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담론의 몰락', 아니 그 불가능성은 리오타르에 따르면 '포스트모던의 조건'이기도 하므로 무슨 뉴스거리는 아니겠다. 다만 우리의 경우엔 약간의 연착륙이 있는 듯하다. '평화-인권' 같은 거대담론이 "지나치게 거시적이고 추상적"이라는 최장집 교수의 비판이 최근에서야 제기되는 걸 보면. 마침 얼마전 김우창 교수도 비슷한 칼럼을 실은 적이 있기에 모아놓는다.  

한겨레(07. 05. 17) "평화·인권같은 거대담론 보통사람 삶에 기여 못해”

최근 현 정부 시기 들어 민족주의 과잉을 경계한 논문을 발표한 최장집 고려대 교수가 이번에는 “평화와 인권과 같은 거대담론”을 대상으로 비판적 논의를 펼쳤다. 최 교수는 18~19일 전남대 5·18연구소 등이 전남대에서 여는 국제학술대회 ‘5·18과 민주주의, 그리고 한반도 평화’에 발표할 논문 ‘5·18과 한국의 민주주의’에서 “(평화와 인권과 같은 거대 담론들은) 구체적 삶의 현실을 정치의 중심이슈로 두는 데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그는 거대 담론들이 “보통 사람들의 실생활에 직접 기여했고, 할 수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며 “거대담론은 삶의 현실에서 발생하는 미세하고 구체적인 문제를 다루기에는 지나치게 거시적이고 추상적”이라고 규정했다. “한반도에서의 평화는 그 어떤 이슈보다 중요하지만 전쟁이 발생할 가능성을 일상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현실이기보다 이데올로기일 경우가 많다.”

최 교수는 “평화의 이슈가 진보파와 보수파 사이에, 대북강경파와 온건파 사이에 레토릭(수사)의 수준에서 격렬한 대립을 불러일으킬지는 몰라도, 실제 이들의 정치갈등이 평화 대 전쟁이라는 양자택일을 둘러싼 것일 수는 없다”며 “평화의 이슈는 (…) 과장된 현실에 기초한 갈등이 되기 쉽다”고 규정했다. 이런 그의 주장은 과도한 민족주의는 사회내 갈등이 정당히 자리잡을 수 없도록 해 민주주의 발전에 부정적 영향을 끼친다는 기존 견해를 좀더 구체화한 것으로 해석된다.

최 교수는 또 이런 거대 담론은 “위로부터 정치엘리트들에 의한 대중동원의 성격을 띤다”면서 우리 정치의 지역정당 구조와 연결시켰다. 그는 “광범위하고 전국적이고 일반적인 이슈를 정치화하는 데 적합하지 않은” 지역주의 정당과 정치인들이 전국적 수준에서의 대중동원을 위해 이런 거대 담론들을 끌어들였다고 했다. 최 교수는 “운동에 의한 민주주의 실천은 민중을 국가에 대한 소극적 비판자 이상의 역할을 갖지 못하게 하는 효과를 낳는다”며 “정당이 그 중심 수단이요, 행위자가 되는 민중 참여”의 정당성을 강조하면서 글을 마무리했다.

정대화 상지대 교수는 같은 행사에 발표할 논문 ‘민주화 과정에서 민간권력의 형성과 역할’에서 “민주주의가 지역주의에 의존하는 무능력한 정당의 존재로 위기에 직면하게 됐다”는 최 교수의 기존 견해를 반박했다. 그는 6월 항쟁 이후 낙선운동과 같은 시민적 정치개입을 통한 정치적 세대교체가 이뤄졌고, 민주화 운동 세력의 지속적인 정당정치 참여, 노동운동의 정치세력화에 이른 ‘진전’ 상황들을 열거하며 “정당정치의 발전을 위한 노력이 적지 않았음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정 교수는 따라서 “문제의 핵심을 (…) 현상적으로 드러나는 정치권과 정당에서 발견할 것이 아니라 민주화 과정에서 생존을 보장받고 지금까지도 권력을 행사하고 있는 구세력의 지역주의적이고 수구적인 권력정치에서 발견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대응도 민주화와 개혁을 저해하는 구세력의 청산에 맞춰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여기에 이르는 ‘권력 구성’의 두 가능성으로 △민주세력의 연대를 통한 새로운 권력의 창출 방안 △노동운동과 시민운동의 관계 복원과 한계 극복을 통한 정치 지평의 확보를 제시했다.

이번 학술대회에는 이밖에 브루스 커밍스 미국 시카고대 교수(주제: 5·18과 한국 현대사)와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동아시아와 남북한), 윤영관 서울대 교수(21세기 세계변화와 남북관계의 전망), 이해영 한신대 교수(한-미 자유무역협정과 민주주의) 등이 발표자로 나선다. (강성만 기자)

 

경향신문(07. 05. 10) 정책의 여러 차원

다음 대통령 선거전과 관련하여 얼마 전 어느 회의에서 대통령 후보자가 어떤 정강 정책을 내놓아야 하느냐에 대하여 사람들에게 질의서를 작성 배부하는 문제가 나왔다. 예상되는 정책안은 남북관계, 경제성장, 고용확대, 빈부격차, 입시제도, 부동산과 주택, 환경오염 등등에 관한 것이었다. 이러한 것들이 정책의제의 범주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은 맞는 말이다. 그러나 되풀이되는 이 의제들에 대하여 유권자들은 피로감을 느낄 가능성이 없지 않다.

모든 것이 매체적 흥밋거리가 되는 시대에 있어서, 되풀이되는 주제는, 그 중요성에 관계없이, 사람들의 흥미를 불러일으키기 어렵다. 그러나 그렇게 되는 참 이유는 이러한 항목에 대한 우리 정치계의 정책이 대체로 추상적인 신념 표현의 차원에 머물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들에게 정책의 중요성은 그것이 현실적인 의미를 갖는다는 것일 터인데 큰 이야기가 현실로 쉽게 번역되지 못하는 것이 지금까지의 경험이다.

특히 생활 현실과 관련해서 그렇다. 교육 문제에 있어서, 평준화냐 아니냐, 3불이냐 아니냐, 또는 다른 어떤 신앙에 따른 논쟁이 누적되어 있는 본질적인 교육문제를 해결해줄 것으로 믿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의료보험 같은 것을 볼 때, 제도는 그 관료적 외형을 넘어 세부에 대한 구체적 주의가 없이는 인간적 내용을 갖추지 못한다는 것을 생각하게 한다. 우리의 의료 제도 안에서 충분히 인간적이고 전문적인 배려가 있는 치료를 받을 수 있다고 말할 사람이 많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그렇다하더라도 우리 보험이 의료비용 중 잔돈이 아니라 큰 돈 걱정을 없애준다고 말할 수 있을까?

원칙 천명 차원에서의 합의를 끌어내는 처음의 단계를 지나면, 문제는 실제로 그것이 현실의 삶을 어떻게 더 편안하게 해주느냐 하는 것이다. 앞에 언급한 회의에서는, 거창한 정강이나 정책의 천명이 아니라 실제로 국민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지극히 구체적으로 조사하여 그것을 정책 구상의 자료로 삼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어떨까 하는 제안이 나왔다. 학교 교복 값을 내린다든가, 건축현장의 중첩된 하청제도를 개선한다든가--이런 작은 요구들을 알아보면 어떨까 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으로 먹고 입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정치의 중점이 거창한 구호로부터 일상 현실로 돌아오는 데 도움을 주는 일이 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며칠 전에 끝난 프랑스의 대통령 선거 기간 중, 결선 투표 직전 두 후보의 텔레비전 토의가 있었다. 외신에 소개되었던 내용을 보면 우리로서는 정책 토의가 지극히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차원에서 행해지는 데에 놀라게 된다. 가령 사회당후보 세골렌 루아얄 후보의 교육 관련 제안에는 중학교의 학생수를 학교당 600명, 한 학급당 17명이 넘지 않게 하는 것과 같은 방안이 있었다. 대통령에 당선된 민중운동연합(UMP)의 니콜라 사르코지 후보의 제안에는 미망인의 연금을 높이고 의료보험에서 안경비용을 부담하게 한다는 것이 있었다. 두 후보의 토론 과정 중 가장 열띤 순간은 장애자의 교육문제를 논할 때였다. 장애자 교육을 정상 교육에 통합하는 인도적 노력이 있어야 한다는 사르코지 후보의 말을 위선적이라고 루아얄 후보가 감정적으로 비난하면서 날카로운 말이 오고 갔다.

많은 나라에서 주택문제는 자주 등장하는 사회문제이다. 프랑스 대통령 후보들의 토의에서는 임대주택의 세입자가 세를 내지 못하였을 때 임대인과 임차인을 금전적으로 어떻게 보호할 것인가, 실업 등으로 세가 미불이 될 때 국가에서 보조금을 줄 것인가, 임대계약을 갱신하는 경우 임대료 인상 금지기간을 얼마로 할 것인가, 젊은 가구주들의 주택 확보에 어떤 사회적 보조가 필요한가 등의 문제가 거론되었다. 조금 큰 제안으로는 두 후보는 다 같이 투기 방지 조처를 해야 한다는 데에는 동의했지만, 루아얄 후보는 매년 공공주택 12만가구를 짓고 새로운 건축물에는 친환경적인 시설로서 조명과 난방에 태양열이나 풍력 등의 장치를 설치하게 하여야 한다는 제안을 했고 이에 대하여, 사르코지 후보는 대체로 유보적인 입장을 표명하였다. 그의 생각은 주택문제 해결에는 금융 지원이 더 적절하다는 것이었다.

세부적이라고 하여 정책에 근본적 입장의 차이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사르코지 후보가 당선된 것은 주 35시간 노동시간 변경, 감세, 정부 기구 축소 등을 통해서, 시장경제 체제를 강화하겠다는 것을 국민이 받아들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이것은 반드시 시장 자체를 절대시하는 것이라기보다 경제를 활성화하여 고용과 청년실업 문제 등을 해결하겠다는 사회정책적 고려에 기초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두 시간 반 이상 계속된 대선 후보들의 토의의 특징은, 내놓은 정책들이 극히 구체적이라는 것이었다. 토론의 내용들이 지나치게 세말적이라는 논평도 없지 않았지만, 신문에 실린 논평들에도 예산이나 비용, 사회적인 부작용 등을 면밀하게 계산하는 비판적 검토들이 있었다.

우리나라의 선거전에서 논의되는 정책의 추상성과 이번 프랑스 대통령 선거전에 나왔던 정책의 구체성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지만, 그것은 두 나라가 처해 있는 처지가 다른 데에 연유한다. 우리의 정책 의제들이 거창하고 추상적인 것은 우리의 문제가 거창하고 추상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필요한 것은 거창하고 추상적이면서도 구체적인 방안들이다. 이제는 우리의 문제들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야 할 단계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구체적이라는 것은 반드시 정책이 한 사안에 한정되어야 한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정책은 구체적이면서도 사회 일반에 현실적 반향을 일으키는 것이라야 한다. 어떤 구체적인 정책은 단발로 끝난다. 또 어떤 것은 구체적이면서도 실제는 극히 추상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작년 말에 투르크메니스탄의 니야소프 대통령이 사망하였다. 연초에 한 외지는 그의 업적을 열거하는 기사를 실었다. 그의 업적에 드는 일에는--풍자를 목적으로 한 것이었기 때문에 풍자될 만한 것만을 고른 것일 수 있는데--지방 도서관과 병원 폐쇄, 오페라, 발레, 서커스 금지와 함께 국립 교향악단 해체, 텔레비전 출연자의 화장 금지, 학교 교사의 금이빨 금지, 립싱크 가창 금지-이러한 문화 정비 작업, 그리고 수도 주변에 천년을 갈 숲 가꾸기, (여름 온도가 40도가 넘는 나라에) 펭귄이 살 수 있는 연못 만들기, 자신과 자신의 가족, 친지의 이름이 붙은 것은 제외하고, 거리 이름, 달력의 달과 주의 명칭 바꾸기 등이 있다.

대통령의 치적으로 금이빨 금지 같은 것은 참으로 기이하다 하겠지만, 니야소프 대통령의 생각으로는, 금이빨은 순수한 트루크만 문화 전통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오페라 금지 등도 민족 문화의 순수성 수호라는 명분 하에 발상된 것이다. 그런데 우리 정치도 반드시 이러한 종류의 정책 발상으로부터 멀리 있다고만 할 수는 없다. 길거리에서 머리 길이와 치마 길이를 단속하던 일은 오래전의 일이 아니다. 다음 선거에서 금이빨 금지, 오페라 퇴치, 천년의 숲 가꾸기나 펭귄 연못 설치와 비슷한 계획들이 정책 항목으로 등장하지 않으리라고 장담할 수는 없다. 지금도 아주 구체적인 것 같으면서도, 발의자의 순수 신앙 속에서만 중요한 의미를 갖는, 추상적인 사업들은 우리 정치 프로그램의 중요 항목이다.(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 

07. 05. 17-21.

P.S. 중요한 것은 레토릭 수준의 거대담론이나 추상적인 자기확신적 동어반복들이 어떤 류의 아주 구체적인 정책들과 동일하다는 것에 대한 인식이다. 이게 '대립물의 통일성'이면서 '적대적 공범관계'이다. 가령 '여러분 모두를 사랑합니다!'란 연예인성 멘트의 수사학은 바로 옆에 있는 구체적인 개인들에 대한 혐오(혹은 비호감)와 정확하게 짝패인 것이다. '신한국'을 만들겠다는 구호나 '한나라', '열린우리'를 만들겠다는 구호가 결국엔 금이빨을 금지한다거나 펭귄 연못을 설치하겠다는 발상과 하등의 차별성을 갖지 못한다는 깨달음이, 따라서 공유될 필요가 있다. 혹은 이것들간의 공모성을 드러내주는 '번역기'라도 있으면 좋겠다. 내가 문학을 존중하는 이유는 그것 거창한 레토릭도 도취적 디테일도 거부하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플랜카드'나 '찌라시'에 의해 변화하지 않는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자꾸때리다 2007-05-17 23:58   좋아요 0 | URL
거대 담론이 없는 실천이 있을 수 있을까요? "신이 없다면 모든 것이 금지된다."

로쟈 2007-05-21 09:40   좋아요 0 | URL
Mravinsky님/ 그게 '실천'이 아니라 '실천의 알리바이'라는 게 요점인 것이죠.
juin님/ 그리고 결론은 그 둘이 같은 거라는 걸 덧붙여야겠습니다...

심술 2007-05-22 00:02   좋아요 0 | URL
김우창 교수님 글 밑에서 넷째 문단 마지막 문장에 '토론의 내용들이 지나치게 세말적'이라고 적혀 있는데 여기서 나오는 세말이 미세분말(fine powder)의 준말입니까?

로쟈 2007-05-22 00:08   좋아요 0 | URL
저도 '쇄말적'의 오타인가 싶었는데, '세말적(細末的)'이란 뜻이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