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홍규 교수의 신작 <반민주적인, 너무나 반민주적인>(필맥, 2008)이 떠올려주는 전작은 바로 한달 전에 나온 <누가 아렌트와 토크빌을 읽었다 하는가>(글항아리, 2008)와 <셰익스피어는 제국주의자다>(청어람미디어, 2005)이다. 한국의 지식인과 독자들이 자주 언급하지만 제대로 읽지도, 이해하지도 못하고 있다는 판단을 전제로 하고 있는 책들. 한데, 이번에 나온 '니체 비판서'는 새롭다기보다는 좀 '올드'하다는 인상을 준다. 1960년대에 소위 '니체 르네상스'(혹은 '새로운 니체')가 일어나면서 타겟으로 삼았던 전통적인/보수적인 니체관을 그대로 리바이벌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가령, “사내는 전투를 위해, 또 여인은 전사에게 위안이 될 수 있도록 양육되어야 한다. 그밖의 모든 일은 어리석은 일이다.”란 대목에서 "여성을 남성의 도구로 보는 관점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고 보는 식(너무나 당연한 독해다!). 그의 '다시 읽기'는 '곧이 곧대로 읽기'이기도 하다(그의 주장은 니체를 비틀어 읽지 말라는 것이다!). 책이 흥미로울 듯했으나 리뷰를 읽으면서는 주저하게 된다(사실 오늘도 이 책을 사러 서점에 들렀지만 눈에 띄지 않는 바람에 깜박 잊고 말았다. 다행인가?).
한겨레(08. 09. 06) 니체는 인종주의자·제국주의자였다
박홍규 영남대 교수가 쓴 <반민주적인, 너무나 반민주적인>은 근년 들어 부활해 거침없이 활보하고 있는 니체(1844~1900) 사상을 정면으로 비판한 저작이다. 지은이는 부활한 니체의 등 뒤에 감추어져 있던 반민주주의자 니체의 모습을 돋을새김한다. 니체 르네상스라고 할 만한 최근의 현상은 프랑스판 탈근대주의 물결과 함께 등장했다. 미셸 푸코가 사유의 지렛대로 삼은 ‘계보학’이 국내에서 니체의 탈근대적 재해석의 도화선 노릇을 했고, 뒤이어 질 들뢰즈 철학의 유행이 니체의 전면적 복권을 이끌어냈다. 이 흐름이 발굴한 니체는 도발적이고 반항적인 니체, 급진적이고 전복적인 니체다. 니체의 사유를 거점으로 삼아 근본적이고 근원적인 반역을 꾀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니체 르네상스의 바탕에 깔려 있다.
지은이는 이런 식의 니체 해석이 니체를 ‘오독’하는 일이라고 단언한다. 니체의 일부를 전부로 치환하고, 니체의 핵심적인 주장을 지워버리며, 왜곡·과장으로 니체의 본모습을 감추고 있다는 것이다. 지은이는 니체가 처음부터 끝까지 오늘날의 니체 이해와는 정반대로 인종주의자·제국주의자·반여성주의자였다고 말한다. 이 모든 점을 요약해 지은이는 니체가 반민주주의자였다고 강조한다. 니체는 강자·주인·귀족·지배자를 위한 철학을 했으며, 그 지배자의 지배를 정당화했을 뿐만 아니라 그 지배의 실현을 총체적으로 요구했다. 반면에 약자·여성·노예·피지배자를 멸시했고, 그들의 사상과 제도인 민주주의를 극단적으로 혐오했다. 지은이는 니체의 이런 면모가 그의 저작 전편에 일관성 있게 깔려 있음을 보여준다.
니체 사상의 본질을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구절로 이 책에 소개되는 것이 말기의 저작 <도덕의 계보> 중 ‘금발의 야수’다.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그들은 아마도 소름 끼치는 일련의 살인·방화·능욕·고문에서 의기양양하게 정신적 안정을 지닌 채 돌아오는 즐거움에 찬 괴물[이다.] (…) 이런 모든 고귀한 종족의 근저에 있는 맹수, 곧 먹잇감과 승리를 갈구하며 방황하는 화려한 금발의 야수를 오해해서는 안 된다. (…) 로마·아라비아·독일·일본의 귀족, 호메로스의 영웅들, 스칸디나비아의 해적들-이러한 욕망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그들은 모두 같다.”
이 ‘소름 끼치는 야수’야말로 니체가 지배자 종족의 표상으로 인식하고 옹호했던 대상이라고 지은이는 말한다. 니체의 이 근본 이미지는 다른 저작에서 다양한 형태로 끝없이 변주되고 반복된다. 약자에 대해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에게 가장 커다란 위험은 병자다. 악인이나 ‘맹수’가 아니다. 처음부터 실패자, 패배자, 좌절한 자-가장 약한 자들인 이들은 대부분 인간의 삶의 토대를 허물어버리고, 삶이나 인간이나 우리 자신에 대한 우리의 신뢰에 가장 위험하게 독을 타서 그것을 의심하게 만드는 자들이다.”
마찬가지로 니체는 여성에 대해서도 경멸적 시선을 감추지 않았다. “사내는 전투를 위해, 또 여인은 전사에게 위안이 될 수 있도록 양육되어야 한다. 그밖의 모든 일은 어리석은 일이다.” 여성을 남성의 도구로 보는 관점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니체는 제국주의적 침략과 전쟁을 권하기도 한다. “세계에 아직 남아 있는 야만적이고 신선한 지역의 주인이 되고 무엇보다도 나 자신의 주인이 되려 하자. (…) 모험과 전쟁을 회피하지 말고 최악의 경우에는 죽을 각오를 하자. (…) 유럽의 주민 중 4분의 3만큼이 빠져나가면 좋을 것이다.”
지은이는 니체가 노동자들을 노예로 두어야 한다고 생각했음도 상기시킨다. 니체는 노동자들을 교육하고 조직하는 것이 강자의 지배를 무너뜨리는 일이라고 보았다. “목표를 원한다면 수단도 원하지 않으면 안 된다. 노예를 원하면서 노예를 주인으로 교육한다면 바보가 아닐 수 없다.” 니체의 이런 반민중적·반여성적·반민주적 발언들은 다음과 같은 말로 요약된다. “오늘날은 소인배들이 주인이다. 여인의 근성을 지닌 자, 하인의 피를 타고난 자, 그리고 누구보다도 천민 잡동사니, 이제 그런 자들이 인간의 온갖 숙명 위에 군림하려 드니, 오, 역겹도다! 역겹도다! 역겹도다!”
지은이는 애초 독일정신을 찬양했던 니체가 1871년 이후 반독일로 돌아섰던 것도 독일에서 민주주의가 번지는 데 실망한 결과라고 해석한다. 아리아인의 지배자 정신을 체현해야 할 독일이 자신의 정신을 배반했다고 보았다는 것이다. 많은 ‘탈근대적’ 니체주의자들이 니체의 반독일주의를 인종주의·국가주의·군국주의에 대한 니체의 반대를 뜻한다고 보는 것과 전혀 다른 관점이다. 지은이는 니체주의자들이 니체의 이런 본모습을 의도적으로 무시하거나 회피한 채로 니체의 몇몇 발언에 기대 그를 민주주의·페미니즘·급진주의의 새로운 대안으로 삼는 것은 억지스러운 일이라고 비판한다. 니체를 여과 없이 찬양함으로써 반민주적인 엘리트주의자·귀족주의자 니체가 활보할 수 있도록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지은이가 이 책에서 가장 힘주어 강조하는 지점이다.(고명섭 기자)
08. 09. 05.
P.S. 찾아보니 니체와 하이데거 전공자인 박찬국 교수의 <니체, 인간에 대해서 말하다>(철학과현실사, 2008)도 지난 여름에 나온 책이다. '병든 인간 건강한 인간, 니체의 잠언과 해설'이 부제인데, 니체 혐오가가 아닌 니체 애호가의 책이긴 하지만 '잠언의 철학자, 니체' 또한 나로선 별로 흥미를 갖게 되지 않는다. 타이틀로만 보자면, <니체의 체계(Nietzsche's System)>(http://books.google.co.kr/books?id=XATb3iOXQVcC&dq=nietzsche's+system&pg=PP1&ots=Vl2TL3EczX&sig=1bdakrETQzG73R4-iHnT_mczznI&hl=ko&sa=X&oi=book_result&resnum=1&ct=result) 같은 책이 내가 읽고 싶은 책이다(그래도 뭔가 새로운 걸 말해주는 책들 말이다). 니체에 관한 지안니 바티모의 책들이나 읽는 게 그냥 더 나을 듯도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