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토요일자 한겨레 '책과사람'란에서 가장 크게 다루어진 것은 책세상문고 '우리시대'가 100권을 돌파했다는 소식이다. 탁석산의 <한국의 정체성>부터 구춘권의 <메가테러리즘과 미국의 세계질서전쟁>까지이고 만 5년만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1년에 대략 20권씩의 책을 낸 셈인데, 그간에 국내 출판계를 대표하는 문고본으로 성장했고, 뒤이은 문고본들의 모델이 돼 주었으니 치하할 만한 일이다(물론 문학과지성의 스펙트럼문고가 있었지만, 국내 필자들만의 '인문서'로 채워진 것은 책세상문고만의 덕목이다). 100권 통틀어 65만부가 나갔다고 하니까 권당 평균으로 치자면 6,500부가 나간 셈이고 이건 다른 출판사들이 부러워할 만한 성적이다. 대개 2쇄까지는 찍었다는 얘기니까(본전은 뽑았다는 얘기이기도 하고). 나는 이 시리즈의 책을 10권쯤 읽은 거 같은데, <아리스토텔레스, 경제를 말하다>, <정치와 진리> 등이 기억에 남는 책들이다.

 

 

 

 

 

2003년도부터 나오기 시작한 책세상문고 '세계문학'은 '우리시대'의 기획이 성공한 덕분에 꾸려지게 된 것인데, 이 시리즈의 최신간은 러시아 작가 불가코프의 희곡 <조야의 아파트/질주>이다. <거장과 마르가리타>의 작가로 잘 알려진 불가코프는 비록 작가로서 불운한 생애를 보내긴 했지만, 러시아 20세기의 최대 작가 중 한 사람이면서 동시에 최대 극작가이다. 20세기 작가들 중에서 그는 아마도 가장 자주 공연되는 작가일 것이다. 그의 대표적인 작품은 <백위군>(<투르빈가의 나날들>이 각색본인데, <백위군>이란 이름으로 무대에 더 자주 오른다)과 이번에 번역된 두 작품 등이며, <질주>는 영화로도 제작됐다(국내에도 출시돼 있다). 

 

 

 

 

불가코프의 다른 드라마로는 몰리에르의 생애를 다룬 <위선자들의 밀교>(연극과인간, 2001)가 같은 역자에 이해 번역/소개된바 있으며, 장편 <백위군>(열린책들, 1996), 중편집 <개의 심장>(열린책들, 1998), <비운의 달걀>(1999, 대구효성카톨린대출판부) 등이 번역돼 있다. 그의 중편들은 대부분 풍자소설에 속하며, <백위군>은 내전기를 다룬 작품. 그리고 그의 걸작 <거장과 마르가리타>은 한길사에서 출간된바 있지만, 절판되었고 현재 다른 역자에 의해서 번역이 준비되고 있는 걸로 안다(이 작품은 러시아에서 현재 드라마 시리즈로 제작되고 있다). 대략 이 정도 규모이면 20세기 러시아에서 수위를 다툴 만한 작가의 전모를 어느 정도 가늠해볼 수 있을 듯싶다.

불가코프의 <조야의 아파트>를 제일 먼저 꼽은 것은 책세상문고를 기념하고 작가의 지명도를 고려해서이지만, 한편으론 안면이 있는 역자에게서 책을 선사받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니 나름대로 홍보도 해줄 필요가 있는 것. 하지만, 이런 경우는 지극히 드물어서 나는 대부분의 책들을 내 돈 주고 사서 읽어야 한다.  그건 '악마적인' 차이이다. 증정받은 책들에 대해선 오타나 오역 등에 구애받지 않지만, 내 돈 주고 산 책들에 대해서 나는 엄격하다. 그 책들에는 나의 땀과 수난과 눈물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대강 얼버무리면서 넘어갈 일은 아닌 것이다.

 

 

 

 

두번째로 꼽을 책은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숲)이고, 천병희 교수의 번역이다. 1만 1995행이라는 데 우리말 최초의 완역본이다. <변신이야기>는 이전에 솔출판사(김명복 역, 1993)와 민음사(이윤기 역, 1994/1998) 본이 나와 있지만, 모두 중역본이며 고대 라틴어에서 옮긴 것으로는 이 책이 처음이다. <원전으로 읽는 변신이야기>라고 장황한 제목이 붙은 것은 그러한 사정을 드러내주기 위함일 것이다. 물론 중역이더라도 내용이 정확하고 문체가 유려하다면 굳이 원전 번역이 강조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형편이 그렇지가 않아서 가장 많이 읽히고 있는, 민음 세계문학전집의 간판으로 나온 이윤기본만 하더라도 상당히 많은 오류를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지적된다(강대진의 지적인데, 어느 잡지에 실린 비평문이 그의 서평집 <잔혹한 책읽기>에는 들어가 있지 않다.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원전 번역이 강조되는 건 그 때문이다.

천 교수는 그리스와 라틴 고전문학 번역에 있어서 독보적인 위치에 있는데, 조만간 키케로의 책이 후속작으로 출간될 거라고 한다. 한편 천교수가 번역한 그리스 고전들은 단국대출판부에서 나오고 있는데, 그 책들의 북디자인은 좀 수준 이하다(덕분에 나는 한권의 책도 안 사고 있다). 공들여 번역한 작품들이 허름한 모양새로 나오는 건 좀 무성의하게 보인다. 겉멋만 든 책들보다야 양반이긴 하지만, 좀 때깔이 있는 책들로 다시 나왔으면 싶다.

 

 

 

 

때깔로만 치자면 동문선의 책들도 빠지진 않을 것이다. 내가 비교적 혐오하는 출판사이지만, 전공과 관심 때문에 자주 신간들을 둘러보게 되는 것도 이 출판사의 책들이다. 동문선의 최신간은 주디스 버틀러의 <안티고네의 주장>이다. 버틀러는 <의미를 체현하는 육체(Body Matters)>(인간사랑, 2003)가 소개된바 있는데, 페미니즘 이론과 퀴어이론의 새로운 강자로서 주목받고 있는 여성 이론가이다. 그녀의 대표작은 '페미니즘과 정체성의 전복'이란 부제를 단 <젠더 트러불>이고, <권력의 심리적 삶>, <흥분하기 쉬운 발화> 등의 저서들을 연이어 냈다. 나는 버틀러의 책(복사본)을 여러 권 갖고 있는데, 그건 영문학과 페미니즘쪽에서 주목받는 이론가로 부상함에 따라 그녀의 책 대부분이 저렴한 마스터본으로 돌아다녔기 때문이다. <안티고네의 주장>(2000)은 그 시절에 따로 복사해두었던 책인데, 원서는 103쪽 분량의 얇은 책이다(번역서는 138쪽).

 

 

 

 

아무리 중요한 이론가라 하더라도 (대개의 동문선의 책들이 그런 것처럼) 번역을 신뢰할 수 없으면 나오나 마다한 책들인데(귀국 이후에 내가 읽은 최악은 마슈레의 <문학은 무슨 생각을 하는가>(동문선)였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번역을 하고 출간을 한 것인지 알 수 없는 책. <문학생산이론을 위하여>(백의)와 쌍벽을 이룬다) 다행히도 신간의 경우에는 버틀러 전공자가 번역을 맡았고 (드문 일이지만) 38쪽의 역자 해설까지 덧붙였다. 그러니 다소간 비싼 책이더라도 엉터리는 아닐 것이다.

 

 

 

 

버틀러와 관련해서 읽어볼 만한 논문은 <성관계는 없다>(도서출판b)에 실린 콥젝의 "성과 이성의 안락사"이다. 콥젝은 <젠더 트러블>에서 개진된, 생물학적 성에 대한 버틀러식의 해체에 동의하면서도 성의 문제가 순전히 가변적/수행적인 것이라는 버틀러의 주장에 대해서는 칸트와 라캉을 경유하여 반박한다. 그리고 이러한 기조는 지젝에게서도 이어지는데, 곧 출간예정인 <까다로운 주체>(도서출판b)의 한 장을 지젝은 버틀러에 대한 비판에 할애하고 있기도 하다. 콥젝의 논문은 <나의 욕망을 읽어봐>에 실려 있는데, 그녀의 또 다른 책 <여자가 없다고 상상해봐>는 근간 예정이다.

 

 

 

 

세번째 책은 페루 작가 바르가스 요사의 <리고베르토씨의 비밀노트>(새물결, 2004)이다. 이 책은 작년 12월에 나온 걸로 돼 있는데, 내가 서점에서 책을 본 게 최근이다. 요사의 책으론 <나는 훌리아 아주머니와 결혼했다>(문학동네, 2002)와 <세상종말전쟁>(새물결, 2003) 등이 최근에 나온 작품들이다. 나는 전자를 좀 읽어보았을 뿐이지만, 요사는 남미 3대 작가라는 명성에 걸맞는 '이야기꾼'이다. '요사의 모든 책'이라고 할 만한 것이다. 그러니 나오는 족족 읽어볼 일. 약간 유감스러운 건 책이 두 권을 분권돼 나왔다는 점. 출판사로선 그게 여러 모로 편하고 이익이 되는지 모르겠지만, 두꺼운 책을 선호하는 나로선 불만스럽다. 분량으로 봐선 한권으로 묶여도 됐을 만한 책이다.  

                             

 

 

 

 

네번째 책은 <E=mc2>(생각의나무)이란 베스트셀러를 썼던 데이비드 보더니스의 신간 <일렉트릭 유니버스>(생각의나무)이다. 제목 그대로 전기에 관한 것인데, "전화, 라디오, 레이더, 컴퓨터, 심지어 비아그라까지, 전기력의 힘을 빌어 탄생한 물건과 그들의 역사를 담았다"고. 이런 교양과학서를 읽은 지가 이젠 꽤 되는 것 같다. 휴식 같은 시간들이 내겐 없었던 셈. 에드 레지스의 <누가 아인슈타인의 연구실을 차지했을까>(지호)도 읽어볼 만한 책인데, 나는 이전에 <아인슈타인 방의 사람들>(웅진닷컴, 1993)이란 제목의 번역본으로 읽었다. 프린스턴고등학술연구원 사람들의 '프렌즈' 같은 이야기들. 옛날엔 이런 책들을 읽을 시간이 있었는데...

 

 

 

 

끝으로 벤야민 관련 신간 <발터 벤야민과 메트로폴리스>(효형출판). 수잔 벅 모스의 <발터 벤야민과 아케이드 프로젝트>(문학동네, 2004)와 유사하게 파사주 프로젝트에 대한 해설서인 듯. 382쪽으로 돼 있지만, 번역서의 여백이 상당히 헐렁해서 원서는 300쪽이 안될 것 같다. 이런 식의 두툼한 책은 낭비적이며 책값도 비싸게 매겨진다는 점에서 전혀 반갑지 않다. 얄팍하게 책장사를 하려는 궁리들은 자제해주었으면 좋겠다. 벤야민의 또다른 책으로 <모스크바 일기>(그린비)가 이번주에 출간된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참견하기도 한 책이어서 기대가 된다...

05. 03. 28.

P.S. 다음에는 그간에 나온 영화관련 책들에서 읽고 싶은 것들을 꼽아보도록 하겠다... 

 

 

 

 

P.S.2. 한권만 더. 레비스트로스의 예술론이라고 할 <보다 듣다 읽다>(이매진)이 출간됐다. 원저는 1993년에 나왔고 "인류학자의 시각에서 푸생, 뒤샹, 모네, 들라크루아, 보티첼리를 보고, 라모, 바그너, 베토벤, 로시니를 듣고, 디드로, 랭보, 보들레르를 새롭게 읽어낸다."고 소개되고 있다(레비스트로스는 서양 고전음악의 애호가로서 그에 대한 자부심도 피력한 적이 있다). 그런데, 이 책은 이미 지난 1994년에 <레비스트로스의 미학에세이>(동아출판사)로 나왔던 책이다. 역자는 물론 다르다. 나는 이전에 나온 걸 갖고는 있지만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없는 걸로 봐서 그다지 좋은 번역도 아니었던 듯싶다. '헌 책'이지만 '새 푸대'에 담으면 좀 나아지는 게 있을지도...

05. 03.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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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구두 2005-03-28 16:42   좋아요 0 | URL
앗, 오늘 한겨레에서 다뤄주었군요. 책세상 문고... 기특한 시리즈지요?

로쟈 2005-03-29 13:14   좋아요 0 | URL
'오늘'이 아니라 '지난 토요일'입니다.^^ 바람구두님도 애독하시는 것 같더군요...
 

최근에 나온 책들 얘기를 꺼내놓기 전에 최근에 개봉한 영화 두 편에 대한 얘기부터 늘어놓기로 한다. 그 두 편이란 베르톨루치의 <몽상가들>과 이상일의 <69 식스티나인>이다. 전자는 68년에 관한 영화이고, 후자는 69년에 관한 영화이다. 이미 한국 생활에 적응하고 있는 나로선 영화관에 들락거릴 여유가 전혀 없다는 게 아주 당연하기에, 개봉 영화들을 본 건 물론 아니다. 하지만, <몽상가들>은 러시아에서 산 비디오시디를 노트북에 복사해놓고 있기 때문에 가끔 볼 때가 있다(러시아어 시나리오도 갖고 있다). 그리고 <69>에 대해서는 몇 개의 영화평을 통해서 대략 어림짐작하고 있다.  



비슷한 시기를 다룬 영화이어서인지 근래의 영화평들 가운데는 두 영화를 동시에 언급하고 있는 것도 드물지 않다. 오늘 아침에 전철에서 읽은 영화평론가 김영진의 "<몽상가들>, 혁명은 노는 것"(<필름2.0>)이란 평도 그런 경우인데, 베르톨루치의 영화를 비교적 호의적으로 평하면서 이렇게 언급한다: "물론 <몽상가들>의 결말은 시시하다. 어쩌면 베르톨루치는 그 당시 거리에서 벌어졌던 혁명에 대해서는 말할 게 없었는지도 모른다. 혁명은 성공하지 못했다. 그럴 바에야 지지 않는 법은 웃어주는 것이다. 이는 무라카미 류의 소설 <69>에 나오는 전언이기도 하지만 베르톨루치는 그걸 다른 방식으로 얘기할 뿐이다." 소설 <69>는 물론 영화 <69>의 원작이다. 요컨대, 베르톨루치와 무라카미 류/이상일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같은 내용은 얘기하고 있다는 것. 그 같은 내용이란 글의 제목을 빌자면, '혁명은 노는 것'이라는 전언이다.

<몽상가들>에서 김영진이 가장 충격적이었다고 말하는 장면은 이런 것이다: "영화의 한 장면에서, 테오와 이자벨 부모가 휴가를 마치고 잠시 집에 들렀을 때 그들은 자식들과 그들의 친구가 저질러놓은 완벽한 집안의 무정부주의적 혼란에 질겁하면서도 그걸 존중해준다. 그들은 내색하지 않고 용돈을 던져놓고는 다시 휴가를 떠난다. 이 장면은 충격이다. 다음 세대의 도덕을 현재형으로 강요하지 않는 자그마한 혁명의 도래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보수적이었던 프랑스 사회가 오늘날의 수준만큼이나 진보할 수 있었던 것은 여하튼 실패한 부르주아 혁명이었던 68년 5월 혁명 덕분이다."

갓 스물에 이른 세 청춘남녀가 서로 벗고 뒹굴고 하는 '관능의 막다른 골목에서 혁명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걸 읽어내는 건 평론가의 권리이고 관객의 권리이다. 하지만, 자유로운/방종한 아이들의 '무정부주의적' 혼란을 부모들이 존중해주는 장면에 대해 '충격적'이라고 하는 것은 좀 오버이다. 부모가 그렇게 방임하는 것은 그들이 성인이어서라기보다는 아직 (순진무구한) 어린애들이기 때문은 아닌가? "그들은 내색하지 않고 용돈을 던져놓고는 다시 휴가를 떠난다"는 말에서 확인할 수 있지만, 혁명을 자기들끼리의 '노는 것'으로 전유할 수 있는 물적 토대는 부르주아인 부모의 돈이다. 그 돈으로 히히덕거리면서 "자신들의 출신 성분의 토대를 공격"한다는 게 얼마만큼의 진정성을 가질까? 강남의 여피족들이 자녀가 대마초를 피우고 혼음하는 걸 방임하는 일이 과연 얼마나 '혁명적'일까? "뼛속 깊이까지 가부장적 도덕으로 무장하고 있는 우리의 현실"은 그러한 방임에 의해서 과연 머지 않은 미래에 프랑스 수준만큼 진보할 수 있을까? 뼛속 깊이 가부장적이기는커녕 피부와 머리카락까지 노린내를 풍기면서 길거리에서 자기들끼리의 영어로 떠들어대며 흥청대는 일부 유학생들의 비가부장적인 행태에서 과연 어떤 '진보'를 식별해낼 수 있을까?

해서 영화 <몽상가들>에 베르톨루치 자신과 자신의 세대에 대한 얼마만큼의 애정이 담겨있는지 나로선 가늠할 수 없지만(내가 이 영화에서 읽는 건 주로 영화광 어린애들의 치기에 대한 비아냥이기에), 이 영화가 '청춘판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라는 문구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그의 걸작으로 꼽히는 <순응자>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내가 본 베르톨루치의 걸작은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이며, 거기에는 '몽상'이 아닌 '현실'이 그려져 있다(그러니 '마지막 탱고'는 '마지막 몽상'이기도 하다). 그러니 그러한 현실과의 조우(혹은 상징적 거세)를 장면화하고 있지 않은 영화 <몽상가들>은 역설적이지만, '미성년판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에 불과하다.

"남녀성기의 노출과 혼음을 전면 허용한 것은 처음"(영상물등급위원회 영화등급분류소위원회)이라는 데, 사실이라면 이 영화는 내가 본 러시아판과 마찬가지로 세 남녀가 말 그대로 발가벗고 나온다(이 영화는 영화사적 의미가 아닌 '개봉사적 의미'로 기억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장면 정도로 '성인'영화의 등급을 받을 수 없다는 것 또한 당연하다. 발가벗고 나오면서 부끄러운 줄 모르는 것은 이 영화가 철없는 미성년들의 영화이며, 미성년들을 위한, 애들을 위한 영화이기 때문이다. "마음껏 상상하라, 그리고 마음껏 벗어제껴라, 돈은 줄 테니까."라는 식이니까. '혁명은 노는 것'을 조금 비틀어서 말하자면, '혁명은 돈이 좀 필요한 것'이 될 것이다.



지난주 <필름2.0>은 <몽상가들>에 대해서 김영진과는 전혀 반대되는 평을 실었는데, "발가벗은 육체가 놓친 것"이란 제하의 평에서 평론가 정지연은 이렇게 쓴다: "베르톨루치가 <몽상가들>에서 부활시킨 68년 5월은 혁명조차도 유희로 쾌락했던 시네필들의 몽환적 시기에 다름아니다. 혁명이 계급이 아니라 세대에 의해 수행된다는 벤야민의 직감이 맞는 것이라면, 이들이 혁명을 수행하기란 불가능해 보인다. 테오와 이자벨은 랑글루아 시위에 동참하고, 급진적 사회변화를 거부하는 아버지에 맞서지만, 그 모든 것들은 하나의 제스처에 불과하다. 이들의 방에 붙어 있는 <중국여인>의 포스터, 마오 형상의 스탠드, 들라크루아의 그림은 단지 실내장식물일 뿐이다. 이들은 거리의 진실에 관심이 없다. 그들을 지금 사로잡은 것은 부르주아의 요새와도 같은 아버지의 저택에서 고급 와인과 서로의 육체를 탐하는 에로스의 쾌락일 뿐이다."

다른 대목들에서 비친 '엄숙주의자'적 시선에 내가 동감하는 것은 아니지만, 인용한 대목에 대해서는 십분 동의한다. 다만, 나로선 <몽상가들>을 비판하는 정지연의 시각이 '몽상가들'을 비아냥거리는 베르톨루치의 시각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입각점은 다르더라도). 듣기에 한때 공산주의자였던 베르톨루치는 1970년작 <순응자>를 통해 변절하며 자신의 '아버지-형상'인 고다르를 매우 증오했다고 한다. 내가 <몽상가들>을 처음 보면서 느낀 것은 (프랑스 시네마테크의 설립자인) 랑글루아의 아들들, 고다르와 트뤼포에 대한 베르톨루치의 비아냥이다. 그는 그들을 비판하는 대신에 다만 그들이 순진했다고 말한다. 이미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에서도 그는 68혁명의 '한계'와 '좌절'을 거리를 두고 우회적으로 그려낸바 있다. 그 영화에서 말론 브란도를 베르톨루치와 동일시할 수 없듯이 <몽상가들>에서 (미국에서 건너온) 매튜를 (이탈리아에서 건너갔던) 베르톨루치와 동일시할 수 없다.

나는 그런 방향에서 이 영화에 대한 평이 나오지 않을까 짐작하고 있었는데, <필름2.0>의 두 평론가는 좀 다른 방향에서 영화를 보고 있는 듯하다(러시아어 대사들을 듣는 통에 내가 잘못 이해한 대목들이 있었는지도). 나중에 다른 지면의 영화평들을 들춰봐야겠다(주로 <씨네21>을 보던 내가 <필름2.0>를 들추게 된 건 '돈' 때문이다. 1/3 값이니까. 돈 때문에 고민하는 건 성인의 충분조건은 아니지만 필요조건은 된다. <필름2.0>에서 제일 재미있는 코너는 <토크2.1>이다).

영화 <69> 또한 사정은 달라 보이지 않는다. 그 영화에는 "데모나 바리케이드 같은 것, 멋지다고 생각해"라는 여학생이 나오고, 이 여학생 때문에 학교를 봉쇄하기로 마음먹는 남학생이 등장한다고 하니까. 원작소설보다는 경쾌하다고 하는데, 그래도 기본 설정 자체는 유지되고 있을 터이다. 지난주 문화일보에 실린 영화평(이안젤라의 시네마토크)에 의하면, 이 영화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시골학생들은 "한편으로는 학교 바리케이드 봉쇄를 실행하면서 동시에 다른 한편에서는 록 페스티벌을 기획한다. 한편으로는 미군기지 담을 넘는 반미적 일탈사고를 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흑인병사의 성교장면을 훔쳐보면서 영어와 미국문화에 빠져든다. 왜냐고? 이들이 세상에 이기는 방법으로 택한 전략이란 바로 즐겁게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이 '즐겁게 사는 투쟁 전략 또는 청춘의 핑계'로 지양하고자 하는 것은 "전후 기성세대의 보수적 권위주의와 전공투로 상징되는 좌파학생운동의 급진주의"이다. 그들은 이 양 진영을 조롱한다. 모든 건 "눈 앞에 있는 여학생"을 위한 것, "바리케이드도 페스티발도 그 여학생에게 주목받기 위한 유희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그러한 유희는 청춘의 특권일 수 있다. 하지만, 그 청춘들이 모두 기성세대가 돼 버린 지금도 그럴까?



지난주 <필름2.0>의 <69>를 다룬 영화평에서 평론가 이상용은 (프랑스 68혁명을 모방한) 이 해프닝성 짝뚱에도 진실'은 있다고 쓴다(<몽상가들>에 의하면, 68혁명 또한 폼이자 제스처에 지나지 않지만). "68혁명에 대한 답변이라고 읽히는 프랑스의 철학자 들뢰즈와 가타리의 저서인 <안티 오이디푸스>를 빌자면, 혁명이란 사회나 인간에 대한 의무가 아니라 욕망이어야 한다. 켄 일행은 그 누구보다 자신들의 욕망에 충실하다. 그것이 비록 고다르의 영화를 핑계대어 여학생을 꼬시고, 레드 제플린의 음악을 빌어 자유를 흉내내는 것에 지나지 않더라도 그들은 자신들의 주체할 수 없는 욕망을 충실히 배설한다. 켄은 입버릇처럼 즐거우면 모든 것이 괜찮다고 말한다. 정답은 여기에 있다. 주체할 수 없는 욕망을 담은 청춘의 기관차는 무언가를 재보는 것이 아니라 에너지를 가득 안고 부딪히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지구 반대편에서 체험한 68혁명의 진정한 기운이었다."

재일교포 감독 이양일도 이 영화에서 "지금은 없어진 그 시대 젊은이들의 에너지를 회생시키고 싶었다"라고 말했는데, 그렇다면 '68혁명의 진정한 기운'은 다 어디로 증발한 것일까? 68세대나 69세대가 사회를 이끌어가는 주류, 혹은 기성세대가 된 지금 왜 세상은 그다지 달라지지 않은 걸까? 혹은 왜 이것밖에는 달라지지 않은 걸까? 그건 '즐거움' 자체가 우리 삶의 물적 토대가 아니기 때문이다. 즐거움은 특정한 사회적 토대와 관계가 허용하는 상부구조이자 잉여이고 기분이다. <69>를 쓰는 작가는 그걸 써서 밥벌이를 하는 전업작가이다. 거기에서 즐거움만 읽어내는 건 순진한 태도이다. 다들 아는 것이지만, 69라는 건 특정한 성적 체위이기도 하고 그런 의미에서 '욕망을 대변하는 기호'이기도 하다. 하지만, 69라는 체위만으로는 어떠한 재생산(reproduction)도 가능하지 않다. 바꿔 말하면, 그 욕망은 아무런 물적 토대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그러니, 그러한 기호가 68혁명의 진정한 기운이었다면(<몽상가들>에서도 그렇지만), 혁명이란 그저 폼(form)이며 폼(foam)이다.



 

 

 

마음껏 전시되는 육체들에도 불구하고 <몽상가들>은 내게 틴토 브라스의 영화들보다도 재미가 없었는데(물론 브라스는 주로 엉덩이를 전시한다), <69>는 그보다는 재미있을 걸로 보인다. 하지만, 재미 혹은 재미의 윤리(fun ethic)는 말 그대로 (자기충족적인) 재미를 위한 것이다. 마스터베이션에 불과한 것. 거기에 진정한 혁명이니 기운이니 하는 문구를 갖다 붙이는 건 보기에 불편하다. 혁명이 아무리 대단한 게 아닐지언정 거기엔 피흘림이 있고 피냄새가 섞여 있다(그런 점에서 아직 보지 않았지만, 내가 지지하는 영화는 최양일의 <피와 뼈>이다. '피와 뼈'에 비한다면 '69'는 애들 장난이다). 그게 마스터베이션과의 차이이다...

P.S. 최근에 나온 책 얘기를 하려고 했지만, 영화 얘기가 너무 길어졌다(굳이 책 얘기를 덧붙이자면, 베르톨루치에 관한 것으로 <베르톨루치, 중요한 장면들>(예건사, 1991)을 들어볼 수 있다. 절판된 책이어서 구하기가 쉽진 않지만). 글을 나누는 수밖에. 제목도 바꿔서 걸고. 아즈마 히로키 얘기도 덧붙이려고 했는데, 복사한 글을 들고 오지 않았다. 다음에 보완하기로 한다...

05. 03. 28

 지난주 <한겨레21>에 두 영화에 대한 소개 기사("청춘의 꽃, 68을 기억하는가")가 실린 걸 뒤늦게 읽었다. 내가 읽은 평들 가운데에서는 가장 균형이 잡혀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이 기사를 먼저 읽었더라면 나는 굳이 두 영화에 대해 군말을 덧붙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한 대목만 인용해 둔다:

"두 감독이 돌아보는 60년대는 같으면서 다르다. 두 영화는 60년대를 혁명의 시대이기에 앞서 축제의 계절이었다고 회고한다. <몽상가들>은 섹스를, <69>는 청춘을 내세운다. 인류의 마지막 청춘세대였던 68세대 출신인 베르톨루치 감독은 60년대를 돌아보며 분열한다. 베르톨루치는 희망을 이야기하지만, 정작 영화는 60년대를 조롱한다. 베르톨루치는 “미래에 대해 깊은 우울감을 가지고 있을 요즘 젊은이들에게 나는 긍정적으로 희망으로 가득 찼던 그때를 선물하고 싶다”고 말했다. 하지만 <몽상가들>은 매튜의 시선을 빌려 쌍둥이 남매의 일탈적 행동이 미숙아들의 자폐적 행위에 지나지 않았다고 말한다. 감독은 자신의 세대를 긍정하고 싶어하지만, 감독을 포위한 현실은 감독의 무의식에서 희망을 거세한 듯 보인다. 그의 시선은 자꾸 이상과 현실의 균형을 찾는 매슈에게 쏠린다."

<몽상가들>에 대한 유효하면서도 적절한 읽기이다(내가 말하고 싶었던바 또한 <몽상가들>이 60년대에 대한 베르톨루치의 '조롱'혹은 비아냥이라는 것이다)...

 05. 3.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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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아침부터 아침을 거르고 강의를 마치고 나면, 모처럼(?) 한가하다. 오전부터 당장에 (업무 같은) 공부를 하기엔 뭔가 밑진다는 기분이 들어서 '이럴 땐 이런 거'라는 식으로 책 얘기를 몇 자 적는다. 내가 휴식 혹은 여가를 사용하는 한 가지 방식이다.

 

 

 

 


'최근에 나온 책들'이라고 연재의 제목을 달기는 했지만, 내용은 '최근에 눈에 띈 책들'이라고 해야겠다. 이젠 제법 '당신이 없는 사이에' 나온 책들에 대해서 개관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쑥불쑥 눈에 띄는 책들이 없지 않다. 미국철학자 A. 매킨타이어의 <윤리의 역사, 도덕의 이론>(2004) 같은 게 그렇다. 작년 여름에 나온 걸로 돼 있는데, 원제는 'A Short History of Ethics'이고, 1966년 1판에 이어서 1998년에 2판이 나왔다. 기억에 매킨타이어는 찰스 테일러, 마이클 왈쩌와 함께 존 롤즈의 자유주의에 대항하는 공동체주의 3총사의 한 사람이다.

테일러와 왈쩌는 모두 국내 학술강연에 초빙된바 있지만(각각 <세속화와 현대문명>, <자유주의를 넘어서>라는 강연집을 남겼고, 왈쩌의 경우 작년에 <관용에 대하여>도 번역 출간됐다), 매킨타이어는 상대적으로 관심밖에 놓여 있었던 듯하다. 물론 그의 주저인 <덕 이후After Virtue>가 <미덕의 상실>(문예출판사, 1997)이란 제목으로 진작에 소개된바 있지만, (역시나 번역에 대해서는 불만들이 많고) 그다지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것 같지는 않다. 개인적으로도 <마르쿠제>(지성의 샘, 1994)라는 짤막한 책을 통해서 매킨타이어와 처음 접해보았지만, 그다지 깊은 인상을 받지 못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윤리학에 대한 그의 구도와 아이디어에는 흥미를 놓지 않고 있었는데(나는 그의 주저들을 제본해서 갖고 있다. 란 논문집을 포함해서) 이번에/작년에 나온 그의 또다른 '주저'는 그러한 흥미를 충족시켜줄 만하다.

전체 18장으로 이루어진 책에서 7장까지가 그리스의 윤리학에 할애된 걸 통해서도 알 수 있지만, 매킨타이어의 주된 관심(이면서 전공분야)은 그리스 고전학 쪽이다(학부시절 그의 전공이기도 하다). 즉 그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등의 윤리학에 대해서 우리가 참조해볼 수 있는 가장 신뢰할 만한 저자이다. 게다가 역자도 서문에서 밝히고 있지만, 이 책은 서양윤리학사에 대한 가장 훌륭한 입문서의 하나이다(그러니 좀 읽어줄 필요가 있다). 한가지 흠이라면, 국역본이 98년의 2판이 아닌 66년의 1판을 번역한 책이라는 점. 물론 2판의 서문이 번역돼 있긴 하지만, 본문에서는 1판의 쪽수들이 기재돼 있는바, 2판의 수정/증보된 내용이 (혹 있다면) 반영된 것 같지 않다.

원저의 제목에 Short란 말이 들어가 있지만, 본래 책은 280쪽 정도의 컴팩트한 분량이다. 하지만, (부록이 좀 들어갔다고는 해도) 국역본의 분량은 480쪽이다. 이런 사정은 비단 이 번역서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번역서들의 경우 원서보다 보통 150% 정도로 분량이 불어나는 게 예사인데, 나는 이것이 좀 낭비적이라고 생각한다. 활자를 키우거나 행간 등에 여유를 주는 것이 독자에 대한 배려인지는 모르겠지만, 덕분에 책은 더 두툼해지고 책값은 더 비싸게 매겨진다. 나는 두툼한 책을 선호하긴 하지만, 큼직한 글씨들은 왠지 부담스럽다.

 

 

 

 

두번째로 눈에 띈 책은 <속도와 정치>로 우리에겐 잘 알려진 폴 비릴리오의 <소멸의 미학>(연대출판부, 2004)이다. 이 책 역시 작년 여름에 나온 걸로 돼 있다. 원저는 'The aesthetics of disappearance'(1991)이고, 내 기억엔 언젠가 복사해 두었던 책이다. 그의 책으론 (1994)과 <정보과학의 폭탄>(울력, 2002)의 러시아어본도 나는 갖고 있다. '지각의 병참학' 같은 용어를 화두로 들고 나오는 이 수수께끼 같은 '철학자'를 나는 아직 읽지 않았지만, 그와 자주 비교되는 보드리야르와 마찬가지로 뭔가 계발적인 면모를 그에게서 본다(보드리야르의 번역자가 비릴리오 또한 처음 소개한 건 우연이 아니다. 동시에 유감스럽기도 하지만. <유혹에 대하여> 같은 번역서를 고려해 본다면 말이다). 다르게 생각한다는 것, 혹은 다른 용어/개념으로 사고한다는 것, 우리가 일단 배워야 하는 것은 그런 것이다. 비릴리오의 책으론 <전쟁과 영화>(한나래)도 작년에 출간됐지만, 그다지 미덥지 않은 번역이란 평이다.

 

 

 

 


세번째 책은 미국작가 도널드 바셀미의 <백설공주>(책세상, 2004). 이 책은 작년 12월에 나왔고, 내가 귀국해서 지젝의 <진짜 눈물의 공포>(울력, 2004), 그리고 마야코프스키의 <대중의 취향에 따귀를 때려라>(책세상, 2005)와 함께 가장 먼저 산 책이기도 하다. 바셀미란 이름은 포스트모더니즘이 유행하던 시절에 자주 들어보던 이름이지만, 그의 저작이 본격적으로 소개된 건 이번이 처음인 걸로 안다. 알라딘의 소개를 빌자면, <백설공주>는 "'미국의 보르헤스'로 평가받는 포스트모던 소설의 선구자 바셀미의 장편소설"로서 "제목 그대로 익숙한 그림 형제의 동화 '백설 공주'를 패러디한 내용"이다.

작가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패러디 동화들처럼, 고전 동화 속의 남성중심주의를 찾아내 페미니즘적 시각으로 고쳐 쓰는 작업을 시도하며, 동시에 소설의 배경을 20세기 미국 사회로 설정함으로써 소비 자본주의와 대중문화의 홍수에 떠밀려 가는 현대인들의 일상을 유머러스하게 풍자하고 있다." 그러니 읽어볼 만하지 않을까? 물론 이런 제안을 건네는 나는 아직 이 책을 읽을 시간을 못내고 있지만. 유독 바셀미에 눈길이 간 것은 모스크바에서도 이 책의 러시아어본을 구경했기 때문이다. 사두진 않았지만(영어권 작가들의 경우는 샐린저나 포크너 등의 몇몇 경우를 제외하면 러시아어 작품집을 사지 않았다).


 

 

 

네번째 책 역시 모스크바의 기억과 연관된다. '현대예술의 거장' 시리즈로 나온, 패션누드의 사진작가 핼무트 뉴튼의 자서전 <핼무트 뉴튼Helmut Newton>(을유문화사, 2004)이 그것이다. 작년 11월에 나온 걸로 돼 있는데, 역시나 러시아어본도 작년 가을에 나왔으며 나는 서점에서 구경한 한국어본보다 훨씬 근사한 러시아어본을 갖고 있다(가격은 60% 정도). 나는 사진작가들의 책을 별로 갖고 있지 않지만(가령 <듀안 마이클>(열화당, 1986) 같은 게 예외적이다), 또 사진찍기에도 별 취미가 없지만(나는 모스크바에서 단 한장의 사진도 찍지 않았다, 결과적이긴 하지만), 가끔은 이런 책을 쓰다듬는다. 하긴 누드사진도 꽤 여러장 들어 있긴 하다. 그러니 부실한 번역서들을 읽느라고 눈이 침침할 때쯤이면 한번씩 들여다봄 직하지 않은가?

 

 

 

 

다섯번째 책은 진짜 신간이다. 지난주에 나온 책으로, 헝가리의 2002년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임레 케르테스의 운명 4부작 완결편 <청산>(다른 우리)가 그것이다. 케르테스의 작품인 만큼 또 '아유슈비츠' 얘기이다. 나는 그의 책을 아직 읽은 바 없지만, 이 책을 꼽은 것은 '역시나' 모스크바에서의 기억 때문이다. 류뱐카 역 근처의 <오기>라는 서점에 갔다가 눈에 띄어 산 책 중의 하나가 케르테스의 에세이집이었던 것(거기에는 그의 수상 기념연설문도 실려 있다). 샛노란책의 문고본이었는데, 주로 헝가리 비평가, 철학자들의 책 몇 권 중 하나였다... 그런 책들이 아직 도착하지 않고 있다. 조만간 올 거라는 얘기는 듣고 있지만, 모스크바에서 서울로의 여정은 그리 만만치 않은 모양이다...

P.S. '회사원/철학자' 강유원의 <책과 세계>(살림, 2004)를 읽었다. 이미 아는 사람은 다 알 만큼 필명을 날리고 있는 저자에게는 고유한 문체가 있고, 그걸 곱씹게 만드는 질긴 사유가 있다(<책과 세계>는 최근에 읽은 책들 가운데 가장 '시'에 근접한다. 오늘날 시는 시집이 아니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는 듯하다). 그런 문체와 사유를 길잡이 삼아, 그는 <길가메시 서사시>로부터 <종의 기원>에 이르는, '쓸쓸한 세계'에서 '쓰라린 세계'에 이르는 여정을 독자에게 안내한다. 그가 이전에 쓴 <서양문명의 기반>(미토, 2003)의 축약판이라고 하는데(그 책을 나는 샀는지 안 샀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만하면 어지간한 '문명론'이다(그런 길의 끝에 자크 아탈리 같은 이가 있는 건지, 아놀드 토인비 같은 이가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로크의 '자연권'이나 마르크스의 '종교비판'이 갖는 의미에 대해서 새롭게 생각해볼 수 있었다는 게 이 책을 읽은 성과이지만, 내가 음미하는 건 주로 그의 근육질 문체인바, 그의 문체는 마치 날씬하면서도 잘 단련된 근육을 보는 것 같은 쾌감을 전해준다. 마치 김훈의 글을 읽을 때처럼. 한데, 다른 자리에서 강유원은 '자칭 보수' 김훈을 매우 신랄하게 조롱하고 비판한바 있다. 하지만, "이 지구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 중의 절대 다수가 책을 읽지 않는다. 그들은 평생 동안 살아 있는 자연만을 마주하고 살아간다."(3쪽)라는 글의 시작이나 "먼 옛날의 서사시들은 세계에 대한 과학적 인식 없이도 세계가 쓸쓸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수많은 세월이 지난 다음에도 또다시 같은 것을 알아차리는 건 너무 허망하다. 쓰라린 것이다."(91쪽)라는 마무리에서 나는 적어도 그 정조에 있어서 김훈과의 차별성을 찾지 못하겠다. 저자가 이 책에서 호의를 보이고 있는 것도 로마제국과 대영제국의 지극한 '실용주의' 혹은 '현실주의' 아닌가?

그래서 내가 내린 잠정적인 결론은 '달뜬 낭만주의'를 경멸해마지 않는 이 '회사원/철학자'가 '배고픈 우파'가 아닌가 라는 것이다('배부른 좌파'들이 종종 눈에 띄듯이, '배고픈 우파'도 드물지는 않다). 비록 객관세계를 잊은 철학과 물신숭배에 빠진 자연과학 사이에서 찢긴 채 둘의 화해를 모색하면서(회사원-철학자!)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뭐든지 해볼 작정"이라고 그가 말해놓고는 있지만 말이다. 또 그럴 작정인 만큼 그 또한 곧 배부른 처지가 될 것이다. 그러기를 바란다(그에게도 쓰라린 나날들이 아닌 행복한 나날들을 살 만한 권리는 있는 것이니까).

 

 

 



강유원과 함께 떠올려지는 이름은 <잔혹한 책읽기>(작은이야기, 2004)의 저자 강대진이다. 이 '두 강'은 책읽기의 두 강자이다. 관심분야도 문명사와 고전학 쪽이어서 겹쳐지는 부분도 없지 않다. 두 사람을 읽는 일은 즐겁고 유쾌하다(유머에 있어서는 '쓰라림'을 줄곧 되뇌이는 강유원보다는 강대진이 한수 위이다). 그런 강자들이 주변에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턱없이(=읽은 것도 없이) '강짜'를 쓰는 놈들 말고...

05. 03. 21.

 

 

 

 

P.S.2. 최근에 눈에 띈 책들에 대해서 주로 늘어놓았는데, 최근에 나온 책들 가운데 '확실히' 눈에 띄는 책이 있어서 언급해둔다. <움베르토 에코의 문학강의>(열린책들) 같은 책을 단번에 눌러버린 책인데, 에코도 그다지 유감스러워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건 마틴 가드너가 주석을 단 <앨리스>(북폴리오)이다. 이전에 이 주석본에 대한 얘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이번에 번역돼 나온 건 그 결정판이라고 한다. 가드너는 1960년에 처음 <주석 달린 앨리스>를 출간하고, 이어 1990년에는 <좀더 많은 주석 달린 앨리스>를, 그리고 마침내 2000년에는 그 결정판을 낸 것.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정도는 다들 한권씩 갖고 있거나 한번씩 읽어보셨을 테지만, '앨리스 깊이 읽기'라면 사정이 또 다르지 않을까?

과학 저술가로 유명한 마틴 가드너가 미국의 가장 대표적인 앨리스 전문가라면, 불어권에서 이에 버금할 만한 사람은 장-자크-르세르클이다. 낭테르 대학에서 언어학/영어학 교수로 있다는 그는 루이스 캐럴과 무의미(넌센스) 문학의 전문가이며, 앨리스에 대한 그의 논문은 '피귀르 미틱' 시리즈의 <앨리스>(이룸, 2003)에서 읽어볼 수 있다. 개인적으론 관심을 갖고 있는 저자라서 그의 책 몇 권을 챙겨두고 있다(나는 문학에서의 무의미에 관심을 갖고 있다). 그리고 다 알 만한 얘기지만, 들뢰즈의 <의미의 논리>(한길사, 1999)는 <앨리스>에 대한 들뢰즈식의 '깊이 읽기'이다. <앨리스>를 읽지 않고 <의미의 논리>를 읽는 건(혹은 옮기는 건) 그래서 순서에 맞지 않는다.

한편, 러시아작가이면서 미국작가 블라지미르 나보코프 또한 <앨리스> 애호가이며 러시아어 번역자라는 좀 드물게 알려져 있을 듯하다. 가드너만큼의 주석을 달고 있는 건 아닌데, 한편으론 그럴 필요가 없기도 했다, 나보코프로선. 그의 소설들이 <앨리스>적인 의미-무의미의 유희를 이미 실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대, 롤리타를 읽으려는가, 앨리스도 챙겨가기를!..

05. 03.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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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구두 2005-03-21 16:27   좋아요 0 | URL
헉, 찔린다...
"턱없이(=읽은 것도 없이) '강짜'를 쓰는 놈들 말고... "

로쟈 2005-03-21 16:37   좋아요 0 | URL
설마 바람구두님이?^^

바람구두 2005-03-22 09:29   좋아요 0 | URL
음, 솔직히 한동안은 스스로 천재가 아닐까 의심해본적이 있어요. 흐흐. 턱없이 높게 나온 IQ검사를 믿은 탓일지는 몰라도... 그러다 스스로 그런 류의 인간형이 아니란 것도 그야말로 처절하게 깨달은 뒤로는 공부만이 살 길이다 싶었는데, 독학의 길을 걷는 이들이 지니는 독특한 아우라가 있잖아요. 스승도 없고, 어디 소속되고 싶지도 않다고 생각하면서도(그러니까 학파니 학벌이니를 경멸하면서도) 동시에 체계적인 공부를 하고 싶다는 욕심도 버릴 수 없는 ... 가끔 그런 갈증에 시달리게 되죠. 그런데 지금 막상 체계 안에서 공부를 시작해보니 역시 원치 않는 공부를 덩달아 해야 하는 버거움이랄까, 그런 게 생기더군요. 아무래도 저는 학자라고는 할 수는 없고, 그것을 현실에 적용시키는 실천적인 입장(거창하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현장실무자)에 있다보니 이론과 현실 사이에서는 늘 고민이 되더이다.

바람구두 2005-03-22 09:32   좋아요 0 | URL
참, 비릴리오의 "전쟁과 영화"는 저도 올해초에 구해서 읽었는데...번역은 둘째고, 일단 제게는 좀 어려운 이야기더군요. 종종 이런 소식 올려주시면 도움이 참 많이 됩니다. 흐흐, 고맙다는 말치곤 좀 엉성하죠?

로쟈 2005-03-22 09:48   좋아요 0 | URL
너무 엉성한 게 아니라 너무 '진한' 것 같습니다.^^ 독학자들이 모두 바람구두님이 발자국을 따라 걷다 보면, 그 나름의 호젓한 오솔길이 생길 듯도 합니다. 턱없이 높은 IQ에다가 무한정의 바람기질(=열정)까지, 양수겹장이시군요. 헤헤(도스토예프스키 소설에서는 그렇게들 웃습니다)...

바람구두 2005-03-22 14:30   좋아요 0 | URL
좋게 보아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나저나 예전에 이야기드렸던 것처럼 시간되실 때 한 번 연락주시길 ...

릴케 현상 2005-04-15 23:34   좋아요 0 | URL
우연히 강유원씨 홈에 누가 윗글을 올린 걸 봤어요. 강유원씨 코멘트
으음. 이 글을 읽어보니 제가 우파로군요. <<우정론>>에 대한 글 제목이 '행복한 시대의 징후'이고, <<국부론>>에 대한 제목이 '행복한 날들'이니 "로마제국과 대영제국의 지극한 '실용주의' 혹은 '현실주의'"에 대해 "호의를 보이고" 있다는 판단이 가능하기도 하겠습니다. 그 제목을 곧이곧대로 읽느냐, 경멸적인 의미로 읽느냐는 독자 마음이겠군요.

로쟈 2005-04-18 10:54   좋아요 0 | URL
네, 가보니까 누가 올려놓았더군요. 그리고 "곧이 곧대로 읽느냐, 경멸적인 의미로 읽느냐는 독자의 마음"이라고 코멘트되어 있군요. 저는 강유원씨의 '고전 읽기'를 높이 사지만, 그의 (자기 아이러니를 포함한) '위악적인' 포즈에는 동감하지 않습니다(그는 김훈의 위악적인 포즈는 곧이곧대로 읽더군요). 책이나 철학, 고전에 대한 비아냥을 통해서만 우리는 책과 철학과 고전을 존중할 수 있는 건지 의심스럽기도 하고. 사실 '회사원/철학자'(결국 그는 그런 자기 PR로 유명해졌는데)란 포즈도 그렇지요(그가 아직도 회사원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류의 포즈나 자기과시마저도 없다면, 삶이 퍽 쓸쓸하겠지만, 보기 좋은 건 아닙니다. 더불어, 그는 자신의 정의에 근거하더라도 아주 래디컬한 보수주의자입니다. 그의 말마따나 좌파들은 먹고 사는 거 얘기나 하지 삶의 품위나 교양에 대해서는 얘기하지 않거든요(이문열 같은 고전주의자도 한 사례입니다). 저의 기대는 그가 덜 떨어진 보수, 자격미달의 보수가 아닌, 제대로 된 보수의 진수를 보여주는 것입니다(저는 그런 보수가 소위 '강단 좌파'보다 우리에겐 더 필요하며 더 유익하다고 생각합니다).

릴케 현상 2005-04-20 10:41   좋아요 0 | URL
저는 잘모르지만^^ 제대로 된 보수를 보고 싶은 맘이 더 커요. 전에 김규항씨가 보수는 저 하나만 잘 지켜도 건사한 거라고 했던가요?
 

지난번에 신간 <성관계는 없다>(도서출판b)를 '최근에 나온 책들'의 하나로 꼽았었는데, 나는 필요 때문에 다른 책들보다 먼저 이 책을 손에 들게 되었다. 이 논문선집의 요점 중의 하나는 라캉의 성구분 공식에 대한 독해/이해를 제공하는 것이고, 브루스 핑크의 서론격 글인 "성적 관계 같은 그런 것은 없다"(There's No Such Thing as a Sexual Relationship)은 그런 역할에 충실하다.

 

 

 

 

나는 이전에 같은 테마를 다룬 <라캉과 포스트페미니즘>(이제이북스)을 읽었더랬지만, 그 번역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었던 대목들이 핑크의 글에서는 명쾌하게 정리/해명되고 있었다. 해서, 라캉 읽기의 '걸림돌'이라고 할 만한 몇몇 대목들, 가령 '욕망 그래프', '네 가지 담론', '성 구분 공식' 등에 대해서 이젠 편하게 참조할 수 있는 책들이 우리에겐 주어졌다(앞의 둘에 대해서는 지젝을 참조하면 된다).

 

 

 

 

핑크의 글에 대해서는 편역자 해제에서 다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나는 군말을 덧붙일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해서 독자들은 그냥 읽어나가면 되는데, 여기선 내가 개인적으로 읽어나가다가 유려한 번역이지만 좀 미심쩍게 생각되는 몇몇 부분을 짚어보기로 한다. 옥의 티라고 할 만한 대목들이 몇 군데 있어서이다.

가벼운 것부터 지적하면, 64쪽에서 '사물'이 발견하는 기표의 예로 든 'art'는 '예술'이 아니라 '미술'로 옮겨져야 할 것이다(그러니까 '예술', '음악'이 아니라 '미술', '음악'이다).그건 67쪽에서도 마찬가지이다. 74쪽에서, "적어도 플라톤까지 거슬러 올로가는 저 오래된 형식과 질료의 은유"에서 '형식'은 물론 'form'의 번역이지만, 이 경우에는 '형상'이라고 번역하는 게 관례이다. 나는 '형식(형상)' 정도로 옮겨주는 게 나을 거 같다. 65쪽에서 "원인을 의미화하기"는 "subjectifying of the cause"의 번역인데, 역자가 "signifying of the cause" 정도로 잘못 본 것 같다. 다른 대목의 번역들을 보건대, "원인을 주체화하기"라고 옮겨져야 할 듯싶다. "그 자신의 원인이 되기"란 뜻이니까.

76쪽에서 "라캉은 S(빗금A)에 관해서 직접 언급하지는 않지만"은 "The little Lacan directly says about S(빗금A)"인데, 여기서 little은 형용사나 부사가 아니고 명사이며 (사전에 따르면) '적으나마 있는 것'이란 뜻이다. 그러니까 풀어서 얘기하자면, "라캉이 S(빗금A)에 대해서 직접 언급한 것은 얼마 안되지만, 그에 따르면"이란 뜻이다(요컨대, "직접 언급하지는 않지만"이 아니라 "직접 언급한 것"이다).

78쪽에서 "왜냐하면 그 파트너는 '남자들'이란 범주에 들어가지 않고, 따라서 여자는 남자와 '관계하거나' 남자를 '따르기' 위해서 남자에게 호소할 필요가 전혀 없으니까 말이다."는 "S(빗금A), as that partner is not situated under 'Men' at all, and thus a woman need have no recourse to a man to 'relate' or 'accede' it."의 번역인데, 이건 내가 보기에 오역이다. 역자는 맨마지막에 나오는 it을 남자들(Men)으로 봤는데, 문맥상 '그 파트너'인 S(빗금A)이어야 한다. S(빗금A)는 '남자들'이란 범주에 들어가지 않으니까 당연히 S(빗금A)와의 관계에서 '남자들'은 불필요하다는 얘기이니까(남자를 따르기 위해서 남자에게 호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은 넌센스이다).

81쪽에서 "그것은 남근 경제나 단순한 구조주의 안으로 결코 만회될 수 없다"고 한 것은 "It can never be recuperated into a 'phallic economy' or simple structualism."의 번역인데, (오역을 지적하는 게 아니라) 나라면 "그것은 남근경제나 단순한 구조로 결코 회복될 수 없다"라고 옮기고 싶다. 바로 위 문단에서는 'Sexual relationships'를 '성적 관계'라고 단수로 옮겼으므로 그것을 받는 'they'도 단수인 '그것은'으로 옮겨야 할 것이다(수의 일치상). 아니면, '성적 관계'를 '성적 관계들'로 옮기든가.

85쪽에서 "프로이트는 여자는 법에 대해서 이와는 다른 관계를 맺는다고 제안하는데, 그는 그 관계를 아직 덜 고도로 발달된 자아-이상이나 초자아와 관계지었다."는 "Freud suggests that women have a different relation to the law, which he correlates with a less highly developed ego-ideal or superego"의 번역인데, 역자는 관계사 which의 선행사를 relation으로 보았다. 나는 그게 law가 아닌가라고 생각한다. 지젝이 다른 자리에서 지적하는 바이지만(144쪽) 라캉에게서 법은 상징적 자아-이상으로서의 법과 초자아 차원에서의 법이라는 두 가지 얼굴을 갖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상.  

근간으로 돼 있는 브루스 핑크의 <라캉의 주체(The Lacanian Subject)>는 몇 차례 언급한바 있지만, 가장 명쾌한 라캉 입문서이다. 좋은 번역서가 조만간 나온다면, 라캉에 대한 많은 오해와 갈증이 해소될 걸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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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국 이후 이런저런 알레르기성 질환에 시달리고 이런저런 일에 치이면서 모스크바 후일담이 자꾸 늦춰졌다. 이젠 타이밍도 좀 놓친 감이 없지 않다. 그간에 읽은 이런 저런 글/책들에 대한 이야기 거리들도 분량으론 상당하지만, 그걸 늘어놓을 만한 이런저런 여건이 또한 안되기에 참아 두기로 한다. 아마도 '우편적 불안에 대하여'나 '문학철학에 대하여' 혹은 (여전히) 지젝과 데리다에 대한 이야기들이 기회를 봐서 씌어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직은 그 '기회'가 아니다(박자 타령만 늘어놓다가 음정마저 다 잊어버리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대신에 막간을 이용해서 (한동안) 이전에 해온 일을 이어서 해본다. 어차피 저녁을 먹은 지 얼마 안 되기 때문에 곧장 책을 읽을 수도 없고 해서... 

 

 

 

 

사실 최근에 나온 책들보다 최근에 '다시' 나온 책들이 더 눈길을 끌기도 한다. 가령, 다시 나온 <코스모스>, 다시 나온 <정신현상학>, 다시 나온 <창조적 진화>, 다시 나온 <유한계급론>, 다시 나온 <최초의 3분> 등은 (다시) 읽어볼 만한 고전들이지만, 현재로선 (다시) 책을 살 만한 형편도 아니어서 그냥 넘어가기로 한다. 걔 중 가장 중요한 책은 물론 그간에 절판되었던 <정신현상학>이지만, (기대와는 다르게) 같은 역자의 번역이어서 어떨까 싶긴 하다. 적어도 '한글세대'의 새로운 번역을 기대했었기 때문이다. <창조적 진화>와 관련하여 내가 고대하는 것은 박홍규 교수의 강의록인데, 이건 언제나 정리돼 나올는지. 참고로,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는 러시아에서도 작년에 최초의 번역본이 나왔었다(우리의 경우는 지난 81년에 처음 책이 나왔었고, 나는 84년에 이 책을 용돈을 주고 사서 읽었더랬다).  

 

 

 

 

그런 걸 제외하고 나온 책으로 제일 첫손에 꼽을 만한 건 말라르메의 <시집>(문학과지성사)이다. 대산세계문학총서의 하나로 나온 이 책은 황현산 교수의 번역인데, 원문과 (216쪽에 달하는) 자세한 주석이 붙어 있다(이런 것이 내가 기대하는 번역 시집의 모양새이다). 해서 이 프랑스 상징주의의 대가를 이제는 우리말로 인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게 내가 이 책을 대하는 감회이다. 기존의 번역 시집들이 있긴 하지만, 랭보나 로트레아몽의 경우에도 이런 식의 주석 시집이 나오기를 기대해 마지 않는다. 물론 다른 언어권의 대표적 시인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지만. 문학에서 또 손꼽을 만한 건 이보 안드리치의 소설 <드리나강의 다리>(문학과지성사). 역시나 대산세계문학총서로 나왔다. 지난 1961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이기도 한 이보 안드리치는 (언젠가 소개한바 있듯이) 같은 유고 출신의 영화감독 쿠스투리치가 가장 존경하며 좋아하는 작가이기도 하다. 더불어, 나는 모스크바에서 (좀 무게가 나가는) 러시아어본을 샀었기 때문에, 이 책의 한국어본 출간이 더 반갑다.  

 

 

 

 

두번째로 꼽고 싶은 것은 하이데거. 그의 <이정표>(한길사)가 최근에 출간됐다. 한길그레이트북스 시리즈의 65권, 66권으로 나왔는데, 이 시리즈가 이미 그만한 규모의 책들을 역간해 낸 것이 대견스럽다. 한 200권까지 가게 되면 제법 장관을 이룰 수 있으리라(물론 벌써부터 품절된 책들이 없지 않지만). 하이데거의 다른 책으론 작년에 나온 <진리의 본질에 대하여>(까치글방)도 눈길을 끈다. <이정표>의 경우 나는 오래전에 교보문고에서 구한 영어본을 갖고 있다. 러시아어본도 몇 권 구했지만, 하이데거만큼은 한국어본이 더 많이 나와 있으며 번역 또한 다른 철학자들에 비해 아주 양호한 편이다. 개인적으로 하이데거에 '입문'하게 된 계기가 되었던 책이 지난 94년에 나온 <형이상학 입문>(문예출판사)인데, 검색해보니 품절로 뜬다. 다시 나와도 좋을 만한 책인데.. 

 

 

 

 

교양과학쪽 신간으로는 에드워드 윌슨의 <우리는 지금도 야생을 산다>(바다출판사)가 눈에 띈다. 윌슨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소개가 필요하지 않으리라(그의 책으론 <사회생물학>, <생명의 다양성>, <인간의 본성에 대하여>, 그리고 자서전 <자연주의자> 등이 번역돼 있다). 책의 원제는 'In Search of Nature'(1996)이고, 윌슨의 제자이기도 한 최재천 교수가 번역에 참여했다. 비교적 짧은 분량(204쪽)이니까 단숨에 읽어볼 만한다. 도킨스의 책에 견주자면, <에덴 밖의 강>(동아출판사) 정도가 여기에 대응할 만하겠다. 각각 <인간본성에 대하여>와 <이기적 유전자>에 대해서.  

 

 

 

 

정신분석쪽 신간으로 <성관계는 없다>(도서출판b)가 출간됐다. '러시아문학과 정신분석'이라는 게 이번 학기의 관심주제이기도 해서, 성/성차에 대한 라캉주의 이론을 소개/해명하고 있는 논문모음집인 이 책이 나에겐 아주 요긴하다. 모두 6편의 논문을 싣고 있는데(내가 애초에 기대했던 것보다는 소략한 분량이다), 내가 읽은 대목들에서 번역도 나쁘지 않다. 아마도 그 일부가 이 책에 수록돼 있는, 브루스 핑크의 <라캉의 주체>도 곧 출간되지 않을까 싶은데, 그렇게 되면 아쉬운 대로나마 '라캉 입문'의 길이 좀 트이게 될 것이다. 기간된 책들 가운데 동일한 주제를 다루고 있는 것으로는 엘리자베스 라이트의 <라캉과 포스트페미니즘>(이제이북스)이 있다. 몇 년 전 작고한 라이트 여사의 책은 <정신분석비평>(문예출판사)과 <페미니즘과 정신분석학 사전>(한신문화사)를 비롯해서 여러 권 된다. 그녀는 남편과 함께 블랙웰출판사에서 나온 <지젝 선집(The Zizek Reader)>을 편집하기도 했다.  

 

 

 

 

끝으로 역사분야의 책 가운데에서는 데이비드 하비의 <모더니티의 수도 파리>(생각의 나무)를 언급해두고 싶다(서점에서 이 책을 보자마자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가 떠올랐다). <포스트모더니티의 조건>의 저자로서 국내에도 여러 권의 책이 소개돼 있는 하비는 마르크스주의 지리학자이다. 나로선 이 분야에 문외한인바, 한 추천사를 옮겨오면 "데이비드 하비는 아마 영어권에서 활동하는 도시학자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인물일 것이며, 그러한 그의 역량이 이 책에서 최고도로 발휘되어 있다." 그러니 한번 읽어봄 직하지 않겠는가? 물론 543쪽의 분량이나 28,000원의 가격 모두 만만치는 않다.  

 

 

 

 

최근에 나온 인문서들 가운데는 기획출판들이 자주 눈에 띈다. 살림출판사에서 낸 'e시대의 절대사상' 시리즈(같은 출판사의 '살림클래식'에서도 최근에 프랑스의 저명한 중국학자 마르셀 그라네의 책을 냈다)나 그린비의 '세계를 뒤흔든 선언' 같은 게 그런 사례이다. 4권이 한꺼번에 나온 후자의 시리즈 중에서는 <세계를 뒤흔든 독립선언서> 같은 걸 가장 먼저 읽고 싶은데, 그건 <공산당선언>이나 <시민불복종>, <침묵의 봄>보다 우리에게 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한편으론 데리다의 <법의 힘>(문학과지성사)에 실린, 데리다의 이 선언문 독해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이기도 하고. <테러시대의 철학>, <환대에 대하여>,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 등을 나는 두서없이 읽어보고 있는데, 조만간 독후감을 쓸 수 있기를 희망한다. 물론 요즘 같아서는 그저 희망으로 그칠 수도 있고, '희망에 대하여'로 땜질할 수도 있는 것이지만. 그러다가 망할... 

 

 

 

 

05. 03. 10 

P.S. 굳이 덧붙여 이야기할 만한 책이 출간됐다. 몽테뉴(1533-1592)의 <엣세>가 완역돼 나온 것. <몽테뉴 인생 에세이>(동서문화사)가 그 책이며, 역자는 손우성 교수이다. 프랑스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사상가이자 모랄리스트인 몽테뉴의 책은 그간에 <수상록>이란 제목으로 번역돼 왔지만, 신간은 전 3권 107장의 원서를 최초로 완역한 책이다. 분량은 1294쪽(물론 상당한 분량이긴 하지만 놀라운 분량은 아니다. 내가 갖고 있는 2권 짜리 러시아어 완역본은 그 이상의 쪽수이기 때문이다. 해서 '정말' 완역인지는 실물을 보고 확인해봐야겠다). 올해 나온 고전 번역으로서는 가장 반가운 책이다.  

 

 

 

 

몽테뉴의 수상록은 중3 때 한 라디오 방송에서 여성 작가가 소개하는 걸 듣고 구입해서 읽은 기억이 있는데, 새삼 그 책을 떠올리고 재평가하게 된 건 내가 전공으로 하는 러시아 작가 푸슈킨이 인생관에 있어서 몽테뉴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부터이다. 내가 푸슈킨의 '성숙성'이라고 생각해던 대목들이 몽테뉴의  영향, 혹은 몽테뉴로부터의 감화에 많은 걸 빚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친 것. 그래서 다시금 몽테뉴를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하던 차였는데, 마침 우리말 완역본이 출간된 것이다.  

더불어 파스칼 전문가인 이환 (전)교수의 <몽테뉴의 엣세>(서울대출판부)도 작년말에 출간됐다. 그 전 가을에는 박홍규 교수의 <몽테뉴의 숲에서 거닐다>(청어람미디어)가 출간됐었고. 신뢰할 만한 저자들이기에 두루 참조할 만하다. 그리고 몽테뉴와 그의 시대에 대해서는 홋타 요시에의 3권 짜리 전기 <위대한 교양인 몽테뉴>(한길사)를 참조할 수 있다. 이만하면 몽테뉴는 성찬으로서 모자람이 없다. 남은 건 그 성찬에 초대받는 것이다...  

05. 03.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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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대 2005-03-10 23:34   좋아요 0 | URL
코스모스가 '사이언스 클래식' 시리즈로, 그야말로 고전으로 나온 것은 이해할 만한 일이지만, 출간된 지 20년도 더 됐기 때문에 내용중 상당 부분은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맞지 않습니다. 천문학에 관심 있는 분이라면 몰라도 물리학의 관점에서는 의미가 없는 책입니다. 그보다는 '엘러건트 유니버스(승산)'을 추천하고 싶네요.

가을산 2005-03-11 00:23   좋아요 0 | URL
아무래도 코스모스는 칼 세이건의 전공인 천문학이 중심이에요.
그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새 세대에게 '영감'을 줄 수 있다는 면에서 아직도 코스모스의 역할이 있다고 봅니다.

비로그인 2005-03-11 09:05   좋아요 0 | URL
이보 안드리치의 <드리나강의 다리> 재출간 저도 반갑군요. 옛 책을 가지고 있었는데 서울집을 좀 뒤져봐야겠습니다. 아무래도 분실한것 같아요...

로쟈 2005-03-11 11:53   좋아요 0 | URL
사놓고 읽진 못했지만, <엘러건트 유니버스>가 '새로운' 클래식이 될 거라는 건 예상해볼 만합니다(새로 나온 <코스모스>는 사진도판이 들어간 게 장점이라더군요). <드리나강의 다리>가 옛날 어느 전집에 들어 있었나요? 저도 본 것 같기도 한데, 갖고 있지 않은 책이라 긴가민가 합니다...

바람구두 2005-03-11 12:30   좋아요 0 | URL
오호... 추천합니다.

비로그인 2005-03-11 13:01   좋아요 0 | URL
전집에 들어있었던 건 아닙니다. 단행본이었죠.일테면 삼중당문고등의 전집류가 나오기도 훨씬전의 책입니다. 아무래도 잃버렸다고 단정을 지었지만 뒤져보아야 할 것입니다. 주말에..그리고, 러시아어를 알지도 못하면서 러시아본을 갖고계신것에 샘을 내봅니다^^

비연 2005-03-11 13:47   좋아요 0 | URL
추천합니다^^

udeis 2006-01-17 02:18   좋아요 0 | URL
<형이상학 입문>은... 기왕 절판된 마당에 새로운 번역이 나오길 바랍니다.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