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한겨레21에 실은 출판면 기사를 옮겨놓는다. 최근 출간된 <레닌과 미래의 혁명>(그린비, 2008)의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하고 근간 예정인 '혁명' 관련서들에 대한 소식을 덧붙였다. 이미지를 찾다 보니 (지면기사에 쓰인 건 못 찾겠고 대신에) 레닌 포스터에 오바마의 얼굴을 붙인 것이 눈길을 끈다. 포스터에 씌어진 문구는 "레닌은 살았다, 레닌은 살아 있다, 레닌은 살아있을 것이다!"이다. 더불어 '1917년'은 '2008년'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이제 2009년이다...

 

한겨레21(09. 01. 12) 혁명의 시대, 레닌을 생각한다

"레닌은 생각도 하지마!” 오늘날 자유민주주의자들, 그러니까 반공 우파뿐만 아니라 급진 좌파까지도 공유하는 암묵적인 합의가 있다면 그것은 레닌에 대한 ‘사고금지’다. 2008년 5월 국내에도 소개된 <지젝이 만난 레닌>(교양인 펴냄)의 편저자 슬라보예 지젝이 레닌을 반복하려는 기획을 시도하면서 처음 접했던 반응이 빈정거리는 폭소였다는 점은 시사적이다. “마르크스는 좋다, 하지만 레닌이 뭔가?”라는 식이다. 그러한 반문이 전제로 하는 레닌은 마르크스주의를 실천에 옮기려는 노력의 실패이며, 20세기 정치에 부정적 영향을 끼친 역사적 재앙이자, 독재로 치달은 현실 사회주의 실험의 원흉으로서의 레닌이다. 요컨대, 레닌은 현실사회주의 몰락과 소위 이데올로기의 종언을 가져온 실패이자 재앙이고 원흉이다. 이것이 혁명가 레닌에게 들씌워진 표준적 이미지다.    

 

‘레닌의 현재적 의미를 묻는다!’는 구호를 내걸고 출간된 <레닌과 미래의 혁명>(그린비 펴냄)은 시류를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 레닌에 대한 표준적이면서도 상투적인 이미지에 괄호를 치고 현재의 자본주의 위기 국면에서 레닌과 러시아혁명을 다시 생각해보자고 제안한다. 이 제안이 처음 발의된 것은 박노자 교수가 러시아혁명에 대해 강의한 2007년이었다고 한다. 이에 따라 그린비출판사의 학술심포지엄이 개최된 것이 2008년 7월이었다. ‘촛불 시대에 다시 생각하는 레닌과 러시아혁명’이 심포지엄의 타이틀이었다. 이번에 나온 책은 발제자로 나선 세 명의 발표문과 현장 토론을 중심으로 구성돼 있고 보리스 카갈리츠키의 러시아 자본주의론과 루이 알튀세르의 레닌론 등이 보충되었다.     

이 모임의 형식이 ‘심포지엄’이라는 단어로 표현됐지만 러시아어로는 ‘소비에트’에 가깝지 않을까 싶다. 발제자의 한 사람인 박노자 교수가 짚어주는 대로 소비에트란 원래 ‘조언’이란 뜻이며 러시아 혁명기의 소비에트란 무엇보다도 서로 조언을 주고받고 논의하는 기구이자 장소였다. 조언은 명령이 아니며 평등한 관계를 전제로 한 수평적 소통을 지향한다. 작은 규모이긴 하지만, 바로 그런 의미에서의 소비에트, 혹은 평의회가 촛불집회를 계기로 레닌을 재평가하기 위해 열렸던 셈이다. 그 ‘소비에트’의 대체적인 분위기는 “지금 레닌을 불러낸다는 것은 뼈아픈 실패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 실패 속에서 실패를 사유하는 것이다.(...) 그 실패를 통해 새로운 출구를 찾는 것이다”는 발언 속에 집약돼 있다.   

‘레닌의 정치학에서 외부성의 문제’를 다룬 이진경 교수는 계급과 당, 국가와 혁명, 사회주의와 이행이라는 세 가지 주제를 중심으로 ‘외부성’의 사유가 레닌에게서 어떻게 작동하는지 살펴본다. 이러한 검토를 통해 그는 프롤레타리아 정치와 프롤레타리아 혁명, 그리고  혁명적 정치 모두가 부르주아 국가권력에 대해 외부적이고, 외부적이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린다. 그가 보기에 레닌은 프롤레타리아 혁명 이후 국가장치를 이용해 국가장치를 사멸시켜야 하는 딜레마에 봉착하게 되는데, 이 난감한 역설을 돌파하기보다는 포기하는 쪽을 택했다. 레닌은 외부성을 사유했지만 그것을 끝까지 관철하지는 않았다는 것이 비판의 요점이다.   

한편, 조정환 다중네트워크 대표는 ‘제헌권력’의 문제를 화두로 삼아 레닌을 다시 생각한다. 그에 따르면 헌법에는 성문화된 헌법을 가리키는 형식적 헌법 외에 헌법을 제정하는 행위로서의 물질적 헌법이 있다. 이 경우 물질적 헌법이 형식적 헌법에 선행하며 더 우선적이다. 레닌은 이 두 가지 헌법의 차이를 분명하게 의식하고 1917년 2월 혁명 이후 사회주의의 물질적 헌법(프롤레타리아 독재)과 형식적 헌법(소비에트 헌법)의 쟁취를 주장한다. 하지만 1917년 7월 이후에는 제헌권력의 최종심을 소비에트에서 볼셰비키로 귀속시키게 되며, 조 대표는 이것이 소련 사회주의는 물론 세계 사회주의 역사에 혼란과 불행을 가져온 것이 아닌가라고 비판한다. 그런 의미에서 '레닌에게 배우기'는 '레닌을 극복하기'를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마지막 발제에 나선 박노자 교수는 레닌에게서 반자유주의적, 혹은 비자유주의적 민주주의와는 다른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발견하는데, ‘소비에트 민주주의’가 그것이다. 이 소비에트의 시발은 노동자들이 처우 개선을 위한 공장주와의 협상에 대표자를 내보낸 것에서 비롯한다. 소비에트는 혁명기에 볼셰비키들과 ‘협력’했지만 그들의 지도에 ‘순응’하지는 않았으며 특정 정당의 하부조직으로 편입되지도 않았다. 다른 볼셰비키들과 달리 레닌은 소비에트의 잠재력을 크게 평가하고 소비에트와의 동등한 협력관계를 강조했다. 박 교수가 보기에, 이러한 ‘민주주적인’ 레닌이야말로 정치가로서 그의 비범한 면모다. 하지만 내전으로 치달은 혁명 이후의 과격한 상황은 레닌으로 하여금 자신의 민주적인 원칙을 지킬 수 없도록 했고, 내전의 종료와 함께 소비에트 민주주의도 의미를 상실하게 됐다. 레닌을 다시 생각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실패와 좌절의 교훈을 지금의 현실 속에서 어떻게 되새길 것인가를 고민하도록 한다.   

 

이미 지난해 ‘촛불 정국’에서도 확인한 바 있지만 대의 민주주의 체제의 위기와 거기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들이닥친 세계 자본주의의 위기 국면은 새로운 사회와 체제에 대한 사유를 요구한다. 이에 발맞추어 올해 출판계의 한 가지 화두는 ‘혁명’이 될 전망이다. 올해 프레시안북에서는 ‘레볼루션(Revolutions)’ 시리즈를 선보일 예정이다. 전체 10권 가운데 마오쩌둥의 <실천론․모순론>, 로베스피에르의 <덕치와 공포정치>, 호치민의 <식민주의를 타도하라>, 예수의 <가스펠>, 트로츠키의 <테러리즘과 공산주의> 등이 1월 중 발간될 1차분에 포함될 예정이다. 그리고 도서출판 마티에서도 이번 봄에 슬라보예 지젝을 포함하여 에티엔 발리바르, 프레드릭 제임슨, 테리 이글턴 등 대표적인 좌파 지식인․철학자들의 레닌론을 묶은 <레닌 재장전>(가제․Lenin Reloaded)을 출간할 계획이다. 바야흐로 출판계에서만큼은 “혁명이 문 앞에 있다!”  

09. 01. 05.  

P.S. <지젝이 만난 레닌>에 대해 작년에 쓴 글은 '자본론보다 더 긴요한 책'(http://blog.aladin.co.kr/mramor/2146648)을 참조. 그리고 그린비출판사의 학술심포지엄 스케치는 출판사의 블로그(http://greenbee.co.kr/blog/296)에서 읽어볼 수 있다. 이번에 나온 <레닌과 미래의 혁명>은 레닌과 러시아혁명에 대한 약간의 배경지식을 갖고 있다면 흥미로운 독서를 제공한다. 전체 3부 가운데, 초심자라도 가장 편하게 읽을 수 있는 대목은 2부의 토론이다. 발제자들이 자신의 발표를 요약/정리해주고 있기도 하기 때문에 전체적인 대의를 파악하고자 한다면 2부를 먼저 읽는 게 좋을 듯싶다. 가령 박노자 교수의 이런 비교는 어떤가. 

레닌의 생명력이 궁금하다면 1917년도, 혁명의 해에 레닌의 움직임들을 자세히 봐야 합니다. 나중에 레닌이 독재자란 비판을 받짐만, 1917년 10월까지만 해도 레닌은 모범적인 소비에트 민주주의자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실 1917년 러시아의 부르주아 임시정부는 이명박 정권하고 어떤 면에서 비슷하기도 했어요. 이명박보다는 훨씬 약했지만, 외부 권력에 절대적으로 의존한다는 차원에서는 비슷한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임시정부는 자구책으로서 독일과의 전쟁을 중단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어도 할 수가 없었는데, 그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러시아에 대한 연합국들의 채권 때문이죠.(...)   

지금 대한민국이 그것보다 국력 상태도 좋고, 여러 가지 점에서 당시 러시아처럼 파산 위기는 아니라고 할 수는 있죠. 그럼에도 이명박 정권이 미국 자본주의에 상당한 의존성을 보이고 있고, 또 그것이 대(對)국민적으로는 굉장히 안 좋게 보이는 것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는 그런 상황을 보면 왠지 1917년의 임시정부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임시정부와 이명박 정부의 다른 점은 전자에게는 이렇다 할 경찰력이 없었던 것입니다. 전의경이 없었던 것이죠.(166-7쪽)  

흠, 말하자면 임시정부의 수장이었던 케렌스키에게는 이명박과는 달리 어청수가 없었다는 것이 차이점이라는 얘기겠다...   

P.S.2. 대부분 그렇지만 마감에 쫓겨 원고를 넘긴 탓에 이번에도 제대로 퇴고를 하지 못했다. 그래도 다행인 건 교열부에서 손을 봐준다는 점인데, 이번호 지면기사에서는 몇 가지 이견도 생겼다. 첫 문단에서 "그러한 반문 전제로 하는 레닌은"이 지면에서는 "그러한 반문 전제로 하는 레닌은"으로 수정됐는데, 나는 전자의 뜻으로 썼다. 그리고 고유명사 표기 두 가지. 지면에서는 '알튀세르'가 '알튀세'로, '호지민'이 '호찌민'으로 수정됐는데, 한겨레의 방침에 따른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거명한 책에서의 표기는 전자이며 내가 지지하는 쪽도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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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레닌 재장전' 예고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1-14 12:13 
    2009년에 이어서 2010년에도 '1월의 책'은 '레닌'이다. 두툼한 분량의 <레닌 재장전>(마티, 2010)이 곧 출간될 예정이다. 부제는 '진리의 정치를 향하여'. 아래가 원서의 표지이고, 번역본의 표지는 좀 크게 넣었다.       <지젝이 만난 레닌>(교양인, 2008)과  박노자 외, <레닌과 미래의 혁명>(그린비, 2008)에 이어
 
 
2009-01-06 00: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1-06 00: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재작년부터 연말이나 연초에 교수신문에서 학술출판 트렌드에 관한 기사를 옮겨놓았다(아래쪽의 '학술출판'이란 태그를 클릭해보시길). 올해는 며칠 늦어진 셈인데, 사실 작년의 출판 전망과 결과를 대비시켜보는 페이퍼를 연말에 계획하기도 했지만 이런저런 사정상 실행에 옮기진 못했다(이럴 땐 '로쟈 2'가 있었으면 싶다). 그냥 올해의 전망기사를 읽어보는 걸로 넘어갈까 한다. 얼른 보기에 아주 예기치 않은 기대작이나 대작은 눈에 띄지 않아서 좀 실망스럽긴 한데, 그건 기사가 올해의 라인업을 다 망라해서 보여주지는 못하기 때문인 듯싶다. 그런 허전함을 채워줄 예기치 않은 책들과 분명 맞닥뜨릴 수 있으리라고 믿어본다. 흠, 올해도 이제 시작이다!.. 

교수신문(08. 12. 31) 2009년 미리 보는 출판 트렌드

주요 학술출판사들이 올해 출판을 계획하고 있는 책의 면면을 보면, 갑갑한 현실에서 돌파구를 찾으려는 물색의 자취를 느낄 수 있다. 인문사회과학 전문 출판사들의 출간예정 도서목록을 보면 무겁지만 역량이 기대되는 책들의 귀환이 점쳐지고 있다. 멀게는 이국의 저자에서부터 가깝게는 국내 신진 저자의 뚝심이 역력한 책들이 출간을 기다리고 있다.   

우선 ‘혁명적 에너지와 상상력의 귀환을 꿈꾼다’라는 모토의 세기의 혁명가들의 시리즈를 계획하고 있는 프레시안북이 눈에 들어온다. 마오쩌둥, 로베스피에르,  호치민, 예수, 트로츠키, 카스트로, 제퍼슨, 볼리바르, 페인, 마르크스 등의 저작을 선보일 예정이다. 살림출판사는 칼 슈미트의 『정치적인 것의 개념』을, 민음사는 프레드릭 제임슨의 『정치적 무의식』을, 도서출판 길은 자크 데리다의 『마르크스와 그 적자들』과 에른스트 블로흐의 『유토피아의 정신』 그리고 울리히 벡의 『세계화 시대의 권력과 반대권력』을 내놓는다. 특히 프레드릭 제임슨의 저작은 난해하기로 정평이 나 있어, 좀처럼 역자들이 달겨들지 않은 저작이라, 국내 첫 번역이 자못 기대된다.   

국내 필진 이론적 역량 과감히 선보여
국내 필진이 직접 한국의 정치, 경제, 사회 현실에 대해 고민한 흔적을 책으로 펼쳐내는 경향도 엿보인다. 서울대학교출판부는 『한국사회 트렌드를 읽는다』(정진성 외), 『한국의 사회운동가 진보정당』(임현진) 등의 저서를 출간 예고하고 있다. 도서출판 길은 『소수자의 정치학』(이정우)과 『스피노자-현대철학에의 함의』(진태원) 등의 책으로 사회를 근본에서 해독하는 국내 필진의 이론적인 높이를 과감히 선보일 예정이다. 이정우 박사는 들뢰즈·가타리 철학에 기반을 둘 것이고, 진태원 박사는 알튀세르와 발리바르의 철학에 기반을 둘 것으로 보인다. 이참에 두 저자의 관점차를 비교하면서 프랑스 철학 내부의 이론적 긴장을 파악해보는 것도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이매진은 『학출-80년대와 공장으로 간 대학생들』과 『잊혀진 것들에 대한 기억』을 통해 이미 전설이 되고 있는 뜨거웠던 시절을 돌아보고자 한다. 따듯한 방구석에서 ‘설’만 풀어내기에 바쁜 요즘 지식인들의 현주소를 반추하는 계기도 기대해본다. 단, 한 때 유행했던 ‘후일담’의 토로에 그치지 않을까하는 염려도 공존한다.

한편 정치사상의 울타리를 벗어나 보다 세부적이고 다양한 각도에서 미래를 고민하는 저작도 출간을 기다리고 있다. 우선 꾸준히 출판 트렌드의 상수로 자리 잡은 여성주의 관련 저작도 올해 역시 선을 보인다. 책세상은 『여성, 섹슈얼리티, 국가』(이성숙)와 『식민지 이후를 사유하다-차이의 정치학, 탈식화와 재식민화이 경계』(권명아)등의 저작들과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의 『여성 권리 옹호』와 올리브 슈라이너의 『여성과 노동』을 번역서로 준비 중이다. 무게 있는 철학서로 알려진 철학과현실사도 『여성 리더쉽의 공간과 철학』(윤혜린)과 『지구화 시대 여성주의 철학』(윤혜린)을 내놓을 예정이다. 여성주의 관련 저작의 경우, 예전의 단순 개괄서에서 벗어나 다양하고 심층적인 주제를 신선한 포맷으로 서점에 등장하는 것이 최근 추세다. 올해 출간이 예고되는 몇몇 저작들이 동어반복적인 주장을 하지 않길 기대해본다.  



환경 역시 오늘을 사유하는데 빼놓을 수 없는 고민거리 중의 하나이다. 도서출판 한울은 『비판적 생태학과 환경정의』(최병두)와 찰스 하퍼의 『환경과 사회』를 잇달아 출간할 예정이다. 단순한 자연 보호주의적 관점이 아니라, 사회적이고 환경정의적 관점에서 접근하는 방법론이 주목을 끈다. 다만 자칫하면 인간 중심주의로 환경을 사유하는 한계에 갇힐 수도 있는데, 저자들이 어떤 지혜를 발휘할지 지켜볼 대목이다. 민음사의 『저탄소 경제, 경제의 지도를 바꾼다』(김현진)는 정책적인 관점에서, 인간사랑의 『마르크스의 에콜로지 : 유물론과 자연』(존 벨라미)은 사상적 관점에서 환경의 문제를 사유하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동아시아라는 지역에 대한 연구 성과를 선보이는 저작도 포진을 하고 있다. 휴머니스트는 『동아시아사』(제임스 팔레 외)를, 도서출판 한울은 『중국과 베트남 : 비대칭의 정치학』(브레틀리 워맥)을, 창비는 『21세기에 다시 보는 동아시아 3국 근대이행기』(김동노 외)와 『일본의 역사인식 비판』(미야지마 히로시)를 예고하고 있다. 그린비가 출간 예정 중인 『80년대 중국과의 대화』(자젠잉 외)와 『거울 속에 있는 듯』(다이진화)은 현대 중국에 초점을 맞춘 저작들이다.

동아시아를 읽는 차분한 시선들
아울러 동아시아에서 활약한 유명인들의 자서전 내지는 평전도 다수 출간을 기다리고 있다. 삼인출판사는 『히로히토 평전』(허버트 빅스)과 『문동환 자서전』(문동환)을 준비하고 있고, 시대의 창은 『안중근 평전』(김상웅)을 예고하고 있다. 돌베개도 『황종희 평전』(쉬딩바오)을 선보인다. 동아시아 지역 연구는 아무래도 우리의 역사적 경험과 무관할 수 없어 편향된 주장을 할 가능성이 있기도 하다. 다행스럽게도 최근 경향은 차분한 시선을 보여주고 있어 기대가 된다.  



예년에 비해 대안적 삶과 사회를 염두에 둔 저작들이 많긴 하지만 그렇다고 전통 철학 저작들이 위축된 것은 아니다. 학술 연구의 무게가 더해져야 실천적 고민의 질도 보장할 수 있다는 것을 저자와 역자 그리고 출판사들이 모르지는 않기 때문이다. 물론 가장 중요한 것은 독자들의 인식 변화이겠지만 말이다. 학술 출판의 좌장격인 아카넷은 무게있는 학술서 다수를 출간 예고하고 있다. 딜타이의 『정신과학에서 역사적 세계의 건립』을 가다머 전공자인 김창래 교수가, 칸트의 『판단력 비판』을 칸트 전공자인 백종현 교수가 준비하고 있으며, 꾸준히 하이데거 책을 번역해 온 신상희 박사가 하이데거의 『횔덜린 시의 해명』을 번역한다.

아카넷이 간혹 프랑스철학서를 번역해왔지만, 올 예정 책들은 독일철학에 편향된 것이 눈에 걸린다. 독일철학은 무거운 학술 고전의 대접을 받고, 프랑스철학은 유행에 영합하는 대중용 서적의 취급을 받는 현실을 반영하는 듯해 개운하진 않다. 고전의 번역 이전에 무엇이 고전인가, 고전을  선정하는 기준은 객관적인가에 대한 고민도 있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소소하고 기발한 소재를 다루면서도 학문적 깊이를 유지하고자 하는 최근 역사학 저서의 경향은 올해에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휴머니스트는 『소문사설-조선의 기술사』(부유섭 외)와 『조선의 문자생활사』(심경호), 『동다기-차의 문화사』(정민)를 소개할 준비를 하고 있다. 같은 출판사의 『인과성의 문화사』(스티븐 컨)도 기대를 모은다. 요즘 우리 주변에서 사소해 보이는 것들의 역사에 정통한 사람들을 종종 보게 되는 것은 이런 책들의 기여 덕분이 아닐까.  



고전은 어떻게 선정되는가
모티브북은 셸던 와츠의 『전염병의 역사: 질병, 제국주의의 힘』을 선보인다. 전염병과 역사는 이미 출판시장에서 여러 번 재미를 보았던 소재인데, 이번엔 다른 관점과 주장을 볼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는 ‘우리 문화의 뿌리를 찾아서’시리즈를 예고한다. 『한국의 김치』(김숙희) 등이 그것이다. 서양의 차, 전염병, 관습, 의상 등 별의별 사소한 것들의 역사에 더 관심을 보이고 있는 출판 시장의 트렌드에 비춰 눈길이 가는 소재들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일까. 올해는 특히 우리의 일상사에 대한 출판계의 관심이 큰 듯하다. 일조각은 『경기민요』(정동화)를 내놓을 예정이고, 소나무는 『한국의 아악은 없는가?』(한흥섭)와 『육담 박물관』(김선풍)을 준비하고 있다. 돌베개의 『한국 주거의 미시사』(전남일 외)도 빼놓을 수 없다.

건축 관련 저작들도 예년에 이어 꾸준히 흐름을 형성할 것으로 보인다. 휴머니스트는 『노마드철학과 서양건축』(이진경)을 통해 서양건축에 대한 철학적 독해를 선보일 예정이다. 동녘은 『표면의 건축』(데이빗 레더 배로우 외), 『전통건축 해체도』(김왕직 외), 『영건의궤와 조선의 건축』(김동욱 외) 등 건축 관련 저작을 대거 내놓을 전망이다. 소나무 역시 『건축학과 함께 하는 백제 도읍지 기행』을 내놓을 예정인데, 전통 건축을 역사와 접목해 소개하는 최근 트렌드를 반영한 책이다. 건축에 대한 관심은 종합적 문화에 대한 열망을 일정 부분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오주훈 기자)  

09. 01.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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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런 2009-01-05 17: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늘 들러 구경만 하고 갑니다. 새해가 며칠 지나 늦었지만,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바랍니다.

로쟈 2009-01-05 22:57   좋아요 0 | URL
오늘은 댓글도 다셨네요.^^ 복많이 받으시길..

마늘빵 2009-01-05 17: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보 감사합니다. ^^ 글에 익숙한 분이 계시네요.

로쟈 2009-01-05 22:59   좋아요 0 | URL
네, 발모님이 계시네요. 연말에 뵀지요...^^

사량 2009-01-05 2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몇몇 책들은 이미 한 해 전 같은 기사에서 언급된 책들이네요. ^^; 올해에는 꼭 만나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로쟈 2009-01-05 23:02   좋아요 0 | URL
제때 내기 어렵죠. 저도 작년에 내려던 책이 역량이 부족해 미뤄져서 괴롭습니다.^^;
 

신간이지만 '로쟈의 낚시'가 아니라 '번역과 번역가' 카테고리에 분류하고픈 책이 있다. 도올 김용옥의 <논어 한글역주>(통나무, 2008). 한겨레의 서평을 읽고 출간 사실을 알았는데, 전3권 가운데 알라딘에는 아직 1권만이 떠 있다. 기자로도 방송인으로도 활발한 활동을 보여주었지만 도올의 본령은 아무래도 동양 고전학이고 그간에 자신의 역량을 너무 허비하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었는데, 자신의 '본업'으로 복귀한다는 반가운 소식이다. 중국 고전 13경을 완역하는 첫 작업으로 <논어>의 역주를 출간한 것인데, 이후의 후속 작업도 기대가 된다. 저자로서도 <도올 논어>를 두고 벌어졌던 학문적 시비와 세간의 비아냥을 불식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리라(고전학에서 '역주'란 진검승부가 아니던가!).  

한겨레(09. 01. 03) 도올이 안내하는 논어 읽기의 오르가슴 

도올 김용옥(61) 전 세명대 석좌교수가 한자문명권의 최고 고전인 <논어>를 번역하고 주석한 <논어 한글 역주>(전 3권)를 펴냈다. 권당 60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의 완역판이다. 1982년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한 이래 줄곧 고전 번역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스스로 번역의 범례를 세우겠다고 약속하기도 했던 그는 이제야 그 약속의 일단을 실천한 셈이 됐다. “한 갑자를 돌고 난 내 인생을 회고해 보면서, 나는 갑자기 나의 학문세계의 초라한 모습을 깨닫게 됐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사서삼경을 포함한 중국 고경 13경 전체를 번역하고 주석하는 작업이었다고 그는 이 책 서문에 밝히고 있다. 그 첫 작업이 <논어> 역주인 셈이다.

지은이는 본문에 들어가기에 앞서 먼저 <논어>의 세계사적·문명사적 위치와 의미를 찾는 긴 서문을 통해 ‘인류문명’을 ‘전관’하고 있다. 이 문명사적 조망은 그리스·로마 문명을 뿌리로 삼는 서구 문명을 상대화하려는 뜻을 품고 있다. 이집트·메소포타미아·인더스·황하 문명이라는 세계 4대 문명이 범아시아 대륙에서 태어났음을 고려하면, 그리스·로마 문명은 그 문명권 바깥에서 일어난 역외의 문명이다. 고대문명 전체의 시야에서 보면 ‘원류 속의 말류’에 해당한다. 그런데도 그 문명이 오늘날 지배문명이 된 것은 ‘연역적 사유’의 발견에 있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근대 서구가 산업혁명과 자본주의를 일으키고, 민주주의를 발전시켰으며, 과학기술을 흥성시킨 것은 이 그리스 문명의 사유 방식에 기댄 성과였다. 지은이는 서구의 지배를 가능케 한 이 세 위업 가운데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는 동아시아가 어느 정도 따라잡았으며, 아직 미치지 못한 것이 자연과학 분야라고 말한다. 그러나 과학이라는 것이 보편타당한 최종적 진리를 보증하는 것은 아니다. ‘과학적 진리’ 이상의 어떤 새로운 진리관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바로 여기서 <논어>라는 서구 문명 바깥의 사유를 새로이 탐구할 필요성이 나타난다. 

종교문명사적 차원에서도 <논어>의 자리는 의미심장하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고대 문명 초기에 등장한 다신교적 신앙은 메소포타미아를 중심으로 하여 일신교 신앙으로 나아갔고, 이어 인더스·갠지스 문명을 통해 일신교 자체의 극복인 불교를 낳았다. 불교가 보여준 신 없는 종교 체계는 중국 문명에서 그대로 재현됐는데, 그것이 유교 문명이다. 공자는 신을 배제한 인간 중심의 사유, “인문학적 윤리학”의 건설자였다. 그런 점에서 “고대 문명 세계에서 가장 콘템포러리한(현대적인) 문명”이며, 바로 그런 이유로 <논어>를 탐구한다는 것은 우리 시대 사유의 새 지평을 탐색하는 일이 된다.   

지은이는 공자의 생애에 관해서도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이렇게 공자의 삶 자체를 추적하는 것은 공자가 살았던 구체적 삶을 알지 못하고 <논어>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역설적인 것은 공자의 삶을 가장 구체적으로 느끼게 해주는 책이 바로 <논어>라는 사실이다. “공자는 오직 <논어> 속에만 살아 있다. 나는 <논어> 이상 진실한 공자에 관한 기록을 발견할 수 없다. 공자의 숨결이 생동치고 있는 것이다.” 공자는 55살 때 노나라를 떠나 14년 동안 ‘천하주유’를 한 뒤 고국에 돌아왔다. <논어>는 그가 귀환한 68살 때부터 73살 때까지 말년의 생각을 뼈대로 삼고 있다. 원숙기의 사상이 담겨 있는 셈인데, 그 사상이 수미일관한 체계 속에 추상적으로 기술돼 있지 않고 상황적 텍스트들의 콜라주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이 이 경전의 특징이다. “‘논어’의 ‘어’는 공자가 그의 제자들이나 당시의 사람들과 대화한 말, 그리고 제자들끼리 토론한 말, 그리고 공자에게 접문한(가까이 가 들은) 말이다. ‘논’은 ‘집이논찬’이란 뜻으로, 그 말들을 편찬했다는 뜻이다.”

이어 <논어> 해석의 역사를 살핀 ‘논어해석사강’과 신주의 틀을 세운 주자의 ‘논어집주서설’ 번역문, 그리고 지은이 자신의 번역론을 본문 앞에 배치했다. 본문에서 지은이는 ‘학이 편’에서 마지막 ‘요왈 편’까지 20편을 차례로 번역하고 고주와 신주 등 동서고금의 주석문들을 가능한 한 폭넓게 참조한 뒤 지은이 자신의 시각으로 새 주석을 단다. 가령, 요즘 논란이 되고 있는 ‘정명’(正名)이라는 말이 등장하는 ‘자로 편’의 해당 구절을 지은이는 이렇게 번역한다. “자로가 말하였다. ‘위나라의 군주가 선생님을 모셔다가 정치를 하려 한다면, 선생님께서는 무엇을 먼저 하시겠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반드시 이름을 바로잡는 정명을 먼저 할 것이다.’ 자로가 말하였다. ‘역시나 했더니만, 선생님도 참 아둔하기 그지없으시구려. 왜 하필 이름을 바로잡는다고 하십니까?’ 이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이름이 바르지 않으면 바른 논리를 따라가지 않고, 말이 바른 논리를 따라가지 않으면 사업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생생한 현대 구어체로 이루어진 번역이다.

<논어>를 읽고 깨닫는 즐거움에 대해 정자가 이런 말을 했음을 지은이는 상기시킨다. “논어를 읽으매, (…) 어떤 자는 읽고 나서 그중의 한두 구절을 깨닫고 기뻐한다. 또 어떤 자는 읽고 나서 참으로 배움을 즐기는 경지에 오르는 자도 있다. 그런데 어떤 이는 읽고 나서 곧바로 자기도 모르게 손으로 춤을 추고 기뻐 발을 구르는 자도 있다.” 이 책은 이 희열로 가는 긴 여행이다.(고명섭 기자) 

09. 01. 03.  

P.S. 동양 고전에 관해서라면 나 자신이 초입자여서 '수준'을 말하기 어렵다. 어림짐작으론 리쩌허우의 <논어금독>(북로드, 2006)과 남회근의 <논어강의>(씨앗을뿌리는사람, 2002)가 국내에 소개된 중국어권 저작으로선 명망이 높은 책인 듯싶다. 나로선 도올의 <논어 한글역주>를 견주어볼 만한 기준점이다.   

 

국내 저자의 책으론 이기동의 <논어강설>(성균관대출판부, 2005), 배병삼의 <한글세대가 본 논어>(문학동네, 2002)가 얼른 떠오르는 책이다. 물론 고전적인 주석으로 치자면 대부분의 주석서들이 한마디씩 걸치고 지나가야 하는 주희의 <논어집주>를 빼놓기 어렵겠다. 성백효 역주본(전통문화연구회, 2006)에 이어서 박헌순본(한길사, 2008)도 출간돼 있다...

   

한편, <논어> 읽기에 관해 예전에 쓴 칼럼은 '논어를 읽었다는 자 누구인가'(http://blog.aladin.co.kr/mramor/1884175)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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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슴츠레 2009-01-04 2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문학자는 아니지만 이수태 씨의 <논어의 발견>과 <새번역 논어> 역시 '논어읽기'에 참고하면 좋은 책이지 않나 싶습니다. 저도 일독하고 추천하는 것은 아니다만 주변 지인들의 추천이 압도적이더군요. 저의 추천은 그 분들에 대한 개인적이고 전적인 '신뢰'에 근거할 따름입니다..

로쟈 2009-01-04 23:12   좋아요 0 | URL
오래전 책이어서 눈에 잘 안 띄었나 봅니다. 도서관에 갈 때 한번 들춰봐야겠네요...
 

일이 있어서 인사동에 나갔다가 아이에게 문구도 사줄 겸 반디앤루니스에 잠깐 들렀는데, 의외의 신간이 눈에 띄었다. 러시아문학 전공자인 이덕형 교수의 <이콘과 아방가르드>(생각의나무, 2008). 근간 예정이라는 건 알았지만 리뷰보다도 실물을 먼저 보게 될 줄은 몰랐다(사실 내가 찾아보려고 했던 책은 승계호 교수의 학문세계를 다룬 <서양철학과 주제학>(아카넷, 2008)이었지만 아직 들어와 있지 않았다. 알라딘에도 그렇고).  

 

책 자체는 지난 2004년에 발표한 소설 <검은 사각형>(생각의나무, 2004)에 이미 예고돼 있었는데, 그 소설의 얼개가 출판사 사장인 주인공이 어느 겨울날 러시아 작가의 출판권 계약과 자신이 준비하고 있는 ‘이콘과 아방가르드’의 원고수집을 위해 길을 떠나서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거쳐 프랑스, 이탈리아, 터키 등을 경유하며 각 도시에서 작가나 화가의 흔적을 만나고 그들의 미학적 의미를 되새겨본다는 것이었다. 작가의 분신과도 같은 주인공이 그렇게 수합한 자료와 사색의 결과가 <비잔티움, 빛의 모자이크>(성균관대출판부, 2006)와 이번에 나온 <이콘과 아방가르드>로 갈무리된 것. 하므로, 아직 한권도 읽어보진 못했지만, 이 세 권의 책이 하나의 삼부작처럼 읽혀야 하는 게 아닐까 싶다. <이콘과 아방가르드>에 대한 출판사 소개는 이렇다.  

이 책을 쓴 성균관대학교 이덕형 교수(러시아어문학 전공)는 러시아 문학과 그리스도교 이콘을 20여 년이 넘게 연구한 학자이자 소설가로서 국내에서 보기 드문 이콘 전문 연구가이다. 그는 국내에서 러시아어문학을 전공한 후 소련 유학이 불가능했던 1980년대에 프랑스로 유학을 갔다. 그곳에서 가톨릭 예수회 수도사들의 정교 공동체인 파리 근교 뫼동의 생조르주에서 4년 동안 정교의 교리와 함께 이콘의 제작기법을 배웠다. 이때 그는 러시아 문학과 예술에 깊이 스며들어 있는 정교 사상을 비로소 체감하게 됐고 나아가 그 뿌리가 되는 비잔틴 문화까지 탐구하게 됐다. 

저자는 이미 19세기 러시아 르네상스의 중심이었던 상트페테르부르크를 특유의 감성과 아름다운 문체에 담아 예술기행서 <빛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를 펴낸 바 있으며, 신간 <이콘과 아방가르드>의 모태가 된 소설 <검은 사각형>을 몇 해 전 출간하기도 했다. <검은 사각형>은 러시아 비잔틴 이콘의 흔적을 찾아 나선 구도적 여정을 글로 옮긴 것으로서 미학과 문학을 넘나들면서 초월에의 욕구를 예술(구체적으로는 러시아 이콘)이라는 틀에 담아 자신을 표현하고 성찰하는 한 존재의 지적 여정을 담아낸 자전적 소설이다. 이 소설 속에서 전개되는 주인공의 여정(모스크바, 상트페테르부르크, 파리, 니스, 밀라노, 뫼동)은 <이콘과 아방가르드>에서 저자가 직접 수집하고 고른 200여 장이 넘는 생생한 이콘 도판으로 되살아나고 있다. 또한 2천 년 이콘의 역사를 읽어내기 위한 저자의 각고의 노력(러시아어, 프랑스어, 라틴어, 그리스어 등 다양한 언어에 대한 해박한 지식, 수많은 국내외 참고도서들)들도 눈여겨볼 만하다. 

 

러시아 문화사와 문화시학을 다룬 저자의 첫번째 책은 <천년의 울림>(성균관대출판부, 2001)이었다. 묵직한 책이지만 전공 교재로도 많이 사용되었고 일반 독자들에게도 러시아문화에 대한 훌륭한 안내서 역할을 해준 책이다. 이어서 나온 책이 <빛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책세상, 2002)인데, 페테르부르크 문화사의 서론격인 책이다. '서론격'이라고 한 것은 저자가 이 주제에 대한 보다 본격적인 저작을 준비중인 것으로 알기 때문이다. <다쥐보그의 손자들>(성균관대출판부, 2002)은 동슬라브 신화를 다룬 '소품'이다. 소품이라고 한 건 <천년의 울림>이 보여준 스케일에 견주어 그렇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스케일은 <이콘과 아방가르드>에 이르는 삼부작에 이르러 다시 폭발적으로 확장된다.   

물론 다른 언어로 된 이 분야의 관련서가 없는 건 아니지만 저자의 노고 덕분에 초기 그리스도교의 교부 미학과, 비잔티움 정교회, 러시아 정교회, 아방가르드의 이콘을 역사적으로 가로지르는 '초월적 성스러움'의 미학을 우리말로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가뜩이나 빛도 성스러움도 모자라는 세태인지라 서가에 꽂아두고 자주 쓰다듬어볼 만하다... 

09. 01. 03. 

P.S. 저자 인터뷰기사는 http://news.khan.co.kr/section/khan_art_view.html?mode=view&artid=200901091751005&code=900308 참조. 이런 멘트가 눈에 띈다. “이콘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부정신학이라고 불렸던 그리스 교부철학이 미셸 푸코, 질 들뢰즈, 장 뤽 마리옹 등 현대철학자들의 주장과 비슷한 걸 알게 됩니다. 초월자를 언어라는 테두리에 가둘 수 없으며 침묵과 관조, 이콘과 모자이크 같은 ‘빛의 예술’을 통해 존재와 하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 부정신학은 들뢰즈의 ‘감각의 논리’와도 통하지요. 서유럽 교회의 예술이 모든 것을 소실점으로 모으는 원근법을 발명했다면 그리스 정교의 이콘 미학은 아방가르드 작가들이 채택한 다초점과 나열의 방식을 갖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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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04 00: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1-04 00: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수북 2009-01-14 17:13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입니다. 이덕형 교수님 신간이 나와서 검색해 보던 중 로쟈님의 글을 보게 되었는데요, 글이 좋아서 저희 블로그에 스크랩하고 싶어서 댓글 남겨요. 허락해주신다면 담아가고 싶습니다. ^^

로쟈 2009-01-14 17:38   좋아요 0 | URL
독전감이어서 별 내용은 없는데요.^^;
 

이번주 시사IN에서 '우석훈의 경제프리즘'을 옮겨놓는다. 이유야 물론 책에 관해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분야로 치자면 출판경제학에 관한 내용이다. 그는 이 책시장을 '이데올로기 전쟁의 최전선'이라고 부른다. 흠, 그렇담 이 알라딘이란 공간 또한 전장(戰場)이라 아니할 수 없다. 로쟈는 '전선기자'쯤 되겠고. '전우들'에게 보내는 새해 메시지를 우석훈의 칼럼으로 대신한다. 요지는 이렇다. "‘돈이면 최고다’라는 지난 4~5년간의 자기계발서 이데올로기가 ‘명박 시대’를 열었다면, 다른 시대를 열기 위해서는 ‘돈이 최고가 아니다’라고 말해주는 책들이 많이, 그것도 아주 많이 필요하다."

 

시사IN(08. 12. 29) 책, 이데올로기 전쟁의 최전선  

책이라는 것은 참으로 신기한 물건이다. 최근의 진화이론을 다루는 생물학자들은 문화와 제도의 영역을 일종의 확장된 유전자와 유사한 개념으로 다루려는 경향이 있는데, 이런 접근은 약간은 과도하다 싶을 정도의 유전자 환원론이라서 생각만큼 학계에서 환영받고 있지는 못하다. 어쨌든 문화 현상을 진화 장치의 일부로 파악한다면, 그 가운데 토막 중 가운데 토막으로 들어갈 것은 역시 책이다. 책은 사회적 기억과 함께 새로운 지식의 창작 그리고 서로 다른 문화매체 간의 소통 등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은 기능을 가진 듯하다. 문화 영역에서도 책의 존재는 거의 절대적이다.

지식사회학의 칼 만하임은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영역은 존재하기 어렵다고 지적한 적이 있는데, 사실 책만큼 이데올로기와 가깝고, 또 이데올로기 그 자체인 물건도 별로 없다. 2008년 한국에서 책이라는 것은 각각의 이데올로기의 생산자이며 동시에 전파자이고, 이런 점에서 책들 사이에서는 보이지 않는 이데올로기 전쟁이 뜨겁다. 이데올로기의 시대가 갔는가? 웃기지 마시라. 자본주의가 존재하는 한, 혹은 그 이후에도 이데올로기 전쟁은 사람들이 경제적 생활을 하는 한, 멈추어질 성격의 것이 아니다. 2008년 대한민국에서 출간된 책 중에서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로운, 그런 ‘순수’―이것도 그 자체로 하나의 이데올로기이다―의 영역에 해당하는 책이 있을까? 내가 보기에는 한 권도 없다.

만약 한국의 책 중에서 정말로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로운 책이 딱 하나 존재한다면, 그것은 홍성대의 <수학의 정석> 정도를 꼽을 수 있다. 지금까지 5000만 부쯤 팔린 이 <수학의 정석>은 최소한 한국에서 좌파든, 우파든, 생태주의자든, 여성주의자든, 아니면 극우파까지 모두 보는, 그야말로 이데올로기 없는 책인지도 모른다. 물론 따져보면, 이 책에도 수학 이데올로기가 있고, 진학 이데올로기가 있으며, 학벌 이데올로기가 숨어 있기는 하다.

책의 이데올로기 전쟁이 얼마나 극심한지 알아보는 간단한 방법이 있다. 영화와 비교해보자. 감독이 좌파 계열이든 아니든, 예를 들면 봉준호 감독의 <괴물>과 같은 대형 국내 영화가 상영되면 전 매체가 이를 밀어주고 띄워준다. 물론 영화에도 예술영화와 B급 영화, 좌파 계열의 영화와 지독한 쇼비니즘 영화 혹은 마초 영화 같은 것들이 있지만, 어쨌든 국내 영화계 생존의 차원에서 나름 괜찮은 작품이 나오면 거의 모든 신문과 매체가 어느 정도는 다뤄준다.

이데올로기 없는 책은 없다

그러나 책의 경우는 이런 일이 거의 없다. 특히 신문 서평의 경우, 이른바 조·중·동에서 다루는 책과 한겨레·경향이 다루는 책은 거의 싸늘하다고 할 정도로 완벽하게 두 부류로 나뉜다. 한때는 조선일보 서평이 2000권 정도의 값어치가 있다고 추정하던 시절이 있지만, 지금은 별로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어쨌든 그만큼 한국의 신문들이 이데올로기에서 확실한 자기 지형을 가졌다고 볼 수도 있지만, 결정적으로 한국 자본주의에서는 책이 이데올로기 전쟁의 최전선에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어쨌든 한국에서 책이라는 것은 2007년 기준으로 3조1000억원 규모의 시장이기는 한데, 그 중에서 아동용 서적 1조원을 빼면 실제로는 2조원 정도 된다. 자본주의 시스템으로 볼 때, 가장 밝은 곳에서 가장 공개적인 방식으로 사회의 방향을 결정하는 이데올로기 전쟁터의 최전선이 바로 이 출판문화 현장이다. 물론 그렇다면 흔히 생각하듯 이 이데올로기 전쟁이 사회과학 내에서 좌파와 우파 혹은 기타 서로 다른 사회에 대한 이론이나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맞붙는 형국인가? 그렇게 고상한 방식으로 한국에서 논쟁이 진행되거나 사회적 논의가 전개되었다면, 지금 사회가 이 꼴은 아닐 것이다.

만약 이념적 지평에서 한국의 출판계를 나눈다면, 한쪽에 역시 사회과학으로 분류되는 책이 자리하고, 다른 한쪽에는 아이러니하게도 자기계발서와 경제경영 서적이 들어갈 것이다. 물론 이 경제경영서의 정식 분류는 ‘재테크 책’ 정도가 맞겠지만, 어쨌든 장하준같이 이 시장에서 버텨낸 극소수를 제외하면 한국에서 경제경영서는 재테크와 관련된 것이다. 물론 그 내부도 분류해보면 금융자본의 이데올로기를 충실히 반영하는 것이 한 부류, 건설자본의 이데올로기에 충실한 것이 또 다른 부류이다. 뭔가 기술적인 분석을 한 것 같지만, 사실 ‘증권 투자해라’와 ‘땅 투기 해라’ 따위 아주 강력한 한국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것 외에는 별 얘기가 없다.  

그리고 이런 재테크 서적과 쌍을 이루는 책이 바로 최근 한국 출판계의 큰 특징인 자기계발서이다. 물론 모든 자기계발서가 다 지독한 이데올로기 서적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베스트셀러 반열에 오른 책은 거의 100% 그렇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 같다. 지난 수년 동안 한국을 강타했던 <마시멜로 이야기>나 <시크릿> 혹은 공병호의 자기계발서 시리즈들은 너무나 이데올로기적이다. 이런 책들의 실제 메시지는, ‘모든 것은 네 탓이다’ 그리고 ‘사회에 절대로 반항하지 말라’ 같은 매우 단순한 코드를 담고 있다.  

자기계발서 이데올로기가 ‘명박 시대’ 열어
이러한 흐름의 대척점에 서 있는 것들은 흔히 인터넷 서점 같은 곳에서 사용하는 기준으로 인문학 혹은 사회학과 같은 분류 코드를 가진 책이다. 이런 책들은 많은 경우, 개인에게 무엇인가 할 것을 요구하거나 아니면 ‘돈이면 최고다’ 혹은 ‘우리나라 최고다’라는 말이 아닌 또 다른 것들을 독자에게 끊임없이 전달하려 한다. 어쨌든 이 두 가지 유형의 책은 모두 이데올로기적이며, 그것이 직접 이데올로기를 다루고 있든 그렇지 않든, 굉장히 사회적인 의미를 띤다. 문학 역시 이데올로기 성격이 강한데, 최근 한국의 문학들은 일본식 표현대로 사소설이라고 부를 만한 이야기가 대세를 이룬다.

올해 국방부의 불온서적 사태에서 보았듯이, 책에 대한 정부의 이데올로기 공세는 더욱 강해질 것이고, 특히 정부 지원금을 받으면서 출간되는 많은 책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더욱 많은 책이 원천적으로 봉쇄당하는 정치 탄압이 발생할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기 어렵다. 게다가 수년간 계속될 경제 위기 속에서 국민은 제일 먼저 지갑을 닫게 될 것인데, 불행히도 한국에서 도서 구입비를 별도 예산으로 소비 계획을 짜는 사람은 극소수이다. 이 심각한 이데올로기 전쟁의 결과가 사실은 다가올 한국 경제의 미래를 결정할 가능성이 높고, 상황은 지금 매우 열악해 보인다. 어쨌든 더 많은 책을 내고, 사람들이 더 자주 책을 접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나는 회원들이 참여하는 일종의 출판생협 형태나 사회적 기업 같은 제3부문의 방식을 고민하는데, 방법이 녹록지 않다.

‘돈이면 최고다’라는 지난 4~5년간의 자기계발서 이데올로기가 ‘명박 시대’를 열었다면, 다른 시대를 열기 위해서는 ‘돈이 최고가 아니다’라고 말해주는 책들이 많이, 그것도 아주 많이 필요하다. 이제 일반 시민의 지혜가 필요한 순간이 왔다. 이 이데올로기 전쟁에서 정부의 돈을 사용하기는 어렵다.(우석훈_경제학박사) 

09. 01. 01. 

P.S. 대개 그렇듯이 기사는 지난 월요일에 읽었다. 또 대개 그렇듯이 아침 전철 안에서였다. 책을 소재로 한 칼럼이기에 나름 '진지하게' 읽다가 몇 번 키득거렸는데, 우석훈의 독특한 스타일, 곧 문체 때문이었다. 문체를 만드는 건 일차적으로 반복이다. 당신은 무엇을 반복해서 읽으셨는지? 내가 읽은 건 이것이다.  

-어쨌든 문화 현상을 진화 장치의 일부로 파악한다면, 그 가운데 토막 중 가운데 토막으로 들어갈 것은 역시 책이다.    

-어쨌든 국내 영화계 생존의 차원에서 나름 괜찮은 작품이 나오면 거의 모든 신문과 매체가 어느 정도는 다뤄준다.

-어쨌든 그만큼 한국의 신문들이 이데올로기에서 확실한 자기 지형을 가졌다고 볼 수도 있지만, 결정적으로 한국 자본주의에서는 책이 이데올로기 전쟁의 최전선에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어쨌든 한국에서 책이라는 것은 2007년 기준으로 3조1000억원 규모의 시장이기는 한데, 그 중에서 아동용 서적 1조원을 빼면 실제로는 2조원 정도 된다.  

-어쨌든 장하준같이 이 시장에서 버텨낸 극소수를 제외하면 한국에서 경제경영서는 재테크와 관련된 것이다.  

-어쨌든 이 두 가지 유형의 책은 모두 이데올로기적이며, 그것이 직접 이데올로기를 다루고 있든 그렇지 않든, 굉장히 사회적인 의미를 띤다.  

-어쨌든 더 많은 책을 내고, 사람들이 더 자주 책을 접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물론, '물론'이란 부사의 과다한 노출에 주목하시는 분도 있겠지만, 내 경우엔 '어쨌든'의 반복이 보다 유표적으로 여겨진다. 눈에 띈다는 말이다. 글쓰기 버릇이기도 할 텐데(하지만 이 버릇은 사고습관과도 연관이 있다), 어쨌든 경제학자 우석훈은 '어쨌든'이란 부사를 너무 자주 쓴다. 과소비한다. 그럼에도 '어쨌든 우석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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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i 2009-01-01 21:15   좋아요 0 | URL
그것은 마치 로쟈님의 '해서, ...'와 같군요.^^

로쟈 2009-01-01 21:21   좋아요 0 | URL
그런가요? 혹 그렇더라도 온라인과 오프라인 글쓰기는 좀 다릅니다.^^; 온라인에서는 일부러 반복해서 쓰기도 하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