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나온 책들 얘기를 꺼내놓기 전에 최근에 개봉한 영화 두 편에 대한 얘기부터 늘어놓기로 한다. 그 두 편이란 베르톨루치의 <몽상가들>과 이상일의 <69 식스티나인>이다. 전자는 68년에 관한 영화이고, 후자는 69년에 관한 영화이다. 이미 한국 생활에 적응하고 있는 나로선 영화관에 들락거릴 여유가 전혀 없다는 게 아주 당연하기에, 개봉 영화들을 본 건 물론 아니다. 하지만, <몽상가들>은 러시아에서 산 비디오시디를 노트북에 복사해놓고 있기 때문에 가끔 볼 때가 있다(러시아어 시나리오도 갖고 있다). 그리고 <69>에 대해서는 몇 개의 영화평을 통해서 대략 어림짐작하고 있다.  



비슷한 시기를 다룬 영화이어서인지 근래의 영화평들 가운데는 두 영화를 동시에 언급하고 있는 것도 드물지 않다. 오늘 아침에 전철에서 읽은 영화평론가 김영진의 "<몽상가들>, 혁명은 노는 것"(<필름2.0>)이란 평도 그런 경우인데, 베르톨루치의 영화를 비교적 호의적으로 평하면서 이렇게 언급한다: "물론 <몽상가들>의 결말은 시시하다. 어쩌면 베르톨루치는 그 당시 거리에서 벌어졌던 혁명에 대해서는 말할 게 없었는지도 모른다. 혁명은 성공하지 못했다. 그럴 바에야 지지 않는 법은 웃어주는 것이다. 이는 무라카미 류의 소설 <69>에 나오는 전언이기도 하지만 베르톨루치는 그걸 다른 방식으로 얘기할 뿐이다." 소설 <69>는 물론 영화 <69>의 원작이다. 요컨대, 베르톨루치와 무라카미 류/이상일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같은 내용은 얘기하고 있다는 것. 그 같은 내용이란 글의 제목을 빌자면, '혁명은 노는 것'이라는 전언이다.

<몽상가들>에서 김영진이 가장 충격적이었다고 말하는 장면은 이런 것이다: "영화의 한 장면에서, 테오와 이자벨 부모가 휴가를 마치고 잠시 집에 들렀을 때 그들은 자식들과 그들의 친구가 저질러놓은 완벽한 집안의 무정부주의적 혼란에 질겁하면서도 그걸 존중해준다. 그들은 내색하지 않고 용돈을 던져놓고는 다시 휴가를 떠난다. 이 장면은 충격이다. 다음 세대의 도덕을 현재형으로 강요하지 않는 자그마한 혁명의 도래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보수적이었던 프랑스 사회가 오늘날의 수준만큼이나 진보할 수 있었던 것은 여하튼 실패한 부르주아 혁명이었던 68년 5월 혁명 덕분이다."

갓 스물에 이른 세 청춘남녀가 서로 벗고 뒹굴고 하는 '관능의 막다른 골목에서 혁명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걸 읽어내는 건 평론가의 권리이고 관객의 권리이다. 하지만, 자유로운/방종한 아이들의 '무정부주의적' 혼란을 부모들이 존중해주는 장면에 대해 '충격적'이라고 하는 것은 좀 오버이다. 부모가 그렇게 방임하는 것은 그들이 성인이어서라기보다는 아직 (순진무구한) 어린애들이기 때문은 아닌가? "그들은 내색하지 않고 용돈을 던져놓고는 다시 휴가를 떠난다"는 말에서 확인할 수 있지만, 혁명을 자기들끼리의 '노는 것'으로 전유할 수 있는 물적 토대는 부르주아인 부모의 돈이다. 그 돈으로 히히덕거리면서 "자신들의 출신 성분의 토대를 공격"한다는 게 얼마만큼의 진정성을 가질까? 강남의 여피족들이 자녀가 대마초를 피우고 혼음하는 걸 방임하는 일이 과연 얼마나 '혁명적'일까? "뼛속 깊이까지 가부장적 도덕으로 무장하고 있는 우리의 현실"은 그러한 방임에 의해서 과연 머지 않은 미래에 프랑스 수준만큼 진보할 수 있을까? 뼛속 깊이 가부장적이기는커녕 피부와 머리카락까지 노린내를 풍기면서 길거리에서 자기들끼리의 영어로 떠들어대며 흥청대는 일부 유학생들의 비가부장적인 행태에서 과연 어떤 '진보'를 식별해낼 수 있을까?

해서 영화 <몽상가들>에 베르톨루치 자신과 자신의 세대에 대한 얼마만큼의 애정이 담겨있는지 나로선 가늠할 수 없지만(내가 이 영화에서 읽는 건 주로 영화광 어린애들의 치기에 대한 비아냥이기에), 이 영화가 '청춘판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라는 문구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그의 걸작으로 꼽히는 <순응자>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내가 본 베르톨루치의 걸작은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이며, 거기에는 '몽상'이 아닌 '현실'이 그려져 있다(그러니 '마지막 탱고'는 '마지막 몽상'이기도 하다). 그러니 그러한 현실과의 조우(혹은 상징적 거세)를 장면화하고 있지 않은 영화 <몽상가들>은 역설적이지만, '미성년판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에 불과하다.

"남녀성기의 노출과 혼음을 전면 허용한 것은 처음"(영상물등급위원회 영화등급분류소위원회)이라는 데, 사실이라면 이 영화는 내가 본 러시아판과 마찬가지로 세 남녀가 말 그대로 발가벗고 나온다(이 영화는 영화사적 의미가 아닌 '개봉사적 의미'로 기억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장면 정도로 '성인'영화의 등급을 받을 수 없다는 것 또한 당연하다. 발가벗고 나오면서 부끄러운 줄 모르는 것은 이 영화가 철없는 미성년들의 영화이며, 미성년들을 위한, 애들을 위한 영화이기 때문이다. "마음껏 상상하라, 그리고 마음껏 벗어제껴라, 돈은 줄 테니까."라는 식이니까. '혁명은 노는 것'을 조금 비틀어서 말하자면, '혁명은 돈이 좀 필요한 것'이 될 것이다.



지난주 <필름2.0>은 <몽상가들>에 대해서 김영진과는 전혀 반대되는 평을 실었는데, "발가벗은 육체가 놓친 것"이란 제하의 평에서 평론가 정지연은 이렇게 쓴다: "베르톨루치가 <몽상가들>에서 부활시킨 68년 5월은 혁명조차도 유희로 쾌락했던 시네필들의 몽환적 시기에 다름아니다. 혁명이 계급이 아니라 세대에 의해 수행된다는 벤야민의 직감이 맞는 것이라면, 이들이 혁명을 수행하기란 불가능해 보인다. 테오와 이자벨은 랑글루아 시위에 동참하고, 급진적 사회변화를 거부하는 아버지에 맞서지만, 그 모든 것들은 하나의 제스처에 불과하다. 이들의 방에 붙어 있는 <중국여인>의 포스터, 마오 형상의 스탠드, 들라크루아의 그림은 단지 실내장식물일 뿐이다. 이들은 거리의 진실에 관심이 없다. 그들을 지금 사로잡은 것은 부르주아의 요새와도 같은 아버지의 저택에서 고급 와인과 서로의 육체를 탐하는 에로스의 쾌락일 뿐이다."

다른 대목들에서 비친 '엄숙주의자'적 시선에 내가 동감하는 것은 아니지만, 인용한 대목에 대해서는 십분 동의한다. 다만, 나로선 <몽상가들>을 비판하는 정지연의 시각이 '몽상가들'을 비아냥거리는 베르톨루치의 시각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입각점은 다르더라도). 듣기에 한때 공산주의자였던 베르톨루치는 1970년작 <순응자>를 통해 변절하며 자신의 '아버지-형상'인 고다르를 매우 증오했다고 한다. 내가 <몽상가들>을 처음 보면서 느낀 것은 (프랑스 시네마테크의 설립자인) 랑글루아의 아들들, 고다르와 트뤼포에 대한 베르톨루치의 비아냥이다. 그는 그들을 비판하는 대신에 다만 그들이 순진했다고 말한다. 이미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에서도 그는 68혁명의 '한계'와 '좌절'을 거리를 두고 우회적으로 그려낸바 있다. 그 영화에서 말론 브란도를 베르톨루치와 동일시할 수 없듯이 <몽상가들>에서 (미국에서 건너온) 매튜를 (이탈리아에서 건너갔던) 베르톨루치와 동일시할 수 없다.

나는 그런 방향에서 이 영화에 대한 평이 나오지 않을까 짐작하고 있었는데, <필름2.0>의 두 평론가는 좀 다른 방향에서 영화를 보고 있는 듯하다(러시아어 대사들을 듣는 통에 내가 잘못 이해한 대목들이 있었는지도). 나중에 다른 지면의 영화평들을 들춰봐야겠다(주로 <씨네21>을 보던 내가 <필름2.0>를 들추게 된 건 '돈' 때문이다. 1/3 값이니까. 돈 때문에 고민하는 건 성인의 충분조건은 아니지만 필요조건은 된다. <필름2.0>에서 제일 재미있는 코너는 <토크2.1>이다).

영화 <69> 또한 사정은 달라 보이지 않는다. 그 영화에는 "데모나 바리케이드 같은 것, 멋지다고 생각해"라는 여학생이 나오고, 이 여학생 때문에 학교를 봉쇄하기로 마음먹는 남학생이 등장한다고 하니까. 원작소설보다는 경쾌하다고 하는데, 그래도 기본 설정 자체는 유지되고 있을 터이다. 지난주 문화일보에 실린 영화평(이안젤라의 시네마토크)에 의하면, 이 영화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시골학생들은 "한편으로는 학교 바리케이드 봉쇄를 실행하면서 동시에 다른 한편에서는 록 페스티벌을 기획한다. 한편으로는 미군기지 담을 넘는 반미적 일탈사고를 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흑인병사의 성교장면을 훔쳐보면서 영어와 미국문화에 빠져든다. 왜냐고? 이들이 세상에 이기는 방법으로 택한 전략이란 바로 즐겁게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이 '즐겁게 사는 투쟁 전략 또는 청춘의 핑계'로 지양하고자 하는 것은 "전후 기성세대의 보수적 권위주의와 전공투로 상징되는 좌파학생운동의 급진주의"이다. 그들은 이 양 진영을 조롱한다. 모든 건 "눈 앞에 있는 여학생"을 위한 것, "바리케이드도 페스티발도 그 여학생에게 주목받기 위한 유희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그러한 유희는 청춘의 특권일 수 있다. 하지만, 그 청춘들이 모두 기성세대가 돼 버린 지금도 그럴까?



지난주 <필름2.0>의 <69>를 다룬 영화평에서 평론가 이상용은 (프랑스 68혁명을 모방한) 이 해프닝성 짝뚱에도 진실'은 있다고 쓴다(<몽상가들>에 의하면, 68혁명 또한 폼이자 제스처에 지나지 않지만). "68혁명에 대한 답변이라고 읽히는 프랑스의 철학자 들뢰즈와 가타리의 저서인 <안티 오이디푸스>를 빌자면, 혁명이란 사회나 인간에 대한 의무가 아니라 욕망이어야 한다. 켄 일행은 그 누구보다 자신들의 욕망에 충실하다. 그것이 비록 고다르의 영화를 핑계대어 여학생을 꼬시고, 레드 제플린의 음악을 빌어 자유를 흉내내는 것에 지나지 않더라도 그들은 자신들의 주체할 수 없는 욕망을 충실히 배설한다. 켄은 입버릇처럼 즐거우면 모든 것이 괜찮다고 말한다. 정답은 여기에 있다. 주체할 수 없는 욕망을 담은 청춘의 기관차는 무언가를 재보는 것이 아니라 에너지를 가득 안고 부딪히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지구 반대편에서 체험한 68혁명의 진정한 기운이었다."

재일교포 감독 이양일도 이 영화에서 "지금은 없어진 그 시대 젊은이들의 에너지를 회생시키고 싶었다"라고 말했는데, 그렇다면 '68혁명의 진정한 기운'은 다 어디로 증발한 것일까? 68세대나 69세대가 사회를 이끌어가는 주류, 혹은 기성세대가 된 지금 왜 세상은 그다지 달라지지 않은 걸까? 혹은 왜 이것밖에는 달라지지 않은 걸까? 그건 '즐거움' 자체가 우리 삶의 물적 토대가 아니기 때문이다. 즐거움은 특정한 사회적 토대와 관계가 허용하는 상부구조이자 잉여이고 기분이다. <69>를 쓰는 작가는 그걸 써서 밥벌이를 하는 전업작가이다. 거기에서 즐거움만 읽어내는 건 순진한 태도이다. 다들 아는 것이지만, 69라는 건 특정한 성적 체위이기도 하고 그런 의미에서 '욕망을 대변하는 기호'이기도 하다. 하지만, 69라는 체위만으로는 어떠한 재생산(reproduction)도 가능하지 않다. 바꿔 말하면, 그 욕망은 아무런 물적 토대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그러니, 그러한 기호가 68혁명의 진정한 기운이었다면(<몽상가들>에서도 그렇지만), 혁명이란 그저 폼(form)이며 폼(foam)이다.



 

 

 

마음껏 전시되는 육체들에도 불구하고 <몽상가들>은 내게 틴토 브라스의 영화들보다도 재미가 없었는데(물론 브라스는 주로 엉덩이를 전시한다), <69>는 그보다는 재미있을 걸로 보인다. 하지만, 재미 혹은 재미의 윤리(fun ethic)는 말 그대로 (자기충족적인) 재미를 위한 것이다. 마스터베이션에 불과한 것. 거기에 진정한 혁명이니 기운이니 하는 문구를 갖다 붙이는 건 보기에 불편하다. 혁명이 아무리 대단한 게 아닐지언정 거기엔 피흘림이 있고 피냄새가 섞여 있다(그런 점에서 아직 보지 않았지만, 내가 지지하는 영화는 최양일의 <피와 뼈>이다. '피와 뼈'에 비한다면 '69'는 애들 장난이다). 그게 마스터베이션과의 차이이다...

P.S. 최근에 나온 책 얘기를 하려고 했지만, 영화 얘기가 너무 길어졌다(굳이 책 얘기를 덧붙이자면, 베르톨루치에 관한 것으로 <베르톨루치, 중요한 장면들>(예건사, 1991)을 들어볼 수 있다. 절판된 책이어서 구하기가 쉽진 않지만). 글을 나누는 수밖에. 제목도 바꿔서 걸고. 아즈마 히로키 얘기도 덧붙이려고 했는데, 복사한 글을 들고 오지 않았다. 다음에 보완하기로 한다...

05. 03. 28

 지난주 <한겨레21>에 두 영화에 대한 소개 기사("청춘의 꽃, 68을 기억하는가")가 실린 걸 뒤늦게 읽었다. 내가 읽은 평들 가운데에서는 가장 균형이 잡혀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이 기사를 먼저 읽었더라면 나는 굳이 두 영화에 대해 군말을 덧붙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한 대목만 인용해 둔다:

"두 감독이 돌아보는 60년대는 같으면서 다르다. 두 영화는 60년대를 혁명의 시대이기에 앞서 축제의 계절이었다고 회고한다. <몽상가들>은 섹스를, <69>는 청춘을 내세운다. 인류의 마지막 청춘세대였던 68세대 출신인 베르톨루치 감독은 60년대를 돌아보며 분열한다. 베르톨루치는 희망을 이야기하지만, 정작 영화는 60년대를 조롱한다. 베르톨루치는 “미래에 대해 깊은 우울감을 가지고 있을 요즘 젊은이들에게 나는 긍정적으로 희망으로 가득 찼던 그때를 선물하고 싶다”고 말했다. 하지만 <몽상가들>은 매튜의 시선을 빌려 쌍둥이 남매의 일탈적 행동이 미숙아들의 자폐적 행위에 지나지 않았다고 말한다. 감독은 자신의 세대를 긍정하고 싶어하지만, 감독을 포위한 현실은 감독의 무의식에서 희망을 거세한 듯 보인다. 그의 시선은 자꾸 이상과 현실의 균형을 찾는 매슈에게 쏠린다."

<몽상가들>에 대한 유효하면서도 적절한 읽기이다(내가 말하고 싶었던바 또한 <몽상가들>이 60년대에 대한 베르톨루치의 '조롱'혹은 비아냥이라는 것이다)...

 05. 3.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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