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국 이후 이런저런 알레르기성 질환에 시달리고 이런저런 일에 치이면서 모스크바 후일담이 자꾸 늦춰졌다. 이젠 타이밍도 좀 놓친 감이 없지 않다. 그간에 읽은 이런 저런 글/책들에 대한 이야기 거리들도 분량으론 상당하지만, 그걸 늘어놓을 만한 이런저런 여건이 또한 안되기에 참아 두기로 한다. 아마도 '우편적 불안에 대하여'나 '문학철학에 대하여' 혹은 (여전히) 지젝과 데리다에 대한 이야기들이 기회를 봐서 씌어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직은 그 '기회'가 아니다(박자 타령만 늘어놓다가 음정마저 다 잊어버리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대신에 막간을 이용해서 (한동안) 이전에 해온 일을 이어서 해본다. 어차피 저녁을 먹은 지 얼마 안 되기 때문에 곧장 책을 읽을 수도 없고 해서... 

 

 

 

 

사실 최근에 나온 책들보다 최근에 '다시' 나온 책들이 더 눈길을 끌기도 한다. 가령, 다시 나온 <코스모스>, 다시 나온 <정신현상학>, 다시 나온 <창조적 진화>, 다시 나온 <유한계급론>, 다시 나온 <최초의 3분> 등은 (다시) 읽어볼 만한 고전들이지만, 현재로선 (다시) 책을 살 만한 형편도 아니어서 그냥 넘어가기로 한다. 걔 중 가장 중요한 책은 물론 그간에 절판되었던 <정신현상학>이지만, (기대와는 다르게) 같은 역자의 번역이어서 어떨까 싶긴 하다. 적어도 '한글세대'의 새로운 번역을 기대했었기 때문이다. <창조적 진화>와 관련하여 내가 고대하는 것은 박홍규 교수의 강의록인데, 이건 언제나 정리돼 나올는지. 참고로,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는 러시아에서도 작년에 최초의 번역본이 나왔었다(우리의 경우는 지난 81년에 처음 책이 나왔었고, 나는 84년에 이 책을 용돈을 주고 사서 읽었더랬다).  

 

 

 

 

그런 걸 제외하고 나온 책으로 제일 첫손에 꼽을 만한 건 말라르메의 <시집>(문학과지성사)이다. 대산세계문학총서의 하나로 나온 이 책은 황현산 교수의 번역인데, 원문과 (216쪽에 달하는) 자세한 주석이 붙어 있다(이런 것이 내가 기대하는 번역 시집의 모양새이다). 해서 이 프랑스 상징주의의 대가를 이제는 우리말로 인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게 내가 이 책을 대하는 감회이다. 기존의 번역 시집들이 있긴 하지만, 랭보나 로트레아몽의 경우에도 이런 식의 주석 시집이 나오기를 기대해 마지 않는다. 물론 다른 언어권의 대표적 시인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지만. 문학에서 또 손꼽을 만한 건 이보 안드리치의 소설 <드리나강의 다리>(문학과지성사). 역시나 대산세계문학총서로 나왔다. 지난 1961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이기도 한 이보 안드리치는 (언젠가 소개한바 있듯이) 같은 유고 출신의 영화감독 쿠스투리치가 가장 존경하며 좋아하는 작가이기도 하다. 더불어, 나는 모스크바에서 (좀 무게가 나가는) 러시아어본을 샀었기 때문에, 이 책의 한국어본 출간이 더 반갑다.  

 

 

 

 

두번째로 꼽고 싶은 것은 하이데거. 그의 <이정표>(한길사)가 최근에 출간됐다. 한길그레이트북스 시리즈의 65권, 66권으로 나왔는데, 이 시리즈가 이미 그만한 규모의 책들을 역간해 낸 것이 대견스럽다. 한 200권까지 가게 되면 제법 장관을 이룰 수 있으리라(물론 벌써부터 품절된 책들이 없지 않지만). 하이데거의 다른 책으론 작년에 나온 <진리의 본질에 대하여>(까치글방)도 눈길을 끈다. <이정표>의 경우 나는 오래전에 교보문고에서 구한 영어본을 갖고 있다. 러시아어본도 몇 권 구했지만, 하이데거만큼은 한국어본이 더 많이 나와 있으며 번역 또한 다른 철학자들에 비해 아주 양호한 편이다. 개인적으로 하이데거에 '입문'하게 된 계기가 되었던 책이 지난 94년에 나온 <형이상학 입문>(문예출판사)인데, 검색해보니 품절로 뜬다. 다시 나와도 좋을 만한 책인데.. 

 

 

 

 

교양과학쪽 신간으로는 에드워드 윌슨의 <우리는 지금도 야생을 산다>(바다출판사)가 눈에 띈다. 윌슨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소개가 필요하지 않으리라(그의 책으론 <사회생물학>, <생명의 다양성>, <인간의 본성에 대하여>, 그리고 자서전 <자연주의자> 등이 번역돼 있다). 책의 원제는 'In Search of Nature'(1996)이고, 윌슨의 제자이기도 한 최재천 교수가 번역에 참여했다. 비교적 짧은 분량(204쪽)이니까 단숨에 읽어볼 만한다. 도킨스의 책에 견주자면, <에덴 밖의 강>(동아출판사) 정도가 여기에 대응할 만하겠다. 각각 <인간본성에 대하여>와 <이기적 유전자>에 대해서.  

 

 

 

 

정신분석쪽 신간으로 <성관계는 없다>(도서출판b)가 출간됐다. '러시아문학과 정신분석'이라는 게 이번 학기의 관심주제이기도 해서, 성/성차에 대한 라캉주의 이론을 소개/해명하고 있는 논문모음집인 이 책이 나에겐 아주 요긴하다. 모두 6편의 논문을 싣고 있는데(내가 애초에 기대했던 것보다는 소략한 분량이다), 내가 읽은 대목들에서 번역도 나쁘지 않다. 아마도 그 일부가 이 책에 수록돼 있는, 브루스 핑크의 <라캉의 주체>도 곧 출간되지 않을까 싶은데, 그렇게 되면 아쉬운 대로나마 '라캉 입문'의 길이 좀 트이게 될 것이다. 기간된 책들 가운데 동일한 주제를 다루고 있는 것으로는 엘리자베스 라이트의 <라캉과 포스트페미니즘>(이제이북스)이 있다. 몇 년 전 작고한 라이트 여사의 책은 <정신분석비평>(문예출판사)과 <페미니즘과 정신분석학 사전>(한신문화사)를 비롯해서 여러 권 된다. 그녀는 남편과 함께 블랙웰출판사에서 나온 <지젝 선집(The Zizek Reader)>을 편집하기도 했다.  

 

 

 

 

끝으로 역사분야의 책 가운데에서는 데이비드 하비의 <모더니티의 수도 파리>(생각의 나무)를 언급해두고 싶다(서점에서 이 책을 보자마자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가 떠올랐다). <포스트모더니티의 조건>의 저자로서 국내에도 여러 권의 책이 소개돼 있는 하비는 마르크스주의 지리학자이다. 나로선 이 분야에 문외한인바, 한 추천사를 옮겨오면 "데이비드 하비는 아마 영어권에서 활동하는 도시학자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인물일 것이며, 그러한 그의 역량이 이 책에서 최고도로 발휘되어 있다." 그러니 한번 읽어봄 직하지 않겠는가? 물론 543쪽의 분량이나 28,000원의 가격 모두 만만치는 않다.  

 

 

 

 

최근에 나온 인문서들 가운데는 기획출판들이 자주 눈에 띈다. 살림출판사에서 낸 'e시대의 절대사상' 시리즈(같은 출판사의 '살림클래식'에서도 최근에 프랑스의 저명한 중국학자 마르셀 그라네의 책을 냈다)나 그린비의 '세계를 뒤흔든 선언' 같은 게 그런 사례이다. 4권이 한꺼번에 나온 후자의 시리즈 중에서는 <세계를 뒤흔든 독립선언서> 같은 걸 가장 먼저 읽고 싶은데, 그건 <공산당선언>이나 <시민불복종>, <침묵의 봄>보다 우리에게 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한편으론 데리다의 <법의 힘>(문학과지성사)에 실린, 데리다의 이 선언문 독해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이기도 하고. <테러시대의 철학>, <환대에 대하여>,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 등을 나는 두서없이 읽어보고 있는데, 조만간 독후감을 쓸 수 있기를 희망한다. 물론 요즘 같아서는 그저 희망으로 그칠 수도 있고, '희망에 대하여'로 땜질할 수도 있는 것이지만. 그러다가 망할... 

 

 

 

 

05. 03. 10 

P.S. 굳이 덧붙여 이야기할 만한 책이 출간됐다. 몽테뉴(1533-1592)의 <엣세>가 완역돼 나온 것. <몽테뉴 인생 에세이>(동서문화사)가 그 책이며, 역자는 손우성 교수이다. 프랑스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사상가이자 모랄리스트인 몽테뉴의 책은 그간에 <수상록>이란 제목으로 번역돼 왔지만, 신간은 전 3권 107장의 원서를 최초로 완역한 책이다. 분량은 1294쪽(물론 상당한 분량이긴 하지만 놀라운 분량은 아니다. 내가 갖고 있는 2권 짜리 러시아어 완역본은 그 이상의 쪽수이기 때문이다. 해서 '정말' 완역인지는 실물을 보고 확인해봐야겠다). 올해 나온 고전 번역으로서는 가장 반가운 책이다.  

 

 

 

 

몽테뉴의 수상록은 중3 때 한 라디오 방송에서 여성 작가가 소개하는 걸 듣고 구입해서 읽은 기억이 있는데, 새삼 그 책을 떠올리고 재평가하게 된 건 내가 전공으로 하는 러시아 작가 푸슈킨이 인생관에 있어서 몽테뉴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부터이다. 내가 푸슈킨의 '성숙성'이라고 생각해던 대목들이 몽테뉴의  영향, 혹은 몽테뉴로부터의 감화에 많은 걸 빚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친 것. 그래서 다시금 몽테뉴를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하던 차였는데, 마침 우리말 완역본이 출간된 것이다.  

더불어 파스칼 전문가인 이환 (전)교수의 <몽테뉴의 엣세>(서울대출판부)도 작년말에 출간됐다. 그 전 가을에는 박홍규 교수의 <몽테뉴의 숲에서 거닐다>(청어람미디어)가 출간됐었고. 신뢰할 만한 저자들이기에 두루 참조할 만하다. 그리고 몽테뉴와 그의 시대에 대해서는 홋타 요시에의 3권 짜리 전기 <위대한 교양인 몽테뉴>(한길사)를 참조할 수 있다. 이만하면 몽테뉴는 성찬으로서 모자람이 없다. 남은 건 그 성찬에 초대받는 것이다...  

05. 03.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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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대 2005-03-10 23:34   좋아요 0 | URL
코스모스가 '사이언스 클래식' 시리즈로, 그야말로 고전으로 나온 것은 이해할 만한 일이지만, 출간된 지 20년도 더 됐기 때문에 내용중 상당 부분은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맞지 않습니다. 천문학에 관심 있는 분이라면 몰라도 물리학의 관점에서는 의미가 없는 책입니다. 그보다는 '엘러건트 유니버스(승산)'을 추천하고 싶네요.

가을산 2005-03-11 00:23   좋아요 0 | URL
아무래도 코스모스는 칼 세이건의 전공인 천문학이 중심이에요.
그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새 세대에게 '영감'을 줄 수 있다는 면에서 아직도 코스모스의 역할이 있다고 봅니다.

비로그인 2005-03-11 09:05   좋아요 0 | URL
이보 안드리치의 <드리나강의 다리> 재출간 저도 반갑군요. 옛 책을 가지고 있었는데 서울집을 좀 뒤져봐야겠습니다. 아무래도 분실한것 같아요...

로쟈 2005-03-11 11:53   좋아요 0 | URL
사놓고 읽진 못했지만, <엘러건트 유니버스>가 '새로운' 클래식이 될 거라는 건 예상해볼 만합니다(새로 나온 <코스모스>는 사진도판이 들어간 게 장점이라더군요). <드리나강의 다리>가 옛날 어느 전집에 들어 있었나요? 저도 본 것 같기도 한데, 갖고 있지 않은 책이라 긴가민가 합니다...

바람구두 2005-03-11 12:30   좋아요 0 | URL
오호... 추천합니다.

비로그인 2005-03-11 13:01   좋아요 0 | URL
전집에 들어있었던 건 아닙니다. 단행본이었죠.일테면 삼중당문고등의 전집류가 나오기도 훨씬전의 책입니다. 아무래도 잃버렸다고 단정을 지었지만 뒤져보아야 할 것입니다. 주말에..그리고, 러시아어를 알지도 못하면서 러시아본을 갖고계신것에 샘을 내봅니다^^

비연 2005-03-11 13:47   좋아요 0 | URL
추천합니다^^

udeis 2006-01-17 02:18   좋아요 0 | URL
<형이상학 입문>은... 기왕 절판된 마당에 새로운 번역이 나오길 바랍니다.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