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없이 지나간 한 주였다. '정신없다'는 건 한 가지에 얽매여 다른 걸 생각할 여지가 없거나 적은 경우를 이른다. 때문에 정신없다는 것 자체가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삼매경도 있고, 황홀경도 있으니까. 다만 그것이 타의에 의한 것일 때 '정신없는 삶'은 '정신나간 삶'보다 낫다고 말하기 어렵다. 불행한 건 우리가 때로 정신없이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이고, 다행스러운 건 내가 몇 시간 전에 해방되었다는 것. 다시 읽어야 할 책들과 써야 하거나 쓰고 싶은 글들이 읽는 책상머리로 되돌아왔다... 

편혜영의 <사육장 쪽으로>와 브루스 핑크의 <에크리 읽기>와 크리스테바의 <반항의 의미와 무의미> 등이 책상과 그 주변에 놓여 있지만(실상은 거의 헌책방 수준인지라 책상에 쌓아올려놓은 책만도 몇 십 권은 되겠다), 기운이 없는 관계로 주말 북리뷰나 훑어보다가 별로 관심이 가는 책이 없다는 사실에 안도(?)하면서(짐멜의 두꺼운 책이 출간됐지만 나는 <돈의 철학>이나 재출간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다만 레세크 코와코프스키의 <마르크스주의의 주요 흐름>(유로서적, 전3권, 2007) 출간을 다룬 기사들이나 옮겨놓기로 했다.     

문화일보(07. 08. 24) 마르크스주의 계보 총정리 혁명가·정책 비판도 담아

책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안내서이자 개괄서다. 저자는 1권에서 마르크스주의의 기원을 검토하면서, 헤겔과 계몽주의를 거쳐 신플라톤주의에 이르는 마르크스주의의 유산들을 추적한다. 이어 마르크스 사상의 발전을 분석하고, 여러 형태의 사회주의와 갈라지는 지점들을 짚는다. 2권에선 주도적인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교의와 제2인터내셔널 시기에 벌어진 그들간의 논쟁을 다루고 있다.

이 시기엔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다양한 해석들이 쏟아졌다. 마지막 3권에선 스탈린주의를 분석하고, 마르크스주의가 소비에트 형성에 끼친 영향을 분석한다. 이어 저자는 트로츠키·그람시·루카치·마르쿠제와 여타의 마르크스주의 논객들이 세운 공적들을 검토하면서 2차 세계대전 이후 마르크스주의가 걸어온 다양한 발전 양상들을 추적한다.

1927년 폴란드에서 태어난 저자는 1953년 바르샤바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교수로 임용돼 철학역사학부의 학장에까지 올랐다. 처음엔 정통 마르크스주의자였지만 스탈린주의에 대해 환멸을 느끼고는 ‘무엇이 사회주의인가’라는 글을 썼다. 이 글 때문에 망명길에 올라야 했던 저자는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 대학과 영국 옥스퍼드 대학 등에서 객원 교수를 역임했다. 자신을 가장 유명하게 만든 이 책으로 미국의 ‘국회도서관상’을 수상했다.



저자는 신판(2004년) 서문에서 “소비에트연방이 붕괴된 이후 지성의 면에서 무능했지만 억압과 수탈의 도구로서는 효과를 발휘했던 마르크스주의가 연구의 주제로서는 완전히 매장되어, 망각의 늪에서 더 이상 그것을 건져 올릴 이유가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면서 “그러나 이는 근거 없어 보인다. 과거의 이념들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그 지적 가치에 의존하는 것도 아니고 그것들의 현재적 설득력에 달려 있는 것도 아니다”라고 밝히고 있다. “이론적·교조주의적 마르크스주의는 몇몇 학술기관들의 복도를 초췌한 모습으로 배회하고 있는” 형국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를 연구할 가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저자는 1981년판 서문에서 책에 대해 “마르크스주의의 안내책자로 씌어졌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책 곳곳에서 마르크스주의와 사회주의 정책들, 혁명가들의 성격을 은근히 비틀어 꼬집고 있는 저자의 시각을 엿볼 수 있다. 예를 들어 19세기말 무정부자들의 입을 빌려 “마르크스주의 교의는 인간사회를 거대한 집단수용소로 바꾸는 데 적합한 청사진이었다”고 지적하는 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주의를 잘 모르는 이들에게 이 책은 “마르크스주의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사회철학의 교과서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역자는 말한다.(김영번기자)

한국일보(07. 08. 25) [저자초대석] 마르크스주의의 주요 흐름 변상출

변상출(46)씨는 이제 좀 낯이 서는 기분이다. 1990년대 손에 넣은 뒤로는 떼 놓은 적 없던 <마르크스주의의 주요 흐름>을 막 옮긴 것이다. 국내 초역. 폴란드 마르크시스트 레셰크 코와코프스키의 역저다. “마르크시즘이 이론과 현실 사이를 오가던 당시, 사회주의 몰락 소식을 접하고는 미뤄뒀던 번역을 하자고 결심했어요.”

그러나 2,000여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 정말 출판될까가 아니라, 지루한 번역 작업을 감내해낼 지가 현안이었다. “일이 끝난 밤 10시께부터, 이 닦듯 매일 최소한 1~2쪽은 옮겼습니다.” 그 결과, 도서출판 유로서적에서 전 3권의 두툼한 세트로 선보이게 됐다.

“2권까지 옮겨 놓고 나서, 저작권 문제를 놓고 함께 논의했던 출판사예요. 갈수록 수요가 높아져 가고 있는 고전이라는 확신도 공유했죠.” 스탈린 비판으로 망명길에 올라야 했던 정통 마르크시스트의 따가운 지적은 이 시대 한국에도 중요한 발언을 하고 있다는 것.

신자유주의적 세계, 아니 한국에서부터 영향력이 체감돼 가고 있는 마르크시즘이 걸어 온 방대한 여정을 철학적ㆍ역사적ㆍ현실정치적으로 곱씹어 보게 만드는 책이다. “자본주의의 지구화, 자본주의적 물질주의, 인간 소외, 비정규직 문제, 현실 사회주의 등에 대한 통찰은 여전히 생명력을 지니죠.” 특히 신비주의적으로 비칠 수도 있을 철학자 에른스트 블로흐에 대해 한 장이나 할애하고 있음은 이 책을 더욱 미덥게 하는 일례이기도 하다.

리얼리즘 문예 이론가 루카치를 전공한 그는 “마르크시즘을 재정립하고, 포스트 모더니즘의 해체론적 담론과 정면 대결하는 데 긴요한 책을 쓸 계획”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그러나 자신은 좌파는 아니라며 선을 그었다. 그는 “인간이 좀 더 행복해질 수 있는 세상을 추구할 뿐”이라고 말했다.

“이론적 실천에 경도된 구조주의적 마르크시즘은 이를테면 단성 생식이죠.” 1980년대말, 알튀세류의 현란한 구조주의가 마르크시즘의 본령을 흐린다며 못마땅해 하던 그는 영국의 좌파 역사학자 E. P. 톰슨에게서 진정한 지성인을 보았다. 톰슨과 서신으로 쌓은 친교는 그의 주저 <이론의 빈곤> 번역으로 이어질 전망이다. 톰슨은 코와코프스키와 이론적 실천의 문제를 두고 공개 서한을 나누기도 했으니, 톰슨-코와코프스키-변씨 사이에는 모종의 ‘좌파적 연대감’이 흐르고 있는 셈이다. 영남대 등지에서 독문학, 미학, 문예 이론, 민중 문화 등을 강의중이다.(장병욱 기자) 

07. 08. 25.

P.S. '국내 초역'이라는 이 책을 '오래된 새책'으로 분류한 것은 예전에 출간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저자(Leszek Kolakowski)와 서명 자체가 낯설지 않아서 도서관을 검색해보니 <콜라코프스키의 마르크스주의>(한겨레, 1989)로 출간됐었다. 도서관에는 서지가 1-3권이라고 돼 있지만(그렇다면 완역돼 있는 셈이다) 기억엔 1권만(혹은 2권까지?) 번역되었던 게 아닌가도 싶다. 아무튼 이건 직접 확인해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국내 초역'이란 말은 약간의 부연설명이 필요하겠다. 코와코프스키(콜라코프스키)의 또 다른 책으론 <베그르송>(지성의샘, 1994)가 있다. 이건 내가 읽은 책이니 저자의 이름이 어찌 낯익지 않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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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타 2007-08-25 0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사 보는 순간 우선 1권만 주문했는데 어떨지 모르겠군요. (아, 저는 항상 로쟈님 서재에 기웃거리기만 했던 풋내기 서재인이랍니다;;. 처음으로 답글을 남기네요^^;)

로쟈 2007-08-25 0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풋내기'도 금방 노장이 됩니다. 실상은 저도 '서재인' 생활 4년차에 불과하니까 신참 하사관 정도라고나 할까요...

짱꿀라 2007-08-25 0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가 로쟈님을 신참이라고 하겠습니까? 항상 큰 도움을 주시는 전문가시죠.

람혼 2007-08-25 0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음을 들뜨게 하는 신간 소식에 감사드립니다.^^

philocinema 2007-08-25 1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 감사의 말씀!

로쟈 2007-08-26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타르코프스키 영화의 제목을 빌자면, 그냥 '스토커'일 뿐입니다. 어느 '구역'의 입구까지만 안내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