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한 송년회 자리에 가면서 읽은 건 '씨네21' 신년호(07. 01. 02)의 전영객잔 코너였다. 영화평론가 정성일의 <랑페르> 읽기인데, 폴란드의 거장 키에슬로프스키(키에슬롭스키)의 유작 프로젝트를 보스니아의 젊은 감독 다니스 나토비치가 완성한 <랑페르>(=지옥)에 대한 불만과 비판, 그리고 먼저 떠난 거장에 대한 애도를 두루 포함하고 있는 아주 '핫'한 글이었다. '지옥은 천국에 다가갈수록 가까워진다'가 그 타이틀인데, 너무 긴 분량에다 아직 온라인에서 서비스되지 않는 글이라 대신에 이달 중순 같은 지면에 실린 리뷰기사를 옮겨놓는다. 작년과 비교하더라도 아주 '조용한' 세밑이지만, 그래도 마음은 '지옥'에서부터 다시 시작하는 게 마땅하지 않을까 싶어서. 지옥 같은 지옥이 아니라 우리가 자주 '천국'이라고 착각하는 지옥에서부터...   

씨네21(06. 12. 13) 키에슬로프스키보다 호사스러운 지옥 <랑페르>

1996년 3월13일의 비극. 이날 크지슈토프 키에슬로프스키는 심장수술을 받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것으로 키에슬로프스키가 친우 크지슈토프 피시비츠와 계획하고 있던 ‘천국-지옥-연옥’ 3부작은 완전히 끝이 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대가의 유산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지난 2002년에 <천국>(Heaven)을 연출한 <롤라 런>의 톰 티크베어에 이어 두 번째로 거장의 봉인된 원고를 풀어젖힌 것은 <노맨스 랜드>의 의기양양한 보스니아 감독 다니스 타노비치다.

‘랑페르’(L’Enfer: 지옥)로 떨어진 주인공들은 세명의 자매다. 그들은 유년기에 겪은 무시무시한 사건 이후 교류도 없이 각자의 상처를 속으로 곰기며 살아간다. 잘나가는 사진작가의 아내이자 두 아이의 엄마인 맏딸 소피(에마뉘엘 베아르)는 남편의 외도로 고통받고 있으며, 남편의 뒤를 몰래 밟아 남편이 사랑하는 여자의 모습을 보며 배신감으로 스스로를 무너뜨린다. 대학생인 막내 안느(마리 질랭)는 친구의 아빠이자 교수인 프레데릭과 사랑에 빠졌다. 하지만 프레데릭은 가족을 지키기 위해 안느를 버리기로 결심하고, 이에 이성을 잃어버린 안느는 금지된 사랑을 되찾기 위해 몸부림친다. 둘째 셀린느의 삶은 가장 적막하다. 세 자매 중 유일하게 요양원에 있는 엄마(캐롤 부케)를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그는 누구와도 관계를 맺지 않고 고독한 삶을 살아간다. 그들의 상처를 되짚어내는 이는 세바스티앙(기욤 카네)이라는 미스터리한 젊은이로, 그는 셀린느에게 접근해 자신이야말로 지옥의 근원이었다고 폭로한다.

유년기의 기억은 여전히 자매들을 맴돈다. <랑페르>의 지옥은 영원히 반복되는 인류의 형벌이다. 주인공들은 그 속에서 과거의 실수를 또다시 반복하고, 무시무시한 다람쥐 쳇바퀴에서 떨어져 살아가는 타인에게까지 똑같은 지옥을 안겨준다. 간통과 간음과 불신과 속임수는 그들뿐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도 전염된다. <랑페르>는 세 자매의 지옥을 좀더 직접적으로 묘사하기 위해 종종 그리스 신화의 여인 메데아를 인용한다. 동생까지 희생하며 남편인 이아손을 따랐던 메데아는 남편의 배신으로 분노한 나머지 복수를 위해 자식들을 죽였다.

<랑페르>의 어머니 역시 아비의 목숨을 끊었으나 그 고통을 이어가는 것은 자식인 세명의 자매들이다. 타노비치(그리고 두명의 크지슈토프)는 현세의 메데아들을 통해 인간의 오해와 복수심과 불신이 빚어낸 인간 마음속의 지옥을 들여다보며 관객에게 말한다. 우리 모두는 메데아의 자식들이며, 그 비극의 핏줄은 인간이 실존하는 한 영원히 대를 이어 전해질 것이라고. 무시무시한 제언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보는 이의 심장에 서리를 내린다. 형식적으로 <랑페르>는 조각조각 다른 색깔로 만들어진 퀼트와도 같다. 각각의 캐릭터를 넓은 보폭으로 뛰어넘으며 진행되던 이야기는 서서히 자매들의 관계를 가까이 가까이 이어붙이고, 발화점이 높은 인간들의 드라마와 관객의 숨을 죽이는 미스터리 구조는 농밀하게 짜여져 결말을 향해 달음박질친다.

물론 영화의 형식은 두명의 크지슈토프가 창조해낸 시나리오 속에 이미 완결되어 있다. 키에슬로프스키의 유산을 영화화하는 감독이라면 거장의 세계에서 완벽하게 유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었을 것이다. 다니스 타노비치는 <랑페르>가 자신의 창조물이기보다는 키에슬로프스키를 향한 오마주임을 굳이 숨기려 들지 않는다. 그는 주인공들에게 각각 레드, 블루, 그린의 색채를 입히고, (세 가지 색 3부작에 공히 등장하는) 병을 분리수거하는 할머니를 등장시킴으로써 대가를 향한 존경의 마음을 내보이는 것으로 의무를 다한다.

타노비치가 자신만의 지장을 찍으려는 야심을 드러내는 부분은 젊고 감각적인 붓터치다. <랑페르>의 스타일은 키에슬로프스키가 만들었음직한 지옥보다 훨씬 호사스럽다. 촬영감독 로랑 다리양(<타인의 취향> <아스테릭스2 :미션 클레오파트라>)은 현실보다 화려한 빛과 색채를 이용해 바로크 음악처럼 휘몰아치는 스토리를 시각화하는 재주를 보인다. 가끔은 시각적 과시가 지나친 나머지 노골적인 미장센으로 주제를 과시하는 프랑스 멜로영화처럼 보이는 순간도 있는데, 이를 내밀한 은유의 언어로 바꾸어주는 것은 네 주연배우의 공이다. 언제나처럼 지옥에 빠져 바스락거리는 영혼을 기묘한 아름다움으로 비추어내는 에마뉘엘 베아르는 상처입은 메데아의 모습 그대로이며, 마리 질랭, 카랭 비야, 특수분장에 힘입어 단호하고 냉정한 공기를 발산하는 캐롤 부케의 연기는 각각의 호연을 따라가기 힘에 부칠 지경이다. 세대를 뛰어넘는 프랑스 여배우들의 화음을 듣고자 하는 관객에게는 프랑수아 오종의 <8명의 여인들> 이후 가장 기가 막힌 관현악이다.

<랑페르>는 언젠가 만들어질 <연옥>(Purgatory)을 위한 징검다리로도, 69년생 젊은 작가의 야심만만한 행보로도, 프랑스 여배우들의 내공을 발산하는 무대로서도, 충분한 값을 치를 만한 예술품이다. 물론 키에슬로프스키 팬들은 젊은 유럽 작가들의 ‘신곡 3부작’을 향한 오마주 난도질에 마뜩잖아 할 테지만, <랑페르>는 (티크베어의 <천국>이 그랬듯이) 키에슬로프스키의 무게에서 완벽하게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을 태초에 지고 태어난 영화다. “분명히 큐브릭 팬들은 싫어할 거야. 어쩌겠어.” 큐브릭의 오랜 지기였던 프로듀서 잔 할란이 스필버그에게 던진 충고는 타노비치에게도 유효할 것이다.(김도훈 기자) 

06. 12. 31.

 

 

 

 

P.S. 그러니까 이 '호사스러운' 지옥은 키에슬로프스키의 관객들에게라면 (정성일의 경우처럼) '충분한' 지옥일 수 있겠다("나는 <랑페르>라는 영화보다 원래의 시놉시스, 원래의 토픽, 내가 미처 볼 수 없었던 메모들, 만들지 않은 키에슬로프스키의 판본이 훨씬 흥미롭다."). 영화평론가 정성일에 대한 지지는 타르코프스키와 키에슬로프스키에 대한 그의 열광적인 지지와 겹친다(거기에 약간의 틈새를 이루는 건 임권택에 대한 그의 열광적인 지지이다). 키에슬로프스키에 대해서도 몇 차례 다룬 바 있는데, 아직도 갈길은 멀다. 올해 그에 관한 책들만 해도 서너 권을 더 구한 이유이다. 내년엔 보다 근사한 말들을 덧붙일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욕심을 내자면,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영화', '씌어지지 않은 책'들에 대해서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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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12-31 17: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키에슬로프스키가 보여서 정신없이 클릭했어요! 랑페르 봐야겠네요.. 정성일도 찾아봐야겠어요. 감사합니다! 혹시 키에슬롭스키 십계 보셨어요? 예전에 조금 봤고 또 보고픈데 방법을 모르겠어요.

로쟈 2006-12-31 17: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십계>는 오래전에 봤습니다. 저도 소장하고 있진 않은데, 방법이야 구입하시거나 어디서(어딘지는 모르겠지만) 다운받으시는 거겠지요...

수유 2007-01-01 1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직 랑페르를 못봣네요.. 이래저래 연말연시는 분주하기만 할뿐 실속은 없습니다. 이제 방학이고 하니 여유롭게 영화관 순례를 해야겠는데 날 기다려주질 않을 영화들일까봐 다소 걱정.

로쟈 2007-01-01 1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방학이시다니 부럽습니다.^^ 더불어, 새해인사를 드려야겠네요. 분주하지만 실속도 챙기는 한해가 되시길!..

수유 2007-01-01 2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로쟈님도 만족스런 새해 맞으시길 바랍니다. 건필!!

도톰 2007-01-09 14: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영상 재생툴중의 하나인 곰플레이어의 무료영화 코너에서 키에슬로프스키의 십계 시리즈를 한 편씩 보여주더군요. 지금까지 3개가 걸렸었는데, 이런 방법으로 시리즈를 다 보여줄지는 모르겠습니다. 일정 기간이 지나면 무료영화는 유료 영화로 바뀝니다.
http://searchgom.ipop.co.kr/cgi-bin/search_gom_movie.cgi?sub=1&whr=6100&key=%BD%CA%B0%E8

로쟈 2007-01-09 14: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왕이면 다 걸렸으면 좋겠네요...
 

러시아 관련 해외칼럼을 읽고 옮겨놓는다. 한 러시아 언론인의 기명칼럼이 특약으로 게재된 것인데, 러시아인들에게는 초미의 관심사인 2008년 대선에 대한 우려섞인 전망을 내놓고 있다. 갈수록 팽배해지고 있는 중산층의 정치적 무관심이 그 우려의 근거이다. 하긴 푸틴이 대통령에 재선되이 두번째 임기를 시작한 2004년부터어 이미 2008년 대선 전망이 러시아에서는 심심찮은 화제거리였다. 2007년에는 그 윤곽이 가려질 수 있을까? 이 칼럼이 아마도 올해의 마지막 '러시아 이야기'가 될 듯하다. 기사의 원문도 아래에 옮겨놓았다. 아래는 지난 푸틴의 재선 직후부터 3선 반대 투쟁을 벌이고 있는 前세계 체스챔피언 가리 카스파로프.

   

경향신문(06. 12. 30) 러시아 중산층의 '정치 무관심'

보통 이맘때면 다가올 한 해를 설계하느라 분주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러시아에서는 2007년이 아닌 2008년에 더 관심이 쏠려 있다. 과연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공언하는 것처럼 2008년 대통령 임기 만료 이후 권좌에서 물러날 것인가에 관한 것이다. 만일 정말 물러난다면 누구를 후계자로 세울 것인가? 그 후계자는 크렘린 내부에서 발탁될 것인가, 아니면 외부 인사일까?

푸틴이 (퇴임 이후) 최종 조정자 및 의사결정자의 지위를 버리지 않는 한, 격렬한 분쟁이 일어날 공산이 크다. 권력과 부가 분리되지 않고, 모든 정부 기관들이 독립성을 잃어버린 환경에서 최상층부의 권력이동은 폭력적인 재분배로 귀결된다. 따라서 기득권의 유지나 확대를 원하는 정치 엘리트들은 권력 변화에 사활적인 관심을 갖고 있다.

반면 대중은 리더십의 변화를 기꺼이 받아들일 자세가 돼 있다. 국민의 45%는 푸틴이 후계자를 지명하고, 그가 새 대통령이 될 것으로 예상한다. 그런가하면 25%는 푸틴이 헌법을 개정해 세번째 임기를 시작할 것으로 전망했다. 어떤 쪽으로 결론이 나든 권력이동이 최상층부에 의해 결정되고 투표로 추인될 것이라는 걸 대중은 알고 있다.

입법부내 정파 간 균형도 크렘린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그동안 집권 세력은 의원 선거 등을 지속적으로 통제했다. 이에 따라 집권층이 원하지 않는 세력이 내년 12월 의회에 진출할 기회는 없다. 러시아의 보통사람들은 정치에서 배제돼 있으며, 즉각적으로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는 일이 아니면 관심을 두지 않는다. 언론인 암살 등에 대해서도 ‘사업상의 파트너들’에 의해 살해됐을 것으로 믿으면서도 도통 무심하기만 하다.

러시아에서 국가와 국민 간 괴리는 아주 오래된 전통이다. 최근 생활수준이 향상되면서 국민의 정치적 무관심은 더 강해지고 있다. 러시아 국민의 삶은 석유와 가스를 팔아 번 돈으로 공산주의 몰락 이후 어느 때보다 풍요롭다. 정부가 독재로 치닫고 있지만 더 순응적으로 변하고 있다. 반정부 세력은 정부의 핍박보다도 대중의 무관심에 당황해 한다. 선거 결과가 사전 각본대로 나타날 것이기에 대중은 투표하지 않으려 한다. 대중의 정치참여는 자리를 보전하고 재산을 늘리려는 러시아 관료들에게 장애가 될 뿐이다.

누군가 최근 러시아의 모순된 경향을 중산층의 형성과 함께 급속한 관료제의 성장을 바탕으로 한 중앙집권정부의 강화로 설명한 적이 있다. 새로 싹을 틔우는 러시아 중산층은 크렘린의 경제 정책을 개탄하지만 만연한 부패, 사법부 조정, 법치 및 민주주의의 실종 등에 대해서는 눈을 감는다. 그들은 정부에 해명이나 변화를 요구하지 않는다. 당분간 삶은 현재의 모습대로도 충분하다는 것이다.

2008년의 평화로운 권력이양을 위협하는 요소가 있다면, 그것은 대중으로부터가 아니라 권력층 내부에서 생겨날 것이다. 만약 러시아의 중산층이 호시절에 안주해 정치적 무관심을 계속해서 키워간다면은 장차 권력이 관료제에서 포퓰리스트 세력으로 넘어가는 모습을 지켜만 보게 될 것이다.(마샤 리프먼/ 러시아 언론인)

The moscow mystery of 2008

Usually at this time of year, people are obsessed with what the coming year will bring. But in Russia, the real uncertainty concerns 2008, not 2007. Indeed, one can boil Russian politics down to one issue nowadays: Will President Vladimir Putin stay on as president after 2008, despite repeatedly stating that he won’t? And if he indeed steps down, whom will he groom as his replacement? Will his chosen successor belong to one of the Kremlin’s feuding factions? Or will he pick an “outsider”?

Unless Putin maintains his stature as the country’s ultimate arbiter and decision-taker, there is a high risk of fierce infighting. In an environment where power and property are inseparable and all government institutions are emasculated, a major transfer of authority at the top may lead to violent redistribution. Thus, resolving these questions is vital for Russia’s political elites who are anxious to preserve the current perks and gain more.

As for the public, the vast majority appears resigned to accepting whatever is arranged by the leadership. Fully 45% of Russians believe that Putin will name a successor, and that this person will become the new president. Almost a quarter believe that the constitution will be changed so that Putin can have a third term. Either way, it is almost universally understood that the transfer of presidential authority is masterminded at the top and endorsed at the ballot box. The balance of forces in the legislature, too, will be determined by the Kremlin. Over the past years the configuration of the political parties and the election legislation have been repeatedly modified so as to suit the interests of the ruling elite. As a result unwanted forces have no chance in next December’s parliamentary election.

Alienated from politics, ordinary Russians are indifferent to everything that does not immediately affect them, and do not seek to hold anyone accountable. They were not bothered by the journalist Anna Politkovskaya’s recent murder or the assassination of Andrey Kozlov, first deputy chairman of the central bank, or the implications of Alexander Litvinenko’s poisoning (a majority in a recent poll said he was killed by his “business partners”).

The alienation between the state and the people has a long tradition in Russia, and so does public apathy. But these days the apathy is reinforced by improved living standards. Thanks to windfall revenues from oil and gas, Russians live better than ever in the postcommunist times. Moreover, it may be argued that never in Russian history has the proportion of those who enjoy reasonably decent lifestyles been as high as it is today. As a result, people have become even more compliant in the face of increasingly autocratic governance.

Of course, there are plenty of reasons to complain, and people may grumble, but they won’t come together to oppose the status quo. Marginal political groups and figures who stage protests increasingly find themselves confronting official pressure and even harassment ? all the more reason for the broad public to turn away from them.

Since the election results are preordained, many may simply not vote. In fact, today’s Russian state barely has a reason to muster active support. On the contrary, public participation is seen as an obstacle to the goals pursued by the bureaucracy: self-perpetuation and expanding control over lucrative assets. If any among the Russian elite ever nursed modernizing ambitions, they have abandoned them, for without public participation, modernization is a fallacy.

Instead, the Kremlin increasingly draws on the conservative, Soviet-style electorate as its power base, while alienating the advanced, the entrepreneurial, and the best educated. Stephen Jennings, the chairman of the board of Renaissance Capital, an investment group with a decade of experience in Russia, recently noted the country’s “contradictory trends”: the emergence of a “burgeoning middle class” alongside a “highly centralized government, breeding a new class of state oligarchs and a mushrooming bureaucracy.”

The problem is that Russia’s best and brightest, which Jennings praised for “high management skills, professionalism, productivity, and social and economic ambition,” don’t seem to mind their alienation from policy-making. They may resent the Kremlin’s economic policies, but they put up with Russia’s rampant corruption and its disgraceful ratings in competitiveness indices, just as they put up with the general erosion of democracy, manipulation of the judiciary, and weak law enforcement. Like their less advanced compatriots, they don’t seek to hold the government accountable or call for change. For the time being, life is good enough as it is.

Thus, if there is any threat to a smooth transition in 2008, or a risk of subsequent destabilization, it may stem from infighting at the top, not from the public. Optimists hope that at some point Russia’s burgeoning middle class will assume responsibility for Russia’s future and demand a radical improvement in governance. But what would trigger a shift from passive compliance to active public participation?

If good times breed political apathy, and bad policies lead to a socioeconomic decline, Russia’s best and brightest may find themselves outstripped by populist forces.

06. 12. 31.

 

 

 

 

P.S. 러시아의 정치사상사와 현정치에 관한 책들 역시 기대만큼 풍족하지 않다(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책들에 한정하면 더더욱). 저널적인 차원에서라도 기대와 관심에 부응하는 책들이 나왔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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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31 12: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6-12-31 15: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감사합니다. 내년에 허리가 좀 펴질 만한 책들을 골라보겠습니다.^^ 혹은 앞으로는 책을 누워서 보심이...
 

까마득하게 잊고 있던 시 한편을 떠올리게 됐다. 바스코 포파(1922-1991)의 시집 <절름발이 늑대에게 경의를>(문학동네, 2006)이 이번에 출간되었기 때문인데, 내게 포파는 무엇보다도 '작은 상자'의 시인으로 기억돼 있다. 그가 유고슬라비아(지금은 세르비아)의 시인이라는 건 이 참에 알게 됐다(동유럽쪽이란 기억만 갖고 있었다). 마치 오 헨리 단편에서처럼 한 20년만에 절친한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갑다. 바삐 시인과 그의 시에관한 자료들을 검색해보고 몇 가지를 옮겨놓는다. 일단은,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작은 상자'를 다시 읽어보는 게 순서일 것이다(아래는 서재에서 책을 읽고 있는 바스코 포파). 영역시도 연이어 붙여놓으면서.  

 

작은 상자

작은 상자는 이제 젖니가 나고
키가 작고
면적도 부피도 작다.
그게 작은 상자가 갖고 있는 전부다.

작은 상자는 점점 커져서
이제 작은 벽장도 갖게 되었는데,
옛날에는 작은 상자가 그 작은 벽장 속에 들어 있었다.

작은 상자는 날마다 조금씩 크고 쉬지 않고 커졌다.
이젠 그 속에 방과
집과 마을과 땅과
그리고 전에 작은 상자가 들어 있던 세계까지 갖게 되었다.

작은 상자가 제 어렸을 때를 떠올리며
너무나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었기 때문에
다시 작은 상자는 작은 상자로 되돌아갔다.

작은 상자 속에는
아주 작은 세계만 있다.
당신은 작은 상자를 호주머니에 넣을 수도 있고
그러다가 그걸 잃어버릴 수도 있다.

그러니 작은 상자를 조심해야 한다.

The Little Box by Vasko Popa

The little box gets her first teeth
And her little length
Little width little emptiness
And all the rest she has

The little box continues growing
The cupboard that she was inside
Is now inside her

And she grows bigger bigger bigger
Now the room is inside her
And the house and the city and the earth
And the world she was in before

The little box remembers her childhood
And by a great longing
She becomes a little box again

Now in the little box
You have the whole world in miniature
You can easily put in a pocket
Easily steal it lose it

Take care of the little box  

다시 읽어보니까 초현실주의의 분위기가 그대로 전해진다. 이 시집에 주목하고 있는 리뷰는 드문데, 서울신문의 소개기사를 참고로 옮겨놓는다.

서울신문(06. 12. 29) 은유·환상의 유고 詩세계

전쟁의 포성으로만 기억되는 유고슬라비아. 그들의 문학은 어떤 모습일까. 그동안 좀처럼 접하기 어려웠던 만큼 유고슬라비아 문학은 우리에게 낯설고 신기하기만 하다.

문학동네에서 펴낸 유고슬라비아 시인 바스코 포파의 시집 ‘절름발이 늑대에게 경의를’(오민석 옮김)은 호기심의 한 끝을 풀어주기에 충분하다. 포파는 현대 유고슬라비아 문학을 대표하는 초현실주의 시인. ‘작은 상자’를 비롯, 그의 대표시 몇편이 국내에 소개된 적은 있지만 시집의 형태로 전모를 선보이기는 처음이다.

Self-portrait as a wolf, by Anthony Weir

“…암늑대가 살아 있는 한, 할머니는/ 리넨 천 같은 왈라키아 발음으로/ 나를 작은 늑대라고 부를 것이다// 늑대는 나에게 비밀스레/ 날고기를 먹였고 나는 성장하여/ 언젠가 무리를 이끌 것이었다// 나는 내 눈이/어둠 속에서 불타오르기 시작할 것을/믿었다…”

포파의 ‘늑대의 눈’이란 시의 한 대목이다. 포파는 세르비아 전통에서 문학의 전범을 찾는다. 이 시집에 실린 ‘늑대 시편’이 그 한 예다. 세르비아 부족신화에서 늑대는 숭배와 경의의 대상으로 등장한다. 세르비아인들은 늑대의 전사적 기질을 동경한다. 죽은 자의 영혼이 늑대로 부활한다고 믿는 그들은 코소보 평원을 자유롭게 누비는 늑대를 자신의 조상으로 여긴다. 그런 맥락에서 보면 늑대는 시적 화자의 먼 조상이며 한편으론 시인의 자아이기도 하다.

그러나 서글프게도 이 늑대는 죽음이라는 절대 폭력과 싸우는 절름발이 늑대다. 시인은 이 실존적인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세르비아의 애국성인 성(聖) 사바의 존재를 새삼 일깨운다. “별들이 그의 머리 주위를 돌며/ 그에게 살아 있는 후광을 만들어준다// 천둥과 번개가/ 보리수 꽃 흩뿌려진/ 그의 붉은 턱수염 안에서 숨바꼭질을 한다…”(‘성 사바’ 중에서)



세르비아 국민이 그토록 추앙하는 성 사바가 보여준 공동체적 삶이야말로 포파가 초현실주의 언어를 통해 닿고자 했던 이상향이 아닐까. 이 시집은 유고슬라비아 출신의 미국 시인 찰스 시믹이 번역한 영역본 선집을 우리말로 옮긴 것. 그가 비록 포파 시의 가장 이상적인 번역자로 알려져 있지만 이중 번역의 아쉬움은 남는다.(김종면 기자)

06. 12. 30.

P.S. 아쉬움을 덜어줄 만큼 더 소개되기를 기대해본다. 이제 우리가 갖게 된 유고(세르비아) 문학. 작년에 원전 번역으로 출간된 이보 안드리치의 <드리나강의 다리>(문학과지성사, 2005)와 바스코 포파의 시집. 그리고 에미르 쿠스투리차의 초현실주의적(!) 영화들. 그 쿠스투리차가 2006년에 찍은 영화는 특이하게도 다큐멘터리 <마라도나>이다. 하긴, 유고와 아르헨티나는 '마술적 리얼리즘'을 공유하는 나라들이므로 이 둘의 조합이 어색하지만은 않겠다. 작은 '축구신동' 마라도나, 축구장에선 그를 조심해야 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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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6-12-30 10:38   좋아요 0 | URL
오..저 시가 오늘 아침 마음에 들어오네요.바스락 바스락...

로쟈 2006-12-30 12:19   좋아요 0 | URL
우리는 각자의 작은 상자를 갖고 있는지도 모르죠...

Joule 2006-12-30 21:42   좋아요 0 | URL

작은 상자, 저 시를 꽤 오래 찾아다녔더랬어요. 한 번 첫눈에 반한 사람은 시간이 흘러 길에서 우연히 다시 만난대도 또다시 눈길이 가는 것처럼 시도 그래요.


nada 2006-12-30 21:45   좋아요 0 | URL
쿠스트리차와 마라도나라니. 마라도나의 짧은 목에 걸린 은 목걸이마냥 생경하군요. 마이클 만의 알리 꼴 나는 거 아닐까요.

로쟈 2006-12-31 00:18   좋아요 0 | URL
joule님/ 맞습니다.^^
꽃양배추님/ 좀 의외이긴 하지만 생경하지는 않은데요.^^ 그리고 극영화가 아니라 그냥 다큐입니다...
 

오늘자 한겨레를 읽다가 흥미로운 기사가 눈에 띄어 옮겨놓는다. 물론 책에 관한 것이고, 세계 각국의 베스트셀러로 2006년 한해를 되돌아보는 기획기사인데, 그 중 독일편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것이 재작년에 방한한 바 있는 독일 철학자 페터 슬로터다이크의 역사철학서 <분노와 시간>이다. <냉소적 이성비판>으로 명성을 얻은 바로 그 철학자의 최신간이다. 기사를 봐서 흥미로운 내용이 담긴 책인데 내년에 번역돼 나올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 전에 1권만 나오고 소식이 없는 <냉소적 이성비판> 2권이 먼저 번역돼 나와야겠지만.  

 

 

 

 

한겨레(06. 12. 29) 베스트셀러로 짚어본 2006 세계…유럽편

독일에서는 가을 출간된 <분노와 시간>(Zorn und Zeit)이라는 에세이 형식의 역사 철학서가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랐다. 철학서가 베스트셀러에 들기 힘든 건 어디나 매한가지이지만, 이 책은 독일 출판계에서 하나의 신화를 이뤄냈다(*주어캄프출판사에서 출간했고 356쪽 분량이다).

 

 

 

 

 

 

 

 

 

저자인 페터 슬로터다이크는 68세대로 칼스루에 대학에서 철학과 교수로 일하고 있다. 텔레비전 철학토론 프로그램으로 대중에게 낯설지 않은 그는 <냉소적 이성 비판>으로 이미 1980년대에 베스트셀러 철학서를 내놓았다.



‘정치, 심리적 시도’라는 부제를 단 이 책은 세계 역사를 심리, 인류학적 이론을 바탕으로 설명한다. 슬로터다이크는 ‘분노’라는 감정이 역사를 변화시키는 원동력이라고 본다. 즉 억압되어 쌓인 분노가 근대 해방운동, 지난 세기의 전체주의까지의 역사에 기본적으로 작용하는 힘이라는 것이다. 그는 지금까지 서구사회의 역사는 ‘분노 감정의 경영관리’의 역사라고 말한다. 공동체의 분노의 집합은 재화의 축적에 비유된다. 대표적인 예로, 레닌의 코민테른은 인민들의 분노가 모여 작용하는 ‘분노의 세계은행’이다.

반면, 이슬람 세력은 차세대 역사 변화의 원동력이 될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왜냐면 이슬람은 엄청난 선교력이 있고, 특히 소외되고 약한 자들의 마음을 얻고 있기 때문이다. 이슬람 세계의 좌절한 젊은 남성들이 서구세계에 대해 갖는 시기심과 분노는 역사를 바꿀 만한 잠재력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슬로터다이크는 이들이 정치적 저항세력으로서 한계를 갖는다고 지적한다. 이슬람 세력은 정치·문화적 알맹이가 부족해 공산주의 같은 ‘저항세력의 세계은행’을 설립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진단한다.(베를린/한주연 통신원)

06. 12. 29.

 

 

 

 

P.S. 출간돼 있는 역사철학서 몇 권을 나열해본다. 슬로터다이크의 '역사철학'은 아마도 이 계열의 맨마지막 장에 와야 할 듯싶다. 그리고, '냉소적 이성' 외에 '분노'란 말은 슬로터다이크의 키워드로 더 등록해야겠다. '분노의 관리로서의 세계사'는 '자유의 확장으로서의 세계사'(헤겔)와 짝패를 이룰 만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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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mmer 2006-12-29 16:03   좋아요 0 | URL
'분노라는 감정의 경영관리'라는 그의 역사인식은 니체-하이데거의 오묘한 결합으로 보이네요. 덤으로, 니체에 관한 책을 쓴 바 있는 뤼디거 자프란스키와 함께 '철학 사중주'라는 토론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더군요.

로쟈 2006-12-29 16:45   좋아요 0 | URL
독일에선 가장 대중적인 철학자이기도 한가 봅니다...
 

지난주부터 가방에 넣고 다니면서 정작 읽어보지 못하고 있는 책이 있다. 나타샤 시네시오스의 <거울(Mirror)>(2001)이 그것인데, 제목에서 알 수 있지만 타르코프스키의 <거울>(1975)에 대한 '깊이 읽기'이자 '자세히 읽기'이다. 저자는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시나리오 선집(Andrei Tarkovsky: The Screenplays)>(2003)의 공역자이기도 하다.

얼마전에 예고한 바 있는데, 오늘은 타르코프스키가 20년전에 세상을 떠난 날이다. <거울>을 들고 다닌 건 그 때문이다. 하지만 연말에 짬을 낸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새삼 깨닫게 된다. 아니, (물리적) 시간조차도 연말에는 더 빨리 내빼는 게 아닌가 싶다(부끄러워서?). 책은 문고본 판형의 120쪽 분량인데, 주된 내용은 <거울>의 제작과정과 작품에 대한 자세한 분석으로 돼 있다. 마지막 장은 이 영화의 수용에 관한 장이다. 아무려나 영화 <거울>에 대한 가장 상세한 안내서로서 손색이 없다.

이 책의 존재는 사실 몇 달전에 알게 되어 도서관에 구입신청을 했었고 이달 중순에 대출할 수 있었다. 같이 주문한 책이 댓권 되는데 모두 I. B. Tauris출판사에 내는 'KINOfiles Film Companions' 시리즈의 '러시아영화' 편에 들어 있는 책들이다(전체 시리즈의 책임자인 리처드 테일러 자신이 러시아영화 전문가이다). 현재까지는 10편의 영화를 다룬, 10권의 책이 출간돼 있다. 그 10편의 영화는 차례대로, <전함 포템킨>, <카메라를 든 사나이>, <위선의 태양>, <참회>, <침대와 소파>, <거울>, <학이 날다>, <리틀 베라>, <희생>, <폭군 이반> 등이다. 그러니까 에이젠슈테인과 타르코프스키의 영화가 각각 2편씩 목록에 포함돼 있다(<침대와 소파>만이 내가 처음 접하는 영화이다).  

이후에 한 문단을 더 적어내려갔는데, 알라딘의 서버가 다운되는 바람에 날아가버렸다. 어쩌겠는가. 한두 번이 아닌 것을. 여하튼 20주기를 맞이하여 경건하게 타르코프스키와 그의 영화들을 한번쯤 돌이켜보면 좋겠다는 것. 아래 사진은 <거울>에서 자신이 결정적인 실수를 한 줄 알고 인쇄소로 바쁘게 뛰어가는 젊은 시절의 어머니 촬영장면이다. 그러니까 영화에서는 그녀의 뒷모습이 보이게 된다(*자고 일어나니 이미지가 먹통이다. 영화의 시작 장면으로 바꿔놓는다. 남편을 기다리던 젊은 아내, 젊은 엄마의 뒷모습으로. **또 먹통이어서 다시 교체했다).  

 

타르코프스키는 어머니-시간의 뒤통수를 좇아가며 그것을 '봉인된 시간'(=영화) 안에 성공적으로 보존해놓았지만 극장 밖의 우리는 매번 놓치거나 헛걸음만 하게 된다. 시간은 언제나 발빠르게 우리를 앞질러 가기 때문이다. 타르코프스키에 대해 몇 자 적으려던 생각도 저만치 뒤처져 있다. 세밑의 시간은 왜 그리 걸음이 빠른 것인지(부끄러워서일까?). 이제 곧 과거가 되고 역사가 될 시간, 2006년에 작별을 고한다. 아듀, 아듀오스, 우리는 또 한 해를 살아냈다네!...

06. 12. 29-30.

 

 

 

 

P.S. 국내에서 읽어볼 수 있는 타르코프스키 책은 여전히 3권 그대로이다. '러시아 영화 시리즈'에 대한 기대는 한참을 더 미뤄야할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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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30 05: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수유 2006-12-30 09:38   좋아요 0 | URL
저도 저 책을 읽고 싶네요. 저 시리즈들이 번역이라도 되어 나온다면 좋으련만..

로쟈 2006-12-30 12:18   좋아요 0 | URL
**님/ 100불이면 좀 쓰셨군요.^^ 전 국내에서 출시됐을 때 구입했는데.
수유님/ 누가 출간하겠다고 하면 제가 번역이라도 하고 싶은데요...

수유 2007-01-01 11:25   좋아요 0 | URL
정말 로쟈님이 번역하셨으면 좋겠네요. 출판사를 세울만한 역량이 된다면 참 좋겠는데 말이죠.^^;; 그런 꿈을 꾸어보아도 좋을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