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나온 책들 가운데 <전통과 중국인>(플래닛, 2007)이란 책이 너무 두꺼워보여 그냥 지나쳤는데, 알고 보니 중국의 '반체제' 지식인 류짜이푸(1941- )가 공저자의 한 사람이다. 몇 년전에 대가급 지식인 리저허우(1930- )와의 대답집 <고별혁명>(북로드, 2003)을 같이 낸 이가 류짜이푸이다. 과문하지만, 이 두 사람이 중국의 대표적인 반체제 지식인 계보를 잇는 게 아닌가 싶다('반전통 지식인'이라고 해야 더 타당할까?).

해서 <전통과 중국인>을 <고별혁명>과 같이 모아놓고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물론 유감스럽게도 이 생각에 구체적인 실행계획이 포함돼 있지는 않지만. 나는 당장 지젝도 읽어야 하고 톨스토이도 읽어야 하고 소포클레스도 읽어야 한다). 미리 관련기사들을 모아놓는다. 세계일보의 기사는 '편집장과 한권의 책'이란 유익한 연재물인데, 이번주에는 <전통과 중국인>을 펴낸 플래닛의 안성열 편집장이 직접 책소개에 나섰다. 그리고 중앙일보의 칼럼은 이 책의 배경이 되는 사상의 계보를 잘 요약해주고 있다.

세계일보(07. 08. 25) 유가·도가·불가 사상이 중국인의 국민성에 미친 영향은?

전통은 그에 부합하는 인간을 만들어 냄으로써 생명을 유지한다. “유가의 학설 속에는 매우 뿌리 깊은 도덕에 대한 광신의 물결이 숨겨져 있었다. 애초에 그것은 검토를 거치지 않은 단순한 원칙일 뿐이었으나, 나중에는 신성불가침의 철칙으로 변했으며 갈수록 거세져 막을 수 없는 거대한 물결로 변했다. 개인의 인생에서 그것은 이성을 잃은 완고하고도 영문을 알 수 없는 도덕적 영웅주의로 표현되었고, 한 나라에서는 공상 속의 천국에 대한 이상을 신하와 백성들에게 주입하는 것으로 표현되었다. 통치자는 이를 위해 ‘실천하라’고 부단히 강요했다. 이 도덕에 대한 광신의 물결은 과거 십여 세기 동안 중국을 석권했으며, 결국 중국을 쇠퇴의 위기로 몰고 갔다.”

‘전통과 중국인’은 전통문화가 중국인의 국민성에 미친 영향을 지식고고학적 방법으로 추적하면서, 중국 근대라는 격변기의 정신사적 특수성을 포착하려 한 역작이다. 지은이들은 공맹으로 대표되는 유가뿐만 아니라 노장의 도가와 불가, 그리고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라고 여기는 중화주의까지 중국의 문화적 전통이라고 간주될 수 있는 광범위한 스펙트럼에 비판과 해석의 메스를 가한다.

루쉰, 천두슈, 후스, 리다자오, 우위, 저우쭤런 등 이른바 ‘사상계의 청소부’라고 불린 중국 근대 지식인들이 전통에 대해 취했던 비판적 태도와 논점의 핵심들을 제시하고 자신들의 관점을 더했다.
또 유가, 도가, 불가 사상의 철학적 핵심을 사상 그 자체의 관점에서 제시하면서 각각의 사상적 기원에서부터 제도화 과정, 그리고 말류들에 의한 왜곡과정까지 세밀하게 추적하고 있다.

지은이들의 논의의 바탕에는 ‘인간’의 본원적 존엄성과 자유에 대한 열망이 깔려 있다. 류짜이푸와 린강, 두 지은이는 중국인들이 도덕이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를 걷어치우고 해탈의 단꿈에서 깨어나 새로운 ‘인간’으로 거듭나기를 간절히 바란다.

한때 화제를 몰고 왔던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김경일 지음, 바다출판사)라는 책과 주제가 유사하지만 서술의 폭과 깊이에서 차이가 크다. 인문의 의미에 값하는 책이다.(안성열 플래닛 편집장)

중앙일보(07. 08. 25) “공자가 중국을 쇠퇴의 길로 몰고 갔다”

아편전쟁에서 치욕스런 참패를 맛 본 뒤에도 중국은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고 나머지는 다 오랑캐라는 ‘천조(天朝)심리’를 떨쳐버리지 못한다. ‘전쟁에서 번번이 패한다’는 누전누패(屢戰屢敗)를 ‘완강하게 버티며 굴복하지 않는다’는 누패누전(屢敗屢戰)으로 고쳐 말함으로써 현실을 교묘히 비켜간다. 루쉰(魯迅)을 비롯한 5·4운동의 ‘문화 선구자’들은 그러나 부끄러운 자화상을 외면하지 않는다. 루쉰은 중국인들을 건달에게 얻어맞은 뒤에도 “그래도 내가 (나 자신을 경멸하는 데는) 제1인자”라고 자위하는 주관적 승리법의 달인, 아Q에 빗대 마음껏 조롱한다.



중국인들이 그 꼴이 된 것은 수 천 년 찌든 전통의 묵은 때 탓이었다. 루쉰에게 그것은 중국의 ‘츠런(吃人=食人)’ 전통이다. 츠런은 인육을 먹는 야만적 풍속(실제 중국에 존재했다) 외에도 “독립적인 인격과 개인 정신에 대한 부정과 거세”를 뜻한다. 즉 자신보다 강한 자한테 억압받고 약한 자는 억압함으로써 ‘인간다운 인간’은 없고 노예와 상전만 존재하는 현실 말이다.

그러한 전통의 대표선수는 공자다. 이 책의 부제가 ‘공자와 루쉰의 대결’인 이유다. 저자들은 범도덕주의를 표방하는 유가(儒家)의 예치질서가 중국인들의 자아와 주체를 제거했으며 궁극적으로 중국을 쇠퇴의 길로 몰고 갔다고 주장한다. 반면 전통을 거부하는 ‘아버지 세대에 대한 심판(審父)’으로 불합리를 만들어 내는 사상적 근원, 즉 전통적 가치관을 용도폐기하고 현대적 의미로서의 국민성 개조를 추구한 루쉰·천두슈(陳獨秀)·후스(胡適)·리다자오(李大釗) 등 중국의 근대 지식인들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이를 통해 저자들이 열망한 것은 인간의 본원적 존엄성과 자유가 보장된 사회였다.

1989년 천안문 사태 이후 반대파의 공격에 직면했을 때 후진타오 총리가 도피처를 마련해줄 정도로 저명한 석학인 류짜이푸(劉再復)는 현재 홍콩성시대학 중국문화센터 명예교수·미국 콜로라도 대학 객좌 교수로 재직 중이며 린강(林崗)은 중산대학 교수로 있다.(이훈범 논설위원)

07. 08.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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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며칠 방문자수가 '이상하게' 뜬다. 일시적으로 그러는 경우는 있었지만 이번처럼 '지속적'인 경우는 없었던 듯하다. 알라딘의 카운트를 신뢰할 수 없는 이유이다(이 밤중에 무슨 일로 몇 백 명이나 이 서재를 찾겠는가?). 그러나저러나 나는 나대로의 일을 할 뿐이다. 지난주에 스크랩해 두려던 기사를 이제야 시간을 내서 정리해둔다. <강대국의 흥망>의 저자인 폴 케네디 예일대 교수가 쓴 러시아 관련칼럼이다. 원문도 같이 붙여놓았다(왼쪽 정렬을 해놓아도 화면상으로는 양쪽맞춤으로 뜨는 탓에 유감스럽게도 단어들이 깨져서 보인다).

경향신문(07. 08. 18) 러시아, 강대국으로 복귀하다

지난 몇 년간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이끄는 러시아는 다시금 자신감 넘치고 매우 공세적인 나라가 됐다. 필자는 20년전 저서 ‘강대국의 흥망’에서 이 거대한 나라가 많은 외압과 내홍에도 쉽게 망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러나 러시아가 세계 무대 중심에 이렇게 빨리 복귀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많은 이들은 석유와 가스의 값이 급등했고 러시아가 운좋게도 방대한 양의 에너지를 보유하고 있다는 점을 들어 러시아의 회복 배경이 취약하다고 볼 지도 모른다. 그러나 노르웨이나 두바이처럼 석유 수입이 지혜롭게 투자될 경우 국가 발전을 가져올 수 있다. 분명한 것은 늘어난 부가 크렘린에 공세적인 외교정책을 펴도록 자신감을 불어넣었다는 점이다.

현재 러시아 일방주의적 행동을 능가하는 이는 지난 6년간 백악관이 유일할 것이다. 미국이 국제기구에서 특수한 지위를 이용해 이스라엘을 보호해 온 것처럼 러시아는 유엔 안보리에서 거부권 행사로 코소보의 독립 희망을 짓밟았다. 푸틴 정부 관리들은 이웃 국가들에 러시아 에너지 공급에 대한 의존도를 인식시켜 압박하는 이른바 ‘송유관 외교’를 구사하는 데 능숙하다. 서구 석유 회사들도 러시아 정부가 에너지 사용계약을 법적 의무사항으로 간주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 러시아는 군축 협정을 폐기하는 속도로 국제 사회에서 영향력을 확대해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 이는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패배와 치욕을 경험했던 전통적인 파워엘리트가 자산과 권위, 위협력을 회복하는 시점에서 보이는 단계적 행동 패턴이다. 만약 이같은 현상이 지금 더 눈에 띈다면 세계의 맹목적인 석유 의존도와 부시 미국 행정부의 이라크와 테러리즘에 대한 강박 때문일 것이다.



오히려 필자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은 국가주의 나아가 민족주의적 기운을 강화하기 위해 푸틴 행정부가 실행하는 광범위하고도 미묘한 조치들이다. 애국주의적인 청년단체 조직과 러시아 역사교과서 수정작업이 여기에 해당된다.

‘나시(‘우리들’이라는 뜻)’라는 이름의 청년단체는 불과 2년 남짓 됐지만, 민주진영의 푸틴 정권 비판에 맞서 극우주의자 친위대로 삼으려는 정부의 의도에 힘입어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나시가 옹호하는 주요 정책들은 모국에 대한 경외, 가족과 러시아 전통, 결혼에 대한 존경, 외국인에 대한 혐오 등이다(나치 히틀러의 구호와의 유사성을 외면하기 힘들다).



푸틴이 고등학교 역사교범 집필자들을 불러 칭찬했다는 것도 그렇다. 역사학자로서 필자는 교육부가 국가의 과거에 대한 어떤 형태의 공식적인 의견을 채택해야 한다는 것에 망설이는 입장이지만, 러시아의 역사 교범이 민주국가 연합에 참여하는 것이 미국에 주권의 일부분을 내주는 것으로 기술한 것은 충격적이다.

장기적으로 볼때 나시 극단주의자들의 돌출 행동은 역사에 모호한 자취로 남을 수 있다. 반면에 젊은이들에게 의도적으로 사상을 주입하고 그들이 물려받을 위대하지만 극심한 혼란을 겪은 국가의 역사를 수정하는 것은 우리의 21세기에 중대한 의미를 지닐 것이다.(정리|김유진기자)

WORRIED ABOUT PUTIN’S RUSSIA?: READ ON
By Paul Kennedy

For the past several years, the Russia of Vladimir Putin has been sending very clear signals that it is no longer the weakened, troubled and Western-dependent state that it was compelled to be following the collapse of the Soviet Union.

Russia is now once again a proud and very assertive nation, increasingly recognizable by its actions to historians of its Czarist and Communist predecessors. Twenty years ago (in my book “The Rise and Fall of the Great Powers”), I predicted that this enormous country, though deeply troubled by internal fractures and external exhaustion, would not go down without a fight; but I did not think Moscow’s return to the center of the world stage would occur so fast.

Now, many will say that this recovery is based on shallow foundations, in fact that it rests almost totally upon the high price of oil and gas — and Russia’s fortunate possession of vast supplies of those vital commodities. That is true. But oil revenues, if invested wisely (as has been done by two countries as different as Norway and Dubai during the past decade), can enhance national infrastructure, industrial and technological developments, and military security. The Dutch Republic was built upon the herring fisheries of the North Sea; the good burghers of Amsterdam knew how to reinvest their profits in other directions.

In any case, it is perfectly clear that not only is Putin’s regime making smart strategic investments — in infrastructure, laboratories, a revived and modernized military — but also that its flow of wealth is giving the Kremlin the confidence to pursue assertive foreign policies, secure for the moment in a set of global circumstances that has hobbled the United States, turned the attention of China and India elsewhere (toward growth and internal modernization), and given all the world’s oil-producing states immense leverage. Even the incompetent administrations of the late Messrs. Chernenko and Breznhev could not have frittered away such strong cards. And Putin seems, by all measures, a truly formidable poker player.

Right now, the list of Moscow’s unilateralist actions is probably only exceeded by those of the White House over the past six years. Take an obvious example: Russia uses its veto power on the U.N. Security Council to support Serbia and crush Kosovo’s hopes of independence, just as the U.S. uses its privilege to protect Israel and block pro-Palestinian resolutions in the world organization. In a similar negative way, Russia controls what the Security Council may, or may not, do regarding actions against Iran and North Korea.

The list goes on. Putin’s ministers are adept at using what has come to be called “pipeline diplomacy” to force neighbors like Belarus and Ukraine to bend to Moscow’s will and recognize their dependence upon Russian energy supplies, and it is clear that this is intended to have a secondary intimidation effect upon the states of Western Europe as well. Estonia and Latvia are browbeaten over what are regarded as anti-Russian acts, such as the removal of Soviet war memorials or treatment of Russian-speaking citizens.

Western oil companies are discovering that a contract for control of energy resources is not necessarily viewed by the Moscow government as a sacred legal obligation; as the Russian state returns to power, it is insisting upon altered conditions, all of which ensure that the Kremlin and its agencies have the majority share. Thus, massive international corporations such as BP, Exxon and ConocoPhillips, long regarded as powerful independent actors, are now, literally, being put over the barrel, forced to recognize their weaker bargaining position.

Many of their CEOs must have rubbed their eyes at the reports that Russia has just claimed extensive rights at the North Pole, with implications for rights to the exploitation of seabed energy resources. Moscow seems to be advancing its international claims with about the same speed that it denounces arms-control accords. Really, it is hard to keep up.

If all of this is unsettling, especially to Western business interests and to left-wing theorists of global capitalist conspiracies, it is by no means unusual. Actually, compared with extravagant policies and proclamations of Venezuela’s Hugo Chavez and Iran’s Mahmoud Ahmadinejad, Russia’s actions are rather predictable. They are the steps taken by a traditional power elite that, having suffered defeat and humiliation, is now bent upon the recovery of its assets, its authority and its capacity to intimidate.

There is nothing in the history of Russia since Ivan the Terrible to suggest that Putin is doing anything new. “Top-down” policies from the Kremlin have a thousand-year provenance. If they seem more noticeable at this moment in time, it may simply be because of two (possibly temporary) factors: the modern world’s blind dependence upon petroleum, and the Bush administration’s obsession with Iraq and terrorism. All Putin is doing is walking through an open gate — opened, by and large, by the West.

So the reports from Russia that interest me most are not those concerning drone submarines under the Arctic icecap, or putting the screws upon Belarus to pay backdated oil charges. What intrigues me are the broader and more subtle measures being instituted by the Putin regime to enhance national — and, even more, nationalist — pride. Unless I am mistaken, they point to something much more purposeful, and potentially quite sinister.

Two examples will have to suffice here: the creation of a patriotic youth movement, and the not-too-subtle rewriting of Russia’s school history books. The youth movement called “Nashi” (it translates as “ours” or “our own”) is only a couple of years old, but it is growing fast, encouraged by government agencies determined to instill the right virtues
into the next generation and to use this cadre of ultra-Russianists to buttress Putin’s regime against domestic (read: liberal) critics.

The policies that Nashi advocates are eclectic, although probably the same could have been said about the Hitler Jugend 70 years ago. Among the main features are reverence for the Fatherland, respect for the family, Russian traditions, and marriage (the phrase “Kinder, Kueche, Kirche” is hard for this historian to resist), and a pretty complete detestation of foreigners; it is hard to tell whether American imperialists, Chechnyan terrorists, or Estonian ingrates are at the bottom of their list of those who threaten the Russian way of life.

Right now, Nashi is training tens of thousands of young diligents; right now, they are in summer camps where they do mass aerobics, discuss “proper” and “corrupt” politics, and receive the necessary education for the struggles to come. Vast numbers have recently been mobilized to harass the British and Estonian ambassadors in Moscow (don’t say the Foreign Ministry was unaware of such stuff), following Moscow’s disputes with those two countries. According to The Financial Times, Nashi is training 60,000 “leaders” to monitor voting and conduct exit polls in elections this coming December and March. One doubts if their impartiality will reach that of, say, an international U.N. electoral observer unit. I find this all pretty creepy.

So, too, are the reports that Putin has personally complimented the authors of a new manual for high school history teachers that seeks to instill a renewed pride in teenagers of their country’s past and encourage national solidarity. As a professional historian, I always shrink from the idea that education ministries should approve some sort of official view of the national past, although I know that bureaucrats from Japan to France do precisely that, that the PRC leadership would get highly upset if it learned that schools in China could choose their own textbooks, and that American fundamentalists try to put their own clumsy footprint on what children in the land of the free should actually be exposed to.

But it is one thing for French kids to be told about Joan of Arc’s heroism or American kids about Paul Revere’s midnight ride; everyone is entitled to a Robin Hood or William Tell or two. It’s a bit more disturbing to learn that the new Russian history manual teaches that “entry into the club of democratic nations involves surrendering part of your national sovereignty to the U.S.” and other such choice contemporary lessons that suggest to Russian teenagers that they face dark forces abroad.

What does this all mean? Should oil prices collapse — should pigs fly — then Mr. Putin’s efforts at a Russian nationalistic renaissance might also tumble. But there is no doubt about the coherence of this plan to rebuild Russian pride and strength from the top down (BEGIN ITALICS) and (END ITALICS) the bottom up.

Over the longer run, the current street agitations against Britain’s ambassador and the tearing down of the Estonian flag by Nashi extremists may be obscure footnotes to history. By contrast, the deliberate campaigns to indoctrinate Russian youth and to
rewrite the history of the great though terribly disturbed nation that they are inheriting might be much more significant for the unfolding of our 21st century.

XXXX
Paul Kennedy is the J. Richardson Professor of History and the director of International Security Studies at Yale University. His most recent book is “The Parliament of Man,” about the United Nations.
COPYRIGHT 2007, TRIBUNE MEDIA SERVICES, INC. (8/10/2007)

07. 08.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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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나온 책들'을 둘러보다가 요아힘 바우어의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원칙>(에코리브르, 2007)이란 책에 눈길이 갔다. "경쟁과 도태를 기본으로 하는 다윈주의와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 에 반하여 '협력'을 인간의 본성으로 바라보고 있는 책. 인간을 움직이는 모든 동기의 핵심이 이기심이 아닌 다양한 관계 속에서 인정, 존중, 배려, 애정을 발견하고 주고받는 '협력'임을 주장하고 있다."는 소개를 보면 웬 뒷북인가 싶은 책인데, 의외로 원서는 작년에 나왔고 저자는 국내에 다른 책들까지 소개돼 있다. 말하자면 외양은 '멀쩡한' 책인 것이다.

호기심에 독일 아마존에까지 들어가서 원서를 확인해보니까 몇몇 독자평의 별점이 넷이다. 다행히(?) 한 독자는 별점을 하나 주었다. 내가 읽을 수 있는 독어는 인칭대명사 정도여서 내용까지는 모르겠지만 나라면 이 독자의 편을 들고 싶다.

알라딘에 덧붙은 소개는 "지은이는 신경학적 자료들을 바탕으로 협력이 불러오는 '인간성'의 원칙에 대하여 논증하고 있으며, 생물학적인 관점에 있어서도 유전자가 전혀 이기적이지 않음을 설명하고 있다. 이를 통해 인간을 가장 내부에서 움직이게 하는 동인이 다윈의 '자연의 투쟁' 이 아닌 협력, 거울현상과 공감이라는 것을 논증한다."인데, 엉터리 같은 소리이거나 하나마나한 소리이다.

<다윈주의 좌파>에 대한 리뷰(http://blog.aladin.co.kr/mramor/1486776)에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협력의 진화'라는 건 이미 진화생물학에서는 상식적인 것이고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의 재판부터도 자세히 설명하고 있는 부분이다. 거기에 저자가 몇 마디 더 보태는 줄 알았더니 소개상으로는, 그리고 이어서 찾아본 리뷰기사상으로는 도킨스와 '협력'하려는 게 아니라 '경쟁'하기 위한 의도에서 씌어진 듯하다. 저자의 인간 본성론에 기대면,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반칙' 아닐까?



저자인 요아힘 바우어는 이렇게 적어놓았다. "인간의 내면에 사랑하고 협동하려는 성향이 있다면 공격성의 비중은 얼마나 될까? 최근의 학문적 성과에 따라 인간 존재가 지닌 위협적인 특성인 공격성의 위상은 새롭게 설정될 것이다. 그리고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원칙, 이른바 '인간성의 원칙'이 경제, 직장 생활, 교육, 교양, 의학 등 사회의 각 영역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앞으로 살펴봐야 할 것이다. 이 책에서는 그와 같은 질문까지 관심을 갖고 다루려 한다." 그런 방대한 질문을 260쪽 분량에 갈무리해놓은 건 저자의 역량인 듯 보이지만, 나로선 신뢰할 수 없는 역량이다(공격성에 대해서라면 콘라트 로렌츠와 에드워드 윌슨의 책을 참조해볼 수 있다). 내친 김에 리뷰까지 찾아 읽었다(동아일보의 기사만 뜬다).

동아일보(07. 08. 25)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원칙

“생명체는 유전자의 최대 증식을 위해 고안된 유전자의 생존 기계다.”

리처드 도킨스가 1976년에 발표해 인간 본성의 문제로 확대된 ‘이기적 유전자’론이다. 유전자는 근본적으로 이기적이며, 생존을 위해 무한 투쟁을 한다는 게 그 주장의 요체이다. 달리 말해 투쟁과 경쟁, 그에 따른 도태를 내세운 다윈주의가 에드워드 윌슨의 사회생물학이나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론으로 부활한 것이다. 신경생물학자인 저자는 이 책에서 이기적 유전자론에 맞선다. ‘이기적 유전자’는 과학이 아니라 공상이었으며 유전자는 투쟁이 아니라 협력하는 존재라는 것이다.(*아무래도 저자가 윌슨이나 도킨스를 잘못 읽은 게 아닌가 싶다. 기자는 안 읽은 듯하고).  



저자는 ‘이기적 유전자’의 초판 서문에 도킨스가 ‘이 책은 사이언스 픽션으로 읽혀야 한다. 이 책은 상상력을 자극하기 위해 쓰였기 때문이다’라고 했다가 10년 뒤 2판 서문에는 ‘이 책의 핵심적인 내용은 이미 대부분의 교과서에서 볼 수 있다’로 고쳐 쓰는 기묘한 상황이 연출됐다고 지적했다.

사회생물학이 적자생존이나 생존 투쟁 등 다윈의 모델과 시장경제원리를 무비판적으로 끌어들였다고 저자는 꼬집는다. 미국의 여성 생물학자 린 마굴리스는 “투쟁이나 적자생존은 경제학에서 파생돼 생물학에 적용된 인위적인 개념일 뿐이며 경제학의 지배적인 개념들은 생물학에서 성공하지 못한다”고 저자의 주장을 뒷받침한다(*요즘 '투쟁과 적자생존'만을 강조하는 생물학자가 있는가? 국내에서도 로버트 어그로스 등의 <새로운 생물학>(범양사, 1994) 같은 책이 소개된 게 벌써 13년 전이다).

저자는 도킨스의 주장처럼 세포는 이기적 유전자의 투쟁의 결과가 아니라 유전자 간 협력으로 탄생했다고 말한다. 한때 박테리아였던 미토콘드리아도 세포 내 공생의 과정을 통해 원시 단세포 생물과 한 몸이 됐다는 것이다(*마굴리스의 '고전적인' 주장이다).

결국 저자의 주장은 인간 본성의 문제로 이어진다. 인간의 본성은 투쟁이 아니라 협력 공생이라는 특질이라는 것. 이를 입증하기 위해 저자는 동기부여체계(보상체계)나 사회적 뇌, 후성학(유전적 배열의 변화를 포함하지 않는 유전형질에 관한 연구를 하는 학문) 등 다양한 학문적 성과를 동원한다.

인간을 움직이게 하는 동기부여체계는 목표지향적인 행위를 유발한다. 이를 촉진하는 도파민 옥시토신 등 신경전달물질은 애착이나 신뢰에서 생성되는 행복전달물질. 러셀 퍼낼드가 주장한 ‘사회적 뇌’도 동기부여체계의 목표가 사회적 결속이며 성공적인 인간 관계, 나아가 모든 형태의 사회적 상호 작용이라는 점을 밝혔다. 최근 후성학은 유전자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주변 환경에 반응하며 ‘타고난 범죄자’ 같은 유전자의 고정 타입은 환경에 의해 달라진다는 점을 밝혀냈다. 이에 따르면 인생의 초기 단계에서 애정의 결핍은 동기부여체계의 기능을 현저히 저하시켜 공격성을 유발한다는 것이다.(*유일하게 흥미로운 대목이다. 저자는 인간의 본성은 선하지만 환경에 의해서 타락됐다고 보는 듯하다.)



저자의 논증을 따라가다 보면 유전자의 동인이 투쟁이나 경쟁이 아니라는 점에 납득이 가기도 하고 반갑기도 하다. 그럼에도 자연이나 사회 환경에서 생존 투쟁이 격렬하게 발생하는 현실을 거부할 수 없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기적 유전자’와 ‘협력적 유전자’의 접점에 기대가 모아진다. 양자의 논쟁은 해묵은 것인데도 다시 들여다보고 싶은 이유도 그것이 인간의 본성을 이해하는 하나의 방법이기 때문인 듯하다.(허엽 기자)

07. 08.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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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산 2007-08-26 13:35   좋아요 0 | URL
그저 자기가 믿고 싶은 것을 믿는게 인간인가봅니다.

로쟈 2007-08-26 18:10   좋아요 0 | URL
네. 하지만 '과학'은 아니지요...

가을산 2007-08-27 00:04   좋아요 0 | URL
물론 믿고 싶은 것을 믿는것이 과학은 아닙니다.
과학이 아니지만 과학적인 방법을 (편향되게) 이용해서라도 자신의 입장을 합리화하고자 하는 것이 특히 지식틍일수록 강하게 나타나는 특성 중의 하나인 것 같습니다. 자신의 입장에 이로운 사실이나 정황만을 선택적으로 취하는 것, 이것은 객관적으로 인정된 사실이잖아요? (무슨 오류라고 하더라...)
단지 대체로 남들이 그러는 모습은 잘 보여도 자기가 그러고 있는 것은 도대체 인식하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하는 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인 것 같습니다.

로쟈 2007-08-27 00:35   좋아요 0 | URL
저의 예단일 수도 있지만, 책소개나 리뷰를 참조하면 이런 책이 어떻게 나올 수 있었을까, 좀 의아합니다. 제가 보기엔 자기 주장의 합리화 이전에 상당히 '게으른' 책이어서요.--;

심술 2007-08-26 19:04   좋아요 0 | URL
잊은 생물학 용어를 찾고 있는데요 답은 무슨무슨 생물이었던 거 같고 정의는 주변 환경을 말해 주는 생물인가 뭐 그렇고 예를 들자면 어떤 물고기가 어느 강에 있으면 그 강은 아주 깨끗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런 거였거든요. 이 용어가 뭣인지 아시겠는 분 도움 좀 주세요.

심술 2007-08-26 20:12   좋아요 0 | URL
아, 맞다. 지표생물. 저기 한 가지만 더요. 땅 속 깊이 들어갈 때 공기가 모자라게 될 걸 알려고 카나리아를 갖고 들어가잖아요? 이런 경우 카나리아를 가리키는 생물학 용어가 있나요?

가을산 2007-08-27 00:01   좋아요 0 | URL
혹시 mine-shaft canary를 말씀하시는지요?
 

정신없이 지나간 한 주였다. '정신없다'는 건 한 가지에 얽매여 다른 걸 생각할 여지가 없거나 적은 경우를 이른다. 때문에 정신없다는 것 자체가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삼매경도 있고, 황홀경도 있으니까. 다만 그것이 타의에 의한 것일 때 '정신없는 삶'은 '정신나간 삶'보다 낫다고 말하기 어렵다. 불행한 건 우리가 때로 정신없이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이고, 다행스러운 건 내가 몇 시간 전에 해방되었다는 것. 다시 읽어야 할 책들과 써야 하거나 쓰고 싶은 글들이 읽는 책상머리로 되돌아왔다... 

편혜영의 <사육장 쪽으로>와 브루스 핑크의 <에크리 읽기>와 크리스테바의 <반항의 의미와 무의미> 등이 책상과 그 주변에 놓여 있지만(실상은 거의 헌책방 수준인지라 책상에 쌓아올려놓은 책만도 몇 십 권은 되겠다), 기운이 없는 관계로 주말 북리뷰나 훑어보다가 별로 관심이 가는 책이 없다는 사실에 안도(?)하면서(짐멜의 두꺼운 책이 출간됐지만 나는 <돈의 철학>이나 재출간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다만 레세크 코와코프스키의 <마르크스주의의 주요 흐름>(유로서적, 전3권, 2007) 출간을 다룬 기사들이나 옮겨놓기로 했다.     

문화일보(07. 08. 24) 마르크스주의 계보 총정리 혁명가·정책 비판도 담아

책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안내서이자 개괄서다. 저자는 1권에서 마르크스주의의 기원을 검토하면서, 헤겔과 계몽주의를 거쳐 신플라톤주의에 이르는 마르크스주의의 유산들을 추적한다. 이어 마르크스 사상의 발전을 분석하고, 여러 형태의 사회주의와 갈라지는 지점들을 짚는다. 2권에선 주도적인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교의와 제2인터내셔널 시기에 벌어진 그들간의 논쟁을 다루고 있다.

이 시기엔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다양한 해석들이 쏟아졌다. 마지막 3권에선 스탈린주의를 분석하고, 마르크스주의가 소비에트 형성에 끼친 영향을 분석한다. 이어 저자는 트로츠키·그람시·루카치·마르쿠제와 여타의 마르크스주의 논객들이 세운 공적들을 검토하면서 2차 세계대전 이후 마르크스주의가 걸어온 다양한 발전 양상들을 추적한다.

1927년 폴란드에서 태어난 저자는 1953년 바르샤바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교수로 임용돼 철학역사학부의 학장에까지 올랐다. 처음엔 정통 마르크스주의자였지만 스탈린주의에 대해 환멸을 느끼고는 ‘무엇이 사회주의인가’라는 글을 썼다. 이 글 때문에 망명길에 올라야 했던 저자는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 대학과 영국 옥스퍼드 대학 등에서 객원 교수를 역임했다. 자신을 가장 유명하게 만든 이 책으로 미국의 ‘국회도서관상’을 수상했다.



저자는 신판(2004년) 서문에서 “소비에트연방이 붕괴된 이후 지성의 면에서 무능했지만 억압과 수탈의 도구로서는 효과를 발휘했던 마르크스주의가 연구의 주제로서는 완전히 매장되어, 망각의 늪에서 더 이상 그것을 건져 올릴 이유가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면서 “그러나 이는 근거 없어 보인다. 과거의 이념들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그 지적 가치에 의존하는 것도 아니고 그것들의 현재적 설득력에 달려 있는 것도 아니다”라고 밝히고 있다. “이론적·교조주의적 마르크스주의는 몇몇 학술기관들의 복도를 초췌한 모습으로 배회하고 있는” 형국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를 연구할 가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저자는 1981년판 서문에서 책에 대해 “마르크스주의의 안내책자로 씌어졌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책 곳곳에서 마르크스주의와 사회주의 정책들, 혁명가들의 성격을 은근히 비틀어 꼬집고 있는 저자의 시각을 엿볼 수 있다. 예를 들어 19세기말 무정부자들의 입을 빌려 “마르크스주의 교의는 인간사회를 거대한 집단수용소로 바꾸는 데 적합한 청사진이었다”고 지적하는 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주의를 잘 모르는 이들에게 이 책은 “마르크스주의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사회철학의 교과서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역자는 말한다.(김영번기자)

한국일보(07. 08. 25) [저자초대석] 마르크스주의의 주요 흐름 변상출

변상출(46)씨는 이제 좀 낯이 서는 기분이다. 1990년대 손에 넣은 뒤로는 떼 놓은 적 없던 <마르크스주의의 주요 흐름>을 막 옮긴 것이다. 국내 초역. 폴란드 마르크시스트 레셰크 코와코프스키의 역저다. “마르크시즘이 이론과 현실 사이를 오가던 당시, 사회주의 몰락 소식을 접하고는 미뤄뒀던 번역을 하자고 결심했어요.”

그러나 2,000여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 정말 출판될까가 아니라, 지루한 번역 작업을 감내해낼 지가 현안이었다. “일이 끝난 밤 10시께부터, 이 닦듯 매일 최소한 1~2쪽은 옮겼습니다.” 그 결과, 도서출판 유로서적에서 전 3권의 두툼한 세트로 선보이게 됐다.

“2권까지 옮겨 놓고 나서, 저작권 문제를 놓고 함께 논의했던 출판사예요. 갈수록 수요가 높아져 가고 있는 고전이라는 확신도 공유했죠.” 스탈린 비판으로 망명길에 올라야 했던 정통 마르크시스트의 따가운 지적은 이 시대 한국에도 중요한 발언을 하고 있다는 것.

신자유주의적 세계, 아니 한국에서부터 영향력이 체감돼 가고 있는 마르크시즘이 걸어 온 방대한 여정을 철학적ㆍ역사적ㆍ현실정치적으로 곱씹어 보게 만드는 책이다. “자본주의의 지구화, 자본주의적 물질주의, 인간 소외, 비정규직 문제, 현실 사회주의 등에 대한 통찰은 여전히 생명력을 지니죠.” 특히 신비주의적으로 비칠 수도 있을 철학자 에른스트 블로흐에 대해 한 장이나 할애하고 있음은 이 책을 더욱 미덥게 하는 일례이기도 하다.

리얼리즘 문예 이론가 루카치를 전공한 그는 “마르크시즘을 재정립하고, 포스트 모더니즘의 해체론적 담론과 정면 대결하는 데 긴요한 책을 쓸 계획”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그러나 자신은 좌파는 아니라며 선을 그었다. 그는 “인간이 좀 더 행복해질 수 있는 세상을 추구할 뿐”이라고 말했다.

“이론적 실천에 경도된 구조주의적 마르크시즘은 이를테면 단성 생식이죠.” 1980년대말, 알튀세류의 현란한 구조주의가 마르크시즘의 본령을 흐린다며 못마땅해 하던 그는 영국의 좌파 역사학자 E. P. 톰슨에게서 진정한 지성인을 보았다. 톰슨과 서신으로 쌓은 친교는 그의 주저 <이론의 빈곤> 번역으로 이어질 전망이다. 톰슨은 코와코프스키와 이론적 실천의 문제를 두고 공개 서한을 나누기도 했으니, 톰슨-코와코프스키-변씨 사이에는 모종의 ‘좌파적 연대감’이 흐르고 있는 셈이다. 영남대 등지에서 독문학, 미학, 문예 이론, 민중 문화 등을 강의중이다.(장병욱 기자) 

07. 08. 25.

P.S. '국내 초역'이라는 이 책을 '오래된 새책'으로 분류한 것은 예전에 출간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저자(Leszek Kolakowski)와 서명 자체가 낯설지 않아서 도서관을 검색해보니 <콜라코프스키의 마르크스주의>(한겨레, 1989)로 출간됐었다. 도서관에는 서지가 1-3권이라고 돼 있지만(그렇다면 완역돼 있는 셈이다) 기억엔 1권만(혹은 2권까지?) 번역되었던 게 아닌가도 싶다. 아무튼 이건 직접 확인해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국내 초역'이란 말은 약간의 부연설명이 필요하겠다. 코와코프스키(콜라코프스키)의 또 다른 책으론 <베그르송>(지성의샘, 1994)가 있다. 이건 내가 읽은 책이니 저자의 이름이 어찌 낯익지 않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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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타 2007-08-25 0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사 보는 순간 우선 1권만 주문했는데 어떨지 모르겠군요. (아, 저는 항상 로쟈님 서재에 기웃거리기만 했던 풋내기 서재인이랍니다;;. 처음으로 답글을 남기네요^^;)

로쟈 2007-08-25 0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풋내기'도 금방 노장이 됩니다. 실상은 저도 '서재인' 생활 4년차에 불과하니까 신참 하사관 정도라고나 할까요...

짱꿀라 2007-08-25 0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가 로쟈님을 신참이라고 하겠습니까? 항상 큰 도움을 주시는 전문가시죠.

람혼 2007-08-25 0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음을 들뜨게 하는 신간 소식에 감사드립니다.^^

philocinema 2007-08-25 1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 감사의 말씀!

로쟈 2007-08-26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타르코프스키 영화의 제목을 빌자면, 그냥 '스토커'일 뿐입니다. 어느 '구역'의 입구까지만 안내하는...
 

<이론 이후의 삶>이 나온 걸 계기로 데리다의 책을 몇 권 꼽아둔다. 마음놓고 읽을 수 있는 책이 얼마 되지 않아서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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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 이후 삶- 데리다와 현대이론을 말하다
자크 데리다 외 지음, 마이클 페인.존 샤드 엮음, 강우성.정소영 옮김 / 민음사 / 2007년 8월
15,000원 → 13,500원(10%할인) / 마일리지 750원(5% 적립)
2007년 08월 23일에 저장
품절
대담집이라 무난하게 읽힌다.
마르크스의 유령들
자크 데리다 지음, 진태원 옮김 / 이제이북스 / 2007년 9월
19,000원 → 17,100원(10%할인) / 마일리지 9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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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드디어 출간됐다! <법의 힘>에 이어서 오랜만에 나온 믿을 만한 번역본 데리다.
법의 힘
자크 데리다 지음, 진태원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4년 7월
14,000원 → 12,600원(10%할인) / 마일리지 7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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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딱하지만 믿을 만한 번역.
목소리와 현상- 후설 현상학에서 기호 문제에 대한 입문
자크 데리다 지음, 김상록 옮김 / 인간사랑 / 2006년 1월
15,000원 → 14,250원(5%할인) / 마일리지 430원(3%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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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ocinema 2007-08-23 18:35   좋아요 0 | URL
로쟈님의 짧은 코멘트들은 번역의 질을 모른채 "저자"에 대한 관심과 "제목"의 친근함만으로 책을 구입해야 하는 저에겐 길 없는 열대밀림에서의 "나침반"입니다. 님 덕분에 아낄 수 있었던 많은 시간들...늘 감사합니다.

로쟈 2007-08-23 19:18   좋아요 0 | URL
별말씀을...

퍼그 2007-08-23 23:45   좋아요 0 | URL
'한 줄'들이 이보다 더 유용하긴 힘들 듯합니다. 잘 골라 읽어 보겠습니다.^^

람혼 2007-08-24 05:28   좋아요 0 | URL
진태원 번역의 <법의 힘>은 정말 로쟈 님 말씀대로 "믿을 만한" 듬직한 번역이긴 하지만, [아마도 편집상의 실수일 것으로 사료되나] 중요한 단락 하나의 번역이 누락되어 있습니다. 정말 옥에 티라고 해야겠지요. 2쇄에서는 수정되었는지 모르겠군요...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김상록 번역의 <목소리와 현상>이 <법의 힘> 다음으로 가장 괜찮은 번역 중 하나인 듯 한데, 로쟈 님의 리스트에는 빠져 있군요.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지요? <에코그라피>의 번역도 참 좋았었는데, 왜 좋은 책들은 저리도 빨리 품절되는 것인지, 여전히 미스테리랍니다. <그라마톨로지>는 예전에 대우학술총서의 일환으로 김성도 선생의 번역을 통해 출간되었던 적이 있었는데, 몇 가지 부정확한 번역이 있었지만 원본과 비교해서 보기에는 그리 큰 무리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과거 김보현 편역의 <해체>라는 책도 출간된 적이 있었는데, 이 책은 절판된 게 오히려 다행이라고 해야겠지요. 또한 위 리스트에 올려놓으신 <글쓰기와 차이>의 번역은 별로 좋다고 할 수 없습니다(개인적으로 점검해본 적이 있는데 오역도 상당히 많은 편입니다). 오히려 번역본을 본다면 영역본과의 비교 독해를 추천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데리다 수용 초기에는 김형효 선생의 <데리다의 해체철학>도 나름대로 괜찮은 개설서의 역할을 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아마 지금 다시 읽으면 실소를 금치 못할 부분도 어쩔 수 없이 조금 있을 듯 합니다.^^ 또한 시인 프랑시스 퐁주(Francis Ponge)에 대한 데리다의 책인 <시네퐁주> 역시 과거 번역된 적이 있었으나 개인적으로 번역의 질은 점검해볼 기회가 없었네요. Glas나 La carte postale 같은 데리다의 책도 번역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진 지 오래인데, 아마도 오래 걸리거나 더 많이 기다려야겠지요... 현재로서는 이제이북스에서 진태원 번역으로 조만간 다시 출간될 예정인 <마르크스의 유령들>을 기대해보고 있습니다(예전에 양운덕 번역의 첫 국역본은 참으로 처참한 지경이었더랬습니다...).

로쟈 2007-08-25 01:56   좋아요 0 | URL
저도 데리다의 책은 대부분은 영어본과 대조해가면서 읽습니다. <목소리와 현상>은 그다지 좋은 인상을 받지 못했는데, '고혼' 같은 번역어들이 거슬리더군요('람혼'님에게는 친근할 수도 있겠지만). 저에겐 러시아어본도 있어서 자세히 검토해보려 했는데, 언젠부턴가 책이 보이질 않습니다.--;

람혼 2007-08-25 02:19   좋아요 0 | URL
La dissémination이나 Marges de la philosophie 같은 데리다의 '주저'들이 아직 번역되고 있지 못한 것도 아쉬운 일인 것 같습니다. 데리다의 영역본이나 노역본들의 질은 어떤지 로쟈 님의 고견이 궁금합니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책'을 찾는 일은, 참으로 곤혹스럽죠...ㅎㅎ 예전에 까치 출판사에서 출간되었던 머피의 법칙 관련서에서 보았던 구절이 왠지 갑자기 떠오르는군요. 제 기억이 맞다면, "테제: 찾는 물건[로쟈 님이나 저에게는 책?]은 언제나 가장 나중에 찾는 곳에 있다. 안티테제: 찾는 물건은 언제나 처음 찾는 곳에 있다. 다만 처음 찾을 때는 보이지 않을 뿐이다." ^^

philocinema 2007-08-24 09:18   좋아요 0 | URL
람혼님! 오랜만입니다. 안녕하시죠?
람혼님의 글 잘 보았고, 역시나 큰 도움 되었습니다.

람혼 2007-08-25 02:21   좋아요 0 | URL
risper3 님, 오랜만입니다. 부여의 날씨는 좀 시원해졌을까요? ^^;

philocinema 2007-08-25 11:40   좋아요 0 | URL
부여는 아침 저녁으론 가을이 묻어납니다.
다가올 환절기 건강 유의하시면서 "공부"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