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이지만 '로쟈의 낚시'가 아니라 '번역과 번역가' 카테고리에 분류하고픈 책이 있다. 도올 김용옥의 <논어 한글역주>(통나무, 2008). 한겨레의 서평을 읽고 출간 사실을 알았는데, 전3권 가운데 알라딘에는 아직 1권만이 떠 있다. 기자로도 방송인으로도 활발한 활동을 보여주었지만 도올의 본령은 아무래도 동양 고전학이고 그간에 자신의 역량을 너무 허비하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었는데, 자신의 '본업'으로 복귀한다는 반가운 소식이다. 중국 고전 13경을 완역하는 첫 작업으로 <논어>의 역주를 출간한 것인데, 이후의 후속 작업도 기대가 된다. 저자로서도 <도올 논어>를 두고 벌어졌던 학문적 시비와 세간의 비아냥을 불식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리라(고전학에서 '역주'란 진검승부가 아니던가!).
한겨레(09. 01. 03) 도올이 안내하는 논어 읽기의 오르가슴
도올 김용옥(61) 전 세명대 석좌교수가 한자문명권의 최고 고전인 <논어>를 번역하고 주석한 <논어 한글 역주>(전 3권)를 펴냈다. 권당 60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의 완역판이다. 1982년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한 이래 줄곧 고전 번역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스스로 번역의 범례를 세우겠다고 약속하기도 했던 그는 이제야 그 약속의 일단을 실천한 셈이 됐다. “한 갑자를 돌고 난 내 인생을 회고해 보면서, 나는 갑자기 나의 학문세계의 초라한 모습을 깨닫게 됐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사서삼경을 포함한 중국 고경 13경 전체를 번역하고 주석하는 작업이었다고 그는 이 책 서문에 밝히고 있다. 그 첫 작업이 <논어> 역주인 셈이다.
지은이는 본문에 들어가기에 앞서 먼저 <논어>의 세계사적·문명사적 위치와 의미를 찾는 긴 서문을 통해 ‘인류문명’을 ‘전관’하고 있다. 이 문명사적 조망은 그리스·로마 문명을 뿌리로 삼는 서구 문명을 상대화하려는 뜻을 품고 있다. 이집트·메소포타미아·인더스·황하 문명이라는 세계 4대 문명이 범아시아 대륙에서 태어났음을 고려하면, 그리스·로마 문명은 그 문명권 바깥에서 일어난 역외의 문명이다. 고대문명 전체의 시야에서 보면 ‘원류 속의 말류’에 해당한다. 그런데도 그 문명이 오늘날 지배문명이 된 것은 ‘연역적 사유’의 발견에 있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근대 서구가 산업혁명과 자본주의를 일으키고, 민주주의를 발전시켰으며, 과학기술을 흥성시킨 것은 이 그리스 문명의 사유 방식에 기댄 성과였다. 지은이는 서구의 지배를 가능케 한 이 세 위업 가운데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는 동아시아가 어느 정도 따라잡았으며, 아직 미치지 못한 것이 자연과학 분야라고 말한다. 그러나 과학이라는 것이 보편타당한 최종적 진리를 보증하는 것은 아니다. ‘과학적 진리’ 이상의 어떤 새로운 진리관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바로 여기서 <논어>라는 서구 문명 바깥의 사유를 새로이 탐구할 필요성이 나타난다.
종교문명사적 차원에서도 <논어>의 자리는 의미심장하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고대 문명 초기에 등장한 다신교적 신앙은 메소포타미아를 중심으로 하여 일신교 신앙으로 나아갔고, 이어 인더스·갠지스 문명을 통해 일신교 자체의 극복인 불교를 낳았다. 불교가 보여준 신 없는 종교 체계는 중국 문명에서 그대로 재현됐는데, 그것이 유교 문명이다. 공자는 신을 배제한 인간 중심의 사유, “인문학적 윤리학”의 건설자였다. 그런 점에서 “고대 문명 세계에서 가장 콘템포러리한(현대적인) 문명”이며, 바로 그런 이유로 <논어>를 탐구한다는 것은 우리 시대 사유의 새 지평을 탐색하는 일이 된다.
지은이는 공자의 생애에 관해서도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이렇게 공자의 삶 자체를 추적하는 것은 공자가 살았던 구체적 삶을 알지 못하고 <논어>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역설적인 것은 공자의 삶을 가장 구체적으로 느끼게 해주는 책이 바로 <논어>라는 사실이다. “공자는 오직 <논어> 속에만 살아 있다. 나는 <논어> 이상 진실한 공자에 관한 기록을 발견할 수 없다. 공자의 숨결이 생동치고 있는 것이다.” 공자는 55살 때 노나라를 떠나 14년 동안 ‘천하주유’를 한 뒤 고국에 돌아왔다. <논어>는 그가 귀환한 68살 때부터 73살 때까지 말년의 생각을 뼈대로 삼고 있다. 원숙기의 사상이 담겨 있는 셈인데, 그 사상이 수미일관한 체계 속에 추상적으로 기술돼 있지 않고 상황적 텍스트들의 콜라주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이 이 경전의 특징이다. “‘논어’의 ‘어’는 공자가 그의 제자들이나 당시의 사람들과 대화한 말, 그리고 제자들끼리 토론한 말, 그리고 공자에게 접문한(가까이 가 들은) 말이다. ‘논’은 ‘집이논찬’이란 뜻으로, 그 말들을 편찬했다는 뜻이다.”
이어 <논어> 해석의 역사를 살핀 ‘논어해석사강’과 신주의 틀을 세운 주자의 ‘논어집주서설’ 번역문, 그리고 지은이 자신의 번역론을 본문 앞에 배치했다. 본문에서 지은이는 ‘학이 편’에서 마지막 ‘요왈 편’까지 20편을 차례로 번역하고 고주와 신주 등 동서고금의 주석문들을 가능한 한 폭넓게 참조한 뒤 지은이 자신의 시각으로 새 주석을 단다. 가령, 요즘 논란이 되고 있는 ‘정명’(正名)이라는 말이 등장하는 ‘자로 편’의 해당 구절을 지은이는 이렇게 번역한다. “자로가 말하였다. ‘위나라의 군주가 선생님을 모셔다가 정치를 하려 한다면, 선생님께서는 무엇을 먼저 하시겠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반드시 이름을 바로잡는 정명을 먼저 할 것이다.’ 자로가 말하였다. ‘역시나 했더니만, 선생님도 참 아둔하기 그지없으시구려. 왜 하필 이름을 바로잡는다고 하십니까?’ 이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이름이 바르지 않으면 바른 논리를 따라가지 않고, 말이 바른 논리를 따라가지 않으면 사업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생생한 현대 구어체로 이루어진 번역이다.
<논어>를 읽고 깨닫는 즐거움에 대해 정자가 이런 말을 했음을 지은이는 상기시킨다. “논어를 읽으매, (…) 어떤 자는 읽고 나서 그중의 한두 구절을 깨닫고 기뻐한다. 또 어떤 자는 읽고 나서 참으로 배움을 즐기는 경지에 오르는 자도 있다. 그런데 어떤 이는 읽고 나서 곧바로 자기도 모르게 손으로 춤을 추고 기뻐 발을 구르는 자도 있다.” 이 책은 이 희열로 가는 긴 여행이다.(고명섭 기자)
09. 01. 03.
P.S. 동양 고전에 관해서라면 나 자신이 초입자여서 '수준'을 말하기 어렵다. 어림짐작으론 리쩌허우의 <논어금독>(북로드, 2006)과 남회근의 <논어강의>(씨앗을뿌리는사람, 2002)가 국내에 소개된 중국어권 저작으로선 명망이 높은 책인 듯싶다. 나로선 도올의 <논어 한글역주>를 견주어볼 만한 기준점이다.
국내 저자의 책으론 이기동의 <논어강설>(성균관대출판부, 2005), 배병삼의 <한글세대가 본 논어>(문학동네, 2002)가 얼른 떠오르는 책이다. 물론 고전적인 주석으로 치자면 대부분의 주석서들이 한마디씩 걸치고 지나가야 하는 주희의 <논어집주>를 빼놓기 어렵겠다. 성백효 역주본(전통문화연구회, 2006)에 이어서 박헌순본(한길사, 2008)도 출간돼 있다...
한편, <논어> 읽기에 관해 예전에 쓴 칼럼은 '논어를 읽었다는 자 누구인가'(http://blog.aladin.co.kr/mramor/1884175)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