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에 신간 <성관계는 없다>(도서출판b)를 '최근에 나온 책들'의 하나로 꼽았었는데, 나는 필요 때문에 다른 책들보다 먼저 이 책을 손에 들게 되었다. 이 논문선집의 요점 중의 하나는 라캉의 성구분 공식에 대한 독해/이해를 제공하는 것이고, 브루스 핑크의 서론격 글인 "성적 관계 같은 그런 것은 없다"(There's No Such Thing as a Sexual Relationship)은 그런 역할에 충실하다.

 

 

 

 

나는 이전에 같은 테마를 다룬 <라캉과 포스트페미니즘>(이제이북스)을 읽었더랬지만, 그 번역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었던 대목들이 핑크의 글에서는 명쾌하게 정리/해명되고 있었다. 해서, 라캉 읽기의 '걸림돌'이라고 할 만한 몇몇 대목들, 가령 '욕망 그래프', '네 가지 담론', '성 구분 공식' 등에 대해서 이젠 편하게 참조할 수 있는 책들이 우리에겐 주어졌다(앞의 둘에 대해서는 지젝을 참조하면 된다).

 

 

 

 

핑크의 글에 대해서는 편역자 해제에서 다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나는 군말을 덧붙일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해서 독자들은 그냥 읽어나가면 되는데, 여기선 내가 개인적으로 읽어나가다가 유려한 번역이지만 좀 미심쩍게 생각되는 몇몇 부분을 짚어보기로 한다. 옥의 티라고 할 만한 대목들이 몇 군데 있어서이다.

가벼운 것부터 지적하면, 64쪽에서 '사물'이 발견하는 기표의 예로 든 'art'는 '예술'이 아니라 '미술'로 옮겨져야 할 것이다(그러니까 '예술', '음악'이 아니라 '미술', '음악'이다).그건 67쪽에서도 마찬가지이다. 74쪽에서, "적어도 플라톤까지 거슬러 올로가는 저 오래된 형식과 질료의 은유"에서 '형식'은 물론 'form'의 번역이지만, 이 경우에는 '형상'이라고 번역하는 게 관례이다. 나는 '형식(형상)' 정도로 옮겨주는 게 나을 거 같다. 65쪽에서 "원인을 의미화하기"는 "subjectifying of the cause"의 번역인데, 역자가 "signifying of the cause" 정도로 잘못 본 것 같다. 다른 대목의 번역들을 보건대, "원인을 주체화하기"라고 옮겨져야 할 듯싶다. "그 자신의 원인이 되기"란 뜻이니까.

76쪽에서 "라캉은 S(빗금A)에 관해서 직접 언급하지는 않지만"은 "The little Lacan directly says about S(빗금A)"인데, 여기서 little은 형용사나 부사가 아니고 명사이며 (사전에 따르면) '적으나마 있는 것'이란 뜻이다. 그러니까 풀어서 얘기하자면, "라캉이 S(빗금A)에 대해서 직접 언급한 것은 얼마 안되지만, 그에 따르면"이란 뜻이다(요컨대, "직접 언급하지는 않지만"이 아니라 "직접 언급한 것"이다).

78쪽에서 "왜냐하면 그 파트너는 '남자들'이란 범주에 들어가지 않고, 따라서 여자는 남자와 '관계하거나' 남자를 '따르기' 위해서 남자에게 호소할 필요가 전혀 없으니까 말이다."는 "S(빗금A), as that partner is not situated under 'Men' at all, and thus a woman need have no recourse to a man to 'relate' or 'accede' it."의 번역인데, 이건 내가 보기에 오역이다. 역자는 맨마지막에 나오는 it을 남자들(Men)으로 봤는데, 문맥상 '그 파트너'인 S(빗금A)이어야 한다. S(빗금A)는 '남자들'이란 범주에 들어가지 않으니까 당연히 S(빗금A)와의 관계에서 '남자들'은 불필요하다는 얘기이니까(남자를 따르기 위해서 남자에게 호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은 넌센스이다).

81쪽에서 "그것은 남근 경제나 단순한 구조주의 안으로 결코 만회될 수 없다"고 한 것은 "It can never be recuperated into a 'phallic economy' or simple structualism."의 번역인데, (오역을 지적하는 게 아니라) 나라면 "그것은 남근경제나 단순한 구조로 결코 회복될 수 없다"라고 옮기고 싶다. 바로 위 문단에서는 'Sexual relationships'를 '성적 관계'라고 단수로 옮겼으므로 그것을 받는 'they'도 단수인 '그것은'으로 옮겨야 할 것이다(수의 일치상). 아니면, '성적 관계'를 '성적 관계들'로 옮기든가.

85쪽에서 "프로이트는 여자는 법에 대해서 이와는 다른 관계를 맺는다고 제안하는데, 그는 그 관계를 아직 덜 고도로 발달된 자아-이상이나 초자아와 관계지었다."는 "Freud suggests that women have a different relation to the law, which he correlates with a less highly developed ego-ideal or superego"의 번역인데, 역자는 관계사 which의 선행사를 relation으로 보았다. 나는 그게 law가 아닌가라고 생각한다. 지젝이 다른 자리에서 지적하는 바이지만(144쪽) 라캉에게서 법은 상징적 자아-이상으로서의 법과 초자아 차원에서의 법이라는 두 가지 얼굴을 갖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상.  

근간으로 돼 있는 브루스 핑크의 <라캉의 주체(The Lacanian Subject)>는 몇 차례 언급한바 있지만, 가장 명쾌한 라캉 입문서이다. 좋은 번역서가 조만간 나온다면, 라캉에 대한 많은 오해와 갈증이 해소될 걸로 믿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