지 못하고 있는 새엄마, 부모의 이혼으로 상처입고 애정결핍증 환자처럼 사랑에 목을 매며 자학하는 인생을 사는 큰 딸, 그림자처럼 살아가려 애쓰지만 쌓이는 스트레스를 풀지 못해서 방화를 일삼는 아들, 어리지만 집안 분위기와 태생적 수줍음으로 마음을 열지 않다가 사라지는 작은 딸. 작은 딸 유지의 실종으로 이들 가족의 문제는 표면에 드러나고 그러면서 서서히 가족의 모습을 갖춰가는 아이러니한 모습을 보여준다. 

아이가 실종되어 가족 구성원은 패닉 상태에 빠진다. 아버지는 의심가는 이들이 있고 자기가 하는 일이 발각될까 두려워 경찰에 신고하지 않고 탐정을 고용한다. 엄마는 여기저기 아이의 친구에게 전화를 해보지만 정작 아이의 관심사가 무엇이었는지, 아이에게 고민이 있었는지 알지 못한다. 오빠는 그날 자신이 집에만 있었더라면 하고 자책에 빠져 전단지를 들고 돌아다닌다. 같이 살지 않는 의붓언니는 예전에 자신이 모의한 동생을 납치해서 아버지에게 돈을 뜯어내자는 것을 남자친구가 실행한 건 아닌지 전전긍긍한다. 그리고 대만에서 엄마의 남자친구가 아이의 실종 소식에 다급하게 찾아온다.  

이를 통해 작가는 독자들에게 가족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느냐고 묻고 그 물음에 깨닫기를 바라는 것 같다. 하지만 속을 뒤집어 보여준다고 한들 먼지 한톨까지 다 알 수는 없는 일이고 다 안다고 무조건 좋은 일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가족이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가족이란 사랑하는 존재들이다. 믿음의 가장 최소 단위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남자와 여자는 사랑을 해서 결혼을 한다. 그렇게 믿자구. 그 사랑을 토대로 아이를 낳고 기른다. 사랑과 믿음으로 부부는 하나가 되고 부모와 자식은 서로의 울타리가 되어 준다. 서로가 서로에게 맨 몸을 보여주고 자신의 등을 보여주며 무방비 상태임을 언제나 드러낼 수 있는 이들이 가족이고 그렇게 쉴 수 있는 곳이 가정이어야 한다. 그런데 이들은 너무 많은 갑옷을 입고 보여주지 않은 채 그 갑옷에 짓눌리기고 있다. 자신이 갑옷을 입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말이다. 

작품은 '너는 모른다'로 흠뻑 젖어 있다. 너는 모른다고 등장 인물들은 저마다 외친다. 그렇게 외칠거면 알 수 있게 속 좀 보여주고 살 일이지 너는 나를 모른다고 하소연만 하고 있으니 답답하기만 하다. 그러는 너는 나를 알려고 해봤냐고 묻고 싶다. 자신도 보여주지 않고 남도 알려 하지 않는 대화가 단절되고 소통부재를 겪고 있는 가족이 불쌍하다. 이해와 연민은 가슴에서 빼놓고 무심함과 상처주기만 남은 사람들처럼 가족이 남보다 못하게 살고 있는 모습이라니. 어떻게 어린 아이가 전화할 수도 없게 만드는 지. 적어도 엄마, 아빠, 언니, 오빠라면 위험에 빠졌을 때 전화할 수 있는 이들이어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 이들은 아직도 모르는 것만 같다. 안타까운 일이다. 

작품 안에는 가족 말고도 생각해볼 문제들이 내제되어 있다. 우선 우리는 이미 단일민족이 아니었다고 말하던 어떤 사회학자였나 인권운동가가 생각나는데 그의 주장의 근거가 바로 화교의 존재였다. 화교의 역사는 잘 모르겠지만 백년은 넘게 우리나라에 있지 않았나 싶다. 그들은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하지는 않았지만 우리가 이 땅에 살게 한 이들이고 6.25전쟁이 일어났을때 이 땅을 위해 목숨 걸고 같이 싸운 같이 산 사람들이다. 하지만 우린 그들은 늘 이방인 취급했고 그들의 존재를 무시했다. 다문화 가정이 늘어난다고 이제와서 단일민족에 대한 재고가 필요하고 인식전환이 필요하다고 말하지만 우린 진작에 단일민족이라는 꼬리를 버렸어야 했다. 우리 이웃에게 상처를 주고 그들을 배척하기 위한 명분으로 이용되는 단일민족이라면 그것은 추한 우리들의 자화상일뿐이다. 옥영과 밍의 대만인도 한국인도 아니게 되어버린 그들의 모습속에서, 유지를 왕따시키게 만드는 부모들의 모습속에서 잔인함을 본다.  

또 한가지 이 작품을 통해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장기 기증에 대한 문제다. 아픈 내 자식은 소중하다. 하지만 내 자식 살리자고 남의 자식이 어찌되든 상관없어서는 안된다. 어떻게라도 좋다는 건 정말 아니다. 모른 척 하면 안된다. 그로 인해 음성적 매매와 납치, 살인이 일어나기도 한다고 한다. 가난한 나라에서는 그렇게라도 먹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고 지켜주지 않는 어린 생명들은 누군가에 의해 끌려갈 수도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영화로도 나왔었다. 아픈 딸을 위해 마춤 아이를 갖고 그 아이를 낳아 언니에게 기증을 해줬으면 하고 부모는 바라지만 아이는 거부한다는 내용의 <마이 시스터즈 키퍼>를 보라. 그런 부모의 행동이 아픈 딸을 정말 잘 알고 한 행동인지를. 순리를 거스르는 일은 옳지 않다. 이건 너는 모른다는 한마디로 끝날 일이 아니다.  

진작에 알았더라면 움추리지 않았을텐데 진짜 시련이 닥쳐야 인간은 삶에 대해 생각을 하게 된다. 그동안 바라던 것들이 얼마나 덧없고 공허한 것이었는지 깨닫게 된다. 하지만 그런다고 달라지는 것 또한 없다. 산다는 건 그저 사는 것일뿐이다. 고슴도치처럼 제 몸을 부풀려 가시를 세워봐야 상대방이 상대를 안하면 헛수고라는 걸 민망해하며 알게 되듯이 그런 것이다. 인간관계의 본질을 따져봐야 별거 없다. 그래봐야 부부는 부부고 부모 자식간은 부모 자식이고 형제는 형제다. 그 굴레가 굴레든 축복이든 덫이든 관계는 살면서 잘 만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인간의 관계에서 절대적 고립과 단절이란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좋게 생각하며 살기를. 인간 관계 꼬아봤자 나만 피곤하다. 너도 모르지만 나는 더 모르지 않는가.   

처음 사건은 마지막에 와서야 의문이 풀린다. 하지만 그 의문은 또 다른 의문을 낳는다. 이들의 시련이 과연 진짜 시련이었을까 하는. 아버지는 이용을 당했다. 그는 그것을 여전히 아내와 아이들에게 말하지 않는다. 경고조차 하지 않는다. 만약 그가 경고만 했더라도 사건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이게 끝일지 시작일지 책을 덮은 나는 모르겠다. 위험한 이들이 언제 어디서 나타나게 될지 모를 일이니까. 그러니 안타깝지만 이들의 <너는 모른다>는 현재진행형이고 독자인 나는 걱정이 될 뿐이다. 거기에 무심한 이들은 밍에 대해 궁금해하지도 않고 있다. 정말 난 이들을 모르겠다. 언제까지 너만 모른다고 할지를. 나만 모르는 걸까. 작가에게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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