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을 먹은 뒤에야 피로감에서 빠져나와 내년봄학기 일정을 짜고서는(7-8개 강좌의 커리큘럼을 짰다) 몇권의 책을 에코백에 넣고 동네카페로 나왔다. 아포카토를 주문하고서 펴든 책이 나카노 노부코의 <우리는 차별하기 위해 태어났다>(동양문고). 문고본판형의 얇은 책으로 어제 주문하고 오늘 배송받은 책들 가운데 하나다. 저자는 일본의 뇌과학자. 집단 괴롭힘이 일어나는 메커니즘을 뇌과학으로 밝히면서 대응책을 제시한다.

˝특히 어린시절에 누군가를 괴롭히면서 맛본 쾌감이 뇌 속 마약으로 작용하면 ‘공감‘이라는 브레이크가 작동하지 않게 됩니다. 이를 막으려면 ‘상대방을 공격했을 때 결국 손해 보는 것은 나 자신‘이라는 공식을 익혀야 합니다.˝

그런 공식은 어떻게 익힐 수 있을까? 그런 공식을 익히게 해주는 게임도 있을까? 마약으로 작용한다는 말은 중독 현상이라는 것인데 우리는 어떻게 차별 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우리와 그들을 나누고 차별한다는 점에서 모든 ‘이즘‘은 차별 논리에 근거한다. 사해동포주의가 예외일까?). 이런저런 질문들을 갖게 한다. 서문을 읽었을 뿐이니 더 읽어봐야겠다.

책의 한국어판 서문은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의 저자 오찬호가 쓰고 있다. 오찬호는 이번주에 <결혼과 육아의 사회학>도 펴냈다. 첫 책 이후 매년 한두 권씩 책을 내고 있는 부지런한 저자다(방송에도 자주 나온다 한다). 화제작이었던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는 구입만 하고 읽지 않았는데 <결혼과 육아의 사회학>은 읽어보려 한다. 역시 오늘 배송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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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에게서 연락이 없다
연락의 수단이 없는 것인가
마리에게는 아무도 없는 것인가
마리는 그럴 마리가 아니다
우리 사이는 고작 몇 광년
눈대중으로도 갈 수 있는 거리다
그럼 마리가 아니란 말인가
마리에게 전할 말이 있었다
마리가 아니면 누구란 말인가
마리와는 그런 사이가 아니다
마리에게 그렇게 말하는 게 아니었다
마리가 떠나기 전이었다
마리가 가져갈 꽃들이 한껏 피어 있었다
마리는 마음이 아프다고 했다
내가 마리라도 그랬을 것이다
마리가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마리는 말했다
어쩌면 마리는 이제 누구의 이름도 아니다
누구의 이름으로 마리를 부르는 것인가
마리는 어디로 떠난 것인가
마리는 누구의 마리도 아니다
마리가 보고 싶다
마리를 떠나야 하는가
마리라고 부르면
마리가 빛의 속도로 멀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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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역에서 일어난 기적에 대해서
나는 말하지 않겠다
캐리어 가방을 놔두고 한 여자가
갑자기 뛰어갔다는 얘기가 아니다
내가 어쩌다 그 가방을 감시하게
되었다는 얘기도 아니다
주인 없는 가방은 그냥 주인이 없어도
되는 가방인지 나도 기차시간이 있기에
가방 주인을 기다리고만 있을 수도 없다
이제 아무나 들고 가도 되는 건지
이 가방은 분실물로 소속을 바꾸게 되는 건지
그런 게 뭐가 중요하다는 말인가
그러자 사라진 가방
그게 주인이 다시 찾아간 것인지
그냥 누군가 밀고 간 것인지 나는
알지 못하지만 내가 말하려는
기적은 기척도 하지 않은 순간에
한갓 가방이 나타났다 사라졌다는 얘기다
대전역에서 일어난 기적은
평범한 기적이다 평범하기에 기적이다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해야 얻을 수 있는 기적
가방만 하더라도 그렇다
기적은 언제든 얼마든지 적들을 만난다
무슨 일이건 일어나는 게 세상이다
얼마나 많은 걸 포기해야 기적은 달성되는지
기차가 제 시간에 도착하는 기적을 보라
기차라고 욕심이 없겠는가
여차하면 뛰어가는 건 일도 아니다
이 순간이 오기까지의 기적
그런 것 빼고는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대전역을 떠났다
분명 대전역에서 일어난 기적에 대해서
나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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쎄인트 2018-09-05 2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모두 아직 살아있는 것이..기적이지요.
이 세상을 떠나도...기적이지요..
奇蹟이던, 汽笛이던 간에....

로쟈 2018-09-05 23:36   좋아요 0 | URL
네 일상의 기적.
 

어둠이 내렸다 어제는
빗길이었지 보고싶은 사람이
떠오를 것도 같은 날씨라고 생각했다
떠오르다가 가라앉는 것도
흔한 일이지 그대는 익사자

바람이 불었고
한 편의 시도 읽지 않았다

바람과 함께 사라진 건
시도 아니고 그대도 아니었으니
나는 아무것도 잃지 않았다
더는 잃을 것도 없었다
바람은 어디에 묻히는지 궁금했다

무슨 글자라도 적고 싶었다
옆좌석의 타인들처럼 낯설었다
얼만큼 친해야 묘비명이 될 수 있는지
얼만큼 사랑해야 눈물자국이 될 수 있는지
눈물자국은 수술로 지운다는군

비가 내린다고 쓴다
비가 내릴 때까지 기다린다

누군가를 기다릴 때
나는 자유다 무슨 일을 해도
일이 아니고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나는 열중한다
나는 내가 올 때까지 기다린다

보고싶었다고 적는다
더는 그대를 알아보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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쎄인트 2018-09-05 2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내가 올 때까지 기다린다.‘
내 몸에..다시 내 영혼이 깃들기를 기다린다.

로쟈 2018-09-05 23:37   좋아요 1 | URL
네 다의적으로 해석가능합니다.

물들래 2018-09-07 1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밑에 그림은 어느 작가의 작품인지요? 그림이 말을 걸어오네요.

로쟈 2018-09-09 11:05   좋아요 0 | URL
작가는 모르겠습니다. Waiting for Godot를 구글에서 검색하면 뜨는 이미지입니다.

dmsdud5789 2018-09-13 2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이 참 마음에 드네요.
 

내일 강의준비를 하다가(내일 아침 마감인 원고도 써야 한다) 막간에 책장 한칸을 사진으로 찍었다. 식탁이 도서관 책상으로 변신하면서 평소보다 더 자주 이용하게 될 듯싶다. 손이 가장 잘 닿는 곳에 강의나 원고와 관련된 책들을 그때그때 꽂아두려고 한다.

사진을 찍기 위해 조금 정돈은 했지만(옷을 추스리는 것처럼) 아직 정리가 끝난 건 아니고 이 칸에서도 절반의 책은 다른 자리로 이동해야 한다. <책에 빠져 죽지 않기>(교유서가)는 서명으로 넣은 것이고 <똑똑함의 숭배>(갈라파고스)와 <민주당의 착각과 오만>은 최근에 서평을 쓴 책들이다. 언제 예고한 대로 <이데올로기 청부업자들>(레디앙)에 대해서도(원서를 어렵사리 구했다. 주문하고 배송까지 꽤 오랜 시간이 소요돼 ‘어렵사리‘ 구한 것처럼 느껴진다) 읽는 대로 서평을 쓰게 될 것이다(늦어도 다음달까지는?).

가운데 꽂은 책은 독일의 젊은 철학자 마르쿠스 가브리엘의 신간 <나는 뇌가 아니다>(열린책들)이다. ‘21세기를 위한 정신철학‘을 표방한 책. 가브리엘은 1980년생으로 유발 하라리보다 네 살 어리며 나와는 띠동갑이다. 인문학 책을 읽으며 나보다 어린 저자의 책을 읽을 일은 드물었는데 앞으로는 점점 빈번해질지 모르겠다(즐거운 일일까, 씁쓸한 일일까).

가브리엘의 다른 책들도 다 갖고 있는데 눈에 띄는 대로 옮겨올 예정이다. <왜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가>(열린책들)와 지젝과의 공저 <신화, 광기 그리고 웃음>(인간사랑) 등이다. 독일문학기행을 앞두고 읽어야 할 독일문학과 철학, 문화예술, 여행 관련서들이 잔뜩인데, 당장은 가브리엘을 읽기로. 그리고 아마도 제바스티안 하프너와 히틀러 관련서들을 읽으려고 한다. 그 책들이 결국 이 칸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정돈하게 되면 다시 한 컷 찍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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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제트50 2018-09-11 2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상에서 가장 짧은 세계사
- 고딩아이를 위해 구매목록에
올렸으나 얘가 세계사 안한다고 해서
오리무중-.-
*책에 빠져 죽지않기 - 읽는 중.
한번 빠져죽자,고 먼저 1부 서론 보고
관심분야부터 읽는데 친절한 설명에
게다가 내용이 짧다^^

로쟈 2018-09-03 17:43   좋아요 1 | URL
서평은 짧아야 한다는게 소신이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