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나온 화제의 신간은 이진경(박태호 교수)의 <미-래의 맑수주의>(그린비, 2006)이다. 아직 구해서 읽어보진 않았지만, 맑스(주의)에 관한 책으로 가라타니 고진의 <트랜스크리틱>(한길사, 2005) 2부와 함께 듀엣으로 읽어볼 계획은 갖고 있다. 거기에 덧붙이자면, 니콜라스 쏘번의 <들뢰즈 맑스주의>(갈무리, 2005)를 꼽을 수 있겠다(네그리/하트의 <제국>까지 포함시키고자 하면 줄줄이 딸린 책들 때문에 또다른 한판의 방대한 책읽기가 되므로, 가급적 자제해야겠다). 해서, 예비적으로 <미-래의 맑스주의>에 대한 몇 개의 리뷰를 읽어보았다. 이 페이퍼는 그걸 정리한 것이다. 세 개의 서평인데, 각각 한겨레, 동아일보, 경향신문의 것이다.

(1)먼저, 한겨레의 리뷰(06. 04. 07)는 "마르크스 근대성 넘어 '이진경주의'로"로 제목을 달고 있다(*해서, 이 글 제목 '이진경주의'의 출처가 됐다). 내가 읽기에, 그 속사정은 (전통적) '맑스주의'와 이진경의 (과격한) 맑스주의를 분리시키기 위함이 아닌가 싶다. 해서, '미-래의 맑스주의'를 '이진경 맑스주의', 혹은 더 줄여서 '이진경주의'라고 불러주는 것. 서로 인상 구기지 않게 말이다. 그건 그냥 나의 '추측'이고, 다른 속사정이 있는 건지는 모르겠다. 리뷰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이진경씨의 새 책이 나왔다. <미래의 맑스주의>(2006)다. 그의 이력은 그가 쓴 책으로 대표된다. <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방법론>(1986년), <철학과 굴뚝청소부>(1994), <맑스주의와 근대성>(1997년), <근대적 주거공간의 탄생>(2000), (노마디즘>(2002), <자본을 넘어선 자본>(2004년). 그는 쉼없이 생각하고 썼다.(*물론 저자는 거명된 책들보다 더 많은 책을 썼다. <철학과 굴뚝청소부>는 대학가 베스트셀러였고, <근대적 주거공간의 탄생>은 박사학위논문이며, <노마디즘>은 한국사회의 '메인스트림'으로부터도 호평을 얻으면서 '이진경'이란 운동권 브랜드가 '인문학 브랜드화'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책이다. 동시에 국내에 들뢰즈와 노마드/노마디즘 붐을 가져온.)

-<사회구성체론> 이후 꼭 20년만에 나온 <미래의 맑스주의>는 그 이력에 책 하나를 더하는 의미 이상이다. 책 제목에 마르크스주의라는 꼬리표를 달았지만, 실은 ‘이진경주의’를 본격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앞으로 그를 말할 때는 <사회구성체론>과 <미래의 맑스주의>를 언급하게 될 것이다. <사회구성체론>에서 그러했듯이, <미래의 맑스주의>에서 그는 사상가가 아닌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는다(*즉, '사상가' 맑스나 맑스주의를 표방하지만, 실상은 이진경 자신의 이야기라는 함축이다). 이를 따라가며 읽어내기가 만만치 않다는 것은 두 책의 또다른 공통점이다(*무슨 소리인지 이해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90년대 이후 그의 화두는 근대의 패러다임에 오염된 마르크스주의를 재구성·재작동시키는 것이었다. 이 화두를 풀기 위해 10여년이 넘도록 사상의 초원 위를 유목하며 고독한(실은 난해한) 전투를 벌였다. 푸코, 들뢰즈, 가타리 등 서구 탈근대론자들의 문제설정과 씨름했다. 동양사상과 생명과학 등도 섭렵했다(*'10여년이 넘도록'이 아니라 '10여년도 안되어'라고 해야 맞지 않을까?). <사회구성체론> 이후에 나온 모든 책들은 그런 편력의 특정한 대목을 반영하는 것이다. 책이 나올 때마다 많은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 이진경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박수를 치건 돌을 던지건, 그 의문에 대한 대답이 이 책에 담겨 있다. 그동안 몇몇 책에서 등장했던 독특한 사유와 개념들이 <미래의 맑스주의>를 통해 비로소 전체적인 얼개 속에 자리를 잡았다.

-우선 유물론을 물질개념에서 탈피시켰다. “물질이란 말로부터 유물론을 해방시키지 않고서는 유물론에 대한 적절한 정의에 이를 수 없다.” 그는 물질과 관념을 대비시키는 방식으로 유물론을 설명하려는 시도를 거부한다. 대신 “유물론이란 ‘외부’에 의한 사유”라고 말한다. 이에 비해 관념론은 “내부에 의해 스스로 완결되는 사유”다. 유물론은 “모든 것의 본질은 그 내부가 아니라 외부에 의해 결정된다”는 철학이다.(*단순한 의문. '외부'에 관한 사유는 규정하기에 따라서 초월적 관념론을 모두 포괄하는 거 아닌가? 혹은, '철학의 외부'란 철학이 자신의 무능력한 대면하는 지점 아닌가? 철학의 외부에 대해서 (유물론)철학은 무엇을 사융할 수 있는가? 사유되는 외부도 여전히 '외부'인가?) 

-이어 마르크스주의 인식론의 한계도 넘나든다. 인간과 자연의 결합을 넘어 인간과 기계와 자연의 합일을 말한다. 그의 생태학 안에서는 “기계와 자연은 더이상 대립하지 않는”다. 예컨대 “자연으로 돌아가는 보존의 생태주의가 아니라 기계와 문명조차 거대한 자연의 일부임을 받아들이는” 게 그의 세계 인식의 틀이다.(*이미 '포스트-휴먼' 시대에 진입하고 있는지라 이러한 주장은 특별히 생소하거나 과격하지 않다. 물론 '생태주의자'들이라면 불편해 할 주장일 것도 같지만). 

- 마르크스 경제학의 핵심인 노동가치론도 전복시켰다. 기존의 노동가치론은 “노동이라는 상품을 생산하는 자만이 인간이라는 인간중심주의”의 함정에 빠져있다고 비판했다. “노동의 특권적 중심성을 제거해 노동과 비노동의 구별을 넘어서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한걸음 더 나아가 “인간의 노동만이 가치를 생산한다는 명제는 과거의 것”이라고 말했다. 노동과정의 기계화를 언급하면서 “이젠 ‘인간화된 기계’가 가치를 생산한다”고 말한다.(*인간과 기계의 결합에서 유추될 수 있는 자연스런 결론이다. 요컨대, 그는 전통적인 맑스주의적 휴머니즘에 반대한다.)

-가장 특징적인 것은 그의 계급론이다. 프롤레타리아트와 노동계급을 구분했다. 그가 보기에 “프롤레타리아트는 노동자 계급이 아니다.” 프롤레타리아트란 “사회를 지배하는 척도에서 배제되거나 벗어난 자들”이다. 여기서 ‘프롤레타리아-되기’ 전략이 나온다. “자본주의 사회의 보편적 척도에 복속되는 길을 벗어나 이것과는 다른 삶의 방식, 다른 종류의 가치, 다른 종류의 세계를 창안하는 것”이 핵심이다. ‘프롤레타리아-되기’는 기존 지배질서를 거부하는 다양한 소수자들을 한데 모을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이런 전략은 그가 주창해온 ‘코뮨주의’의 핵심이다.(*하면, 노동자계급은 이렇게 자문하도록 해야겠다. "내가 프롤레타리아트가 아니란 말인가?" 여성이라고 해서 자연스레 '여성'이 되는 게 아니며, '여성-되기'가 요청되듯이, 노동자라고 해서 자동적으로 '프롤레타리아트'에 편입되는 건 아니라는 얘기겠다. 프롤레타리아트-되기가 필요한 것. 한편으로 생각하면, 노동계급은 부르주아도 아니고 프롤레타리아트도 아니다! )

-거칠게 보자면 그는 국가·노동계급·인간 중심주의를 거부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진경주의’는 확실히 ‘과거의 마르크스주의’와 상당히 다르다. <미래의 맑스주의>는 이진경이 몸담고 있는 연구집단 ‘수유+너머’가 주창한 코뮨주의적 실천에 대한 하나의 선언이거나 알리바이다. 그는 서문에서 “이 책의 불온함이 책을 읽는 분들의 또다른 불온함을 촉발하고 증식시키길 바란다”고 적었다. 마르크스주의의 혁명적 함의를 오늘에 되살리려는 그의 깊은 모색의 끝에서, 그러나 여전히 남는 의문은 있다. 지금 이진경의 사유와 ‘수유+너머’의 실험을 불온하게 여기며 두려워 하는 이는 과연 누구인가?(*뭐가 불온하냐는 반문이겠다. 한편으론 자신의 '불온함'에 대한 과신도 불온함의 일종인 것일까? 문득 자신의 '야함'에 대해서 언제나 자신하는 마광수가 떠오른다.)   



(*)이어지는 건 기사의 보충설명인데, '이진경의 지적 이력'이라고 해서 군대 차트식으로 '화염병→감옥→사회주의 붕괴→‘수유+너머’'라고 정리하고 있다. 

-400여쪽의 책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끄는 대목은 ‘맑스주의와 코뮨주의’라는 제목의 장이다. 20여쪽의 짧은 글에서 이진경은 자신의 지적 이력을 담담하게 돌아보고 있다. “돌맹이와 화염병, 매캐한 최루가스로 가득찬 전투의 바람, 혹은 아련한 꿈같은 혁명의 바람”이 스물의 자신을 만들었다고 적었다. 1980년대에 대한 회상이다. 그러나 감옥에 있는 동안 사회주의 체제가 붕괴했다. 고민에 빠졌다. “좀 더 나은 삶의 꿈을 포기할 수 없는 한, 맑스스주의는 쉽게 버릴 수 있는 하나의 이념이 아니었다. 동시에 바로 그렇기 때문에 고집스런 지조로 그저 안고 가기만 하면 되는 그런 이념도 아니었다.”

-그는 기존의 사회주의 사회 역시 또다른 ‘근대 사회’에 불과했음을 깨달았다. 여기서부터 ‘근대성’에 대한 긴 모색이 시작됐다. 근대적 마르크스주의를 넘으려는 모색은 “맑스주의 외부에서 던져져야 했고, 맑스주의 안에 없는 것, 그 공백을 통해서 사유돼야 했다.” 푸코, 들뢰즈, 가타리, 네그리, 심지어 동양의 화엄학까지 끌어들였다. ‘수유+너머’ 연구실을 출범시킨 것도 이때문이다. 그는 여기서 “연구와 삶이 하나로 결합된, 근대적인 것과는 다른 삶의 방식을 창안하고 실험하며 새로운 종류의 습속과 무의식을 생산하는 ‘연구자들의 코뮨’”을 시도했다.(*그러니까 노동자 계급보다 혁명적인 것이 이 '연구자들'이겠다. 프롤레타리아트 후보 1순위. 한데, 노동자도 아니고 연구자도 아닌 이들, 즉 삶과 결합될 '연구'를 안 갖고 있는 이들은 어디에 포함되어야 하는지?)

-이진경은 이제 “기존의 맑스주의, 지배적 형태의 맑스주의를 다른 것으로 변형시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은 “계급과 혁명에 대한 구도에 다른 이질적 요소들이 침투해 뒤섞이는 것, 이미 자본주의 사회의 또다른 주류 계급이 된 노동운동을 소수화의 전략을 통해 새롭게 혁명화하는 것”을 통해 이뤄진다고 믿는다.(*그러니까 이진경에게서 맑스주의는 '맑스의 정신'을 뜻하는 것이겠다. 맑스의 정신을 근대 맑스주의주로부터 분리/구출하고자 하는 것.) 

-그런 그가 ‘급진 혁명가’가 아니라 스테디셀러 작가로 인식되는 경향은 분명 불행한 일이다.(*자본의 외부에 대한 사유도 자본주의 안에서 유통되는 것이니까.) 20년전 봄에 나온 <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방법론> 서문에서 이진경은 “사상적 논쟁 과정이 주체의 형성과정”이라고 썼다. 코뮨주의의 주체를 형성하려는 그에겐 지금 논쟁할 상대가 없다. 어쩌면 논쟁하려는 사람들이 없는 문제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일수도 있다.(*아무도 대꾸를 안 해준다는 얘기인가?)

(2)이어서 동아일보의 리뷰(06. 04. 08)는 '마르크스 넘어서 코뮌주의'란 제목을 달고 있고, 따라서 방점은 맑스주의가 아닌 '코뮌주의'에 찍힌다.  

 

 

 



-<굿바이 프로이트>라는 책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한때 그를 믿었다가 버린 사람의 수로 쳤을 때 이 빈 출신의 의사(프로이트)를 능가하는 것은 마르크스밖에 없다.” 그렇다. 프로이트도 울고 갈 만큼 수많은 개종자를 양산했던 그 마르크스에 대한 개종을 거부하는 사람이 아직도 있다. 1980년대 운동권의 대표적인 논객이었고 1990년대 탈(脫)근대사상 연구에 주력해 왔던 박태호 서울산업대 교수다. 필명 이진경으로 더 유명한 그는 한때 사회주의혁명을 꿈꾸다 감옥까지 다녀온 뒤 한동안 푸코와 들뢰즈의 사상에 푹 빠져 지냈다. 그러다 2004년 <자본을 넘어선 자본>을 발표하며 마르크스의 사상을 집단주의적이고 경제결정론적인 공산주의가 아닌 자유로운 개인의 공동체로서 코뮌주의로 재해석할 것을 주장하고 나섰다.(*요컨대, '코뮌주의자로서' 그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다. 한국사회의 '주류'로부터 거부감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책은 그 연장선상에 놓였다. 그가 주장하는 코뮌주의는 익숙한 마르크스 사상과 많이 다르다. 마르크스주의의 핵심 DNA로 꼽히는 변증법적 유물론, 노동가치설, 계급투쟁론, 자본주의 붕괴론을 전혀 다른 차원에서 설명하기 때문이다. 그는 마르크스의 유물론을 모든 것이 물질적 요소에 의해 좌우된다는 ‘경제주의’와는 다른 ‘외부에 의한 사유’라고 주장한다. 관념론이 모든 문제를 체계 내부의 인과관계에서 바라본다면 유물론은 이를 초월해 우리 삶을 규정하는 체계 외부 조건에 대한 통찰을 말한다는 것이다.(*마르크스 또한 자본주의를 '자본의 외부'와 관련지어 사고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체계의 예외성으로서의 '외부'란 체계의 구성적 조건이기도 하다는 상식 정도만 상기하기로 하자. 그의 '외부'는 어떤 외부인 것일까? '수유+너머'?)

-그는 노동가치설에 대해 기계나 화폐, 지대도 가치를 생산한다는 측면에서 인간중심주의적 노동가치설의 폐기를 주장한다. 또 프롤레타리아는 자본주의 계급질서 내 노동자계급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체계가 포착할 수 없는 ‘비(非)계급’으로 바라볼 것을 주장한다. 그것은 다양한 비주류 소수자 그룹으로 재해석돼야 한다는 것이다. 코뮌주의는 바로 이런 소수자들이 자본주의라는 체계 외부의 공간을 마련하려는 모든 불온한 노력을 말한다는 것이다.(*'불온성'은 저자가 표나게 강조하는 바인 모양이다. 한데, '체계 외부의 공간'은 어디일까? '율도국'? 아니면, '존 말코비치'의 머리속?)

-그러나 저자가 말하는 것이 과연 마르크스주의일까. 근대적 사상가였던 마르크스에게 온갖 탈근대적 사유를 주입한 뒤 이게 본래의 마르크스라고 주장하는 것은 한국 유생들이 중국 취푸(曲阜) 공자 생가에 걸려 있는 초상화가 공자를 안 닮았다고 버럭 화를 내는 것과 무엇이 다르다는 말인가.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고 했던 선불교의 기개가 못내 아쉽다.(*미래의 맑스주의, 아직 도래하지 않는 맑스주의가 제안하는 것은 한편으론 모든 과거에 실재해던 모든 '역사적' 맑스주의의 기각이다. "너네, 맑스주의 아냐, 딱지 다 반납해!" 한데, 그건 자본주의에 대해서도 똑같이 말할 수 있다.역사적 자본주의, 혹은 현실 자본주의의 모순은 '미래의 자본주의', 진정한 자본주의에 의해서 극복될 거라고.) 

(3)경향신문의 리뷰(06. 04. 09)는 "마르크시즘을 뒤집어 새 마르크시즘 만났다"란 제목이다. 여기서 '이진경주의'는 '새 마르크시즘'이란 표현을 얻었다. 가장 호의적인 게 아닌가 싶다(인터뷰라서 그런가?).

-사회학자 이진경씨(서울산업대 교수·43)가 ‘미-래의 맑스주의’(그린비)를 내놓았다.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해석서이지만, 책에는 ‘이것이 마르크시즘인가?’ 할 정도로 새로운 내용이 적지 않다. 이 책에서 이씨는 도시 부르주아지는 자본주의적인 계급이 아니라고 말한다. 노동자가 프롤레타리아트는 아니다라는 주장도 펼친다. 인간만이 가치를 생산한다는 마르크스의 주장에 대해서는 ‘기계적 포섭’ 개념을 통해 기계 또한 가치를 생산한다며 맞선다. 공산주의를 대신하는 ‘코뮨주의’라는 사회모델도 내놓았다. 독창적이다 못해 낯설고 도발적이다.

-그래서 책은 이씨의 독창적인 사회구성체론으로도 읽힌다. 이씨가 20대인 1987년 내놓았던 <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방법론>의 연장선인 셈이다(*나는 이 80년대의 '고전'을 읽지 않았다. 다들 사회과학 서적들을 읽을 때라서, 나는 딴 걸 읽었다). 한때 들뢰즈, 가타리, 푸코 등에 탐닉하며 ‘노마디즘’을 유행시킨 이씨를 연구공간 ‘수유+너머’에서 만났다.

-마르크시즘으로 다시 돌아온 것인가.

“아니다. 대학시절 마르크스를 만난 이후 한번도 마르크스를 떠난 적이 없다. 사회주의 몰락 이후 마르크스보다는 푸코, 들뢰즈와 같은 비마르크스주의자들과 만났지만, 모두 마르크스를 제대로 알기 위한 것이었다. 이들의 연구를 통해 마르크스주의를 보다 잘 재구성할 수 있었다.”

-흔히 마르크시즘은 사적 유물론으로 알려져 있는데.

“유물론은 흔히 물질의 일차성을 인정한다거나 정신적인 것을 물질적인 것으로 환원하는 것을 말하지만, 나는 마르크스의 유물론을 ‘외부에 의한 사유’로 정의한다(*유물론에 대한 알튀세르의 정의는 탈목적론으서의 우연성에 대한 사고이다). 역사유물론에서 ‘역사’가 사물의 본질을 규정하는 조건들을 뜻한다고 볼 때 사적유물론은 역사 과학이라기보다는 외부를 통해 사유하는 방법이라고 정의하는 게 옳다. 스탈린주의자들처럼 사적유물론을 사회발전단계론으로만 봐서는 곤란하다.”

-그렇다면 마르크시즘의 핵심은 무엇인가.

외부에 의한 사고다. 사물은 정해진 것도 없고 본성도 관계 속에 달라진다. 사물은 조건에 비춰 사유하고 관계 속에서 해석하는 게 마르크스주의의 핵심이다.(*'人'이 아닌 '人間'에 대해 사고했던 동아시아 사상, 혹은 불교의 연기론 사상이야 말로 '관계적 사유'라는 의미에서 유물론에 근접하는 것이겠다.) 외부에 의한 사고는 유물론을 물질이란 개념과 결별하도록까지 한다.”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계급 개념 등이 통설과 달라 혼란스럽다.

“비정규직, 이주노동자 문제 등은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요구한다. 오늘날 프롤레타리아트 개념은 노동자 계급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비계급’으로 보아야 한다. 한국노총 등에서 보듯 노동자가 귀족화되는 속에서 노동운동은 비정규직, 이주노동자 문제 등과 연대를 가져야 한다. 현재의 노동운동만으로는 변혁의 힘을 가질 수 없다.”

-‘기계적 포섭’은 마르크스의 노동가치설을 부정하는 것인가.

“가치나 가치 생산에 대한 생각을 달리해야 한다. 기계화·자동화도 가치를 생산한다. BT(생명공학) 산업도 잉여가치의 중요한 원천이 되고 있다. 정보화시대, 생명복제시대에는 인간과 기계, 생명체와 기계에 관해서도 기존과 다르게 사유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마르크스주의를 인간 중심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곤란하다.”(*물론 저자는 알튀세리언의 경력을 거쳤으며, 알튀세르적 맑스주의는 반휴머니즘을 표방했었다.)



-자신을 마르크스주의자라고 밝힌 이씨는 루카치, 그람시, 로자 룩셈부르크가 그랬듯이 마르크시즘은 역사 속에서 계속 재해석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씨가 책 제목을 ‘미-래의’ 마르크스주의라고 붙인 것은 마르크시즘이 다가온 현재뿐 아니라 ‘아직 오지 않은’ 세상을 이해하는 데도 유용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에게 마르크시즘은 ‘새로운 것을 찾는’ 무엇이 아니라 ‘아직 사유되지 않은 것을 사유하는’ 사상이자 철학이다.(*그에게서 마르크시즘은 일종의 '메시아주의'인 것이다.)

06. 04. 12.

P.S. '이진경'의 이미지를 검색하다가 눈에 띈 글은 김규항의 '이진경을 어떻게 생각하는가?'이다. 'B급 좌파'의 견해(04. 07. 10)도 참고삼아 들어보기로 한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이진경을 어떻게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을 이따금 받는다. 오늘은 이렇게 대답했다. 진리에 접근하는 방법은 사람에 따라 다르다. 이진경의 방법은 지적 편력, 혹은 지적 허세다. 편력이든 허세든 그가 알아서 선택할 일이지만 그런 방법이 지나치게 많은 존중을 얻는 건 우스운 일이다. 그 배경엔 그가 80년대 PD 운동권의 주요한 이론가였다는 다소 엉뚱한(그러나 한국이라는 기지촌 지식 사회에선 지극히 당연한) 이유가 있다.

-이진경의 주 메뉴가 현실 변혁의 가능성을 차단당한 유럽 좌파들의 정신적 공황과 지적 허세(특히 프랑스의)의 결합에 의해 탄생한 탈근대 철학이라는 건 우연이 아니다. 탈근대철학은 90년대 이후 한국에서 이진경을 비롯한 80년대 우등생 좌파들의 정신적 공황과 포기할 수 없는 지적 허세에 안성맞춤이었다. 주류 사회에 편입되기엔 자의식이 강하고, 기약 없이 풍찬노숙하며 운동하기에도 너무나 유약한 그들에게 탈주, 횡단, 유목 같은 탈근대 철학의 개념들은 뇌까리는 건 모든 것을 실제로 청산하면서도 뭔가 진지한 탐색을 지속하는 듯한 외양을 유지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이진경은 최근 <자본을 넘어선 자본>이라는 책을 ‘예약 이벤트’까지 벌이며 냈다. 그 책의 맑스주의적 가치에 대해 이런저런 말들이 있지만, 그 점에 대해선 이미 맑스가 말한 바 있다. “철학자들은 세계를 해석해 왔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하는 것이다.”(*요컨대, '근대적 맑스주의자'로서 김규항은 '새로운 맑스주의'에 반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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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oshot 2006-04-13 12:24   좋아요 0 | URL
'존 말코비치의 머리속'...이게 왠지 핵심같아 보인다는...

pax 2006-04-13 12:26   좋아요 0 | URL
'불온성'은 저자가 표나게 강조하는 바인 모양이다. 한데, '체계 외부의 공간'은 어디일까? '율도국'? 아니면, '존 말코비치'의 머리속?<--이 부분 읽고 그만 피식 웃고 말았습니다.^^ 확실히, 외부, 외부, 이야기하지만 저로서도 잘 감이 잡히지 않는 개념이더군요. 제가 상상력이 너무 부족한 건가요? 책이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질렀습니다. 근데 읽기도 전에 이 글을 읽으니 최초의 열광이 많이 가라앉는 느낌이군요....;;; 뭐, 비난하는 건 아닙니다. 어쨌거나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준 글입니다^^

yoonta 2006-04-13 13:51   좋아요 0 | URL
왠지 한겨례의 "이진경주의"라는 표현때문에 좌파쪽 사람들한테 더 많이 까이는 것 같다는..-_- 위의 로쟈님 코멘트에서도 느끼는 거지만..저는 솔직히 이진경씨만한 분도 드물다는 생각입니다. 맑스주의적 좌파라는 것이 이론적 천착을 기본으로 깔고들어가는 것이라면 그만큼 그것에 충실한 사람이 없죠. 김규항씨처럼 이론을 등한시?하는 좌파가 이진경씨처럼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을 까대는것이 설득력이 없어보이는 것도 그가 불온한 좌파?라는 꼬리표를 스스로에게 달고 있기 때문이죠. 고민하지않고 공부하지않는 좌파가 공부하는 좌파를 깐다..-_- 물론 그것이 지적허세처럼 보일수도 있지만..구세대적 혁명이 불가능한 오늘날의 상황에서 맑스주의의 세례를 받은 지식인이 할수있는 일이 무엇일까요? 공부하고 이론을 천착하는 것 그리고 미래의 변혁을 구상하고 준비하는것이 아니면 무엇일까요? 그런점에서 이진경은 다만 자신의 일에 충실했을 따름입니다.

그런점에서 저는 김규항씨의 별볼일없는 에쎄이집보다..이진경씨의 지적허세처럼보이는 그의 저작들이 백배는 더 불온해보이는군요..

참 아이러니컬한게 뭐냐면..구세대의 좌파에서 "코뮨주의"를 이야기했던 사람들은 공부하지않는? 바쿠닌같은 아나키스트였고 반대로 권위적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와 개량적 사민주의노선을 걸어온 사람들이 공부하는 맑스주의적 좌파였다면 요즘은 김규항씨같은 공부하지 않는 좌파들이 더욱 개량적?이어지고 공부하는 이진경씨같은 좌파들이 더욱 급진적인 아나키즘적 "코뮨주의"로 간다는 건데요. 요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_-

p.s. 그리고..프롤레타리아트-되기와 여자-되기는 다릅니다. 전자는 사회적으로 후천적으로 결정되는 성질을 가지는 반면 후자는 선천적으로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이진경식 뭐뭐-되기가 필요하다는것은 너무도 당연한것 아닌가요? 노동자답지않은 노동자가 그런 노동자보다 더 많은 지금의 현실을 보면 말이죠..

노부후사 2006-04-13 13:44   좋아요 0 | URL
불온한 건 둘째치고 이진경씨는 어쩜 저리 느끼해 보일까요. 흡흡

프라즈나 2006-04-13 13:59   좋아요 0 | URL
저도 yoonta님 의견에 동의하는 편입니다.

맑스주의건 들뢰즈주의건 불교이건 뭐건간에 이론은 재해석되고 발전해야 하는
것이며 그로인해 철학적/사상적 발전은 이루어진다고 봅니다.

이러한 노력을 두고 맑스의 말을 인용해서 비판하는 김규항씨가 오히려
'가볍고 교조주의적으로' 보입니다.

로쟈 2006-04-13 14:31   좋아요 0 | URL
다양한 의견들이시군요. yoonta님의 의견 가운데, "프롤레타리아트-되기와 여자-되기는 다릅니다. 전자는 사회적으로 후천적으로 결정되는 성질을 가지는 반면 후자는 선천적으로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이죠." 하신 것에만 이견을 답니다. 여자도 여자가 되어야 한다는 게 들뢰즈의 주장 아니었나요? 적어도 제가 읽은 콜브룩은 그렇게 이야기하고 그게 맞다고 봅니다. 여자-되기는 일종의 소수자-되기이기 때문에.

'B급 좌파'에 대한 비판은 그 자신이 'B급'이라고 접어두고 있기 때문에, 별로 효력이 없는 비판 같습니다(자신이 먼저 스스로를 까고 있는 형국이니까). 한편, 저로선 '좌파적 허세'가 불편하긴 하지만, 거기에 대해서 비판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마저 없다면, 그분들이 무엇으로 삶을 정당화할 수 있을지 아직은 염려스럽기 때문에...

yoonta 2006-04-13 15:42   좋아요 0 | URL
물론 여자도 여자-되기를 해야 하는 사람들이 간혹 있죠. 제가 하고싶은 이야기는 들뢰즈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모르겠지만..적어도 현실에서의 노동자들은 여자-되기를 해야하는 여자들보다 프롤레타리아-되기를 해야하는 노동자가 압도적으로 많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일뿐입니다. 그것이 소수자-되기인지 뭔지는 차치해놓고라도 말이죠. 여자들은 그래도 여자들을 상대로 남자-되기를 시킨다고 쉽게 남자가 되지는 않죠..반면 노동자들은 파쇼-되기를 하면 쉽게 파쇼가 되는 그런 사회적 집단입니다. 그래서 이진경식의 프롤레타리아-되기라는 말도 유효할수있단 거죠.


그리고 이진경의 프롤레타리아-되기에 문제가 있으면 그것에 대해 빈정대기보다는 그것의 문제가 무엇인지..그리고 그것을 대체할만한 계급론 혹은 대안이 무엇인지를 말하면 되는 겁니다.

로쟈 2006-04-13 16:38   좋아요 0 | URL
'빈정대기'의 뉘앙스가 포함돼 있지만, 기본적으론 제 '의문'이자 '질문'입니다. '프롤레타리아-되기'에서 왜, 노동계급과 프롤레타리아 범주를 분리시키면서까지 '프롤레타리아'(란 기표)를 특권화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유효성을 여전히 유지하기 위해서일까요?(프롤레타리아에의 충실성? 하지만, 그 역시 '미래의 프롤레레타리아'?) 이 역시 '빈정대기'로 비칠 수 있지만, 제 '의문'입니다. 책을 읽기 위한...

yoonta 2006-04-14 02:42   좋아요 0 | URL
제가 로쟈님 "질문"에 답할수있는 처지가 아니니 무어라 말하순 없네요. 프롤레타리아란 기표를 "특권화"하거나 맑시즘, 노마디즘, 탈주, 접속 등등의 기표를 특권화하고 또 그것을 소비하는 방식에 좀 문제가 있어보이긴 합니다. 아마도 맑시즘이라기보다는 아나키즘에 가까운 그의 "코뮨주의"를 굳이 "미-래의 맑스주의"라고 부르는 것과 프롤레타리아라는 기표를 특권화 시키는 것은 공통의 이유에서가 아닐까 싶어요. 맑시즘이라는 기표에 집착하는 그의 모습이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답답해보인다는 생각이 드는데..80년대를 살았던 사람으로써 맑시즘이라는 기표를 그냥 내다버리기에는 너무 아깝다고 느끼나 봐요.

로쟈 2006-04-14 08:32   좋아요 0 | URL
그런 의미에서, 맑시즘이 종교적이라는 의미에서, 이진경주의 또한 매우 종교적이란 생각이 듭니다...
 

 

 

 

 

바타이유를 검색하다가 한동안 잊어먹고 있던 영화를 떠올리게 됐다. 작년 가을에 개봉됐던 영화 <루시아>(2001)인데(원제는 'Sex & Lucia'), 스페인 영화이고 감독은 홀리오 메뎀, 주연 여배우가 파즈 베가이다. 비디오 대여점이라기보다는 만화대여점이라고 해야 할 동네 '영화마을'에 이런 류의 영화가 들어올 턱이 없기 때문에 언제, 어떻게 영화를 볼 수 있을지는 아직 미지수이지만(DVD는 좀 부담스런 가격이다), 기억을 위해서 관련기사를 옮겨놓는다. 주간한국(2005. 09. 07)에 실렸던 '탐욕적 에로티시즘에 빠진 그들'이 기사의 제목이고, 필자는 영화평론가 장병원이다.

-영화계에는 ‘한국식 제목'이라는 말이 있다. 외화가 국내에 수입될 때 한국 실정에 맞도록 제목을 바꾸는 경우를 두고 쓰는 용어다. 통상 알기 힘든 영문이나 밋밋한 제목을 선정적으로 개작해 원래의 뜻을 훼손하는 경우가 많아 문제가 되는데, <블로우 업>을 <욕망>으로, <브라질>을 <여인의 음모>로, 'Lost in translation'을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등으로 바꾼 것이 대표적이다. <루시아>는 영화계의 제목 바꾸기 관행을 거꾸로 뒤집은 사례로 기억될만하다. <섹스 앤 루시아(Sex & Lucia)>라는 자극적인 원제가 관객의 호기심을 더 끌만하건만, 어찌 된 일인지 수입사는 <루시아>라는 밋밋한 제목을 내세웠다.



-오금이 저리는 섹스 장면 하나 없어도 ‘섹스'라는 말을 제목에 버젓이 집어 넣는 세태를 떠올린다면, 실로 시류에 ‘역행’하는 모험적 시도라 할 수 있다. 수입사의 의도는 말초적인 쾌락에 호소하려는 싸구려 에로 영화가 아니라 품격 있는 예술 영화임을 강조하기 위한 것일지도 모른다. 원래 제목이 부끄럽지 않을 만큼 이 영화는 주체할 수 없는 성적 욕망으로 파국에 이르는 인간을 보여주지만, 탐미적 에로티시즘 위에 가볍지 않은 인생에 대한 성찰을 덧씌운다.

-죽음과 에로티시즘 프랑스 작가 조르쥬 바타이유는 저서 <에로티시즘>(*국역본과 영역본 모두 <에로티즘>으로 표기하고 있으므로 그렇게 해주는 게 낫겠다)에서 죽음과 에로티시즘의 친족관계를 설파한다. 바타이유는 에로티시즘은 죽음과 연결되고 죽음의 순간 인간은 극한의 쾌락을 경험하게 된다고 말한다. 즉 섹슈얼한 욕망은 죽음에의 동경에 다름 아니며, 성적 쾌락은 죽음의 경험과 흡사하다는 것이다. <루시아>는 이 같은 생의 철학에 기반하고 있다.

-레스토랑 웨이트리스 루시아(파즈 베가)는 6년 간 동거했던 소설가 로렌조(트리스탄 우요아)가 세상을 뜬 후 상실감에 시름시름 앓는다. 복잡한 심정을 정리하기 위해 지중해의 호젓한 섬으로 여행을 떠난 그는 천혜의 자연 환경과 그곳에서 만난 미스터리한 남자 카를로스, 민박집 주인 엘레나 등과 교류하며 평온을 찾는다. 하지만 로렌조를 축으로 맺어진 3사람의 과거 행적이 베일을 벗으면서 예상치 못한 비밀의 실체가 드러난다. 

-<루시아>는 한 인물에서 시작한 이야기가 가지를 치면서 전체 등장 인물로 퍼져가는 독특한 구조를 취하고 있다. 동상이몽의 욕망에 사로잡힌 인물들의 실체는 모든 것이 겉보기와는 다르다. <루시아>는 양파 껍질 벗기듯 이들의 과거를 하나씩 풀어놓으며 내밀한 진실의 속살을 들춰낸다. 뒤엉킨 관계만큼이나 그걸 포장하는 재료들도 실타래처럼 뒤엉켜 있다. 소설가인 로렌조가 쓰는 소설과 그의 현실이 뒤섞이고, 실제와 꿈, 환상, 과거와 현재, 미래를 자유롭게 왕래하면서 미궁 속을 헤매듯 이야기가 흘러간다. 관계가 하나 둘 씩 밝혀질 때마다 ‘그들 사이의 비밀’에 대한 궁금증이 증폭된다. 이 난잡한 관계의 사슬을 맺어주는 끈이 있다면 섹슈얼한 욕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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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아>의 성애 묘사 수준은 그간 한국의 영화 심의 기준을 뛰어넘을 만큼 파격적이다. 남녀 성기 노출은 예사요, 디테일한 성행위의 묘사도 수분간 이어진다. 호사가들의 궁금증을 자극한 이 강도 높은 에로티시즘 때문에 미국에서는 17세 미만 관객들은 영화를 볼 수 없는 'NC-17 등급'을 받았다. 더 놀라운 사실은 서슬 퍼런 심의의 가위질이 살아있는 한국에서 ‘무삭제' 판정을 받았다는 것이다. 영화 심의를 담당하는 영상물등급위원회 위원장까지 나서 “과거의 구태의연한 심의기준이 사라졌다는 결정적 증거"로 거론했을 정도로 이 영화의 섹스 장면은 표현의 강도가 세다.

-파격의 영상 미학 물론 파격의 섹스 묘사는 그저 말초적 쾌락을 위한 눈요기 용은 아니다. 대담한 섹스 장면은 드라마의 리얼리티를 강화하는 장치로 동원되고, 다양한 성적 취향을 회피하지 않는 개방성도 욕망의 덧없음을 주장하는 결론을 위한 것이다. 모든 등장 인물들이 한 자리에 모이게 되는 마지막 장면에서 밝혀지는 그들의 과거가 이 같은 점을 확인시켜준다. <루시아>에서 강렬한 에로티시즘 만큼 뇌리에 남는 것은 시각적 이미지의 아름다움이다. 보름달이 비치는 바닷가에서 펼쳐지는 도입부의 수중 정사, 파도가 만들어낸 포말 위에 어리는 그림자, 눈이 멀어버릴 것 같은 코발트 빛 바다와 하늘 등 화려하고 추상적인 풍경의 이미지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농담이 짙은 색감으로 덧칠된 유화나 총천연색 물감을 끼얹어 놓은 것 같은 영상은 잠시 동안 넋을 잃게 만든다. 잊을 수 없는 이미지들을 통해 감성을 자극하는데 공헌한 것은 영화평론가 출신 감독 훌리오 메뎀의 연출력이다. 홀리오 메뎀은 페드로 알모도바르(<내 어머니의 모든 것> <그녀에게>),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오픈 유어 아이즈> <디 아더스>)의 뒤를 이을 스페인 영화의 기대주로 각광을 받고 있는 인물이다.(*내가 아는 스페인 영화감독이 몇 안되는데, 다행히도 알모도바르-아메나바르는 내가 아는 '라인'이다. 메뎀이 그 뒤를 잇고 있다니까 '알모도바르-아베나바르-메뎀'으로 기억해두면 되겠다.)

 

 

 

 

-<그녀에게> <노보> 등에 출연했고 <스팽글리쉬>에서 억척스러운 스페인 이민자 여성을 연기한 매력적인 스페인 배우 파즈 베가(1976- )의 농염한 관능미도 빛을 발한다. <루시아>는 아름다운 배우, 아름다운 로맨스, 아름다운 자연을 통해 관객의 눈을 현혹시킨다.(*내가 이름을 아는 스페인 여배우는 모두 알모도바르의 작품에 출연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빅토리아 아브릴, 페넬로페 크루즈, 그리고 파즈 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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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최후의 순간, 감독은 우리가 아름답다고 느끼는 행위나 가치 뒤에는 추함도 함께 있다고 말한다. 선을 넘어버린 아름다움의 추구는 인간을 ‘도착'이나 ‘파멸'에 이르게 한다는 걸 깨닫게 한다. 하지만 유혹에 약한 인간이 그걸 깨닫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06. 04. 11.

P.S. 참고로, 본문에서 참조하고 있는 <에로티즘의>의 서문을 잠시 인용한다: "에로티즘, 그것은 죽음까지 파고드는 삶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엄밀한 말해서 정의는 아니다. 그러나 이 표현은 다른 어떤 표현보다 에로티즘의 의미를 잘 나타낸다고 생각한다. 정확한 정의가 문제라면, 생식 차원의 성행위에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에로티즘도 생식의 특수한 한 형태이기 때문이다. 생식에 목적을 둔 성행위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유성동물의 공통된 행위이다. 그러나 유독 인간만은 성행위를 에로티즘으로 승화시켰다... 에로티즘은 아기나 생식 등 자연 본래의 목적과는 별개의 심리적 추구이다."(<에로티즘>,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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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이런스 2006-04-12 15: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죽은 혼들이 무지 역동적이네요! 칼라의 마술사로 알고 있던 샤갈과 전혀 느낌이 다른걸요!

싸이런스 2006-04-12 15: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골이라는 자의 그림인가...

로쟈 2006-04-12 15: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샤갈의 그림입니다. 소설의 내용을 채워넣어야 하는데 좀 미뤄지고 있습니다...

urblue 2006-04-13 1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다리고 있습니다. ^^
 

 

 

 

 

폰카로도 사진을 거의 찍지 않는 내가 사진에 대해 특별한 조예를 갖고 있을 리 없다. 몇 사람의 사진가와 사진의 역사에 관한, 누드 사진의 역사에 관한 책 등이 내가 갖고 있는 전부이다. 물론 롤랑 바르트나 수잔 소택의 사진론, 그리고 존 버거의 사진 에세이 등도 갖고는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문외한의 처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건 아니다. 사진 예술의 거장이라는 에드워드 웨스턴의 이름을 현재 열리고 있는 그의 전시회 소개 기사를 읽고 이번에 처음 알았을 정도의 문외한 말이다. 어딘서가 보았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내가 기억하고 있는 이름은 아니었던 것.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는 권리마저 박탈당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의 제자이자 연인이었다는 티나 모도티와의 커플 공동전에 대한 소개 기사를 그의 '작품들'과 함께 옮겨놓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이다.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또 즐기는 것만 못하다고 하였으니, 비록 늦게 알게 되었으나 두고두고 즐기면 되지 않겠는가. 옮겨오는 기사는 오늘자 한국일보(2006. 04. 10)의 것으로 작성자는 조윤정 기자이다.

 -“멕시코를 떠나는 것은 티나를 떠나는 것으로 기억될 것이다.” 20세기 사진 예술의 거장 에드워드 웨스턴(1886~1958)은 1926년 멕시코를 떠나 캘리포니아로 돌아가며 작업노트 한 켠에 이렇게 끄적거렸다. 노트 속의 티나는, 그가 4년 동안 멕시코에 머물 때 함께 한 제자이자 연인으로 멕시코 혁명에 참가한 티나 모도티(1896~1942)였다.



-둘은 1919년 처음 만났다. 이탈리아계 미국인 티나 모도티는 캘리포니아에 있던 웨스턴의 작업실에서 조수로 일하고 사진도 배웠다. 천연두로 남편을 잃은 모도티는 1923년 전쟁과 혁명, 변화의 혼돈으로 뒤엉킨 멕시코로 스승 웨스턴과 함께 건너간다. 당시 웨스턴은 부인을 둔 유부남이었다. 둘은 그곳에서 사진관을 함께 운영하고 디에고 리베라, 다비드 에이 시케이로스, 프리다 칼로 등 아방 가르드 예술가와 만나 멕시코 르네상스를 주도하며 예술에 대한 열정을 불사른다. 스승과 제자였던 둘은 그 사이에 격정적인 사랑에 빠져들었다.



-정규 사진 교육을 받지 않은 모도티의 사진 기술은 거의 웨스턴으로부터 나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웨스턴으로부터 받은 영향이 그만큼 컸던 것이다. 모도티의 대표작 ‘장미’는 장미가 카메라 렌즈 속에서 하나의 조각처럼 변신하는데 이것은 누드, 사막, 조개 등을 인위적 조작 없이 조리개 작업 만으로 세밀하고 분명하게 포착하는 웨스턴의 작품과 흡사하다.

-웨스턴의 ‘사막 위에 여자’는 사막 사진 위에 누드 사진을 잘라 붙인 것처럼 대상이 극명하다. ‘누드’는 솜털 하나와 털이 난 구멍, 살결까지 보일 정도로 세부 묘사가 날카롭고 정확하다. 웨스턴은 이들 작품을 통해 사진의 기계적 사실성을 극대화했다. 여자의 몸과 바이올린, 물위에 떠 다니는 배의 형상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한 웨스턴은 카메라가 사람의 눈보다 명확하고 세밀할 수 있다고 믿고 그 스타일로 작업에 몰두했다.



-모도티가 정치, 사회 운동에 적극 가담하며 사회적 이슈로 활동 범위를 넓히자 웨스턴은 심한 거부감을 느끼며 끝내 결별한다. 그러나 티나 모도티는 사랑을 잃고도 차가운 정치적 신념으로 꿋꿋이 살아가면서 멕시코 체류 10년 동안 역동적인 작품 활동을 했다.



-가난, 고통, 힘겨운 노동 등을 담아낸 모도티의 사진에서는 정밀함과 우아함이 독특하게 묻어난다. 그의 작품 대부분은 이데올로기 논쟁 때문에 70년 대까지 대중에게 공개되지 못했으나 91년 ‘장미’가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당대 최고의 사진 경매가인 16만5,000달러에 낙찰되면서 주목 받기 시작했다.



-모도티와 헤어지고 캘리포니아로 돌아온 웨스턴은 피사체의 사실성을 더 강조하는 작업에 매달렸다. ‘조개’(1927년)는 극단적인 클로즈업과 정교한 조명으로 사진 속 조개 껍질이 금속성 기계처럼 보이게 했다. 그는 구겐하임 재단으로부터 상을 받은(1936년) 최초의 사진 작가였으며, 추상주의와 초현실주의를 넘나드는 다양한 예술적 시험을 시도했다.

-둘의 소름 끼치도록 사실적인 스트레이트 사진은 지금 ‘사진의 전설’이라는 이름으로 서울 강남구 청담동 갤러리 뤼미에르에서 전시되고 있다. ‘사진의 전설’ 전은 5월 7일까지 계속된다.

06. 04.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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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na 2006-07-10 1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balmas 님 서재를 자주 열람하는 철학도입니다. 나온다던 순수이성비판 재번역 출간 소식에 댓글을 따라 님의 서재까지, 그리고 여기까지 오게 됐습니다. 퍼가고 싶어 망설이다 인사드립니다. 잠시 거닐어보니 저는 인문학도를 명패만 걸고 있었군요. 종종 들르겠습니다.
글구, 딴엔 예술을 짝사랑하는 철학도라 멀리 사는 데도(부산) 그 비싼 돈을 주고 클레 전을 보러갔었지요. 클레는 제가 좋아하는 벤야민이나 들뢰즈가 좋아하는 작가라... 들뢰즈가 여러 차례 얘기하는 클레의 책,<현대 예술 이론>을 누가 번역 좀 하면 좋으련만.. 그 페이퍼도 퍼갑니다.

로쟈 2006-07-10 14: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술을 짝사랑하는 철학도시라면 예출철학을 하시면 될 거 같은데요. 더불어, 클레의 <현대 예술이론>도 번역해주시면 저도 좋을 거 같습니다.^^
 

 

 

 

요즘 가장 잘 나간다는 '아티스트' 낸시 랭에 대해 몇 자 적는다(*그녀의 책 <비키니를 입은 현대미술>(랜덤하우스중앙, 2006)이 이 페이퍼를 쓴 이후에 출간됐다). 그녀를 만나본 적도, 그녀의 전시회에 가본 적도 없지만, 언젠가 케이블 TV에서 눈에 띄는 (미혼의) '여성 아티스트'로 소개하는 코너를 우연히 본 적은 있다('콘트라 섹슈얼'이란 프로그램). 그리고, 채 몇 달이 되지 않아 (세계를 목표로 한다는) 그녀는 (적어도) '전국적인' 예술가가 되었다. TV광고에 나오는 건 물론 토론프로그램 패널을 거쳐서 케이블채널의 진행자까지 되었다고 하니까 가히 연예인 뺨친다(혹은 예술의 연예화?). 

미술계에 계시는 분들의 말씀으론 작품 또한 최근에 가장 잘, 가장 많이 팔리는 축에 든다고 하니까(한편으론 부러움과 질시의 대상이겠다) 소위 '성공하는 예술가'의 한 전형으로서 손색이 없다. '문화현상으로서의 낸시 랭'에 미학적으로나 사회학적으로 한번쯤 관심을 가져볼 만한 이유이다. 여기서는 몇 개의 인터뷰/기사를 따라가면서 나의 의견을 보태도록 하겠다.    

먼저, "상큼한 매력의 요정 "세상의 권태여, 가라" 기분 좋은 파격과 긴장의 화신, 편견 깬 신세대 행위예술가"란 제하에 막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시작했던 재작년(2004년) 5월 낸시 랭의 퍼포먼스를 취재한 주간한국의 소개기사. 자신을 새로운 '문화상품'으로 전시할 줄 아는 이 '앙큼한' 아티스트에 대한 기사는 이렇게 시작된다. 모든 강조는 나의 것이다.

"YOU LOST! 내게 무릎을 꿇어! 나른한 봄날 오후, 식곤증에 시달리는 당신, 방심하다가는 이 앙큼한 고양이에게 당할지도 모른다. 당신 품에 와락 안겨 윤기 나는 하얀 털로 당신의 가슴을 간지럽히는 럭셔리한 고양이가 대뜸 하는 말, YOU LOST! 당신은 아직까지 근엄한 얼굴로 허허, 웃겠지만 이 고양이를 쉽게 보았다간 큰 코를 다칠지도 모른다. 온갖 끼와 잠재된 재주로 당신의 이성을 흔들어 놓을 애교의 메신저! 당신은 곧 그녀가 만드는 폭탄주를 마시고 견고한 이성을 슬그머니 주머니에 넣어둘 것이다. 큐티, 섹시, 키티, 낸시, 구호를 외치는 당신을 발견하는 것은 시간 문제다! 이것이 낸시랭이다."

"아담한 키에 앳된 얼굴, 틴에이저로 보이는 얼굴과는 달리 섹시한 몸의 그녀는 이른바 ‘몸짱’, ‘얼짱’, ‘애교짱’이다. 벌써 다섯 번째 개인전을 가질 만큼 자신의 분야에서 신세대 유망주로 떠오른 아티스트다. 20대 후반의 이 행위예술가는 예술가에 대한 편견을 단박에 깨부순다. 타인을 만나자 금세라도 품에 안길 듯 달려와 자신의 소니 소형 캠코더에 인사를 시키는 그녀."(*요컨대, '큐티, 섹시, 키티, 낸시'가 그녀의 컨셉/구호이며, '몸짱' '얼짱' '애교짱'이 무기이다.)

-첫 대면부터가 그녀의 초미니 스커트만큼 아슬아슬했다. 하지만 거부반응은 일어나지 않는다. 낸시와 함께 있는 공간은 그녀가 만든 ‘이상한 나라’였다. 하늘의 구름이 갑자기 리라빛으로 변하고, 나무들이 춤을 추기도 하는 이 신기한 나라에서 호기심으로 가득찬 얼굴로 캠코더를 보며 인사를 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안녕? 낸시! 난 오늘 널 만나러 왔단다. 낸시 랭이란 여자아이가 순진무구 애교 덩어리란 소문을 듣고 왔어. 넌 누구니. 후 아 유?”

-초록의 계절, 푸르른 숲이 주위를 뒤덮어 권태롭기까지 한 계절에 서프라이즈한 퍼포먼스가 있었다. 위엄으로 가득찬 예술의 전당 지붕 아래, ‘SFAF(서울파인 아트 페스티벌) 한국 미술 열흘 장’ 오프닝에서 ‘싱싱 Sing’이란 이름으로 진행된 낸시랭의 세 번째 퍼포먼스. 단발머리 낸시는 까만 선글라스에 발목까지 오는 버버리를 입고 한 손엔 잉글리시 콕스파니엘을 산책시키는 그로테스크한 여자로 분한다. 궁금증과 긴장으로 혼합된 그 순간에 버버리를 벗어 던지는 낸시. 그러자 비키니 차림의 싱싱한 몸이 노출되고, 순간 로비는 해변가로 변한다.

-베이비 오일을 바르고, 자신의 몸을 훔쳐보는 관객을 향해, 손을 뻗어 ‘오일을 발라 주세요’ 라고 애교를 떨다가, 성큼 다가오지 못하는 관객을 비웃기라고 하듯, 싱싱한 육체를 뽐내며 신문과 잡지로 도배된 기계 앞으로 다가간다. 언뜻 보아 권위와 보수로 똘똘 뭉친 신문과 잡지다. 껍질을 벗겨내듯, 옷을 벗듯, 훌러덩 벗겨내니, 노래방 기계가 나오고, 상큼한 요정처럼 ‘보랏빛 향기’ 를 부른다. 관객은 어느새 그녀에게 동화된다. 그녀의 하이힐과 빨간색 비키니 만큼이나 도발적인 퍼포먼스였다.

-이 여자가 바로 낸시 랭. 미국 국적 취득 전 한국이름은 박혜령. 한국인이면서 미국 국적을 지닌 낸시는 18세까지 이중국적으로 두 가지 삶을 살아왔다. 지금은 누가 보아도 낸시 랭이란 이름이 너무도 잘 어울리는 여자다. 낸시의 퍼포먼스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03년 베니스의 비엔날레에서 낸시랭은 초대받지 않은 예술가였지만 ‘초대받지 않은 꿈과 갈등’이라는 주제로 개막식 날 자신이 좋아하는 빨간색 빅토리아 시크릿 란제리에 하이힐을 신고, 얼굴은 가부키를 연상시킬 만큼 허옇게, 어릿광대 마냥 페인팅을 한 채 바이올린을 연주했다. 물론 낑깡 낑깡.(*내가 케이블 TV에서 본 프로그램에서도 이 퍼포먼스는 자세히 소개되었다.)

-낸시가 내는 불협화음은 어릴 적 바이올리니스트를 꿈꿔왔지만 이루지 못했던 꿈에 대한 영원한 동경과 삶과의 갈등을 표현해낸 것이었다. 비엔날레의 주제, ‘꿈과 갈등’과 딱 들어맞았다. 세계 여러 잡지에서는 이 어린 동양 여자아이에게 극찬을 아끼지 않았고, 낸시의 데뷔작은 평범치 않게, 화려하게 시작되었다. 지나가는 서양인들이 낸시를 보고 하는 말, “You looks sad!"

-예사롭지 않은 낸시가 내뿜는 마력의 정체는 무엇일까. 낸시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요기니가 이런 의문을 풀어준다. 요기니는 바로 낸시 랭 자신이다. 천사와 악마의 중간자적 존재로 인간과 신 사이의 영적인 메신저 역할을 하는 요기니에 타부를 개입시켜 자신만의 독특한 요기니를 탄생시켰다. 낸시는 요기니 시리즈를 통해 자신의 꿈과 이상, 상처와 극복을 보여준다. 천사와 악마의 모습을 함께 지닌 요기니는 온몸이 상처투성이여서 어쩐지 슬퍼 보이고 고독해 보이지만, 잠재된 파워와 끈길긴 생명력을 지녀 끊임없이 부활하는 영적인 존재다. “호랑이는 강한 동물이지만, 무리지어 다니지 않는 고독한 영웅이잖아. 강한 것 같지만 늘 혼자 있는 외로운 동물. 내가 그렇다니까!”

-낯선 이의 팔짱을 쉽게 끼고, 가벼운 스킨 십으로 벽을 허물고, 친근감 있게 말을 트고, 허스키 코맹맹이 소리로 언니, 오빠, 선생님을 부르는 낸시. 버릇없어 보이기보다 타인에게 쉽게 문을 열어 오히려 불안할 정도로 순진해 보인다. 세계를 무대로 사업을 하던 어머니를 둔덕에 부족한 것 없이 풍요로웠던 유년시절, 용돈을 모아 산 천체 망원경으로 하늘을 관찰하던 낸시는 공상의 나래를 꿈꾸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다. 낸시의 공상은 우주로 뻗어 나갔고, 자연스레 공상 과학 만화의 상상력은 그녀의 작품 속에 그대로 녹아 있다.

-예술의 전당 지붕아래서 열리는 다섯 번째 개인전의 타부 요기니 시리즈는 기생의 가채머리를 한 동양 여성의 얼굴에 몸체는 로봇인 여전사가 등장한다. 낸시의 작품속 요기니는 대부분 잔다르크적 이미지의 여전사가 대부분이다. 여전사는 그녀와 닮은 그녀의 어머니이기도 하다. 낸시의 어머니는 낸시가 당신처럼 드라마틱한 삶을 살기보다 영화관에 가면 중간 줄에 앉은 관객처럼 평범하고 문안하게 살기를 바란다고. 하지만 낸시에겐 꿈이 있다. 요기니를 통해 사랑의 메신저가 되는 것이 그녀의 꿈과 이상이다.

-너, 아직도 꿈을 꾸니? 나는 묻는다. 응, 나는 꿈을 자주 꾸어. 하늘을 나는 꿈. 바다 속을 자유롭게 유영하는 꿈. 모든 억압에서 벗어나 새처럼 훨훨 나는 꿈을 꿀 때가 가장 행복해. 마치 이루지 못한 꿈을 실현해 가는 과정 같잖아.

-긴장이 풀어지는 봄날 오후, 꿈을 현실로 불러들이는 이 여자를 조심하라. 자신의 분신 타부 요기니 시리즈로 낸시가 말하려 하는 것은 바로 사랑이다. 혼자놀던 외로운 아이는, 자신의 잠재된 가능성을 실현시켜줄 요기니를 탄생시켰지만, 결국 요기니를 통해 사랑의 메신저가 되는 것이 그녀의 꿈이다. 

그리고 오늘자(2006. 04. 09) 인터넷판 세계일보의 기사(여타의 많은 기사들도 대동소이한 내용들을 다루고 있다). 

-“아티스트 낸시 랭입니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 자신을 아티스트라고 소개하고 대통령처럼 과장된 몸짓으로 악수를 나누는 사람, 낸시 랭(27·한국명 박혜령). 연예인인지 디자이너인지 사람마다 아리송한 ‘답안’을 내놓는 이 사람, 요즘 TV만 틀면 여기저기 나온다. 초고속통신망 광고에서 머리에 깃털을 달고 고양이 캐릭터와 탭댄스를 추고, 패션브랜드 광고의 지폐뭉치 속에서 웃고 있다. KBS의 ‘파워 인터뷰’에 고정패널로 나와 몇 차례 돌출발언으로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더니 슬며시 사라졌다. 그러더니 이번엔 케이블 음악채널 M.net에서 지난 3일부터 월∼금요일 오후 6시30분 ‘낸시 랭의 트렌드 리포트 必’에 진행자로 매일 저녁 나오며 카메라 앞에서 퍼포먼스도 하고 토크쇼도 한다. 본인 말대로 “연예인에게 오는 CF, 영화 등의 섭외는 다 들어온다”는 이 사람의 정체는 무얼까.



◆그녀에 대한 오해: 낸시 랭이 광장에 나온 건 2003년 베니스 비엔날레의 거리 퍼포먼스. 초대받지 않은, 가난한 아티스트 낸시 랭은 얼굴에 분칠을 하고 란제리 차림으로 하이힐을 신고 바이올린을 켰다. 이름하여 “초대받지 않은 꿈과 갈등 : 터부 요기니 시리즈’. 이 파격적인 공연 이후 그는 2000년대 한국 현대 미술계에서 논쟁적인 인물로 떠오른다. 하지만 그는 “퍼포먼스를 한 건 단지 돈이 없어서였다”고 설명한다.

-그를 만났을 때 가장 묻고 싶었던 말, 지난해 11월 KBS ‘파워 인터뷰’에 고정 패널로 출연했을 때의 문제의 발언을 되짚었다. 당시 그의 발언, “(천정배) 장관님도 여자 나오는 술집에 가보셨나요?” “저 엘리트 너무 좋아하거든요” 등은 그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큰 오해를 낳았다. “엘리트는 누구나 되고 싶어하는 거잖아요. 많이 가진 만큼 베풀지 않는 한국 엘리트의 현실이 문제이지, 엘리트가 문제는 아니잖아요? 전 명품도 좋아해요. 루이 뷔통부터 크리스천 디올까지, 좋아하는 순위별로 댈 수도 있죠. 누구나 원하는 걸 제가 굳이 숨기지 않은 게 잘못인가요.” 그녀는 ‘파워 인터뷰’에서도 “패널이 아닌 아티스트 낸시 랭으로 출연한 것뿐”이었다며 얼굴을 붉혔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모두가 똑같지 않으면 불안해해요. 튀어나오면 못박고 싶어하죠.”(*나중에 다시 지적하겠지만, '누구나 원하는 걸 굳이 숨기지 않는 것', 그게 '낸시 랭'표 아트의 핵심이다.)

-미국에서 태어나 필리핀에서 보낸 국제고등학교 시절 “전략적으로” 변호사를 사서 바꾼 이름이 낸시 랭(본명 박혜령)이다. ‘랭’은 그가 “비주얼과 타이포그래피, 국제성까지 감안해 만들었다”는 성이다.

◆걸어다니는 팝아티스트 낸시 랭: 아티스트 낸시 랭은 요즘 매일 출근을 한다. 매일 그가 아트디렉터로 있는패션브랜드 쌈지에 출근을 하고 M. Net 아이디어 회의와 녹화도 병행한다. 4월 말 출간 준비중인 책과 개인전, 또 최근 쌈지가 후원하는 입주 프로그램 작가로 선정돼 활동도 벌여야 한다. 도대체 언제 그 많은 일들을 수습할까. “꿈 속에서 아이디어를 얻는다”는 그는 침대 머리맡, 화장실, 핸드백 곳곳에 노트를 놓고 떠오르는 아이디어를 적어놓는 ‘기록광’이라고 했다.



-그녀의 아이디어는 ‘낸시 랭’ 상표의 옷과 가방들에서 쉽게 만날 수 있다. 그가 디자인한 핸드백 안쪽엔 ‘메이드 인 차이나’ 대신에 ‘메이드 인 헤븐’이라고 씌어진 상표가 붙어 있다. 드라마 ‘궁’에서 윤은혜가 들었던 알루미늄 하드케이스의 핸드백 ‘매직박스’도 그의 작품. 대중의 기호를 따라가면서 아티스트 고유의 세계를 지키는 일이 가능할까.“국내에서 아티스트가 방송프로그램 진행을 통째로 맡는 건 처음이죠. 팝 아티스트가 대중과 소통하기 위해 대중매체를 이용하는 건 자연스런 작업인데도 말이죠. 방송을 통해 트렌드를 만들고 전달하며 재해석하는 아티스트 낸시 랭의 세계를 생생하게 보여줄 겁니다. ”

-“낸시 랭은 비즈니스를 예술과 접목시키는 걸 즐기는 사람이”이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그는 “미술가도 잘 되는 것 보여줘야 다른 분야처럼 관심과 투자를 받을 수 있지 않겠냐”고 한다. 낸시 랭은 오는 6월 대대적으로 자선 기부파티를 벌일 계획도 털어놓는다. 작품 대신 계획서를 받아 13명의 젊은 예술가들을 뽑은 후 그들을 후원해 주겠다는 생각이 낸시 랭답다.

 

 

 



-그가 꿈꾸는 예술가는 피카소, 달리, 앤디 워홀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천재적 재능과 다작을 남겼다는 것. 그리고 부와 명성을 ‘일찍이’ 누렸다는 거죠. 고흐는 싫어요. 우울하고 고통스럽게 살며 명작을 남겼지만, 사후에야 유명해졌잖아요?”

-작품보다 작가가 유명해지는 것에 불만은 없을까. “지난해 말 쌈지에서 낸시 랭 개인 전시회할 때 사람들이 밖에서 줄서서 기다리다 들어왔어요. 쌈지 전시장 개장 이후 그렇게 성황인 건 처음이라 그러던데요.” “나르시시즘이 내 작품 키워드 중 하나”라는 그녀의 무한한 자신감과 솔직함이 부러워졌다.

'우리시대의 팝아티스트' 낸시 랭의 '아트'에 대한 나의 의견은 간단하다. 그녀의 이런저런 '아트'가 보여주는 것은 '탈승화의 예술', 혹은 '예술 이후의 예술'이라는 것이다. '예술 이후의 예술' 혹은 '탈역사 시대의 예술'에 대해서는 미국의 철학자/비평가 아서 단토의 <예술의 종말 이후>(미술문화, 2004)의 논의를 참조할 수 있는데, 단토의 '예술종말론'의 영감은 낸시 랭의 우상이기도 한, 팝아트의 선구자 앤디 워홀의 '브릴로 박스'(1964)에서 비롯됐었다. 

 

 

 

 

단토가 워홀의 작품에서 끌어내는 문제의식은 상품으로서의 '브릴로 박스'와 지각적으로 구별되지 않는 워홀의 '브릴로 박스'가 과연 어떻게 (여전히) 예술일 수 있을까였다. 그러니까 예술과 비예술간의 '지각적 식별 불가능성'의 문제가 '예술(시대)의 종언'을 이끌어낸 화두였다(덧붙이자면, 단토에게서 '예술의 종말'은 비극적인 음조와는 거리가 멀다. 그것은 '예술 다원주의'의 개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온몸으로 보여주는 낸시 랭의 '아트' 또한 이와 유사한 문제의식을 불러일으키지 않는가? 본인 말대로, “연예인에게 오는 CF, 영화 등의 섭외는 다 들어온다"고 할 때, 우리는 겉으로 봐서는 그녀가 아티스트인지 연예인인지 식별하기 어렵다(그녀에겐 매일 출근하는 '직장'도 있다). 즉, 여기서도 '지각적 식별 불가능성'이 개입하는 것.  

 

 

자본주의/대중문화 시대의 아티스트/연예인은 다 같이 대중에게 볼거리를 제공하고 각자의 장기와 재능을 상품화함으로써 인기와 부를 획득한다. 애교와 끼가 '예술'인 낸시 랭은 노래와 댄스가 '예술'인 채연, 혹은 연기가 '예술'인 한고은과 어떻게 구별되는가? 모두가 팝(pop)에 호소하는, 그럼으로써 한몫잡는 아티스트들 아닌가?(요즘은 '돈벌이'도 아트에 속한다.) 그렇다면, 단토가 앤디 워홀과 더불어 예술(미술)이 종말을 고했다고 선언한 것과 같은 맥락에서 우리는 낸시 랭과 더불어 예술가의 종말을 선언할 수 있을 것이다(물론, '예술가의 종말' 이후에도 고흐처럼 "우울하고 고통스럽게 살면서 명작을 남"기는 예술가들도 여전히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예술가는 '예술가 다원주의' 시대의 한 유형 정도로 자리매김될 수 있을 따름이다).

 

 

 

 

그렇다면, 어떤 의미에서 '탈승화의 예술'인가? 프로이트를 참조하자면, 예술은 기본적은 '승화'의 과정이자 결과물이었다. 할 포스터의 정리를 따라가보자: "프로이트는 예술을 승화의 과정이며 본능을 포기하는 협상과정이라고 생각했다. 프로이트는 예술이 탈승화의 프로젝트라거나 문화가 금지하는 사항을 위반하는 행위라고 보는 입장을 단호히 거부했다."(<욕망, 죽음 그리고 아름다움>, 31쪽, 번역 일부 수정) 승화(Sublimation)라는 건 리비도의 (비사회적) 욕망을 예술적 창조행위처럼 사회적으로 수용할 만한 양태로 치환하는 것을 말한다.

예컨대, 낸시 랭의 기원이라 할 2003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의 퍼포먼스 '초대받지 않은 꿈과 갈등'은 승화의 전형적인 예이다. 다시 옮기면, "개막식 날 자신이 좋아하는 빨간색 빅토리아 시크릿 란제리에 하이힐을 신고, 얼굴은 가부키를 연상시킬 만큼 허옇게, 어릿광대 마냥 페인팅을 한 채 바이올린을 연주했다. 물론 낑깡 낑깡. 낸시가 내는 불협화음은 어릴 적 바이올리니스트를 꿈꿔왔지만 이루지 못했던 꿈에 대한 영원한 동경과 삶과의 갈등을 표현해낸 것이었다. 비엔날레의 주제, ‘꿈과 갈등’과 딱 들어맞았다."

거기서 '영원한 동경과 삶과의 갈등'을 어릿광대의 불협화음 바이얼린 연주로 표현하는 것이 바로 승화이다(그러니까 낸시 랭은 적어도 베니스에서는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예술가'였다). 혹은 낸시 랭의 이러한 말: "너, 아직도 꿈을 꾸니? 나는 묻는다. 응, 나는 꿈을 자주 꾸어. 하늘을 나는 꿈. 바다 속을 자유롭게 유영하는 꿈. 모든 억압에서 벗어나 새처럼 훨훨 나는 꿈을 꿀 때가 가장 행복해. 마치 이루지 못한 꿈을 실현해 가는 과정 같잖아."

'이루지 못한 꿈을 실현해 가는 과정', 혹은 현실과 타협해 가는 과정, 그런 게 프로이트가 생각했던 예술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의미에서 프로이트는 초현실주의자들처럼 예술을 탈승화의 프로젝트로 보는 입장에 반대했던 것이다. '탈승화(Desublimation)'란 자아의 중개/제약 없이 리비도적 욕망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다. "낸시는 요기니 시리즈를 통해 자신의 꿈과 이상, 상처와 극복을 보여준다"라고 할 때 그 '극복'은 억압되지 않은 리비도의 자기 분출/표현으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탈승화는 "세계를 무대로 사업을 하던 어머니를 둔덕에 부족한 것 없이 풍요로웠던 유년시절"의 유산이기도 할 것인데, 그녀는 자신의 욕망과 타협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그녀의 '낑깡 낑깡'은 자신의 본모습이 아니라, 한시적인 모습이었을 뿐이겠다).

가령, 이런 기사는 어떠한가? 데일리 서프라이즈(2006. 01. 01): "한국사회에 혜성처럼 등장해 이미 그녀 자신이 하나의 브랜드화 되어버린 아티스트 낸시랭(한국명 박혜령)의 파격 행보는 지금껏 우리 머릿속에 각인돼온 전통적 아티스트의 단상을 지극히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다. 미술 잡지나 공모전, 아트페어가 아닌 <바자>나 <엘르> 같은 패션지에 단골손님으로 등장하며 대중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시작했던 낸시랭은 누구보다 자신을 드러내기에 주저하지 않는 솔직한 아티스트다."

여기서, 전통적 아티스트에 대한 상이 혼란스러워지는 것은 그녀가 '예술가 종말' 시대의 아티스트이기 때문이며, '솔직한 아티스트'라는 것은 이 '나르시시즘의 예술가', 혹은 '공주병 예술가'가 자신의 욕망과 따로 타협하지 않는 '탈승화의 예술가'라는 걸 암시해준다. 예컨대, 그녀는 명품중독자로서의 자기 자신을 그대로 퍼포먼스의 주제로 삼는다.

다시 데일리 서프라이즈: "신드롬이라 부를 만한 예외적 상황들을 끌어내며 한 해 동안 대한민국 현대미술계의 이슈 메이커가 되었던 그녀는 자신에 대한 극단적 평가에도 불구하고 빠른 속도로 미술계의 핵심부로 다가서고 있다. ‘아이 러브 루이비통’을 외치며 예일 로고를 작품에 등장시키는 철저한 세속성과 싱싱한 육체를 이용한 섹스어필한 퍼포먼스는 이중성을 벗어던진 홑겹의 재현 방식으로 음습하지 않은 경쾌함 마저 전해 준다. 그녀가 원하든 원하지 않았든 고립감에 빠져 무게에 짓눌린 현대미술계의 핵심을 어떤 방식으로든 건드리고 있다는 얘기다."

'이중성을 벗어던진 홑겹의 재현방식'이 암시적으로 뜻하는 것 또한 그녀가 리비도(이드)와 자아 간의 타협과정을 필요로 하지 않는 예술가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정확히 바로 그러한 의미에서 그녀는 우리시대의 초현실주의 아티스트이다. 혹은 그녀의 예술적 주체는 초현실적 주체이다. 대부분 잔다르크적 이미지의 로봇 여전사인 그녀의 대표 아이템 '타부 요기니'처럼. 나는 그녀의 로봇-요기니가 욕망과 타협할 거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그녀가 대놓고 말하는 자신의 욕망이란 무엇인가? "천재적 재능"을 인정받으면서, "다작"을 통해 "부와 명성을 ‘일찍이’ 누리는 것"이다. 우리시대 대부분의 예술가들이 그런 걸 바란다고 해도, 적어도 '현실'에서는 대놓고 말하지 않는다. 대놓고 돈을 밝히지도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낸시 랭의 '현실'은 우리의 '초현실'이다(혹은 우리시대는 이미 '탈승화의 시대'인가? 하긴 '부자되세요!'라고 인사하는 나라는 많지 않다). 

06. 04.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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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발바닥 2006-04-09 2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연히 오늘 저도 낸시랭에 관한 글을 퍼왔는데 로쟈님도 낸시랭 프로젝트를 진행중이시라니...이런 우연의 일치가...^^ 일단 퍼가고 날카로운 분석과 의견 부탁드려요~

로쟈 2006-04-10 09: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날카로운 분석과 의견'은 아니고, 그냥 낸시 랭 현상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보았을 뿐입니다.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지만, 랭이 뉴스메이커 구실을 워낙 톡톡히 하고 있는지라...

사마천 2006-04-11 2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있네요 덕분에 새로운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 많은 글과 사진을 직접 정리하셨나요? 와... 백남준도 초기에는 머리를 붓삼아 먹 뭍여가지고 글쓰더군요. 일종의 퍼포먼스는 새로운 벽깨는 시도였다고 합니다. 이 아가씨의 장점도 튀는 것 내지 자신감 만은 아니겠지요. 훨씬 많은 무엇이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로쟈 2006-04-11 2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미지들을 따다 붙이는 건 단순작업입니다(간혹 애로사항이 없는 건 아니지만). 물론, 낸시 랭의 장래는 그녀에게 달려있을 겁니다. 저는 새로운 타입의 아티스트 유형을 그녀가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하며, 그에 대한 호오의 문제는 다른 문제라고 봅니다.

로쟈 2006-05-08 0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두 가지 요점 중 하나는 그러한 '언론 플레이' 덕분에 낸시 랭의 경우 '아티스트'인지 '연예인'인지 구별되지 않으며 때문에 '예술가 종언 시대의 예술'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그건 '공감'과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오노나 백남준이나 다 '사기'를 쳤지만, 그들에겐 '아티스트'의 아우라가 있었죠. 낸시 랭은 그런 '아우라'를 갖지 않는 국내 최초의(?) 아티스트가 아닐까요?(덕분에 많이들 불편해 하시는?) 그에 대한 '평가'는 행간에서 읽으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로쟈 2006-05-08 2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인원님의 흥분을 이해할 수가 없군요. 가급적이면 예의를 갖춰서 페이퍼를 썼지만, 대략적인 행간의 의미는 낸시 랭 타입의 '연예인-아티스트'에 대한 불편함을 적어놓은 것입니다(그건 '부자되세요!'라는 노골적인 인사말에 대한 불편함에 상응하는 것입니다). "아이러니한 점은 그렇게 예술의 경계선을 갖고 놀아도 결과는 예술이라는 점입니다"라고 하신 건 저와 의견이 전혀 상반되는데, 저는 낸시 랭이 예술가도 아니며(그래서 '예술가 종말 시대의 예술가'라고 했습니다), 그녀의 작품들이 '예술'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그래서 '예술 종말 시대의 예술'이라고 적었고 '탈승화의 예술'이라고 적었습니다). 다만, 우리가 자본만능시대의 '천박한 시대'를 살고 있는 거라면, 낸시 랭은 징후적으로 중요한 '작가'일 수 있다는 게 제 견해입니다(노골적으로 그녀만큼 돈을 밝히는 작가가 따로 더 있는지요?). '천박한 시대'에 어울리는 '천박한 아티스트'란 의미에서. 더불어, 무슨 '책장사' 운운하시는 건지? 반론을 제기하시는 건 언제나 환영이지만, 글은 제대로 읽고 제기해주십시오...

로쟈 2006-05-09 08: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습관적인 시간낭비'에 동참하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책장사를 계속 거드실 필요는 없을 거 같고(이건 애당초에 개입하실 필요가 없었던 문제 같습니다), '예술 장사꾼'들 신경쓰지 마시고(평범한 고흐도 그렇게 신경을 썼던가요? 미술사에 제가 무지해서), 진정한 예술에 정진하시길 기원합니다...

뱃살공주 2006-05-09 16: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흐도 인간인 이상 당연히 무관심보다는 나쁘게라도 인정받고 싶었을 거여요. 그러나 대부분은 성공보다는 작품에 애착을 더 느끼기 때문에 현실과 쉽게 타협하지는 않을 듯 합니다. 당당한 비굴함이 솔직함이 될 수 없듯이. 아무래도 재미있게 일하는데 파리들이 주변에서 맴돌면 성가시지 않을 사람 없잖아요?
그나저나 정리 잘 하셨네요. 시간 많이 들었을 것 같아요. ^^

로쟈 2006-05-09 17: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적당한 이미지들을 찾느라고 '시간'이 좀 들긴 했는데, 그 이미지들이 그나마 도망가지 않고 얌전하게 있네요.^^

2007-01-08 13:51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