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와 문학사이' 이번주는 <바람의 사생활>(창비, 2006)로 잘 알려진 이병률 시인 편이다. 평론가 신형철씨는 그 시집의 해설을 쓴 인연이 있기도 하다(요새 가장 많은 시집 해설을 쓰고 있는 평론가가 아닐까 싶다). 그만큼 시인의 속내에 정통하다는 뜻도 되겠다. 최근 한 술자리에서 평론가에게 물으니 '작가와 문학사이'의 연재가 25회로 예정돼 있다고 한다. 그리고 열 명을 다루기로 한 시인은 이제 한 명 남았다고. 이병률 시인은 그 아홉번째 시인이다.

경향신문(07. 05. 19) [작가와 문학사이](18)이병률-버티고 버티다 쓰는 ‘슬픔의 시’

모든 감정의 끝에는 슬픔이 있다. 기쁨·증오·분노·사랑이 그 극단에 이르면 인간은 결국 슬퍼진다. 이것은 소설가 은희경의 말이다(‘비밀과 거짓말’). 빼어난 시가 노래하는 것들이 그 ‘극단에서의 슬픔’이다. 한 순간의 달뜬 감정을 함부로 발설하지 않는다. 그냥 좀 내버려 두었다가, 그것이 슬픔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내가 내 마음의 세입자나 되는 듯 적요해질 때, 그때 쓰는 것이다. 그러니 정말 어려운 일은 시를 쓰는 일이 아니라 시를 쓰지 않고 버티는 일이다. 1967년에 태어나 1995년에 시인이 된 이병률은 버티고 버텨서 슬픔이 눈물처럼 투명해질 때 겨우 쓴다. 애이불상이라 했다. 도대체 슬프지 않은 시가 없으나 그 어느 슬픔도 비천하지가 않다.

“그러기야 하겠습니까마는/ 약속한 그대가 오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날을 잊었거나 심한 눈비로 길이 막히어/ 영 어긋났으면 하는 마음이 굴뚝 같습니다/ (…)/ 그래도 먼저 손 내민 약속인지라/ 문단속에 잘 씻고 나가보지만/ 한 한 시간 돌처럼 앉아 있다 돌아온다면/ 여한이 없겠다 싶은 날, 그런 날/ 제물처럼 놓였다가 재처럼 내려앉으리라/ 햇살에 목숨을 내놓습니다/ 부디 만나지 않고도 살 수 있게/ 오지 말고 거기 계십시오”(‘화분’에서)



첫 번째 시집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 한다’에서 골랐다. 가장 아름다운 시라서가 아니라 가장 그다운 시여서다. ‘화분’이라는 제목의 시에서 “제물처럼 놓였다가 재처럼 내려앉으리라/ 햇살에 목숨을 내놓습니다”라는 구절을 얻었으니 그것만으로 이미 넉넉하지만, “부디 만나지 않고도 살 수 있게/ 오지 말고 거기 계십시오”라는 구절이 있어 또 한번 철렁한다. 그의 아름다운 시들은 대개 작별을 노래한다. 제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이별(離別)이 아니라 스스로 힘껏 갈라서는 작별(作別)이다. 이것은 이를테면 “애인이여/ 너를 만날 약속을 인젠 그만 어기고/ 도중에서/ 한 눈이나 좀 팔고 놀다 가기로 한다”(‘가벼히’)고 노래한 미당(未堂)의 달관과는 다르다. 만나고 헤어지는 일에 그토록 지극하기 때문에, 상처를 주고받는 일에 그토록 엄결(嚴潔)하기 때문에, 이렇게 미리 작별을 노래하게도 되는 것이다.

“이 계절 몇 사람이 온몸으로 헤어졌다고 하여 무덤을 차려야 하는 게 아니듯 한 사람이 한 사람을 찔렀다고 천막을 걷어치우고 끝내자는 것은 아닌데// 봄날은 간다// 만약 당신이 한 사람인 나를 잊는다 하여 불이 꺼질까 아슬아슬한 것도, 피의 사발을 비우고 다 말라갈 일만도 아니다 별이 몇 떨어지고 떨어진 별은 순식간에 삭고 그러는 것에 무관하지 못하고 봄날은 간다” (‘당신이라는 제국’에서)



두 번째 시집 ‘바람의 사생활’에서 골랐다. 가일층 처연한 작별의 노래다. 지금도 어디선가 사람들은 작별하고 있겠다. 한 사람이 한 사람을 찌르기도 하였겠다. 당신이 나를 잊어가기도 하겠다. 그렇다고 무덤을 차릴 일도, 천막을 걷어치울 일도, 피가 말라 생을 접을 일도 아니다. 시인은 자꾸 그럴 일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지만, 이것은 마치 그 일들을 이미 다 겪어낸 이의 말처럼 들린다. 그럴 일이 아닌 줄 알지만 그렇게 되고 마는 것이 삶이라고 말하듯 그렇게 봄날은 가고 ‘당신이라는 제국’ 안에서 우리는 이렇게 속수무책이다. 실로 주술적이라고 해야 할 이 시의 매력은 아무리 되풀이 읽어도 탕진되지 않는다. 그의 두 번째 시집에는 이런 절창들이 수두룩하다. 그는 지극히 보편적인 감정들을 지극히 개성적인 언술로 노래한다. 이것이 이병률 시의 힘이다.



그는 여행에 들린 사람이기도 하다. 십여 년의 여행 기록을 모아 산문집 ‘끌림’을 펴내기도 했다. 로망을 팔아먹는 흔해빠진 여행 산문집이 아니다. 그 책은 오히려 범속한 나날들을 지극하게 감당한 사람에게만 홀연히 떠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진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그의 시들도 결국은 같은 말을 하고 있다. 지금 내가 떠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일상에 충실하기 때문이 아니라 일상에 충분히 지극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내가 지금 홀연히 떠나면 그것은 그저 무책임일 뿐이다. 사람이 만나고 헤어지는 일도 그와 다르지 않다. 이러구러 봄날이 다 가는 동안 우리는 끝내 이 서울을 떠나지 못했구나. 님은 삐쳐 있고 꽃들은 진다.(신형철|문학평론가)

07. 05. 19.

P.S. 언젠가 우연히 시인이 운전하는 차를 탄 적이 있다. 운전도 베테랑이었지만 매너도 일품이었다. 소위 '방어운전' 말이다. 그러고 보면, 시인은 운전 또한 버티고 버티면서 했던 듯싶다. 지난달인가 알라딘에 인터뷰 동영상이 뜨기도 했었으므로 굳이 나만 아는 체 할 일은 아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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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issance 2007-05-19 19: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순전히 비평에 이끌려 이병률의 책들을 바구니에 담습니다. 신형철이 개척한 이 비평형식! 독자입장에서 여러모로 고맙군요. 무엇보다 고답적인 비평용어와 난삽한 문장들이 말끔히 사라진 비평이란 점에서 그렇습니다. 모처럼 읽히는 비평을 쓸 줄 아는 평론가가 탄생했어요. 정말이지 그의 시에 대한 감식안은 인정할 수 밖에 없네요.(개인적으로 비평가의 급수는 시 비평에서 결정된다는 편견 아닌 편견을 가지고 있답니다^^) 충분히 주목받을 만해요. 그의 비평집은 언제쯤이나 나올려나. 오랜만에 비평집 출간 소식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로쟈 2007-05-19 2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창 물이 오르고 있는 비평가이죠. 올여름에는 첫비평집이 나온다고 하니까 기대해보시길...
 

'거대담론의 몰락', 아니 그 불가능성은 리오타르에 따르면 '포스트모던의 조건'이기도 하므로 무슨 뉴스거리는 아니겠다. 다만 우리의 경우엔 약간의 연착륙이 있는 듯하다. '평화-인권' 같은 거대담론이 "지나치게 거시적이고 추상적"이라는 최장집 교수의 비판이 최근에서야 제기되는 걸 보면. 마침 얼마전 김우창 교수도 비슷한 칼럼을 실은 적이 있기에 모아놓는다.  

한겨레(07. 05. 17) "평화·인권같은 거대담론 보통사람 삶에 기여 못해”

최근 현 정부 시기 들어 민족주의 과잉을 경계한 논문을 발표한 최장집 고려대 교수가 이번에는 “평화와 인권과 같은 거대담론”을 대상으로 비판적 논의를 펼쳤다. 최 교수는 18~19일 전남대 5·18연구소 등이 전남대에서 여는 국제학술대회 ‘5·18과 민주주의, 그리고 한반도 평화’에 발표할 논문 ‘5·18과 한국의 민주주의’에서 “(평화와 인권과 같은 거대 담론들은) 구체적 삶의 현실을 정치의 중심이슈로 두는 데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그는 거대 담론들이 “보통 사람들의 실생활에 직접 기여했고, 할 수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며 “거대담론은 삶의 현실에서 발생하는 미세하고 구체적인 문제를 다루기에는 지나치게 거시적이고 추상적”이라고 규정했다. “한반도에서의 평화는 그 어떤 이슈보다 중요하지만 전쟁이 발생할 가능성을 일상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현실이기보다 이데올로기일 경우가 많다.”

최 교수는 “평화의 이슈가 진보파와 보수파 사이에, 대북강경파와 온건파 사이에 레토릭(수사)의 수준에서 격렬한 대립을 불러일으킬지는 몰라도, 실제 이들의 정치갈등이 평화 대 전쟁이라는 양자택일을 둘러싼 것일 수는 없다”며 “평화의 이슈는 (…) 과장된 현실에 기초한 갈등이 되기 쉽다”고 규정했다. 이런 그의 주장은 과도한 민족주의는 사회내 갈등이 정당히 자리잡을 수 없도록 해 민주주의 발전에 부정적 영향을 끼친다는 기존 견해를 좀더 구체화한 것으로 해석된다.

최 교수는 또 이런 거대 담론은 “위로부터 정치엘리트들에 의한 대중동원의 성격을 띤다”면서 우리 정치의 지역정당 구조와 연결시켰다. 그는 “광범위하고 전국적이고 일반적인 이슈를 정치화하는 데 적합하지 않은” 지역주의 정당과 정치인들이 전국적 수준에서의 대중동원을 위해 이런 거대 담론들을 끌어들였다고 했다. 최 교수는 “운동에 의한 민주주의 실천은 민중을 국가에 대한 소극적 비판자 이상의 역할을 갖지 못하게 하는 효과를 낳는다”며 “정당이 그 중심 수단이요, 행위자가 되는 민중 참여”의 정당성을 강조하면서 글을 마무리했다.

정대화 상지대 교수는 같은 행사에 발표할 논문 ‘민주화 과정에서 민간권력의 형성과 역할’에서 “민주주의가 지역주의에 의존하는 무능력한 정당의 존재로 위기에 직면하게 됐다”는 최 교수의 기존 견해를 반박했다. 그는 6월 항쟁 이후 낙선운동과 같은 시민적 정치개입을 통한 정치적 세대교체가 이뤄졌고, 민주화 운동 세력의 지속적인 정당정치 참여, 노동운동의 정치세력화에 이른 ‘진전’ 상황들을 열거하며 “정당정치의 발전을 위한 노력이 적지 않았음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정 교수는 따라서 “문제의 핵심을 (…) 현상적으로 드러나는 정치권과 정당에서 발견할 것이 아니라 민주화 과정에서 생존을 보장받고 지금까지도 권력을 행사하고 있는 구세력의 지역주의적이고 수구적인 권력정치에서 발견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대응도 민주화와 개혁을 저해하는 구세력의 청산에 맞춰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여기에 이르는 ‘권력 구성’의 두 가능성으로 △민주세력의 연대를 통한 새로운 권력의 창출 방안 △노동운동과 시민운동의 관계 복원과 한계 극복을 통한 정치 지평의 확보를 제시했다.

이번 학술대회에는 이밖에 브루스 커밍스 미국 시카고대 교수(주제: 5·18과 한국 현대사)와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동아시아와 남북한), 윤영관 서울대 교수(21세기 세계변화와 남북관계의 전망), 이해영 한신대 교수(한-미 자유무역협정과 민주주의) 등이 발표자로 나선다. (강성만 기자)

 

경향신문(07. 05. 10) 정책의 여러 차원

다음 대통령 선거전과 관련하여 얼마 전 어느 회의에서 대통령 후보자가 어떤 정강 정책을 내놓아야 하느냐에 대하여 사람들에게 질의서를 작성 배부하는 문제가 나왔다. 예상되는 정책안은 남북관계, 경제성장, 고용확대, 빈부격차, 입시제도, 부동산과 주택, 환경오염 등등에 관한 것이었다. 이러한 것들이 정책의제의 범주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은 맞는 말이다. 그러나 되풀이되는 이 의제들에 대하여 유권자들은 피로감을 느낄 가능성이 없지 않다.

모든 것이 매체적 흥밋거리가 되는 시대에 있어서, 되풀이되는 주제는, 그 중요성에 관계없이, 사람들의 흥미를 불러일으키기 어렵다. 그러나 그렇게 되는 참 이유는 이러한 항목에 대한 우리 정치계의 정책이 대체로 추상적인 신념 표현의 차원에 머물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들에게 정책의 중요성은 그것이 현실적인 의미를 갖는다는 것일 터인데 큰 이야기가 현실로 쉽게 번역되지 못하는 것이 지금까지의 경험이다.

특히 생활 현실과 관련해서 그렇다. 교육 문제에 있어서, 평준화냐 아니냐, 3불이냐 아니냐, 또는 다른 어떤 신앙에 따른 논쟁이 누적되어 있는 본질적인 교육문제를 해결해줄 것으로 믿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의료보험 같은 것을 볼 때, 제도는 그 관료적 외형을 넘어 세부에 대한 구체적 주의가 없이는 인간적 내용을 갖추지 못한다는 것을 생각하게 한다. 우리의 의료 제도 안에서 충분히 인간적이고 전문적인 배려가 있는 치료를 받을 수 있다고 말할 사람이 많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그렇다하더라도 우리 보험이 의료비용 중 잔돈이 아니라 큰 돈 걱정을 없애준다고 말할 수 있을까?

원칙 천명 차원에서의 합의를 끌어내는 처음의 단계를 지나면, 문제는 실제로 그것이 현실의 삶을 어떻게 더 편안하게 해주느냐 하는 것이다. 앞에 언급한 회의에서는, 거창한 정강이나 정책의 천명이 아니라 실제로 국민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지극히 구체적으로 조사하여 그것을 정책 구상의 자료로 삼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어떨까 하는 제안이 나왔다. 학교 교복 값을 내린다든가, 건축현장의 중첩된 하청제도를 개선한다든가--이런 작은 요구들을 알아보면 어떨까 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으로 먹고 입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정치의 중점이 거창한 구호로부터 일상 현실로 돌아오는 데 도움을 주는 일이 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며칠 전에 끝난 프랑스의 대통령 선거 기간 중, 결선 투표 직전 두 후보의 텔레비전 토의가 있었다. 외신에 소개되었던 내용을 보면 우리로서는 정책 토의가 지극히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차원에서 행해지는 데에 놀라게 된다. 가령 사회당후보 세골렌 루아얄 후보의 교육 관련 제안에는 중학교의 학생수를 학교당 600명, 한 학급당 17명이 넘지 않게 하는 것과 같은 방안이 있었다. 대통령에 당선된 민중운동연합(UMP)의 니콜라 사르코지 후보의 제안에는 미망인의 연금을 높이고 의료보험에서 안경비용을 부담하게 한다는 것이 있었다. 두 후보의 토론 과정 중 가장 열띤 순간은 장애자의 교육문제를 논할 때였다. 장애자 교육을 정상 교육에 통합하는 인도적 노력이 있어야 한다는 사르코지 후보의 말을 위선적이라고 루아얄 후보가 감정적으로 비난하면서 날카로운 말이 오고 갔다.

많은 나라에서 주택문제는 자주 등장하는 사회문제이다. 프랑스 대통령 후보들의 토의에서는 임대주택의 세입자가 세를 내지 못하였을 때 임대인과 임차인을 금전적으로 어떻게 보호할 것인가, 실업 등으로 세가 미불이 될 때 국가에서 보조금을 줄 것인가, 임대계약을 갱신하는 경우 임대료 인상 금지기간을 얼마로 할 것인가, 젊은 가구주들의 주택 확보에 어떤 사회적 보조가 필요한가 등의 문제가 거론되었다. 조금 큰 제안으로는 두 후보는 다 같이 투기 방지 조처를 해야 한다는 데에는 동의했지만, 루아얄 후보는 매년 공공주택 12만가구를 짓고 새로운 건축물에는 친환경적인 시설로서 조명과 난방에 태양열이나 풍력 등의 장치를 설치하게 하여야 한다는 제안을 했고 이에 대하여, 사르코지 후보는 대체로 유보적인 입장을 표명하였다. 그의 생각은 주택문제 해결에는 금융 지원이 더 적절하다는 것이었다.

세부적이라고 하여 정책에 근본적 입장의 차이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사르코지 후보가 당선된 것은 주 35시간 노동시간 변경, 감세, 정부 기구 축소 등을 통해서, 시장경제 체제를 강화하겠다는 것을 국민이 받아들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이것은 반드시 시장 자체를 절대시하는 것이라기보다 경제를 활성화하여 고용과 청년실업 문제 등을 해결하겠다는 사회정책적 고려에 기초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두 시간 반 이상 계속된 대선 후보들의 토의의 특징은, 내놓은 정책들이 극히 구체적이라는 것이었다. 토론의 내용들이 지나치게 세말적이라는 논평도 없지 않았지만, 신문에 실린 논평들에도 예산이나 비용, 사회적인 부작용 등을 면밀하게 계산하는 비판적 검토들이 있었다.

우리나라의 선거전에서 논의되는 정책의 추상성과 이번 프랑스 대통령 선거전에 나왔던 정책의 구체성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지만, 그것은 두 나라가 처해 있는 처지가 다른 데에 연유한다. 우리의 정책 의제들이 거창하고 추상적인 것은 우리의 문제가 거창하고 추상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필요한 것은 거창하고 추상적이면서도 구체적인 방안들이다. 이제는 우리의 문제들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야 할 단계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구체적이라는 것은 반드시 정책이 한 사안에 한정되어야 한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정책은 구체적이면서도 사회 일반에 현실적 반향을 일으키는 것이라야 한다. 어떤 구체적인 정책은 단발로 끝난다. 또 어떤 것은 구체적이면서도 실제는 극히 추상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작년 말에 투르크메니스탄의 니야소프 대통령이 사망하였다. 연초에 한 외지는 그의 업적을 열거하는 기사를 실었다. 그의 업적에 드는 일에는--풍자를 목적으로 한 것이었기 때문에 풍자될 만한 것만을 고른 것일 수 있는데--지방 도서관과 병원 폐쇄, 오페라, 발레, 서커스 금지와 함께 국립 교향악단 해체, 텔레비전 출연자의 화장 금지, 학교 교사의 금이빨 금지, 립싱크 가창 금지-이러한 문화 정비 작업, 그리고 수도 주변에 천년을 갈 숲 가꾸기, (여름 온도가 40도가 넘는 나라에) 펭귄이 살 수 있는 연못 만들기, 자신과 자신의 가족, 친지의 이름이 붙은 것은 제외하고, 거리 이름, 달력의 달과 주의 명칭 바꾸기 등이 있다.

대통령의 치적으로 금이빨 금지 같은 것은 참으로 기이하다 하겠지만, 니야소프 대통령의 생각으로는, 금이빨은 순수한 트루크만 문화 전통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오페라 금지 등도 민족 문화의 순수성 수호라는 명분 하에 발상된 것이다. 그런데 우리 정치도 반드시 이러한 종류의 정책 발상으로부터 멀리 있다고만 할 수는 없다. 길거리에서 머리 길이와 치마 길이를 단속하던 일은 오래전의 일이 아니다. 다음 선거에서 금이빨 금지, 오페라 퇴치, 천년의 숲 가꾸기나 펭귄 연못 설치와 비슷한 계획들이 정책 항목으로 등장하지 않으리라고 장담할 수는 없다. 지금도 아주 구체적인 것 같으면서도, 발의자의 순수 신앙 속에서만 중요한 의미를 갖는, 추상적인 사업들은 우리 정치 프로그램의 중요 항목이다.(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 

07. 05. 17-21.

P.S. 중요한 것은 레토릭 수준의 거대담론이나 추상적인 자기확신적 동어반복들이 어떤 류의 아주 구체적인 정책들과 동일하다는 것에 대한 인식이다. 이게 '대립물의 통일성'이면서 '적대적 공범관계'이다. 가령 '여러분 모두를 사랑합니다!'란 연예인성 멘트의 수사학은 바로 옆에 있는 구체적인 개인들에 대한 혐오(혹은 비호감)와 정확하게 짝패인 것이다. '신한국'을 만들겠다는 구호나 '한나라', '열린우리'를 만들겠다는 구호가 결국엔 금이빨을 금지한다거나 펭귄 연못을 설치하겠다는 발상과 하등의 차별성을 갖지 못한다는 깨달음이, 따라서 공유될 필요가 있다. 혹은 이것들간의 공모성을 드러내주는 '번역기'라도 있으면 좋겠다. 내가 문학을 존중하는 이유는 그것 거창한 레토릭도 도취적 디테일도 거부하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플랜카드'나 '찌라시'에 의해 변화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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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때리다 2007-05-17 23:58   좋아요 0 | URL
거대 담론이 없는 실천이 있을 수 있을까요? "신이 없다면 모든 것이 금지된다."

로쟈 2007-05-21 09:40   좋아요 0 | URL
Mravinsky님/ 그게 '실천'이 아니라 '실천의 알리바이'라는 게 요점인 것이죠.
juin님/ 그리고 결론은 그 둘이 같은 거라는 걸 덧붙여야겠습니다...

심술 2007-05-22 00:02   좋아요 0 | URL
김우창 교수님 글 밑에서 넷째 문단 마지막 문장에 '토론의 내용들이 지나치게 세말적'이라고 적혀 있는데 여기서 나오는 세말이 미세분말(fine powder)의 준말입니까?

로쟈 2007-05-22 00:08   좋아요 0 | URL
저도 '쇄말적'의 오타인가 싶었는데, '세말적(細末的)'이란 뜻이더군요...
 

오랜만에 창비주간논평을 옮겨온다. 한국문학 번역가로도 활동하고 있는 서강대 안선재 교수의 '한국문학 번역의 과제들'이란 제안과 고언이다. '우물안 개구리'를 시야를 벗어나려면 정작 외국 독자들이 한국문학을 보는 시각에도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겠다.

창비주간논평(07. 05. 15) 외국 독자들은 한국문학을 어떻게 읽을까

한국인들은 흔히 한국문학이 해외에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고 말한다. 번역 출간된 작품이 너무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2001년 이후에 70편이 넘는 작품이 영어로 번역되었고 다른 언어로 번역된 작품 수는 분명히 그보다 더 많다. 자주 듣는 또다른 말은, 한국문학의 번역은 형편없어서 노벨문학상 같은 것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나의 첫번째 답변은, 최근에 작품이 거의 번역되지 않은 상황에서 노벨상을 수상한 작가들도 있다는 것이다. 번역과 성공적인 마케팅은 노벨상을 타는 선행조건이 아니다. 두번째 답변은 지난 10년간 내가 봐온 한국문학 번역작품은 원작의 내용을 충분히 정확하게 반영한다는 점에서 질적으로 상당히 괜찮다는 것이다. 세번째 답변은 노벨상 수여기관인 스웨덴 왕립아카데미 회원들이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의 의견에 따르면) 세계 곳곳에서 씌어진 문학작품을 비교하여 평가할 수 있는 능력이 명백히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최근에 그들이 내린 판단은 대부분 심각한 문제가 있다.  

한국문학 번역에 대한 동상이몽

그러나 한국문학의 번역과 홍보가 당면한 문제는 분명히 있다. 첫째, 번역될 작품을 선정하는 데 문제가 있다. 한국의 문화, 정부 관계자들은 대개 이미지 선전으로써 한국을 전세계에 알리려는 총제적인 캠페인의 일환으로, 널리 상찬되고 정평있는 '유명한' 한국작가들의 번역을 추진하려고 한다. 한국문학사를 가르치는 학계의 전문가들은 본인들이 판단하기에 근대 한국문학의 전개과정에서 중요한 작품을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오늘날 해외의 상업출판업자들의 관심은 단 한가지에 집중된다. 즉 그들은 재정적 수익을 많이 올리고 자기들의 위신을 보장할 수 있을 정도로 잘 팔리는 작품을 출판하려고 한다. 한국측의 '문헌적 정보' 프로젝트와 '성공・수익'에 대한 외국 출판업자들의 요구 사이에는 직접적인 갈등이 있는데, 이 갈등은 런던이나 빠리, 뉴델리 등지에서 현재 어떤 종류의 문학작품이 잘 팔리는지 한국인들이 일반적으로 잘 모르기 때문에 더 심각해진다.

문학 번역에 종사하는 사람으로서는, 한국인들이 좋아하는 작품이므로 전세계가 그 한국 작품에 찬사를 보내야 한다는 말을 듣는 것보다 더 절망적인 일은 없다. 최근에 나는 한 유명한 한국작가가 너무 많은 젊은 한국작가들이 1인칭 화자를 도입해 아무런 문학적 상상력 없이 ‘사실적인’ 스타일로 창작한다고 비판하는 것을 들었다.

세계문학으로 진출하려면 국제감각부터 익혀야

그의 비판은 (나는 그 논평의 전문을 보지 못했지만) 많은 한국문학 작품에서 서술자의 복합성이 결여되었음을 지적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내가 읽은 많은 한국 소설은 시작에서 출발해 간혹 회상이 섞여 들어가는 연대기적 순서에 따라 사건을 서술하고 마지막 페이지에 가서 어색한 결말로 끝맺는다. 외국의 성공적인 소설은 이렇게 창작되지 않는다.    

따라서 한국문학을 '세계화'하기를 바랄 때 한국이 당면한 단 하나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오늘날 세계의 가장 탁월한 작가들이 어떤 작품을 생산하고 있는가에 대해 한국 작가들과 독자에게 교육하는 것이다. 현재 번역과 출판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는 한국 문학작품을 바깥에 소개하는 것 못지않게, 아니 그 이상으로 동시대 외국의 탁월한 작가들을 한국독자에게 알리는 일이다. 전해지는 근래의 일본소설의 성공담은 그 점을 확인해준다.

많은 기성 한국작가들의 작품이 잘 팔리지 않는 것을 현대인의 시청각매체에 대한 집착 탓으로 손쉽게 돌릴 일이 아니다. 그것은 한국독자들이 뭔가 더 나은, 진정으로 새롭고 즐거운, (최소한 때때로) 생각을 자극하는 그런 작품을 원한다는 사실의 징표이기도 하다. 양질의 현대 세계문학의 번역을 한국의 출판인들이 지원하지 않는 것은 한국문학의 발전에 해가 되는 일이다. 

외국독자들이 말하는 한국의 시와 소설

오늘날 세계에서 시는 대부분 잘 팔리지 않는다. 상을 타고 비평의 주목을 받으면서 수익을 내고 영화로 만들어지는 것이 소설이라는 사실은 다들 알고 있다. 그렇다면 왜 한국 시가 지난 20년간 한국소설보다 영어로 그렇게나 많이 출간되었는가? 나 자신만 해도 시집을 거의 20여권을 번역했지만 번역한 소설은 3권에 불과하다. 이 물음에 대한 한가지 답변은, 한국 시는 소설보다 훨씬 재미있고 활기차다는 것이다. 많은 한국 시인들은 번역으로 전달될 수 있는 방식으로 특정한 한국적 삶의 경험에 대해 쓴다. 그들의 시는 살아 있고 설득력이 있으며 독특하게 인간적이다. 물론 그 시적 효과를 위해 주로 한국어의 특징에 의존하는 시인들은 번역으로 제대로 표현될 수 없다.



외국독자들에게 어떤 한국 시들의 영향은 강렬하고 잊을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이 사실을 그들에게 들어서 알고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한국소설을 읽은 독자들의 으레 이렇게 묻는다. "작품이 왜 이렇게 우울한가?" 시는 자주 고통스러운 상황에 복합적이며 개인적인 반응을 간결하고 강렬하게 표현하면서 독자로 하여금 인간적인 목소리를 듣게 한다. 물론 소설은 시의 한 형식으로 간주되기도 하지만, 한국 소설가들은 이 점을 보지 못하고 있다. 우아한 문체, 다양한 서술 리듬, 해석의 모호함, 여러 서술자들의 목소리, 글쓰기 전략에서의 복합성 등은 모두 시로서의 소설이 갖는 근본적인 특성들인데, 한국 작가들의 작품에는 너무나 부족한 것이다.

체면치레하지 말고 치열하게 비판하라

물론 어느 면에서는 한국작가들이 작가와 비평가 사이의 효과적인 대화가 성숙되지 않은 문화 속에서 살고 있어서 혜택을 보지 못하는 탓도 있다. 서평 형식으로 (때로는 맹렬하게) 표현되는 문학비평은 국제적인 문학담론의 본질적인 부분이다. 모든 작가가 직면한 가장 큰 위험은 자기에게 너그러운 것이다. 사려깊고 도전적인 비평 없이 어떤 작가가 기량을 연마하고 약점을 고치고 성숙한 예술을 발전시킬 수 있으리라 희망할 수 있겠는가? '체면'과 '명성'이 핵심 고려사항인 한국 같은 문화에서 정직한 비평은 자주 거부된다. 이건 큰일이다.

만약 다른 나라에서 창작되는 작품과의(반드시 북미나 유럽의 작품일 필요는 없다) 창조적인 만남을 통해 한국문학이 다시 태어나려면, 문단이나 학계의 '고참'들이 젊은 작가에 대해 후견인 노릇을 하고 평가하는 여전히 강력한 위계구조는 철폐하고, 새로운 문을 열고 새로운 자유를 찾아야만 한다. 그런 새로운 한국문학이라면 번역될 때 찬사를 받을 가능성이 휠씬 크다. 또한 그럴 때에야 비로소 한국문학은 세계문학의 핵심적인 일부가 될 수 있을 것이다.(안선재| 한국문학 번역가, 서강대 명예교수)

07. 05. 16.

P.S. 특히 마지막 충고가 인상적이다. 체면치레하지 말고 치열하게 비판하라! 좋은 게 좋은 거라는 한국적 정서가 비평의식을 잠식해서는 동네문학 수준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문단이나 학계의 '고참'들이 젊은 작가에 대해 후견인 노릇을 하고 평가하는 여전히 강력한 위계구조는 철폐하라! 흠, 이 벽안의 한국인(?)은 너무 많은 걸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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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5-17 22: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05-18 0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불가피한 일이겠지요. 그건 우리말로 번역된 '세계문학'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일 거구요. 하지만 그런 상실이 또한 번역의 가능조건이라고 생각합니다. '불가능조건'이 되는 상실은 문제이겠지만...
 

고종석의 연재 때문에 수요일엔 한국일보를 사보게 된다. 하지만 오전 강의도 준비해야 하는 터여서 연재기사 '도시의 기억'은 가방에 넣어두기만 하고, 미처 챙겨읽지 못했다. 대신에 훑어본 기사들 가운데 '인상적'이었던 건 '이과수 폭포 보며 혁신 배우겠다는 감사들'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사설이었다. 공직자들의 '세미나 관광'(사실 국회나 지자체 의원들에겐 남 얘기가 아니겠다)이야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어서 '아직도 이런 일이!'라고 놀라기엔 좀 식상하고 멋쩍다. 다만 이 '평범한 사회악'이 이렇듯 반복되는 것으로 보아 거의 구조적인 문제가 아닌가, 란 생각도 든다(그렇다면 '모럴 해저드' 문제가 아닌 것이다). '이구아수(이과수)'를 검색해보니 시원한 폭포수 대신에 뜨는 게 몽땅 이 '세미나' 관련기사들이다. 미디어오늘의 '아침신문 솎아보기'에서 관련 대목만 옮겨놓는다.  

미디어오늘(07. 05. 16) 공기업 감사는 공공의 적?

16일자 아침신문의 사설들은 일제히 남미로 '외유 세미나'를 떠난 공공기관·공기업 감사들의 심각한 '도덕적 해이'를 힐난했다. <공기업 감사들, 이과수 폭포 옆에서 '혁신 세미나'>(조선일보), <이구아수폭포 '혁신 세미나'와 미주리 골프 연수>(동아일보), <단체 외유에 나선 공공기관 감사들>(경향신문), <이과수 폭포로 '혁신' 세미나 간 혁신정부>(중앙일보), <이과수 폭포 보며 혁신 배우겠다는 감사들>(한국일보), <이구아수 폭포에서 공기업 혁신 논하나>(서울신문), <공기업 감사 '외유 세미나' 이래도 되나>(세계일보) 등 사설 제목들만 봐도 알 수 있다. 공기업 감사들이 '혁신을 배우겠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남미의 유명한 관광지인 '이과수 폭포'에 굳이 간 걸로 봐서 놀러간 게 분명하다는 것이다.

조선일보는 A2면 머리기사 <외유논란 공기업 감사들 중도 귀국할 듯>에서 "국민연금관리공단, 한국석유공사, 예금보험공사 등 21곳 공공기관, 공기업 감사들은 '공공기관 혁신포럼'을 연다는 명분으로 남미의 유명 관광지인 칠레 산티아고, 브라질 이과수 폭포, 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 등을 들르는 10박11일 출장을 떠나 외유 논란을 빚었다"는 소식을 전하며 "특히 이번 여행에 참여한 감사들 상당수가 청와대 비서진, 과거 여당인 열린우리당 당직자, 노 대통령 후보 당시의 특보 출신들이라 '낙하산 인사'들이 해외관광을 떠났다는 비판도 제기됐다"고 보도했다. "1인당 800만원 정도 드는 여행경비는 이들이 속한 공기업, 공공기관이 전액 댔다"고 덧붙였다. 한편 출장을 준비한 여행사 관계자를 인용해 "이들은 향후 일정을 중단하고 중도 귀국하는 방향으로 의견을 모은 것으로 알려졌다"고도 전했다.

▲ 중앙일보 5월16일자 6면.
중앙일보는 어제에 이어 이틀째 1면에 공기업·공공기관 감사의 '이과수 폭포 세미나' 관련 보도를 내보냈다. 정부 차원에서 기획예산처가 진상조사에 착수했다는 소식이다. 예산처는 공기업·공공기관에 대한 1차 감독부서다. "감사들의 남미 출장 보도가 나가면서 거센 비판 여론이 일고 있다"는 지적은 조선과 마찬가지다. 방만 운영, 낙하산 인사 등에 대한 비판이다. "그러나 본지 확인 결과 감사 21명은 예정대로 출장 일정을 진행하고 있다"는 부분은 조선과 정반대 얘기다. 왜 사실관계가 다른지 알 수 없다.

조선 "중도 귀국" vs 중앙 "예정대로 일정 진행"

중앙은 6면에서도 <"혁신포럼 빙자한 관광 문책하라">는 제목으로 정치권의 비판을 기사화했다. 여야 할 것 없이 진상 파악과 관련자들의 처벌을 요구했다는 내용이다. 이에 대해 청와대는 "기획예산처가 사실관계를 파악하고 있다"며 "파악해서 문제점이 있다면 (기획예산처 차원에서)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답변했다. 중앙은 △공공기관 감사 21인의 출장 일정 △공기업 낙하산 인사 관련 노 대통령, 청와대 인사수석 발언 등도 관련 그래픽으로 만들어 기사와 함께 배치했다.

중앙은 같은 면에서 <신이 내린 직장, 신이 내린 자리>라는 제목의 '취재일기'를 통해서도 외국으로 세미나를 하러 간 공기업 감사들을 비판했다. 이 기사를 쓴 윤창희 기자는 "보통 사람들과 달리 뭔가 근사한 곳에 가야 산뜻한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모양일까"라고 비꼬는 한편 "그들이 귀국 보따리에 획기적인 감사혁신 방안을 담아 온다면 사실 아무 문제가 될 게 없다. 그러나 우리보다 공기업 경영이 별로 나아보이지 않는 남미에서 기막힌 공기업 혁신방안을 배워올 수 있을까"라고 기막혀 했다. 윤 기자는 이어 "공기업 27개 중 80%가 넘는 22개사 사장이 공무원과 정치인 출신이다. 공기업 감사들이 줄지어 남미로 단체 출장을 떠난 것은 바로 이런 분위기 때문이 아닐까"라며 공기업 감사들의 '모럴 해저드(도덕적 해이)'를 원인으로 짚었다.

한겨레는 6면에서 <공기업 감사 '집단 외유성 출장'>이라는 제목으로 해당 기사를 실었다. "공기업과 공공기관 감사 20여명이 외국 공기업의 감사 업무를 벤치마킹하고 세미나를 연다며 남미로 출장을 떠나자 '낭비성 외유'라는 비판이 일고 있다"는 말로 시작되는 기사는 "무엇보다 이들이 출장에 나선 남미 나라의 공공기관 경영방식에서 우리가 배울 게 많지 않고, 관광지 등에서 적잖은 시간을 보내기로 했기 때문(에 비판을 받고 있다)"고 사안을 정리했다.

 한편 "이들은 모두 '공공기관 감사포럼' 회원들이며, 지난 대선 때 노무현 후보 캠프에서 활약했거나 열린우리당에서 일한 사람들이 많다"고 이 기사는 지적하며 "출장 일정 등을 보면 '감사 업무 혁신 방안 마련'과는 거리가 있다는 지적이 많다"고도 보도했다. 공공기관 감사포럼 의장인 곽진업 한국전력 감사의 "남미의 공공기관을 방문해 한국과의 차이점을 확인하는 것도 공부에 해당하는 만큼 외유성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말을 인용하고 있지만 사안에 대한 언론들의 판단이 일관적인 만큼 다소 궁색해 보이는 게 사실이다.

▲ 경향신문 5월16일자 1면.
경향신문은 이 사안을 1면에서 <1인 800만원짜리 남미 '관광 세미나' 물의/"신도 탐내는 공공기관 감사">라는 제목으로 다뤘다. 경향은 "공공기관들이 '신이 내린 직장'이란 비아냥을 들을 정도로 따가운 시선이 쏟아지는 상황에서 남미로 외유성 세미나를 떠난 것도 이런 역학적 관계 때문에 가능했다는 설명"이라고 기사는 풀이했다. '남미로 출장간 공공기관 감사 경력 및 연봉'과 '정치권·관료 출신 공공기관 감사'를 표로 만들어 정리하기도 했다.(권경선 기자)

07. 05. 16.

P.S. '구조적인 문제'란 것은 어제 읽은 김훈과 홍세화의 대담에서 나온 김훈의 발언을 염두에 둔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아마 우리가 밥을 먹는 과정에서 벌어진 구조적인 악들에 도전했다가 참패하신 것 같아요. 그분이 참패한 것은 참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것을 개조하고 거기에 도전하는 일은 차기 정권의 누가 대통령이 되더라도 계승해 나갈 수밖에 없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근데 박정희, 이승만 이후로 깔려버린 구조화된 악과 억압이라는 것은 정말로 만만치가 않은 것이죠."

얄궂게도 이번 외유성 세미나에 나선 이들은 모두 청와대 비서진을 비롯한 '노무현의 사람들'이라고 한다. '적'은, '구조적인 악'은 밖에만 있는 게 아닌 것(그러니까 그는 도전하기도 전에 이미 패배한 것이 아닐까). 이 '평범한 악'이 '혁신'이란 이름을 갖고 있는 게 또한 아이러니컬하다. 오늘이 5.16 쿠데타가 일어났던 날이란 것까지 고려하면 비장하게 코믹하고, 이과수 폭포가 나오는 왕가위의 <해피 투게더>의 첫장면을 떠올리면 애잔하기까지 하다(감사들끼리의 '해피 투게더' 아닌가?). 신이여, 제발 우리를 구원하지 마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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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민주항쟁20주년사업추진위원회'에서 진행중인 민주화20년 ‘상상변주곡’ 대토론회 중 네번째 꼭지로 임상수 영화감독의 발제 ‘6월항쟁 이후 한국사회 내면풍경에 관한 기사를 옮겨놓는다(지난주인가 두번째 꼭지인 진중권의 '신체의 지질학'을 옮겨놓은 바 있다). 출처는 컬처뉴스이다.   

6월항쟁 20주년 기념 대토론회 '상상변주곡' 네번째 장이 5월 14일 열렸다.

컬처뉴스(07. 05. 15) "고백 통한 자기복원이 필요하다"

1986년 군대를 갔다 온 후 복한한 한 대학생은 머리에 최루탄을 맞아 사망한 이한열의 시신을 지키는 사수조에 참여하라는 전화를 무시했다. 또 신촌에서 시청까지 인파로 뒤덮인 이한열의 장례식 날에도 개미 한 마리 없는 도서관에 혼자 있었다. 하지만 매일 낮 12시에 울리는 택시들의 경적소리와 그에 호응하는 넥타이족들의 모습을 볼 때마다 어쩔 수 없는 울분과 떨림을 느꼈다. 그 복학생은 학교를 졸업하고 영화감독이 된다. <눈물>, <바람난 가족>, <오래된 정원> 등 한국 사회의 문화적 격변과 내면 풍경의 변화를 도발적인 문제제기와 모험적인 카메라 워크로 잡아낸 임상수 감독이다. ‘상상변주곡’ 네 번째 시간(14일)의 발제를 맡은 임 감독은 ‘고백을 통한 자기 복원 없이 그저 달려 나가가만 하는 사회’라는 주제로 “과연 민주화 진영이 무엇을 얼마나 이루었는가”에 대해 이야기했다.

 

 

 

 

 

 

 

 

 

임 감독은 “<그때 그사람들>은 1987년 6월민주항쟁이 없었더라면 찍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라며 “물론 박정희 시대였던 그 18년을 다 담고 싶다는 욕망도 있었지만 그 보다도 먼저 명령과 복종만 있었던, 해서 명령에 대해 회의하거나 사고하는 사람은 존재가 불가능했던 ‘그때 그 사람들’의 인간관계에 주목하고자 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임 감독은 우리가, 한국 사회가, 민주화 운동세력이 극복하지 못한 것을 크게 두 가지로 정리했는데 바로 ‘골목대장 문화’와 ‘터무니 없는 거짓말’이 그것이다. 먼저 ‘골목대장 문화’에 대해 임 감독은 “유치한 위계질서가 지금 얼마나 극복됐을까”라고 반문하면서 “한화 김승현 회장 사건만 보더라도 촌스럽기 그지없는 위계질서를 여전히 목격할 수 있다”고 말했다. 또한 “치졸하고 쓰레기 같은 짓을 하면서도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살고 있다는, 살아야 한다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드러내면서 “하늘이 알고 네가 알고 내가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거짓말이 통용되는 것은 그러한 뻔뻔스러움이 전염되어 내면화 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어 수구와 보수세력을 비판하기에 앞서 그렇게 치열하게 민주항쟁을 주도했던 민주진영 세력들이 도대체 이루어 낸 것이 시스템적인 민주주의 외에 무엇이 있는지에 대해 비판해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금 누구도 세련된 민주주의 속에서 살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임 감독은 “노무현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정의주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가 득세하고 있는 굴절된 풍토를 청산하고자 했지만 사실 이러한 것은 5년동안 할 수 있는 일이, 정권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서 “바로 그 때의 6월 거리에 나왔던 사람들이 자기 고백을 통해 과거를 복원하고 그 복원을 통해 그 피의 값은 충분히 얻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더불어 “이를 이루지 못한다면 소위 6월항쟁이란 허위의식에 가득 찬 난리굿이라 할 2002년 월드컵 열기와 다를 바 없다”고 전했다.

 

 

 

 

 

 

 

 

  

이날 토론자로는 강유정 영화평론가와 김봉석 대중문화평론가가 참여했다. 먼저 강유정 영화평론가는 “모든 사람들은 우연하게 만나고 우연하게 그 자리에 있는 것”이라며 “그러한 우연한 시기에 박종철이 죽었고, 이한열이 죽었고, 그들의 죽음을 우연히 같은 시기에 목격한 사람들이 들고 일어난 것이 바로 6월항쟁이 아닐까”라고 자문했다. 이어 그는 “막스(*맑스)가 사람을 통해 ‘학’을 구성했듯 이제야 우리들도 거리로 뛰쳐나왔던 그들을 통해 우연을 필연으로 만들어야 하는 시기”이며 “좀 더 지독한 타자의 윤리가 임상수 감독의 영화 속에 등장하기를 기대하겠다”고 전했다. 더불어 지독하게 냉정하고 객관적인 관찰자였던 임상수 감독의 위치와 영화 속에서 고백이라는 제의를 재현하고 싶었는지에 대해 질문했다.   

이에 임상수 감독은 “80년대 나는 물론 현장에 있었고 모든 것을 관찰하려는 노력을 했었던 것 같은데 내가 그렇게 바깥에 있었는가”라고 반문하며 “<오래된 정원>을 보고 1980년대 사람들에 대한 애정이 가득차 있었다, 이야기한 한 평론가의 평이 나는 가장 마음에 든다”고 전했다. 또한 “과거의 자기복원이 어려운 이유는 앞으로 빠르게 나가야 하는 현재의 상황들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인데 나는 <바람난 가족>에서 정말 나의 내밀한 고백을 시도했고, 그렇기에 나는 거리낄 것 없이 앞으로 나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김봉석 평론가는 “창작자들이 그 때의 이야기를, 6월민주항쟁의 이야기를 쓰지 않는 것이 불만이다”라며, “임상수 감독이 <오래된 정원>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은 ‘타자’였기에 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 그는 민주화 운동세력이 철저한 자기고백을 하지 않았다는 임상수 감독의 발언에 동의하며 “386세대들은 분명 특수한 세대이고 그들 또한 자부심을 느끼고 있을 것이라 여겨지지만 결국 노태우 정권과 김영삼 정권을 이겨내지 못하고 동구권 또한 무너지면서 이상에 대한 환멸을 느꼈을 것”이라며, “그러한 열등감에 무용담 이상의 것을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에 강유정 평론가는 “386세대라는 호명 자체가 386세대의 호명에 대한 욕망”이라면서 “자기윤리를 세속적인 기준으로 맞추는 세대론 자체는 어쩜 유효하지 않은 것일 수 있다”고 전하기도 했다.(태윤미 기자) 

07. 05. 15.

P.S. 마침 6월에는 황석영의 <오래된 정원>과 임상수의 <오래된 정원>에 대해서 몇 마디 해야 할 일이 있는데, 임감독의 발제문은 참고자료가 될 만하겠다(감독과 변성찬 평론가의 대담을 링크해놓으려고 찾았지만 눈에 띄지 않는다). 내가 할 얘기는 6월로 미뤄놓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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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술 2007-05-16 03:53   좋아요 0 | URL
이 글과는 전혀 관계없는 횡설수설이지만 악셀이 누군지 알아냈어요. 빌리에 드 릴라당(Villiers de l'Isle-Adam)이라는 19세기 프랑스 작가의 희곡이래요. 원작은 우리나라에 아직 옮겨 나오지 않았고 에드먼드 윌슨이란 평론가가 쓴 '악셀의 성'이란 책을 통해 이 작품이 있다는 게 우리나라에 알려졌다내요.

로쟈 2007-05-16 21:44   좋아요 0 | URL
저도 생각난 건 <악셀의 성>밖에 없었는데(번역돼 있는 비평집이고 저도 갖고 있습니다), 번역된 작품의 주인공을 찾으시는 줄 알았습니다. 등잔 밑이 어둡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