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이면 폴란드의 영화감독 크쥐시토프 키에슬롭스키(1941-1996)의 사망 10주년이 된다. 그의 이름은 'Krzysztof Kieslowski'로 표기되는데, 몇 가지 이형들이 있었지만 현재는 '크쥐시토프 키에슬롭스키(키에슬로프스키)'라고 읽어주는 게 일반화된 듯하다. 여하튼 그 이름은 타르코프스키란 이름과 함께 나를 숙연하게 만드는 이름이다. 지난 90년대 내가 접할 수 있었던 동시대 감독으로서 그는 언제나 영감과 경탄의 원천이었다. 그보다 10년 전에 죽은 러시아 감독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가 영화가 어떻게 시의 깊이에 도달하는지를 보여주었다면(내년이면 사망 20주년이군!), 키에슬롭스키는 영화가 어떻게 철학적 사유를 감당할 수 있는지를 시사해주었다. 물론 겸손했던 그 자신은 영화라는 장르 자체가 문학에 비해서 얼마나 바보 같은 것인지 하소연하기도 했지만.

키에슬롭스키의 영화로 내가 제일 처음 본 건 <베로니카의 이중생활>(1991)이었던 듯하다(원제는 '베로니크의 두 가지 삶'). 기억에는 허리우드극장에서였던 듯한데, 연거푸 두 번을 보았고 이후에도 개봉관에서 한번 더 본 영화. 이후에 비디오로도 보고(몇년 전에 교보문고 지하도에서 구입한 중고 비디오는 유감스럽게도 정품이 아니라 복사품이어서 화질이 떨어진다. 2,000원짜리도 안 될 걸 8,000원이나 주고 샀었다! 환불하려고 벼르다가 끝내 교보쪽으로 다시 갈 일이 없어서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영화 자체도 매혹적이었지만, 주연을 맡았던 이렌느 야곱(1966- )의 신비한 매력도 강한 인상을 남기는 영화. 물론 즈비그뉴 프라이즈너의 음악도 귓가를 오래 맴돈다(나는 영화속 가상의 작곡가인 '반덴 부덴마이어'의 음반을 사러 돌아다니기도 했었다!).

베로니카의 이중 생활베로니카의 이중 생활베로니카의 이중 생활레드

이렌느 야곱의 모습은 이후에 '삼색' 시리즈의 <레드>(1994)에서도 다시 만나볼 수 있었는데, 영화 관람 후에 얻는 포스터를 상당히 오랫동안 벽에 붙여놓았던 기억이 있다. 이후에 '삼색' 시리즈의 시나리오 영역본과 키에슬롭스키의 대담집 등을 구하게 되었고, 며칠 전에는 그에 관한 새로운 연구서들이 나와 있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 중 안네트 인스도르프(Annette Insdorf)의 연구서 <두 가지 삶, 두 번의 기회(Double Lives, Second Chances)>(1999)는 막바로 구할 수 있었는데, 흥미로운 건 이렌느 야곱(Irene Jacob)이 짤막한 서문을 붙이고 있는 것. 책 중간에 저자가 키에슬롭스키와 함께 찍은 사진들도 들어가 있는 걸로 보아 이렌느 야곱과도 친분이 있었던 듯싶다. 키에슬로프스키의 한 인터뷰를 에피그라프로 하고 있는 이 서문을 옮겨보면 이렇다(아래는 책 표지. 저자는 콜럼비아대학 영화학과 교수이며 <영화와 홀로코스트> 등의 저작을 더 갖고 있다): 

세상은 휘황한 불빛들과 바쁜 걸음걸이, 코카콜라, 새로운 차... 이런 건만은 아닙니다. 또다른 진실이 있습니다... 내세에서요? 맞습니다, 틀림없이. 좋은 것일 수도 혹은 나쁜 것일 수도 있겠죠. 나는 모르겠어요. 하지만... 뭔가 다른 게 있을 겁니다.”(<텔레라마>지와 인터뷰에서 키에슬롭스키)

-크쥐시토프가 건네준 대본을 매번 다 읽고 나면 나는 항상 수수께끼들에 대면하곤 했다. 왜 그녀는 이 나무를 만지는 거지? 이 구두끈에서 그녀는 무얼 찾는 거야? 그녀는 왜 ‘마법 구슬’의 굴절된 빛을 통해서 풍경을 바라보는 걸까?(<베로니카의 이중생활>에서 주인공은 투명한 플라스틱 공 모양의 장난감을 가지고 논다. 그것은 바닥에 튕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아주 놀라운 방식으로 빛을 분산시킨다.)   

-현장에서 내가 크쥐시토프에게 그 장면(scene)에 대한 아이디어가 뭐냐고 물어볼 때면 그는 대개 이렇게 대답했다. “그건 내가 너한테 듣고 싶은 건데. 그게 나에겐 더 흥미로울 거 같아.” 그래서 내가 장황한 설명을 할라치면 그는 이렇게 가로막았다. “오호, 이렌코, 그건 너무 복잡해. 좀더 간단하게 말해주지 않을래요?”

-그는 현장에서 어떤 장면에 대한 자신의 아이디어가 무엇인지 설명하는 걸 꺼려했다. 대신에 가능성을 열어놓은 채로 계속 발견하고자 했다. 이미 정해져있거나 틀지어져 있는 게 아닌 뭔가 새로운 해석을 말이다. 

 

-좋은 문학에서와 마찬가지로 크쥐시토프 키에슬롭스키의 영화들은 열려 있다. 그래서 다양한 층위에서 읽힐 수 있다. 하지만 그건 우리가 자기 안의 ‘마법구슬’을 사용하여 우리의 해석과 재해석이라는 굴절된 빛을 통해서 그것들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경우에만이다. 몇 년이 지나고 나서도 나는 여전히 궁금해하곤 한다. “왜 그녀는 그 나무를 만진 걸까?”... 그저 그 질문을 열어놓을 뿐이다.


-안네트 인스도르프는 이 멋진 연구서에서 크지시토프 키에슬롭스키 전작(全作)에 대한 통찰력 있는 성찰을 제공한다. 매 작품에 대한 해석의 가능성들을 넓혀놓으면서. 나는 그의 영화들과 인터뷰들을 새로운 호기심을 가지고 다시 방문해보았다. 내가 알지 못했던 아주 멋진 나무들을 발견할 수 있었는데, 안네트는 우리가 그 나무들을 만져볼 수 있도록 친절하게 안내해준다.

 

 

 

 

루이 말의 <굿바이 칠드런>(1987)에 피아노 선생으로 처음 출연했었던 이렌느 야곱이 <베르니카의 이중생활>에 캐스팅된 것은 우연이었다. 키에슬롭스키의 증언에 따르면, 애초엔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의 앤디 맥도웰을 염두에 두었다고 한다. 하지만, 스케줄 때문에 성사되지 못했고, 나중에 <블루>의 주연을 맡게 되는 줄리엣 비노쉬 역시 <퐁네프의 연인들> 촬영 때문에 참여할 수 없었다고. 그때 눈에 띈 것이 이렌느 야곱이며, 그녀는 이 영화로 칸느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다. 이후에 안토니오니의 <구름 저편에>(1995)와 <오셀로>(1997) 등의 영화에 출연한 이렌느 야곱을 더 만나볼 수 있었지만, 그녀의 최고작은 아무래도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으로 남게 될 듯싶다. 키에슬롭스키가 세상을 뜬 이상 말이다.

 

 

 

 

<레드> 이후에 키에슬롭스키는 감독직을 그만두었지만, 와병 중에도 <신곡> 3부작에 대한 각본 작업을 진행중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아마도 키에슬롭스키판 <십계>(<데칼로그>)에 이어서 영화사에 남을 만한 유산이 되었을 텐데, 키에슬롭스키판 <신곡>을 끝내 만나볼 수 없게 된 것은 안타깝다. 원래 TV용 시리즈로 제작되었던 <데칼로그>는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과 <살인에 관한 짧은 필름> 두 편이 극장 상영판으로 따로 제작되기도 했다(두 버전은 런닝타임이 다르며 결말도 약간 상이하다). 

김용규 선생의 <데칼로그>(바다출판사, 2002)가 이 시리즈에 대한 유일한 참고문헌이다. 철학자/신학자로서 저자가 <데칼로그>의 핵심적인 전언들을 짚어내는 데 있어서 영화비평가들보다 더 깊이 들어갈 수도 있다는 걸 책은 입증해준다. 저자는 <타르코프스키는 이렇게 말했다>(이론과실천, 2004)도 내고 있는데, 이러한 저작들은 한편으론 한국 영화학계의 태만을 돌이켜보게 한다(하긴 한국영화사를 정리하는 데만도 일손이 모자랄 테니). 

지젝의 <진짜 눈물의 공포>(울력, 2004)는 영화학에서의 '이론'과 '포스트-이론' 사이에 지젝이 개입하는 방식을 보여주는 책인데, 그가 키에슬롭스키를 분석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은 반가우면서도 흥미롭다. 읽기에 만만찮은 책이지만, 읽을 만한 번역이며 충분한 보상을 제공한다.    

 Kieslowski on KieslowskiThe Films of Krzysztof Kieslowski: The Liminal Image

키에슬롭스키에 대한 기본적인 문헌은 <키에슬롭스키가 말하는 키에슬롭스키(Kieslowski on Kieslowski)>(1995)이며, 가장 최근에 나온 연구서는 Joseph G. Kickasola의 <키에슬롭스키의 영화세계(The Films of Krzysztof Kieslowski: The Liminal Image)>(2004). 나는 이 책이 물 건너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05. 11.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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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네파벨 2005-11-23 18: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은 제가......가장 인상깊게 본 영화...(가장 매혹적이었고 가장 아름다웠고 가장 좋아하는...영화) 중 몇손가락 안에 꼽힐겁니다. (1위 2위 3위라고 순위를 정할 수는 없지만....)

삼색 시리즈 중에서도 레드를 단연 좋아했죠.

이렌느 야곱 역시.....너무너무 좋아요...

이 두 영화 말고...또 이렌느야곱이 주연한 키에슬롭스키의 단편 영화를 한 편 보았는데 제목은 기억이 잘 안나네요...
대학시절...정말 좋아하던 배우와 감독입니다.

이 주제에 대한 로쟈님의 글...
싼타할아버지 선물을 기다리는 아이의 맘으로 기다리겠습니다!

blowup 2005-11-23 18: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베로니카의 이중생활>과 <세 가지 색-레드>의 이렌느 야콥이로군요. 어여어여. 글 올려주세요.

로쟈 2005-11-23 18: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키에슬롭스키 연구서 하나를 복사했는데, 이렌느 야곱이 짤막한 서문을 썼더군요. 제가 좋아했던 감독과 배우이기도 해서, 그걸 옮겨놓으려고 합니다. 대단한 글은 아니랍니다.^^

파란여우 2005-11-23 2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베로니카의 이중 생활...훈늉한 영화이죠
참고로 제 영세명이 뭐게요?^^

이네파벨 2005-11-23 2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마도 베로니카??? ^^

mannerist 2005-11-23 2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망자2'를 아무 생각없이 보다가 눈 헉- 뜨고, 내내 통탄했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쿨럭;;;;

검둥개 2005-11-23 2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 전 이 영화를 어제 케이블에서 잠깐 봤어요. 십 년만에 다시 보니 감회가 새로웠는데 이렌느 야곱이 키에슬로브스키에 대해 쓴 글이 있다구요? 무척 궁금합니다. ^^ 이렌느 야곱은 <오델로>에서도 괜찮은 연기를 했죠.

이네파벨 2005-11-25 1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저도 삽입된 곡들이 너무 맘에 들어서..사운드트랙 앨범을 꽤 힘들게 찾아다니다 구매했던 기억이 납니다.(멜로디가 머리속에 떠오르네요. 배경으로 깔리던 곡들...베로니크가 노래한 합창곡....)

음...앤디 맥도웰이나 줄리엣 비노쉬가 연기한 베로니카는 상상하고싶지도 않네요.

배우의 이미지는 맡은 배역으로 각인되는 것이긴 하지만...
앤디 맥도웰은 신비스럽지도 순수하지도 않고 무엇보다 너무나 미국 냄새가 풍기잖아요...(세번의 결혼식...에 나온 그 이미지가 딱!)
줄리엣 비노쉬도 나름 개성있고 신비(?)스럽기는 하지만 그 개성과 신비감을 지나치게 돌출시키고 강요하는 타입이라 별로....(거칠게 말해 오버스럽다고 할까요..)

......
키에슬롭스키 감독이 벌써 죽은지 10년이 되었군요...(사실 죽은지도 몰랐지만..)
아름다운 우주 하나가 영원히 사라져버렸군요....

검둥개님, 케이블에서 이 영화를 해주었단 말이죠? 놓치다니....너무나 안타깝네요...지금 찾아보니 DVD 타이틀도 국내에 출시되지 않은것 같아요...TV에서 이걸 보셨다니 그저 부러울 뿐...ㅠ.ㅠ

2007-02-28 02:00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