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게 귀가해서 한숨 돌리고 잠시 뉴스기사들을 훑어보다가 눈에 띄는 신간 리뷰가 있어서 옮겨놓는다. '경제학계를 뒤흔든 차세대 블록버스터!'라는 광고문구를 띠지에 달고 있는 책 <맬서스, 산업혁명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신세계>(한즈미디어, 2009)가 눈길을 끄는 책이다. 제목이 다소 긴데, 표지대로 하면 초점은 '왜 부국의 원조가 빈국의 가난을 해결하지 못하는가?'이고 기사의 제목대로라면, '국가간 빈부격차 왜 해결되지 않을까'이다. 한마디로, "'부의 탄생'과 '빈부격차'라는 인류역사와 경제의 가장 핵심적인 질문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는 책"이라고 소개된다(저자 자신은 '가설'이라고 얘기하지만). 2007년에 출간되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고 하는데, 자세한 서평이 기대되는 책이다. 경제서이긴 하나 보관함에 집어넣는다.

엽합뉴스(09. 04. 20) 국가간 빈부격차 왜 해결되지 않을까 

산업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인류는 '맬서스의 덫'(Malthusian Trap)에 갇혀 있었다. 인류의 소득 증가는 인구 증가에 가로막혀 번영을 지속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인류의 생활 역시 부자와 귀족 등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구석기나 중세, 심지어 산업혁명 초기까지 별 차이가 없었다. 영국에서 발생한 산업혁명은 인류의 생활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키면서 수렵시대 이후 오랜 세월 지속해온 맬서스의 덫을 단번에 풀어버렸지만, 부의 증가는 전 세계적으로 확산하지 못하고 일부 국가에만 집중됐다. 이에 따라 20세기 초부터 미국과 영국으로 대표되는 서구사회만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이른바 '대분기(大分岐. Great Divergence)가 발생하면서 국가 간 소득 격차가 크게 벌어졌다.

그레고리 클라크 캘리포니아대 경제학 교수가 지은 '맬서스, 산업혁명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신세계'(한스미디어 펴냄)는 산업혁명에 따른 부의 탄생과 확대, 그리고 국가 간 빈부격차의 문제를 새로운 시각으로 설명한다. 저자는 우선 '맬서스의 덫'을 풀어버린 산업혁명이 영국에서 발생한 이유는 고도의 제도적 정체성과 인구통계학적 특성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영국은 적어도 1200년 이후 사회적 변화가 거의 없다시피 할 정도로 강한 고정성 혹은 정체성을 보였으며, 1300년부터 1760년까지 인구 증가 속도는 더뎠다. 반면 경제적으로 성공한 부유층의 출산율이 높았고, 중산층의 가치가 문화나 유전자에 반영돼 괄목할 만한 경제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산업혁명이 촉발된 것은 기존의 경제학이 설명하는 것처럼 정치, 법률, 경제 등의 제도가 급작스럽게 발전했기 때문이라거나 식민지 개척, 지리학, 자원 등의 요인이라기보다는 문화적 요소에서 비롯됐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다시 말해 폭력, 성급함 등으로 대표되는 수렵채집인의 속성을 버리고 근면, 합리성, 교육 등 좀 더 경제적인 속성을 채택하도록 하는 방향으로 인류의 문화가 심층적으로 변화하면서 산업혁명은 성공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저자는 "오랜 정착생활의 경험과 안정성의 역사를 지닌 사회만이 사람들의 문화적 특성을 변화시켜 경제성장에 적합한 효율적인 속성을 지닌 인류로 탈바꿈시킨다"고 강조한다.

산업혁명을 설명하는 데는 인구통계학적 특성도 중요하게 작용한다. 저자는 "중국과 일본은 1600-1800년 당시 영국처럼 근면, 인내, 정직, 합리성, 호기심, 학습 등 중산층의 가치가 사회 전반으로 퍼져 나갔지만 상류층의 출산력이 일반 계층의 출산력을 약간 상회하는 선에 그쳐 영국처럼 빠른 속도의 성장이 이뤄지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상류층의 출산율이 높았던 영국은 모든 자녀가 부모의 부를 세습 받지 못했지만, 교육수준이 높은 나머지 자녀가 직업을 찾아 사회계층 구조상의 아래 단계로 내려가면서 중산층을 급속히 확산시켰고, 이는 자본주의 경제를 성장시키는 발판이 됐다는 것이다. 



저자는 "안정성의 역사를 지니지 못한 사회는 산업화라는 축복을 받지 못했다"면서 "현대의학과 항공기, 휘발유, 컴퓨터 등은 과거 200여 년간 이뤄진 기술적 풍요로움을 상징하지만 아직도 '맬서스의 덫'에 걸려 있는 아프리카 사회에서 기술적 진보는 인구를 증가시키는 데 일조할 뿐이어서 빈곤층을 양산하는 데 '큰 공'을 세울 뿐"이라고 말한다. 이어 "과거 제국주의 시대에 경제 대국들은 저개발 국가의 경제발전이란 명목으로 '식민지 정책'을 합리화했고, 지금은 빈국을 돕는다는 취지로 부국의 지원과 원조가 물밀듯이 이뤄지지만, 이는 세계적 빈부격차를 심화시킬 뿐"이라고 덧붙인다.

저자는 "오늘날 부국들이 허울 좋은 원조를 통해 겉으로는 인심을 쓰는 척하면서 속으로는 통합이 아닌 배척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가난한 나라에 제시할 만한 경제발전 모형이 적어도 서구사회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면서 "그 결과 지금 인류는 엄청난 물질적 풍요를 누리는 부자나라를 포함해 전 세계의 행복지수는 전혀 증가하지 않는 '이해할 수 없는 신세계'에 살고 있다"고 지적한다. 저자의 이러한 지적들은 세계적 빈부격차를 줄일 근본 방안이 어디에 있는지, 나아가 물질적 풍요로는 해결할 수 없는 인류의 진정한 경제적 행복과 번영이 무엇인지 성찰하게 한다.(정천기 기자) 

09. 04.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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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09-04-21 08:12   좋아요 0 | URL
인구통계학이라 --a
흥미롭긴하네요 ^^

로쟈 2009-04-22 08:42   좋아요 0 | URL
네, 새로운 접근법 같습니다...
 
누가 니체를 읽었다 하는가

서평후보로 꼽아두었다가 다른 책에 밀리는 바람에 잠시 독서를 미뤄두고 있는 책이 김진석 교수의 <니체는 왜 민주주의에 반대했는가>(개마고원, 2009)이다. 책은 이달초에 구입을 했으니까 좀 됐다(니체에 대해서 자주 언급했지만 아직 '본격적'으로 전작 읽기를 시도한 적은 없다. 다음 학기에 강의를 하게 되면 겸사겸사 유고들까지 읽어볼 계획이다). 나는 책소개라도 해놓은 줄 알고 있었는데, 찾아보니 눈에 띄지 않는다. 그냥 넘어갔던 모양이다. 강준만 교수의 칼럼으로 뒤늦은 소개를 대신한다.   

한겨레(09. 04. 20) [강준만칼럼] 약자의 원한 

현대 민주주의 체제는 아마도 약자들의 복수와 원한에 내재하는 합리성 혹은 정당성을 창조적으로 인정한 덕택에 발전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사회적 정의’란 무엇인가? 그것을 단순히 도덕적으로만 이해하지 말고, 창조적으로 이해해보자. 그것은 약자들의 원한과 분노가 창조적으로 인정되면서 새로 태어난 권리다.”     

 

김진석 인하대 교수가 최근 출간한 <니체는 왜 민주주의에 반대했는가>(개마고원)에 나오는 말이다. 이 책은 묘하다. 니체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 사회의 깊은 구석까지 볼 수 있는 안목을 제공해주니 말이다. 김 교수가 한국 민주주의를 논하다가 “니체의 철학을 논의하는 책이니만큼, 이 정도에서 만족하자”고 했을 때, 얼마나 아쉬웠는지 모른다. 아니 철학이 뭐길래, 그렇게 점잔을 빼야 한단 말인가?

니체는 ‘약자의 원한’을 혐오했으면서도 그것이 현대적인 방식으로 무수한 얼굴을 가질 것임을 예감했다고 한다. 어느 사회건 그 얼굴의 정체성을 놓고 사회적 갈등을 겪기 마련이지만, 그 갈등은 자주 ‘약자의 원한’을 혐오하는 쪽으로 결말을 맺는 것 같다. 그것이 창조적 결실을 맺은 뒤엔 어김없이 타락하고 말기 때문이다. 왜 그럴까? 김 교수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 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현대 사회의 개인들은 자신의 약점은 결함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거기에서 생기는 차별을 비판하지만, 동시에 자신의 강점에서 오는 이로움이나 명예는 그대로 누리면서 차별을 인정하는 이중적 태도를 보인다.”

그런 이중적 태도는 ‘강약’(强弱)이 상대적이며 연속선상에 놓여 있는 개념이라는 데에서 비롯되는 것이기도 하다. 지방의 도시 거주자가 ‘서울 패권주의’를 비난하면서도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에선 농촌에 대한 ‘도시 패권주의’에 눈을 감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약자의 원한’이 자주 드러내는 한계이자 모순이다.

‘약자의 원한’을 타락시키는 매개는 늘 돈이다. “돈은 원초적으로 무의식의 대상”이라고 한 제임스 힐먼의 말이 가슴에 와 닿는다. 1789년 프랑스혁명과 1917년 러시아혁명은 모든 정치경제 시스템을 바꿔 놓았지만 단 하나 바꾸지 못한 게 있었으니 그건 바로 돈 시스템이다. 돈은 혁명 위에 존재한다. 수많은 혁명가들과 개혁가들이 종국엔 돈으로 망가지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의식의 세계에선, 그들의 패가망신은 ‘권력·금력·명예 3분법의 파괴’ 때문에 발생한다. 우리 인간의 삶은 남의 인정을 받기 위한 투쟁이지만, 사회적 인정의 기준과 투쟁 방식이 너무 획일화돼 있다. 가장 이상적인 건 권력·금력·명예의 3분법이 지켜지는 것인데, 세 가지를 모두 갖겠다는 사람들이 너무 많고 그게 당연시되는 풍조마저 만연해 있다. 그런 풍조를 타고 공직의 기회비용에 대한 과대평가가 발생한다. 자신의 역량이라면 공직에 있지 않고 개인적인 돈벌이로 나섰을 때에 어느 정도를 벌었을 것이라는 계산을 자기 위주로 하고, 권력을 이용해 그 돈을 취하는 걸 당연하게 여긴다. 죄책감도 없고 부끄러움도 없다. 단죄의 형평성에만 집착한다. 강자가 된 이후에도 여전히 ‘약자의 원한’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어떤 문제에도 불구하고 ‘약자의 원한’이 가져온 사회적 축복을 과소평가하지 않는 균형 감각이 꼭 필요하리라. 김 교수는 니체를 가리켜 “인간 사회가 문화적으로 고양되기 위해 필요했던 폭력에 대해 너무 생생하게 증언하느라 미쳐버린 증인”이라고 했다. 우리 모두의 성찰을 압박하는 위악적 달인이라고나 할까. <니체는 왜 민주주의에 반대했는가>는 오랜만에 두뇌훈련도 할 겸 꼭 읽어볼 만한 책이다.(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09. 04. 19.  

P.S. 지젝의 <시차적 관점>(마티, 2009)의 5장에서 안 그래도 하이데거와 니체에 관한 대목들을 읽던 차였는데, 마침 내일자 강준만 교수의 칼럼이 김진석 교수의 책을 다루고 있어서 옮겨놓았다. 책상맡에 있는 책을 한번 펴보는데, 박홍규 교수의 니체 비판서 <반민주적인, 너무나 반민주적인>(필맥, 2008)을 정면으로 다룬 장도 눈에 띈다. 지젝의 용어를 빌자면, 두 대립적 관점이 니체의 '윤리 정치적 이율배반'이다. 기회가 되면 나대로 이 문제를 정리해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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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09-04-19 23:56   좋아요 0 | URL
저도 김진석 선생의 새 책 얼마 전에 구입하고 언제쯤 독서의 기회가 올까 나름 '일발장전' 중인데, 좋은 소개 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니체의 '발광'에 대한 김진석 선생의 '진단'을 읽고 있자니, 일전에 지젝이 <폭력(Violence)>에서 니체가 발광한 원인에 관해 눙치듯 언급했던 그 예의 번뜩이는 '재기'가 떠오릅니다. 어쩌면 니체 자신도 빠져 있었을지 모르는 이 '약자의 원한'에 관해서는ㅡ지젝도 여러 번 인용하고 있는 바이지만ㅡ슬로터다이크의 <분노와 시간(Zorn und Zeit)>과 함께 생각해볼 여지가 많은 것 같습니다. 그 역시나 기본적으로 '사회적 정의' 혹은 '해방'을 약자의 원한과 분노에 기초한 것으로 보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로쟈 2009-04-20 00:00   좋아요 0 | URL
지젝의 인용을 보니 슬러터다이크가 하이데거론도 썼더군요. 니체 얘기는 주로 주판차치를 참조하고요..

Claire 2009-04-21 23:18   좋아요 0 | URL
이 내용을 읽기 전까지는 나도 약자의 원한이라는 딜레마에
빠져있다는 것을 눈치채지못했네요. ^^
 

중국 관련서 얘기가 나온 김에 지난주에 나온 <차이위안페이 평전>(김영사, 2009)도 기억해 둠직하다. 차이위안페이(채원배)는 베이징대학교 초대 총장을 역임한 교육자이자 사상가라고 한다(아래 기사에서도 도산 안창호와 비교하고 있다). 하지만 시대사를 다룬 책으로도 읽을 수 있을 듯싶다.    

세계일보(09. 04. 11) 중국 교육 근대화의 아버지

우리나라엔 도산 안창호와 오산학교를 세운 남강 이승훈이 있었다면 중국엔 차이위안페이(蔡元培·1868∼1940)가 있었다. 베이징대학교 초대 총장을 역임한 차이위안페이는 시대를 앞서간 사상가, 뜨거운 애국자, 5·4운동의 아버지 등 호칭도 다양하지만, ‘근대 중국의 초석을 마련한 선구적 교육자’가 가장 적합하다.

‘차이위안페이 평전-시대보다 먼저 현대중국을 준비한 위대한 지식혁명가’는 26세 때 과거에 급제해 한림원 관리로 나섰던 차이위안페이가 1894년 갑오전쟁에서 중국이 일본에 패하자 낙향해 교육자로 변신하는 과정, 독일과 프랑스에서의 유학생활, 귀국 후 두 차례의 교육부 장관과 베이징대 총장으로서의 활동 등 그의 삶 전반을 조명한다.

쑨원의 신해혁명 이후 교육부 장관을 맡은 차이위안페이는 경전강독만 중시하는 구교육을 배척하고, 남녀의 교육평등과 근대적 학제를 과감히 도입하는 등 낡은 교육체계를 하나하나 뜯어고쳤다. 프랑스 유학 중에는 일하며 공부하자는 ‘근공검학운동’을 주도했다. 200여명의 중국 유학생이 참여한 이 운동에는 훗날 중국 공산당의 지도자가 된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덩샤오핑도 포함돼 있다. 마오쩌둥은 차이위안페이가 총장으로 재직하던 시절 베이징대학 도서관 사서로 일했으며, 저우언라이와 덩샤오핑은 근공검학회의 후원으로 유럽 유학을 마칠 수 있었다.

안중근 의사에 대한 차이위안페이의 평가도 명문으로 전한다. “아! 역사가 나라를 위해 죽으니 호연지기가 흥기하누나. 당년에 북쪽으로 가서 손가락을 잘라 굳게 맹세하고 큰 뜻에 비장한 노래를 불렀다. 한번 가서 다시 돌아오지 않는 역수의 결의를 다지고 일격에 수치를 씻고 몸은 오히려 죽게 되었다….”(조정진 기자) 

09. 04. 19. 

 

P.S. 덧붙여, 중국철학자 펑유란(풍우란)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손에 들고 있었다는 책, <현대 중국철학사>(이제이북스, 2006)도 참조해볼 만하다. "차이위안페이, 후스, 천두슈를 비롯해 장빙린, 쑨원, 마오쩌뚱, 슝스리에 이르기까지 현대 철학자들을 아우르는 철학사이면서, 서세동점의 시기 ‘동아시아에서의 근대성이란 무엇인가’ 라는 문제의식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중국현대사"이기도 한 이 책에는 '신문화운동의 창시자이자 교육자이며 철학자-차이위안페이'란 장이 포함돼 있다. 찾아보니, 주저인 <중국철학사>(까치)를 간추린 <간명한 중국철학사>(형설출판사, 2007)도 출간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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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신간 중에는 중국 관련서도 포함돼 있는데, 일본의 원로 중국학자 미조구치 유조의 <중국의 충격>(소명출판, 2009)이 그것이다. 찾아보니 <중국사상 명강의>(소나무, 2004), <중국의 공과 사>(신서원, 2004)가 이미 소개된 바 있다. 이번 책은 중국에 대한 시각 교정을 요청하는 것으로 분량은 얼마 되지 않는다. 개인적으론 이상수의 <아큐를 위한 변명>(웅진지식하우스, 2009)에 연이어 읽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관련기사를 옮겨놓는다. 필자는 공역자의 한 사람이다.   

세계일보(09. 04. 18) '떠오르는 중국' 우리에게 어떤 나라인가

수십년간 중국의 급속한 경제 성장 앞에 이제 중국이 세계적인 중심국가가 되었음을 부정할 수 있는 세계인은 없을 듯하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 선진국들이 이러한 중국의 부상을 ‘중국위협론’ 등으로 제기하면서 중국을 견제하고 내부의 결속을 강화하는 것 또한 중국의 위상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논리의 반영인 셈이다. 또 중국과 이웃하고 있는 동아시아 국가 가운데 일본 역시 중국의 이러한 성장을 편안한 마음으로 지켜볼 수는 없는 듯하고, 한국 역시 인적 물적 교류의 측면에서 중국의 강력한 힘을 피부로 느끼고 있다.

서구를 비롯해 동아시아 역내에서 중국은 이제 하나의 ‘충격’으로 다가온 지 오래되었다. 이 충격은 받아들이는 이들의 입장에 따라 위협으로, 야만으로, 비민주로, 무질서와 오만 등으로 다양하게 나타났지만, 근래 중국의 성장을 자신과의 관계 위에서 또는 세계 문명의 차원에서 제대로 평가해보려는 시도는 우리의 경우 아직 부족한 실정이다.

미조구치 유조의 ‘중국의 충격’은 바로 이러한 시각에서 쓰인 책이다. 근대 이후 오랫동안 동아시아의 패권적 국가로서 자부해왔던 일본과 일본인들이 아직도 오리엔탈리즘적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지역 국가들의 변화에 주목하지 못하고 차별과 멸시 등의 부정적 감정을 유지하고 있는 현실이 이 책의 기본적인 저술 배경이 되고 있다.  

특히 중국은 일본의 근대사에서 늘 ‘일본(선진)-중국(후진)’이란 구도의 한 축으로서 기능해 왔고, 이런 과정을 통해 일본의 중국 인식은 왜곡된 형태로 형성되었다. 이러한 일본의 왜곡된 인식은 여전히 현상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중국의 대두를 전혀 문제시하지 않거나 서구의 위협론에 편승하여 그들의 부정적 중국상(中國像)을 더욱 강화하고 있다.

미조구치는 바로 이러한 일본의 중국 인식을 바로잡기 위해 근래 중국의 부상을 ‘충격’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충격’은 중국의 변화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일본인들의 인식, 즉 낙후된 중국과 선진화된 일본이란 이중적 인식을 문제화하기 위해 사용된 표현인 것이다. 

미조구치는 이미 학계에서 은퇴한 노학자임에도 불구하고 2000년대 초 수년간 진행했던 중국 연구자들과의 교류를 통해 동아시아 내에는 각 국가마다 그 나라의 역사적 문맥이 존재하고 있고, 이것을 통해 폐쇄적인 상호인식이 형성되어 왔다는 사실을 절감하였다.

아울러 당시 동아시아에서 현안으로 대두했던 ‘역사인식 문제’에 대해 동아시아의 비판적 지식인들과의 연대를 통해 적극적으로 자신의 견해를 피력했었다. 이러한 활동을 계기로 중국학 연구자로서 자신의 중국 연구를 바탕으로 우선 동아시아 각국의 왜곡된 인식들을 타파하는 노력을 동아시아 지식인 공동으로 수행하자는 주장을 제기했다.

그는 일본을 비롯한 각 국가 간의 왜곡된 인식이 결국 서구 근대를 수용하면서 형성된 일국(一國)적 지식의 차별구조 때문이라고 파악하였다. 따라서 그의 연구와 지식인 연대운동은 궁극적으로는 서구 근대의 극복을 통한 세계적인 보편 문명의 건설을 지향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미조구치의 지향과 활동은 우리와도 무관하지 않은 일임에 틀림없다.

중국은 우리에게 어떤 나라인가. 그리고 동아시아 지역 내에서 새로운 평화적인 질서를 수립하고 새로운 미래 문명을 건설하기 위해 과연 우리는 어떤 노력을 해야할 것인가 등등. 중국을 대상화하는 미조구치의 작업을 참조체계로 삼아 동아시아 지식인들의 생산적이고 심도 있는 토론과 연구가 진행되기를 희망한다.(서광덕 안양대 대만연구소 연구교수)  

09. 04. 19.  

P.S. 책에 대한 출판사 소개에는 이런 내용도 들어 있다. "이 책은 일생 중국 연구에 몸담았던 일본의 노학자 미조구치 유조(溝口雄三)가 그의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근대적 지식 체계의 차별 구조를 타파하고 동시에 미래의 신지식에 대한 모색을 동아시아 지식인 연대 운동의 차원에서 시도하고자 한 노력의 결과물이다.(...) 그가 일생 중국근대사상사에 대한 연구를 지속해왔던 것 또한 왜곡된 일본의 근대를 비판적으로 극복하여 새로운 일본사회의 탄생을 기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미조구치는 일본의 근대화를 ‘서구추수’라고 비판하면서 중국을 비판의 근거로 삼아 일본 근대의 유약함을 폭로해낸 중국문학연구자 다케우치 요시미[竹內好]를 잇는 인물이라고 할 것이다." 요는 다케우치 요시미의 책들에 덧대어 읽어도 좋겠다는 것. 특히 <일본과 아시아>(소명출판, 2004)가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책이다.   

부수적으론 쑨거의 <다케우치 요시미라는 물음>(그린비, 2007)에서 시작된 '아이아 총서'의 책들도 참고해볼 수 있겠다. 가장 최근에 나온 것이 오키나와 문제를 다룬 도미야마 이치로의 <폭력의 예감>(그린비, 2009)이다. 

 

국내서로는 얼마전에 창비에서 나온 '근대의 갈림길' 시리즈가 유익해 보인다. <동아시아 근대이행의 세갈래>가 '총론'이고 중국편이 강진아의 <문명제국에서 국민국가로>이다. 최원식 교수의 <제국 이후의 동아시아>(창비, 2009)도 <중국의 충격>과 같이 읽어볼 만한 책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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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지과학의 제3의 움직임

마이클 가자니가의 <윤리적 뇌>(바다출판사, 2009)를 관심도서로 올려놓은 김에 인지과학의 전반적인 현황과 조망을 다룬 이정모 교수의 <인지과학>(성균관대출판부, 2009)에 대한 소개도 스크랩해놓는다. 저자와의 인터뷰 기사다. 책은 두툼한 '교재'이다.  

  

교수신문(09. 04. 06) “생각 교환할 수 있는 지적 흥분의 분위기 필요해요”

한국의 인지심리학을 대표하는 학자인 이정모 성균관대 교수가 얼마 전 『인지과학』(성균관대 출판부)을 펴냈다. 종합과학이자 융합학문으로서 인지과학의 성과를 총체적으로 소개하는 이 책을 통해, 이 교수는 그간의 학문적 성과를 드러내고 있다. 인지과학은 인간의 심성을 과학을 통해 해명하자는 야심찬 취지를 바탕으로 한다. <교수신문>은 이 교수와 인터뷰를 통해 점점 심화되고 있는 과학기술시대 인간의 지위에 대해서 인지과학은 무엇을 말할 수 있을지, 우리의 미래는 어떻게 전개될지를 알아봤다. 

이정모 교수 약력: 퀸즈대에서 심리학 박사 취득. 한국실험및인지심리학회 회장, 한국인지과학회 회장을 역임했고, 한국뇌학회 고문으로 있다. 

교수님의 『인지과학』을 보고 처음 드는 생각은 딱히 뭔가 문제를 제기할 부분이 없을 만큼 깔끔하고 모범적이라는 점이었습니다. 인지과학에 대해서 이토록 자세하고 성실하게 종합을 한 책은 외국에서도 드물 것으로 사료가 됩니다. 특히 융합학문으로서 인지과학의 면면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계십니다. 처음부터 다양한 학문들에 대해 관심을 갖고 연구를 수행하신 것인지, 아니면 특정한 문제에 관심을 연구하다보니 다양한 학문적 성과와 방법론에 호소를 하게 되신 것인지 궁금합니다. 후자의 경우 애초에 선생님을 사로잡은 학문적 문제의식은 어떤 것이었는지 궁금합니다.  

처음부터 다양한 학문들에 대한 관심을 지니고 연구를 시작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특정한 한 문제에 대한 단순한 심리학적 물음에서 저의 인지과학 탐색의 길이 시작됐던 것 같습니다. 인간의 사고에서 하나의 생각(개념)이 어떻게 해 다른 생각(개념)을 불러일으키는가 하는 심리적 과정에 대한 물음에서 출발해, 생각과 생각을 이어주는 마음의 본질적 특성이 무엇인가에 대한 관심으로 넘어가고, 그 마음이 기억과정 중심으로 작동된다는 것, 그리고 마음의 본질은 1930년대의 영국심리학자 바틀레 교수에 의하면 ‘의미에의 노력(effort after meaning)’의 과정임을 알게 되고, 그리고 기억에는 정보들이 일정한 원리에 따라 구조화돼 연결돼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됐습니다.  

그러면 기억에는 생각들이 어떠한 지식구조를 이루어 저장되고 어떻게 되꺼내어 지는가하는 문제로 물음이 옮겨 갔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생각이나 지식구조란 언어에 의존하니까 언어학의 언어와 의미에 대한 형식적 접근으로 관심이 번져갔고, 지식의 저장구조를 다루던 인공지능의 연구에, 그리고 그러한 지식의 습득, 구조화, 인출 과정들의 특성을 좌우하는 뇌의 신경적 활동에, 그리고 마음, 의미, 지식, 과학의 본질을 탐구하는 철학의 물음으로 관심이 연결된 것 같습니다. 하나를 더 잘 알려하는 과정에서 자연히 여러 학문의 성과와 방법론에 의지하며 탐색했던 것 같습니다.

인지과학은 마음의 과학이다, 다양한 인접 학문의 연구 성과를 총괄해 발전하고 있다 ... 이 정도가 일반 식자들이 가진 생각일 것입니다. 종래의 심리철학이나 심리학과는 확실히 다른 관점에서, 다른 연구방법론을 통해 접근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요 ... 일종의 과학 내 패러다임의 전환으로까지 볼 수 있을지 여쭈어 보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이미 저서에서도 언급을 하셨겠지만, 신문독자들을 위해) 현대의 인지과학이 지닌 혁명적이고, 독특한 점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인지과학의 떠오름은 지적하신대로 하나의 과학 패러다임의 전환이었습니다. 1981년에 두뇌의 좌우반구 분할 연구로 1981년에 노벨 의학/생리학상을 수상한 신경심리학자 로져 스페리 교수의 표현에 의하자면, 인지과학은 아래에서 위로 모든 것이 결정된다는 전통적 과학적 (물리학의) 가정 대신에, 역방향적 하향적 결정론도 인정하는 것이며, 전통적 상향적 입장과 인지주의의 하향적 입장이 조합된 ‘이중 결정’ 모형을 제기하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에너지 중심의 고전적 과학에 정보와 정보처리 관점, 컴퓨터 유추에 바탕한 마음 작동 원리의 탐구 및 형식화 접근을 제시함으로써 인류사회에 정보화 시대, 컴퓨터 시대, 디지털 시대가 출발할 수 있는 구체적 개념적, 이론적 바탕 틀을 제공했습니다. 한 발 더 나아가서 인간 이성은 감정이 개입되지 않는 한 합리적이다 라는 전통적 사회과학의 통념을 실험적 증거에 의해 와해시켜 인간 본성에 대한 개념적 재구성을 하지 않을 수 없게 했습니다. 더욱이 인간의 뇌와 마음의 연결을 탐색하는 분야를 과학의 개척지의 핵심 분야로 떠오르게 했습니다. 전통적 과학 연구의 초점을 자연계의 일반 물질이 아니라 인간 자신의 마음에, 뇌에, 그리고 그 마음을 모사한 인공지능에 돌리게 해, 인문학, 사회과학, 자연과학, 공학의 연결이 과학적 탐구에서 필연적이게 했다는 데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인지과학에는 인문학적 성찰도 가미가 되고, 분명 융합적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지신경과학의 등장 등은 아무래도 전통 인문학의 토대를 위협하는 면이 있습니다. 이른바 환원주의가 아니냐는 지적이 그러합니다. 인지과학의 성과가 마음과 윤리에 대한 발생학적이거나 진화론적 설명을 제공할 수는 있어도, 지향성이나 도덕법칙, 정의의 문제 등을 과학의 언어로 환원할 수는 없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습니다. 이런 지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인지과학은 그 본래적 특성상 과거의 학문 분류 틀인 인문학, 사회과학, 자연과학, 공학을 아우르는 학제적 과학입니다. 그러나 인지과학은 사실은 이러한 고식적 학문분류 그 자체가 21세기의 학문의 분류틀로서는 더 이상 적합하지 않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학문이기도 합니다. 인지과학에서는 뇌와 인공지능도 다루지만, 인간의 마음이 (사회적으로)만들어내는 ‘의미’를 빼놓고는 이야기하기 힘듭니다. 그런데 의미란 주관적 측면이 개입된 것입니다.  

인지과학이 다른 과학과는 달리 지니는 커다란 부담 중의 하나는 과학에서 객관화하기 힘들다고 여겨져 온 인간의 주관적 체험을 과학적 울타리 안으로 어떻게 끌어 들여서 다루는가의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향성이나 도덕법칙, 정의 등은 이러한 주관적이고 사회적인 바탕 위에서 비로소 그 의미가 주어지고 개념화되고 이해, 설명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이러한 지향성, 도덕법칙, 정의 등이 구체적으로 몸을 지니고 사회적 환경에서 적응하는 인간 개체가 이루어내는 것임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도덕적 법칙, 윤리 등에 대해 이러한 후자의 측면에서 어느 정도는 이해, 설명 가능하다고 봅니다. 최근에 현상학적 철학 등과 연결돼 인지과학의 제 3의 대안으로 서구에서 떠오르고 있는 체화된 인지(embodied cogntition) 접근이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계속 노력하리라 봅니다.

<교수신문>은 작년에 디지털 치매를 인간과 기계의 공진화의 한 가능성으로 사고할 수도 있다는 점을 기사로 다룬 적이 있습니다. 교수님도 책의 말미에서 “인간과 인공물의 구분이 무너지는 가능성이 무섭게 빨리 현실로 닥쳐오고 있다”고 언급을 하셨습니다. 이러한 새로운 미래의 도래에 대해서 일부에서는 우려와 두려움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일종의 디스토피아가 도래하는 것 아니냐는 전망이죠. 기계를 만지작거리면서 눈빛이 멍한 요즘 아이들에서 그러한 디스토피아의 징후를 본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기계에 대한 인간의 종속화, 무력화, 노예화라는 우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역사 이래 인간, 특히 인간 마음은 인간이 만든 인공물(언어나 행정체제와 같은 소프트 인공물, 돌도끼나 컴퓨터 등 하드인공물 포함)과 공진화해왔음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체화된 인지’ 접근에 의하면 인간 마음과 인간이 만든 인공물(환경)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는 것 자체가 문제 있지요. 인터넷 게임을 하는 아이들이건 내비게이션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어른이건 이미 인공물은 인간의 마음의 한 부분 요소가 돼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밀접한 연결이 점증하는 것은 막기 어렵겠지요. 왜냐하면 그것이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 인간의 일상적 삶의 양태일 것이니까요. 그러나 이에 대해 디스토피아 같은 비관적이고 부정적인 언급만하는 것은 인간을 제대로 이해 못하기 때문이라고 비판받을 수도 있겠지요.  

인간은 무한한 창의적 인지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봅니다. 그러한 인간의 창의적 인지적 능력을 이러한 기계의 폐해를 예방하고 줄이는 데에 전력투구한다면(마치 환경 파괴를 막기 위해 인류의 온갖 지혜를 다 짜내듯이) 이러한 비관적 예측이 현실화되지 않도록 막을 수도 있겠지요. 바로 이러한 과업을 달성하는 것이 응용 인지과학의 큰 과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의 인지능력이 만들어 낸 기계 등의 인공물의 폐해, 그리고 요즘 논의되는 각종 환경 파괴의 폐해의 원인이 실상은 그러한 인공물에 있다기보다는 그와 상호작용하는 인간의 인지 특성에 있음을 절실히 인식해 이를 극복하는 인간 인지기술을 창조하는 것이 인지과학의 응용적 사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어느 정도 가능하다고 봅니다. 미국이나 유럽의 융합과학기술 개발의 목표가 신물질이나 기계의 창조가 아닌 세계 인간 기능(수행능력) 향상에 있음에 우리는 새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무리 기계와 공진화를 말해도 ‘사유’를 기계가 대신할 수는 없다는 주장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이에 대해선 심각한 심리철학적 논의가 전개될 수 있다고 봅니다. 심리철학에서 논의되듯이 ‘무엇을 사유라고 규정하느냐’, ‘무엇을 기계라고 규정하는가’에 대한 공통된 인식이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하여간, 인간처럼 유한한 생명을 지닌 생물학적 존재가 몸을 갖고 하는 일정한 인지 양식을 사유라고 한다면, 그런 것은 소위 ‘그러한 몸을 지닌 생명체가 아닌 기계가 할 수 있는 인지 양식과는 다소 다를 수 있겠습니다. 그 점은 인정하지만 어떠한 형태로건 형식화할(formalizable) 수 있는 사유는 소위 “기계” 가 해 낼 수 있다고 봅니다. 물론 그러한 기계를 구현하려면 장구한 세월의 연구가 필요하겠지만요.

조금 색다른 질문을 드려볼까 합니다. 교수님은 이 책을 저술하신 동기로 인지과학의 성과를 종합적으로 조망할 책이 없다는 이유를 들으셨습니다. 그만큼 지식의 축적 속도가 빠르다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인지과학을 비롯해서 요즘의 융합학문은 연구자들에게 전문가적 깊이는 물론이고 다방면에 빼어난 백과사전 형 지식인을 요구하는데, 과연 빠른 속도로 늘어나고 있는 각 분야의 지식을 연구자들이 소화할 수 있을지가 의문입니다. 결국 융합학문으로서 인지과학에 대한 총체적 조망은 날이 갈수록 어려워질 수도 있다는 이야기인데요 ...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지적하신 문제점을 날이 갈수록 절실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더 잘 알아야 제대로 인지과학적 연결 틀을 세울 수 있는 인접 분야 주제들이 계속 출현합니다. 어떤 때는 인지과학이 인문학, 사회과학, 자연과학, 인간관련 공학의 상당부분을 빠른 속도로 흡수하면서 그 자체의 특성을 상실해 가지 않는가 하는 염려도 들고, 과연 그러한 시점에서도 통합된 조망의 인지과학이 지금과 같은 형태로 존재할 수 있을까 하는 염려도 듭니다. 다원적 메타포, 다원적 방법론, 다원적 수준의 설명, 그리고 심리학, 철학, 신경과학, 언어학, 인공지능, 인류학, 로보틱스, 물리학, 수학 ... 등  여러 학문의 수렴이 필요한 데, 이것은 어느 개인 한 사람이 이루어 내기 힘든 것이라고 봅니다. 따라서 작은 주제부터 큰 주제까지 여러 분야 간 긴밀히 상호작용하면서 함께, 생각을 발전시켜 나가며 자연 발생적으로 전체적 유기적 조망을 창출하는 그러한 학술적 대화 마당이 절실하게 요구됩니다. 지적 부담을 여러 분야의 사람들이 나누어 갖는 그러한 학술적 마당이 마련돼야 하겠지요.

융합은 요즘 곳곳에서 들을 수 있는 화두입니다. 그러나 융합이니 학제 간 연구니 하는 구호가 구호에만 머문 경우가 많습니다. 인지과학의 경우처럼 진정한 학문적 필요성에서 비롯했다기 보다는, 관변 단체나 언론의 주도로 일부러 ‘융합’을 표방한 경우가 많다는 것이죠. 학제 간 연구가 내실과 진정성을 기하기 위해선 무엇이 가장 필요하다고 보시는지요.  

융합과학기술을 세계적 관심사로 끌어 올린  틀을 제시한 미국 과학재단의 틀에서 강조한 것은 사실은 ‘융합’이라기 보다는 ‘수렴(Convergence)’이었습니다. 여러 연구 관심사 주제, 학문 분야, 학자들의 생각이 계속적이며 역동적인 상호작용을 통해 하나의 상위 개념이나 조망으로 수렴돼 가는 그러한 틀을 제시한 것입니다. 미국과학재단은 이 2002년도 보고서에서 융합(수렴)을 이루어 내기 위해 주의할 것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이미 각 분야가 어느 정도의 성과를 이루어 낸 후의 사후의 연결적 융합이 아니라, 작은 아이디어를 생성하는 초기 단계부터 여러 학문 분야들이 밀접히 연결돼야 한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수렴적 융합, 자연발생적 융합이 일어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이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각 분야의 연구자들이 늘, 긴밀히 상호작용하며 수렴적 관점에서 현상을 이해하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모색하는 그러한 학문적 대화의 마당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인문학, 사회과학, 자연과학, 공학, 예술이라는 기존의 학문 분류 틀이 무너지고, 학부생, 대학원생, 교수, 대학연구자, 기업연구자들이 계속해 생각을 일상적으로 주고받을 수 있는 지적 흥분의 분위기가 형성돼야 합니다. 관변단체나 언론의 시도는 자극을 줄 수는 있지만 구체적 융합은 이루어 내지 못할 것입니다. 대학이 본질적으로 탈바꿈하여야 합니다. 현재의 우리나라의 대학 및 국가 연구지원 체제, 대학 및 중고교 교육체제가 혁신적으로 크게 달라지지 않고서는 서구와 같이 기본 물음에 대한 진지한, 계속된 탐색과, 그리고 여러 학문과의 연결에 의한 융합을 창출해 내기 힘들다고 봅니다.

연구를 하시면서 겪었던 개인적 어려움들과 보람 그리고 향후 계획에 대해서 듣고 싶습니다.  

개인적 어려움의 하나는 과거에는 대학, 과기부, 교육부, 과학관련 공공기관의 종사자들, 그리고 이러한 기관의 자문위원 교수들, 매스컴 종사자들이 구시대적 개념인 물질, 기계 중심의 과학관으로 무장돼 있기 때문에 저희가 인지과학, 학제적 융합을 이야기해도 결국은 황야에서 외롭게 외치는 소리에 그치고 말았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최근에 이러한 상황에 변화가 오고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보람의 하나는 80년대 중반에 대우대단 지원 인지과학 공동연구를 하면서 15명의 여러 분야의 연구자들이 격주로 모여 밤늦게 토론해 용어, 개념적 이해틀의 차이를 결국은 상당히 극복하고 한국인지과학회를 창립한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다른 하나는 제가 홈페이지 등을 통해 인지과학 자료를 소개한 것을 접한 후에 유럽, 북미, 동남아, 중국, 만주 등, 그리고 한국 내에서 전혀 일면식도 없는 인지과학에 관심있는 분들이(주로 한국인) 연락을 해 온 경우들입니다.  

향후 계획의 하나는, 건강이 허락한다면, 학생, 교수, 현장연구자 등이 함께 참여해 긴밀히 상호작용하며, 늘 열리며, 정말 수렴적인 학문간 대화가 활발한 그러한 다학문적 인지과학 세미나를 어떤 교육기관에서 다른 연구자들과 함께 진행, 참여하고 싶은 것입니다.(오주훈 기자)   

09. 04.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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