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과학의 제3의 움직임
마이클 가자니가의 <윤리적 뇌>(바다출판사, 2009)를 관심도서로 올려놓은 김에 인지과학의 전반적인 현황과 조망을 다룬 이정모 교수의 <인지과학>(성균관대출판부, 2009)에 대한 소개도 스크랩해놓는다. 저자와의 인터뷰 기사다. 책은 두툼한 '교재'이다.
교수신문(09. 04. 06) “생각 교환할 수 있는 지적 흥분의 분위기 필요해요”
한국의 인지심리학을 대표하는 학자인 이정모 성균관대 교수가 얼마 전 『인지과학』(성균관대 출판부)을 펴냈다. 종합과학이자 융합학문으로서 인지과학의 성과를 총체적으로 소개하는 이 책을 통해, 이 교수는 그간의 학문적 성과를 드러내고 있다. 인지과학은 인간의 심성을 과학을 통해 해명하자는 야심찬 취지를 바탕으로 한다. <교수신문>은 이 교수와 인터뷰를 통해 점점 심화되고 있는 과학기술시대 인간의 지위에 대해서 인지과학은 무엇을 말할 수 있을지, 우리의 미래는 어떻게 전개될지를 알아봤다.
이정모 교수 약력: 퀸즈대에서 심리학 박사 취득. 한국실험및인지심리학회 회장, 한국인지과학회 회장을 역임했고, 한국뇌학회 고문으로 있다.
교수님의 『인지과학』을 보고 처음 드는 생각은 딱히 뭔가 문제를 제기할 부분이 없을 만큼 깔끔하고 모범적이라는 점이었습니다. 인지과학에 대해서 이토록 자세하고 성실하게 종합을 한 책은 외국에서도 드물 것으로 사료가 됩니다. 특히 융합학문으로서 인지과학의 면면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계십니다. 처음부터 다양한 학문들에 대해 관심을 갖고 연구를 수행하신 것인지, 아니면 특정한 문제에 관심을 연구하다보니 다양한 학문적 성과와 방법론에 호소를 하게 되신 것인지 궁금합니다. 후자의 경우 애초에 선생님을 사로잡은 학문적 문제의식은 어떤 것이었는지 궁금합니다.
처음부터 다양한 학문들에 대한 관심을 지니고 연구를 시작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특정한 한 문제에 대한 단순한 심리학적 물음에서 저의 인지과학 탐색의 길이 시작됐던 것 같습니다. 인간의 사고에서 하나의 생각(개념)이 어떻게 해 다른 생각(개념)을 불러일으키는가 하는 심리적 과정에 대한 물음에서 출발해, 생각과 생각을 이어주는 마음의 본질적 특성이 무엇인가에 대한 관심으로 넘어가고, 그 마음이 기억과정 중심으로 작동된다는 것, 그리고 마음의 본질은 1930년대의 영국심리학자 바틀레 교수에 의하면 ‘의미에의 노력(effort after meaning)’의 과정임을 알게 되고, 그리고 기억에는 정보들이 일정한 원리에 따라 구조화돼 연결돼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됐습니다.
그러면 기억에는 생각들이 어떠한 지식구조를 이루어 저장되고 어떻게 되꺼내어 지는가하는 문제로 물음이 옮겨 갔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생각이나 지식구조란 언어에 의존하니까 언어학의 언어와 의미에 대한 형식적 접근으로 관심이 번져갔고, 지식의 저장구조를 다루던 인공지능의 연구에, 그리고 그러한 지식의 습득, 구조화, 인출 과정들의 특성을 좌우하는 뇌의 신경적 활동에, 그리고 마음, 의미, 지식, 과학의 본질을 탐구하는 철학의 물음으로 관심이 연결된 것 같습니다. 하나를 더 잘 알려하는 과정에서 자연히 여러 학문의 성과와 방법론에 의지하며 탐색했던 것 같습니다.
인지과학은 마음의 과학이다, 다양한 인접 학문의 연구 성과를 총괄해 발전하고 있다 ... 이 정도가 일반 식자들이 가진 생각일 것입니다. 종래의 심리철학이나 심리학과는 확실히 다른 관점에서, 다른 연구방법론을 통해 접근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요 ... 일종의 과학 내 패러다임의 전환으로까지 볼 수 있을지 여쭈어 보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이미 저서에서도 언급을 하셨겠지만, 신문독자들을 위해) 현대의 인지과학이 지닌 혁명적이고, 독특한 점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인지과학의 떠오름은 지적하신대로 하나의 과학 패러다임의 전환이었습니다. 1981년에 두뇌의 좌우반구 분할 연구로 1981년에 노벨 의학/생리학상을 수상한 신경심리학자 로져 스페리 교수의 표현에 의하자면, 인지과학은 아래에서 위로 모든 것이 결정된다는 전통적 과학적 (물리학의) 가정 대신에, 역방향적 하향적 결정론도 인정하는 것이며, 전통적 상향적 입장과 인지주의의 하향적 입장이 조합된 ‘이중 결정’ 모형을 제기하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에너지 중심의 고전적 과학에 정보와 정보처리 관점, 컴퓨터 유추에 바탕한 마음 작동 원리의 탐구 및 형식화 접근을 제시함으로써 인류사회에 정보화 시대, 컴퓨터 시대, 디지털 시대가 출발할 수 있는 구체적 개념적, 이론적 바탕 틀을 제공했습니다. 한 발 더 나아가서 인간 이성은 감정이 개입되지 않는 한 합리적이다 라는 전통적 사회과학의 통념을 실험적 증거에 의해 와해시켜 인간 본성에 대한 개념적 재구성을 하지 않을 수 없게 했습니다. 더욱이 인간의 뇌와 마음의 연결을 탐색하는 분야를 과학의 개척지의 핵심 분야로 떠오르게 했습니다. 전통적 과학 연구의 초점을 자연계의 일반 물질이 아니라 인간 자신의 마음에, 뇌에, 그리고 그 마음을 모사한 인공지능에 돌리게 해, 인문학, 사회과학, 자연과학, 공학의 연결이 과학적 탐구에서 필연적이게 했다는 데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인지과학에는 인문학적 성찰도 가미가 되고, 분명 융합적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지신경과학의 등장 등은 아무래도 전통 인문학의 토대를 위협하는 면이 있습니다. 이른바 환원주의가 아니냐는 지적이 그러합니다. 인지과학의 성과가 마음과 윤리에 대한 발생학적이거나 진화론적 설명을 제공할 수는 있어도, 지향성이나 도덕법칙, 정의의 문제 등을 과학의 언어로 환원할 수는 없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습니다. 이런 지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인지과학은 그 본래적 특성상 과거의 학문 분류 틀인 인문학, 사회과학, 자연과학, 공학을 아우르는 학제적 과학입니다. 그러나 인지과학은 사실은 이러한 고식적 학문분류 그 자체가 21세기의 학문의 분류틀로서는 더 이상 적합하지 않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학문이기도 합니다. 인지과학에서는 뇌와 인공지능도 다루지만, 인간의 마음이 (사회적으로)만들어내는 ‘의미’를 빼놓고는 이야기하기 힘듭니다. 그런데 의미란 주관적 측면이 개입된 것입니다.
인지과학이 다른 과학과는 달리 지니는 커다란 부담 중의 하나는 과학에서 객관화하기 힘들다고 여겨져 온 인간의 주관적 체험을 과학적 울타리 안으로 어떻게 끌어 들여서 다루는가의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향성이나 도덕법칙, 정의 등은 이러한 주관적이고 사회적인 바탕 위에서 비로소 그 의미가 주어지고 개념화되고 이해, 설명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이러한 지향성, 도덕법칙, 정의 등이 구체적으로 몸을 지니고 사회적 환경에서 적응하는 인간 개체가 이루어내는 것임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도덕적 법칙, 윤리 등에 대해 이러한 후자의 측면에서 어느 정도는 이해, 설명 가능하다고 봅니다. 최근에 현상학적 철학 등과 연결돼 인지과학의 제 3의 대안으로 서구에서 떠오르고 있는 체화된 인지(embodied cogntition) 접근이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계속 노력하리라 봅니다.
<교수신문>은 작년에 디지털 치매를 인간과 기계의 공진화의 한 가능성으로 사고할 수도 있다는 점을 기사로 다룬 적이 있습니다. 교수님도 책의 말미에서 “인간과 인공물의 구분이 무너지는 가능성이 무섭게 빨리 현실로 닥쳐오고 있다”고 언급을 하셨습니다. 이러한 새로운 미래의 도래에 대해서 일부에서는 우려와 두려움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일종의 디스토피아가 도래하는 것 아니냐는 전망이죠. 기계를 만지작거리면서 눈빛이 멍한 요즘 아이들에서 그러한 디스토피아의 징후를 본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기계에 대한 인간의 종속화, 무력화, 노예화라는 우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역사 이래 인간, 특히 인간 마음은 인간이 만든 인공물(언어나 행정체제와 같은 소프트 인공물, 돌도끼나 컴퓨터 등 하드인공물 포함)과 공진화해왔음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체화된 인지’ 접근에 의하면 인간 마음과 인간이 만든 인공물(환경)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는 것 자체가 문제 있지요. 인터넷 게임을 하는 아이들이건 내비게이션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어른이건 이미 인공물은 인간의 마음의 한 부분 요소가 돼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밀접한 연결이 점증하는 것은 막기 어렵겠지요. 왜냐하면 그것이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 인간의 일상적 삶의 양태일 것이니까요. 그러나 이에 대해 디스토피아 같은 비관적이고 부정적인 언급만하는 것은 인간을 제대로 이해 못하기 때문이라고 비판받을 수도 있겠지요.
인간은 무한한 창의적 인지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봅니다. 그러한 인간의 창의적 인지적 능력을 이러한 기계의 폐해를 예방하고 줄이는 데에 전력투구한다면(마치 환경 파괴를 막기 위해 인류의 온갖 지혜를 다 짜내듯이) 이러한 비관적 예측이 현실화되지 않도록 막을 수도 있겠지요. 바로 이러한 과업을 달성하는 것이 응용 인지과학의 큰 과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의 인지능력이 만들어 낸 기계 등의 인공물의 폐해, 그리고 요즘 논의되는 각종 환경 파괴의 폐해의 원인이 실상은 그러한 인공물에 있다기보다는 그와 상호작용하는 인간의 인지 특성에 있음을 절실히 인식해 이를 극복하는 인간 인지기술을 창조하는 것이 인지과학의 응용적 사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어느 정도 가능하다고 봅니다. 미국이나 유럽의 융합과학기술 개발의 목표가 신물질이나 기계의 창조가 아닌 세계 인간 기능(수행능력) 향상에 있음에 우리는 새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무리 기계와 공진화를 말해도 ‘사유’를 기계가 대신할 수는 없다는 주장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이에 대해선 심각한 심리철학적 논의가 전개될 수 있다고 봅니다. 심리철학에서 논의되듯이 ‘무엇을 사유라고 규정하느냐’, ‘무엇을 기계라고 규정하는가’에 대한 공통된 인식이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하여간, 인간처럼 유한한 생명을 지닌 생물학적 존재가 몸을 갖고 하는 일정한 인지 양식을 사유라고 한다면, 그런 것은 소위 ‘그러한 몸을 지닌 생명체가 아닌 기계가 할 수 있는 인지 양식과는 다소 다를 수 있겠습니다. 그 점은 인정하지만 어떠한 형태로건 형식화할(formalizable) 수 있는 사유는 소위 “기계” 가 해 낼 수 있다고 봅니다. 물론 그러한 기계를 구현하려면 장구한 세월의 연구가 필요하겠지만요.
조금 색다른 질문을 드려볼까 합니다. 교수님은 이 책을 저술하신 동기로 인지과학의 성과를 종합적으로 조망할 책이 없다는 이유를 들으셨습니다. 그만큼 지식의 축적 속도가 빠르다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인지과학을 비롯해서 요즘의 융합학문은 연구자들에게 전문가적 깊이는 물론이고 다방면에 빼어난 백과사전 형 지식인을 요구하는데, 과연 빠른 속도로 늘어나고 있는 각 분야의 지식을 연구자들이 소화할 수 있을지가 의문입니다. 결국 융합학문으로서 인지과학에 대한 총체적 조망은 날이 갈수록 어려워질 수도 있다는 이야기인데요 ...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지적하신 문제점을 날이 갈수록 절실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더 잘 알아야 제대로 인지과학적 연결 틀을 세울 수 있는 인접 분야 주제들이 계속 출현합니다. 어떤 때는 인지과학이 인문학, 사회과학, 자연과학, 인간관련 공학의 상당부분을 빠른 속도로 흡수하면서 그 자체의 특성을 상실해 가지 않는가 하는 염려도 들고, 과연 그러한 시점에서도 통합된 조망의 인지과학이 지금과 같은 형태로 존재할 수 있을까 하는 염려도 듭니다. 다원적 메타포, 다원적 방법론, 다원적 수준의 설명, 그리고 심리학, 철학, 신경과학, 언어학, 인공지능, 인류학, 로보틱스, 물리학, 수학 ... 등 여러 학문의 수렴이 필요한 데, 이것은 어느 개인 한 사람이 이루어 내기 힘든 것이라고 봅니다. 따라서 작은 주제부터 큰 주제까지 여러 분야 간 긴밀히 상호작용하면서 함께, 생각을 발전시켜 나가며 자연 발생적으로 전체적 유기적 조망을 창출하는 그러한 학술적 대화 마당이 절실하게 요구됩니다. 지적 부담을 여러 분야의 사람들이 나누어 갖는 그러한 학술적 마당이 마련돼야 하겠지요.
융합은 요즘 곳곳에서 들을 수 있는 화두입니다. 그러나 융합이니 학제 간 연구니 하는 구호가 구호에만 머문 경우가 많습니다. 인지과학의 경우처럼 진정한 학문적 필요성에서 비롯했다기 보다는, 관변 단체나 언론의 주도로 일부러 ‘융합’을 표방한 경우가 많다는 것이죠. 학제 간 연구가 내실과 진정성을 기하기 위해선 무엇이 가장 필요하다고 보시는지요.
융합과학기술을 세계적 관심사로 끌어 올린 틀을 제시한 미국 과학재단의 틀에서 강조한 것은 사실은 ‘융합’이라기 보다는 ‘수렴(Convergence)’이었습니다. 여러 연구 관심사 주제, 학문 분야, 학자들의 생각이 계속적이며 역동적인 상호작용을 통해 하나의 상위 개념이나 조망으로 수렴돼 가는 그러한 틀을 제시한 것입니다. 미국과학재단은 이 2002년도 보고서에서 융합(수렴)을 이루어 내기 위해 주의할 것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이미 각 분야가 어느 정도의 성과를 이루어 낸 후의 사후의 연결적 융합이 아니라, 작은 아이디어를 생성하는 초기 단계부터 여러 학문 분야들이 밀접히 연결돼야 한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수렴적 융합, 자연발생적 융합이 일어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이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각 분야의 연구자들이 늘, 긴밀히 상호작용하며 수렴적 관점에서 현상을 이해하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모색하는 그러한 학문적 대화의 마당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인문학, 사회과학, 자연과학, 공학, 예술이라는 기존의 학문 분류 틀이 무너지고, 학부생, 대학원생, 교수, 대학연구자, 기업연구자들이 계속해 생각을 일상적으로 주고받을 수 있는 지적 흥분의 분위기가 형성돼야 합니다. 관변단체나 언론의 시도는 자극을 줄 수는 있지만 구체적 융합은 이루어 내지 못할 것입니다. 대학이 본질적으로 탈바꿈하여야 합니다. 현재의 우리나라의 대학 및 국가 연구지원 체제, 대학 및 중고교 교육체제가 혁신적으로 크게 달라지지 않고서는 서구와 같이 기본 물음에 대한 진지한, 계속된 탐색과, 그리고 여러 학문과의 연결에 의한 융합을 창출해 내기 힘들다고 봅니다.
연구를 하시면서 겪었던 개인적 어려움들과 보람 그리고 향후 계획에 대해서 듣고 싶습니다.
개인적 어려움의 하나는 과거에는 대학, 과기부, 교육부, 과학관련 공공기관의 종사자들, 그리고 이러한 기관의 자문위원 교수들, 매스컴 종사자들이 구시대적 개념인 물질, 기계 중심의 과학관으로 무장돼 있기 때문에 저희가 인지과학, 학제적 융합을 이야기해도 결국은 황야에서 외롭게 외치는 소리에 그치고 말았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최근에 이러한 상황에 변화가 오고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보람의 하나는 80년대 중반에 대우대단 지원 인지과학 공동연구를 하면서 15명의 여러 분야의 연구자들이 격주로 모여 밤늦게 토론해 용어, 개념적 이해틀의 차이를 결국은 상당히 극복하고 한국인지과학회를 창립한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다른 하나는 제가 홈페이지 등을 통해 인지과학 자료를 소개한 것을 접한 후에 유럽, 북미, 동남아, 중국, 만주 등, 그리고 한국 내에서 전혀 일면식도 없는 인지과학에 관심있는 분들이(주로 한국인) 연락을 해 온 경우들입니다.
향후 계획의 하나는, 건강이 허락한다면, 학생, 교수, 현장연구자 등이 함께 참여해 긴밀히 상호작용하며, 늘 열리며, 정말 수렴적인 학문간 대화가 활발한 그러한 다학문적 인지과학 세미나를 어떤 교육기관에서 다른 연구자들과 함께 진행, 참여하고 싶은 것입니다.(오주훈 기자)
09. 04.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