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삭 바벨의 비극적 삶을 모티브로 한 픽션 <사라진 원고>(난장이, 2009)도 그렇지만, 이번주에 나온 책에는 역사의 희생자들을 다룬 책이 도드라진다. 중국 작가 리궈원의 <중국문인의 비정상적인 죽음>(에버리치홀딩스, 2009)도 그렇고, 문인/지식인의 죽음을 다룬 건 아니지만 여순사건을 다룬 김득중 박사의 <빨갱이의 탄생>(도서출판선인, 2009)도 그렇다. 관련기사를 모아놓는다.  

한국일보(09. 06. 20) 사마천은 궁형, 이백은 투신… 그들은 왜?

고래로 중국의 지식인들은 '사농공상'의 맨 앞자리에 그 이름이 놓였다. 때로 사당에 위패로 모셔져 사람들의 절을 받을 수도 있었다. 잘하면 문선왕(文宣王)이라는 시호를 받은 공자처럼 명예로나마 왕 대접을 받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정치병에 걸린 문인은 약도 없다'는 말이 있다던가. 지식인들은 명예라는 상징권력에 좀처럼 만족하지 못하고 호시탐탐 정치권력을 탐했다. 지식인들에게 정치권력이란, 먹고 싶지만 입천장이 델까 두렵고, 안 먹자니 좀이 쑤셔 못견디게 만드는 달콤한 독약이었던 셈.  

중국의 원로작가 리궈원(79)은 이 달콤한 독약을 마실까 말까 고민하며 속세와 탈속의 중간지대에서 끊임없이 방황했던 지식인들의 행태를 주목한다. 그 회색지대에서 최고권력자로부터 혹은 동료 문인들로부터 목이 베이고, 팔 다리가 잘리고, 허리가 끊기고 혹은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했던 지식인들의 비참한 말로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지은이는 한 무제의 심기를 건드려 궁형을 당한 사마천, 당 현종에 대한 용비어천가를 부르다 말년에는 줄을 잘못 서 감옥에 갇히고 결국 투신으로 생을 마감한 이백, 갑골문을 정리한 위업에도 불구하고 동료 문인과의 갈등으로 호수에 몸을 던진 청 말의 고증학자 왕궈웨이까지, 중국 지식인 36명의 죽음을 재조명한다.

문인들의 비극적 말로 가운데 가장 보편적인 것은 최고 권력자들에 의한 보복이다. 지은이는 중국사에 300명이 넘는 황제가 군림했지만 그 중에 지식인을 높이 평가하고 진정으로 대접한 현군은 단 한 명도 없었다고 말한다. 비교적 교양있는 축은 지식인들을 질투했고, 교양이 없는 자들은 지식인을 증오했으며, 반편이 같은 이들은 지식인들을 괴롭혔다는 것. 조조가 금주령을 발표하자 "요 임금은 술을 즐겼기 때문에 성현의 반열에 올랐다"며 공공연히 조조를 비꼬다 사형당한 공융, '명사(明史)'를 편찬해 이민족 정권의 약점을 건드린 죄목으로 청의 강희제에게 처형당한 장정롱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동료들의 질투로 목숨을 잃은 문인도 부지기수다. 사부(詞賦)에 능한 문장가이자 뛰어난 역사학자, 서예가, 작곡가로 동양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로 꼽히는 후한의 채옹이 그런 인물이다. 그의 죽음이 중국인들의 '참치통조림 법칙'과 연결돼 있다는 저자의 설명은 흥미롭다. 오랫동안 자급자족의 농경사회에 살아 경쟁에 대한 관념이 결여돼있는 중국인들은 "네가 나보다 나으면 얼마나 나으며, 내가 너보다 못하면 얼마나 못하겠냐"는 생각에 사로잡혀 평균적인 것을 생산하는 데 익숙하다는 것. 채옹은 너무나 특출했기 때문에 죽음을 당했던 인물이라는 것이다.

지은이는 지식인들에 정치보복을 일삼은 황제들이나 그들의 재주를 질투한 동료들을 비판하기도 하지만, 지식인들의 죽음은 권력에 대한 그들의 이율배반적 태도에 기인했다는 태도를 취하기도 한다. 문장가로 명성을 날렸지만 벼슬을 탐하다가 교수형을 당한 서진시대 육기의 죽음에 대해 그는 "글쓰기가 자신의 최대의 무기라면, 관직이 바로 자기자신에게는 최대의 약점"이었다고 분석한다. 그리고 지식인들에게 "어떤 종류의 유혹이든, 그것이 금빛이든, 은빛이든, 핑크빛이든, 심지어는 오색찬란하고 거대하고 아름다운 것일지라도 가능한 한 그것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현재 중국작가협회 명예위원인 리궈원은 1957년 공산당의 관료주의를 비판하는 소설을 내놓았다가 우파 작가로 낙인찍혀 문화혁명기에 철도 건설현장에 하방돼 20여년간 붓을 꺾어야 했던 인물. 그같은 경험이 권력과 지식인의 관계에 대한 그의 성찰에 무게를 더해준다.(이왕구기자)  

  

한겨레(09. 06. 20) '빨갱이’는 국민-비국민 가르는 이분법에서 태어났다

여순사건을 상징하는 사진 한 장이 있다. 학교 운동장처럼 보이는 넓은 공터에 주민 수천 명이 양쪽으로 패를 나눠 앉아 있다. 두 무리를 나눈 폭 3미터 남짓한 중간지대에는 무장 군인들이 삼엄한 경계를 펴고 있는데, 담장 뒤편 시가지에서 치솟는 검은 연기가 주민들이 맞닥뜨릴 운명의 가혹함을 예고하는 듯하다. 당시 <동아일보>를 통해 ‘피난민 수용소’로 소개됐지만, 실은 여수 진압 직후 여수 서국민학교에서 벌어진 좌익 협조자 색출 장면이다. 오른쪽에 모여 앉은 사람들은 부역 혐의자들로, 사진 촬영 직후 89명이 학교 뒤편으로 끌려가 즉결처분됐다. 운동장을 가로지른 중간지대는 양민과 혐의자의 편의적 구분선이 아닌, 삶과 죽음의 절대적 경계선이었다.

“진압군이 시가지를 점령한 뒤 가장 먼저 한 게 주민을 한곳에 모아놓고 ‘빨갱이’를 골라내는 일이었습니다. 경찰 생존자와 우익 인사들이 대열을 훑고 다니다 ‘저놈’ 하고 지목하면 그걸로 끝이었습니다. 주민들은 이것을 ‘손가락 총질’이라고 불렀어요. 그들을 기다리는 건 무자비한 몽둥이질과 총살, 참수형이었습니다.”

<‘빨갱이’의 탄생>을 펴낸 김득중(44)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는 여순사건의 핵심적 의미를 ‘대한민국 국민 만들기’에서 찾는다. 출범 두 달을 갓 넘긴 이승만 정부에 여순사건은 “대한민국 국민의 자격 조건”을 심사하는 계기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누군가를 ‘국민’으로 승인하는 것은 항상 ‘국민이 아닌 자’를 구분하고 배제하는 과정을 동반하는데, 이승만 정부한테 ‘비국민’은 ‘빨갱이’였다.

“빨갱이란 말은 일제 때부터 있었고, 해방공간에서도 공산주의자를 지칭하는 용어로 빈번하게 사용됐어요. 그런데 여순사건을 거치며 그 의미가 변합니다. 단순히 공산주의 사상을 가진 자가 아니라 ‘양민을 학살하는 살인마’ ‘같은 하늘 아래서 살지 못하는 인간 이하의 존재’라는 악마성을 획득하게 된 것이죠. 부역자 색출 작업이 벌어진 학교 운동장은 양민과 빨갱이, 인간과 비인간, 국민과 비국민을 준별하는 공간이었던 겁니다.”

물론 우익의 ‘빨갱이 사냥’은 봉기 기간 좌익이 벌인 학살행위가 빌미가 됐다. 실제 반군이 장악했던 여러 지역에서 반군과 좌익세력에 의해 경찰과 우익 인사들이 대량으로 살해됐다. 하지만 글쓴이는 좌·우익의 살상행위를 동일선상에서 비교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말한다. 학살의 규모나 대상, 지속 기간에서 차이가 뚜렷하기 때문이다.  

“여수지역사회연구소 조사를 보면, 전체 희생자 1만여명 가운데 95%가 국군과 경찰에 의해 죽었습니다. 지방 좌익과 반군이 죽인 사람은 500명 정도예요. 그리고 행위의 정당성 여부를 떠나 좌익의 학살은 표적이 분명했습니다. 친일 경찰과 한민당 세력, 좌익 탄압에 앞장섰던 청년단원들이었지요. 그런데 우익은 달랐어요. 반란을 일으킨 14연대 군인들과 반군 점령기에 인민위원회 활동을 한 남로당원뿐 아니라 그들에게 밥 해준 사람, 분위기에 휩쓸려 부화뇌동한 학생, 반군이 남기고 간 소지품을 갖고 있는 모든 사람이 변변한 자기변론의 기회조차 얻지 못한 채 살해당했습니다. 복수심 때문이라고 보기엔 정도가 지나쳤습니다.”  

실제 희생자 중에는 평소 경찰과 사이가 안 좋았던 검사, 좌익에 온정적이었던 여중 교장 등 우익 명망가도 있었다. 이들은 반군에 협조한 증거가 없었는데도 심증만으로 잡혀가 처형됐다. 전 시민을 적으로 간주하는 초토화 진압작전의 산물이었다. 그들은 빨갱이라서 죽은 게 아니라, 죽은 뒤에 빨갱이가 된 경우였다.

이런 ‘빨갱이 만들기’에는 언론과 문인들의 구실이 컸다는 게 글쓴이의 분석이다. 실제 신문들은 정보 획득의 통로가 제한된 상황에서 정부와 진압군의 발표 내용, 시중에 떠도는 소문들을 여과 없이 보도했고, 시찰단 자격으로 현지를 방문한 시인과 소설가들 역시 공산주의자의 비인간적 잔인성을 부각시키는 글을 경쟁적으로 발표했다. 이를 통해 ‘빨갱이’란 기표에 담긴 ‘살인마’ ‘비인간’의 이미지는 국민의 의식회로 안에 견고하게 자리잡았다. 이제 대한민국 국민이 되려면 반공의식을 내면화해야 했고, 이렇게 내면화한 반공논리는 대한민국 60년사를 통해 지배권력이 위기를 맞을 때마다 빨갱이라는 유령을 어김없이 불러냈다.

“인터넷에서 ‘좌빨’(좌익빨갱이)이란 표현을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누리꾼들을 볼 때마다 가슴이 서늘해집니다. 대북 강경책에 반대하고 집회·시위와 사상의 자유, 노동자의 파업권을 옹호한다는 이유로 거침없이 빨갱이 딱지를 붙이려 드는 이들의 사고 구조에는 여전히 양민과 빨갱이, 국민과 비국민을 나누는 이분법이 작동하고 있습니다. 여순사건은 아직도 진행형인 셈입니다.”(이세영기자)  



» 1948년 10월26일 여수 서국민학교에서 벌어진 좌익 협조자 색출 장면. <호남신문> 이경모 기자가 찍었다. 같은 장면을 당시 <동아일보>는 피난민 수용소로 소개했다. 

여순사건은 ‘반공국가’ 건국공신
1948년 10월19일 제주 4·3사건 진압을 위해 전남 여수에 주둔중이던 국방경비대 14연대 군인들이 제주 출병을 거부하며 일으킨 무장반란. 지방 좌익세력과 주민들이 봉기에 호응해 가세하면서 여수와 순천, 광양, 구례, 보성 등 전남 동부지역으로 파급됐다. 당시 정부는 북한과 남로당의 지령에 따른 계획적 반란으로 규정했으나 최근 연구 결과 남로당 중앙조직이나 북한과는 무관하게, 숙군(肅軍) 움직임에 위기를 느낀 14연대 내 남로당 조직원들이 우발적으로 일으킨 사건으로 확인되고 있다. 군인봉기가 광범위한 대중운동으로 확산될 수 있었던 배경으로는 친일파 재등용과 토지개혁 지연, 단독정부 수립에 따른 사회·정치적 불만의 누적 등이 꼽힌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이승만 정부는 국가보안법을 제정하고 강력한 반공국가를 구축했다. 조정래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의 배경이기도 하다.  

09. 06.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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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요정 2009-06-20 09:51   좋아요 0 | URL
서글픈 역사입니다. 친일 청산이 이루어지지 못한 게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네요.. 책 두 권 모두 읽어보고 싶어집니다.^^

로쟈 2009-06-21 10:26   좋아요 0 | URL
아직도 후유증을 앓고 있는 것이죠.--;

노이에자이트 2009-06-20 15:07   좋아요 0 | URL
남부군을 쓴 이태가 유작으로 남긴 실록이 <여순병란>이었습니다.14연대가 반란을 일으켰다고 여순 병란이지요.

로쟈 2009-06-21 10:27   좋아요 0 | URL
역사로서 제대로 조명되면 좋겠어요...
 

스탈린 시대에 숙청된 러시아 작가 이삭 바벨(1894-1940)의 삶을 모티브로 한 소설이 번역돼 나왔다. 트래비스 홀랜드의 <사라진 원고>(난장이, 2009). 출판사 소개를 잠시 옮겨보면, "<사라진 원고>의 모티프가 되어준 이삭 바벨. 그는 유대인 출신 러시아의 작가다. 그가 쓴 <적군기병대>는 20세기의 가장 참혹했던 전쟁 가운데 하나인 러시아-폴란드 전쟁의 단면을 40개의 단편으로 그려낸 소설이다. 바벨은 1920년 6월부터 9월까지 약 3개월 가량 부조니 장군의 제1기병대에 배속되어 우크라이나의 갈리치아 일대에서 복무하는데, 이 시기의 경험을 바탕으로 쓰인 소설이 바로 <적군기병대>이다. 이 소설은 1926년 모스크바에서 출간되었고, 곧이어 독일어 번역판이 나오기도 했는데, 이후 나치시대에 이 책은 금서목록에 오른다. 1920년대 이삭 바벨은 소련에서 가장 인기있는 작가 가운데 한 명이었다."  

<적군기병대>는 국내에 <기병대>라고 번역 소개됐다. 오래전에 '소련동구문학전집'(중앙일보사)의 한권으로 출간됐었고, 작년엔 발췌본이 역사 <기병대>(지만지, 2008)란 제목으로 나왔다. 20세기 러시아문학사의 중요한 작가이지만(특히 '장식체'라는 문체가 유명하다), 한국어로는 마르크 슬로님의 <소련의 작가와 사회>(열린책들, 1985), 마샬 버먼의 <맑스주의의 향연>(이후, 2001) 등에서 간략한 전기적 스케치를 읽을 수 있는 정도다. 그의 단편 전집과 평전 정도는 소개되면 좋겠다. 개인적으로 절친했던 친구의 전공이 '바벨'이었고, 그가 남긴 번역 원고도 갖고 있다. 손을 보아서 책을 내기로 했는데, 차일피일 미뤄져 안타까운 마음도 든다. 살아있다면 <사라진 원고>의 출간을 꽤나 반가워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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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Archivist's Story (Hardcover, Large Print)
트래비스 홀랜드 지음 / Thorndike Pr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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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원고
트래비스 홀랜드 지음, 정병선 옮김 / 난장이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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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주의의 향연- 컬리지언총서 22
마샬 버먼 지음, 문명식 옮김 / 이후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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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크 바벨 지음, 김홍중 옮김 / 지만지고전천줄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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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9-06-19 23:43   좋아요 0 | URL
중앙일보사에서 나온 문학전집 시리즈 중 동구문학 시리즈만 없어요.제 것은 삼진사 전쟁문학전집(1972)에 있던 김학수 번역본입니다.장편이었으면 더 좋았을텐데...하는 생각이 있어요.
우리나라에는 폴란드는 그저 강대국들에게 당하고만 사는 나라라는 편견이 있는데 폴란드-소비에트 전쟁을 안다면 생각이 달라질 거에요.그 전쟁도 그렇고 1차대전 종전에서 2차대전 직전의 폴란드는 좀 동정받기 힘든 짓을 많이 했죠.

로쟈 2009-06-20 08:38   좋아요 0 | URL
전쟁문학전집은 처음 들어보는데요.^^ 바벨은 '장편소설'을 쓸 수 있는 역사적 전망을 갖지 못했어요. 그와 동시대 작가들이 대부분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게 자연스럽죠...

옥탑방 2009-06-21 22:21   좋아요 0 | URL
이삭 바벨의 <적군 기병대>를 단편으로 분류하는 것도 좀 애매할 것 같습니다. 어떤 면에서 그건 연작이라고 해야 할 듯 하거든요. 마치 <난쏘공>처럼.

로쟈 2009-06-21 22:38   좋아요 0 | URL
네, 단편들로 구성된 연작소설집이죠...

craykim 2009-06-23 10:29   좋아요 0 | URL
마사까, 옮긴이 정병선님이 그 정병선님은 아니겠죠?
좋은 글 잘 보고 있습니다

로쟈 2009-06-23 22:32   좋아요 0 | URL
전문번역자 정병선씨입니다...
 

이번달 <고교 독서평설>에 실은 글을 옮겨놓는다. 니콜라이 고골을 다룬 '갑론을박' 꼭지다. 당초엔 이번 봄에 <외투>에 대한 논문도 쓰려고 했으나 여러 가지 사정을 실현되지 못해 아쉽다. 탄생 200주년을 맞은 작가를 위해서 뭔가 더 할일을 찾아봐야겠다...  

고교 독서평설(09년 6월호) 보이는 웃음을 통해 보이지 않는 눈물을 흘리다

러시아 근대 문학의 토대를 닦은 작가, 고골
“날 좀 내버려 둬요, 왜 그렇게 나를 못살게 구는 거요?”
이 한 대목만 가지고 작가와 작품을 떠올리기는 어렵겠지만, 러시아 작가 니콜라이 바실리예비치 고골(1809~1852)의 걸작 단편 「외투」(1842)를 읽고 난 다음이라면 이 대목을 잊기도 어렵다. 이번 달에는 러시아 문학에서 가장 수수께끼 같은 작가로 불리는 고골의 문학 세계를, 그의 대표작 「외투」를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사실 동기는 충분하다. 올해는 알렉산드르 푸시킨(1799~1837)과 함께 러시아 근대 문학의 토대를 닦은 고골이 태어난 지 200주년이 되는 해이기 때문이다. 고골은 과연 러시아 문학사, 더 나아가 세계 문학사에 어떤 족적을 남겨 놓았을까? 그의 문학은 어째서 아직도 많은 수수께끼를 남기고 있는 것일까?   



‘웃음’과 ‘공포’의 환상적인 조화
고골은 1809년 4월 1일에 러시아의 지배 아래 있었던 우크라이나의 한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말하자면 그 당시엔 ‘소러시아’라고 불린 우크라이나가 그의 출신지이고 고향이다. 그가 처음 문학적 명성을 얻게 된 작품집이 그곳 민담들을 소재로 한 <지칸카 근촌 야화(夜話)>(1831)인 것은 그런 배경을 갖고 있다. 고골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 지역의 소지주 출신이었다. 어린 나이에 결혼하여 고골을 낳기 전 두 차례나 사산(死産)을 경험한 어머니는 자신의 불행을 다독이기 위해 더욱 독실한 정교회 신자가 되었다. 그리고 어렵게 얻은 맏아들의 이름을 교회 이름을 따서 ‘니콜라이’라고 지었다.   

교회를 열심히 다니면서 늘 기도를 드리던 어머니의 신앙은 미신적인 성향이 강했다. 아들을 각별히 사랑하면서도 그녀가 어린 고골에게 입버릇처럼 들려준 이야기는 주로 최후의 심판과 지옥의 고통에 관한 것이었다. 이런 미신적이고 광신적인 신앙을 물려준 어머니와 달리, 아마추어 극작가이자 연극 애호가였던 아버지 바실리 고골은 아들에게 어릴 때부터 문학과 연극에 대한 열정을 심어 주었다. 직접 대본을 쓰고 연출을 맡고 배우로 무대에 서기까지 했던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고골은 연극에 대한 관심과 문학적 감수성을 키워 나갔다.  

이렇듯 다소 이질적인 부모의 영향은 이후 작가 고골의 삶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러시아 사회의 속물성과 관료주의적 폐해를 풍자적이면서도 유머러스하게 묘사함으로써, 고골은 뛰어난 문학적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의 재능이 진지한 구원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적합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고통받았다. 덕분에 우리가 얻게 된 것은 ‘너무도 경쾌하고 코믹한 고골’과 ‘너무도 진지하고 우울한 고골’이라는 서로 상반되는 작가의 이미지다. 그는 자신의 재능과는 잘 맞지 않는 과제, 혹은 사명을 스스로에게 부과함으로써 고통을 자초한 것은 아니었을까.    

가령 고골 창작의 전환점이 된 희곡 <검찰관>(1836)을 들여다보자. 이 작품은 지방 여행 중에 돈이 떨어져 여관에서 오도 가도 못하게 된 한 하급 관리 흘레스타코프가, 수도 페테르부르크에서 온 검찰관으로 오인되는 바람에 벌어지는 한바탕 소동을 그린 5막 희극이다. 흘레스타코프가 떠나고 난 뒤에야 자신들이 속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시장과 지역 유지들은 분통을 터뜨리는데, 바로 그때 진짜 검찰관이 도착했다는 전갈을 듣는다. 무대 위의 모든 인물들이 경악과 함께 몸이 화석처럼 굳어져 버리고 관객은 폭소를 터뜨리는 것으로 이 작품은 막을 내린다. 한데, 고골은 지문에서 이 마지막 장면을 모든 배역이 거의 1분 30초가량 굳어 버린 자세를 취하고 있는 ‘정지 장면’으로 처리하도록 요구했다. 그리고 실제 공연에서 이 요구가 잘 지켜지지 않자 화를 내기도 했다. 그렇다면 작가는 어떤 효과를 거두기 위해 그토록 이 장면을 강조한 것일까? 

<검찰관>에는 “제 낯짝 비뚤어진 줄 모르고 거울만 탓한다.”라는 러시아 속담이 제사로 쓰였다. 고골은 자신의 작품을 일종의 ‘거울’로 간주했다. 관객들은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우스꽝스러운 소동을 보면서 마음껏 웃음과 조롱을 퍼붓는 동시에, 마치 거울처럼 관객 자신의 모습을 비추는 정지 장면에 섬뜩함을 느끼게 된다. 고골은 관객이 그런 깨달음을 얻기를 기대했고, 그 깨달음을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시간이 1분 30초라고 본 것이다. 따라서 이 장면은 처음엔 웃음을 유발하지만, 차츰 그 웃음은 자신도 무대의 속악한 인물들과 다를 바 없다는 깨달음과 더불어 공포로 바뀐다. 고골의 의도는 그 공포와 함께 관객들을 도덕적인 정화(淨化)와 참회에 이르도록 하는 데 있었다. 얼핏 상반되어 보이지만, ‘웃음’과 ‘공포’는 그런 점에서 고골 문학의 핵심적인 구성 요소다. 곧 그의 이야기들은 기본적으로 우스운 이야기면서 동시에 무서운 이야기다

충동의 인간에서 욕망의 인간으로 - 「외투」
머리가 벗겨진 중년 9급 관리의 불행한 이야기를 다룬 「외투」의 경우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일단 작품은 기본적으로 코믹하며 언어유희적이다. 주인공의 이름부터가 그런데, ‘아카키 아카키예비치’가 그의 이름과 부칭이고, ‘바슈마크(구두)’라는 말에서 유래한 ‘바슈마치킨’이 성(性)이다. ‘아카키예비치’가 부칭이라는 사실은 아버지의 이름도 ‘아카키’였다는 걸 뜻한다. 곧 아버지도 아카키고 아들도 아카키다. 새로 태어난 아이의 이름 후보들이 모두 마음에 들지 않자 그의 어머니는 그냥 남편의 이름을 아이에게 물려주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런데 이 ‘아카키 아카키예비치’란 이름에서 반복되는 ‘카카(kaka)’란 말이 러시아 어에서는 ‘똥’이나 ‘응가’를 뜻하는 유아어이기도 해서, 주인공의 이름을 들을 때마다 러시아 독자들은 묘한 재미를 느끼게 된다. 이 가련한 주인공은 동시에 가장 우스꽝스런 주인공이기도 한 셈이다. “세례를 받을 때 아기는 울어 버렸고, 마치 9급 관리가 될 것을 미리 예상이라도 한 듯 얼굴을 찡그렸다.”    

러시아 관료제는 18세기 초반 표트르 대제(1672~1725) 시대에 관료제 개혁 이후 14등관제로 개편되었으며, 9등관(9급)은 가장 대표적인 하급 관리에 속했다. 서류를 정서하는 일이 주된 업무인 아카키 아카키예비치 역시 9급 관리였다. 그는 사무실에서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존재이며, 경비조차도 그가 지나갈 때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심지어는 그저 파리 한 마리가 지나가는 정도로 여겼다. 같이 근무하는 동료들은 그를 조롱하거나 짓궂게 놀려 댔다. 아카키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지만 그의 팔까지 건드리며 정서를 방해할 때는 “날 좀 내버려 둬요, 왜 그렇게 나를 못살게 구는 거요?”라고 애처롭게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얼떨결에 남들을 따라서 아카키를 조롱하던 젊은 직원은 이 말을 듣고서 뭔가에 찔린 듯이 움찔했다. 거기엔 “나도 당신들의 형제요.”란 소리도 반향으로 묻어났다. 그 뒤 이 젊은이는 평생 동안 인간의 잔인함에 몸서리를 쳤다고 이야기의 화자는 전해 준다.     

사실 고골의 「외투」는 러시아 문학에서 가장 유명한 단편이면서, 또 가장 많이 오해받은 작품이다. 이 작품을 박애주의를 표방한 것으로 이해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그러한 시각에서는 작가 고골이 이 소설에서 아카키 아카키예비치 같은 ‘작은 인간’에 대한 연민과 동정을 드러내고 있다고 본다. 그리고 그 근거로 “나도 당신들의 형제요.”라는 구절을 자주 인용한다. 하지만 이런 시각은 주인공이 자신의 일에서 발견하고 있는 지극한 즐거움을 간과하는 경향이 있다. 그에게 정서는 단순한 직무가 아니라 어떤 사랑의 대상이었고, 자족적인 즐거움의 세계였다. 화자는 이렇게 말한다. “그처럼 자신의 일에 충실한 사람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단순히 열성적으로 일한다고 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아니, 그는 애정을 갖고 근무했다. 이 정서하는 일에서 그는 다양하고 즐거운 자신만의 어떤 세계를 발견한 것이다.”  

아카키는 이러한 자기만의 세계에 몰입해 있는 인물이었다. 그에게는 정서하는 일 외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아서, 옷차림 따위에도 전혀 신경 쓰지 않았고 거리를 걸으면서도 오로지 자신의 필체로 쓴 글씨들만을 떠올렸다. 근무가 끝나고 집에 돌아와서도 그는 수프와 양파를 곁들인 쇠고기 요리에 파리가 붙었거나 말거나 무슨 맛인지도 모른 채 간단히 요기만 하고는 다시 정서를 시작했다. 서류를 정서하기도 하고 취미로 필사본을 만들어 두기도 했다. 일에 대한 열정만을 가지고 본다면 아카키는 5급 직책을 하사받을 만도 한 인물이었다. 말하자면 아카키에게는 두 가지 모습이 있었다. 혹은 두 명의 아카키가 있었다. 평소의 9급 관리 아카키와 5급 관리의 열정을 갖고 정서할 때의 아카키. 정서하다가 자신이 좋아하는 글자들이 나오면 너무 기뻐하는 모습은 마치 딴 사람처럼 보일 정도였다. 이렇듯 “즐거운 자신만의 어떤 세계”를 갖고 있는 인물이 동정의 대상이 된다면 좀 이상하지 않을까? 

정신 분석학의 용어를 사용하자면 정서하는 일에서 지극한 만족감을 얻는 아카키는 ‘충동’에 의해 지배되는 인물이다. 충동(drive)은 어떤 대상을 끊임없이 손에 넣으려고 애쓰는 욕망(desire)과는 달리 어떤 대상의 주위를 맴도는 데서 만족을 얻는다. 곧 충동의 목적은 주체와 대상 간의 순환적인 경로를 반복하는 것이다. 아카키가 정서하는 일에서 느끼는 만족은 바로 이러한 충동에서의 만족이다. 이런 성격의 만족에는 외부적 현실이 필요하지 않으며, 따로 방해자만 없다면 언제까지라도 지속될 수 있다. “400루블의 급료로 자신의 운명에 만족하며 살아가던 한 인간의 평화로운 삶은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고 아마 또 그렇게 순조롭게 말년을 맞이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카키의 사회적 고립과 소외는 결코 불운하거나 불행한 것이 아니다. 그렇게 보는 시각은 단지 외부적 시점을 투사한 것에 불과할 수도 있다. “날 좀 내버려 둬요, 왜 그렇게 나를 못살게 구는 거요?”란 아카키의 항의는 그에 대한 조롱뿐만 아니라 동정에도 적용될 수 있을 듯싶다. 그리고 그 항의의 또 다른 대상이 될 만한 것이 있으니 바로 페테르부르크의 겨울에 사납게 휘몰아치는 북풍이며, 이것이 그의 가장 강력한 적이기도 하다. 고골 스스로가 처음 페테르부르크에 상경했을 때 추위 때문에 크게 고생한 경험이 있으므로 남의 일만도 아니라고 해야겠다. 불행하게도 아카키의 낡은 외투는 더 이상 바람막이가 되어 줄 수 없어서, 그는 재봉사 페트로비치의 강력한 권유에 따라 새 외투를 장만하는 데 몰두한다. 곧 페테르부르크의 겨울 추위는 아무런 결핍도 없이 자기만의 세계에 만족해 있던 아카키 아카키예비치를 바깥으로 끄집어내어 ‘외투 없는 존재’로 새롭게 규정한다.  

새 외투를 욕망하게 되면서 아카키는 전혀 다른 인물로 변모한다. 그는 외투 값을 장만하기 위해서 지독한 내핍 생활을 감수하며 습관처럼 저녁을 굶는다. 요컨대, 미래의 행복을 위해서 그는 현재의 만족을 기꺼이 포기하고 유예한다. “그 대신에 미래의 외투에 대한 끝없는 이상을 머릿속에 그려 보며 정신적인 포만감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무엇인가가 결여된 상태에서만 작동하기 시작하는 욕망은 근원적으로, 그리고 궁극적으로 충족될 수 없다. 새 외투를 장만하여 행복해한 것도 잠시, 아카키가 곧 불량배들에게 자신의 외투를 강탈당한 것은 이러한 욕망의 메커니즘을 단적으로 보여 준다. 그는 파출소장과 고위층 인사를 찾아다니며 외투를 되찾기 위해 애를 쓰지만, 관료제 사회의 몰인간적이고 사무적인 습성에 젖은 인물들에게 차별 대우만을 받고서 앓아누웠다가 결국 세상을 떠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관료제 사회의 사무적인 무관심이 아카키를 죽음으로 몰고 갔다고 말할 수 있을까? 보다 근본적인 원인을 찾자면, 아카키가 충동의 인간에서 욕망의 인간으로 변신한 데 있을 것이다. 그리고 물론 그 변신의 원인은 ‘페테르부르크의 추위’였다. 



피할 수 없는 욕망에 대한 공포
고골은 욕망을 가진 인물들, 곧 자신의 신분과 직분을 벗어나서 더 높은 사회적 지위와 숭고한 가치를 갈망했던 인물들이 파멸하는 이야기를 자주 들려주었다. 이러한 욕망이 두려운 이유는 그것이 그 주체를 떠나서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죽어도 욕망은 죽지 않는다고나 할까. 「외투」는 죽은 아카키의 유령이 자신의 외투를 찾기 위해 배회하다가 고위층 인사의 외투를 강탈해 간다는 내용으로 마무리된다. 그런 점에서 「외투」는 욕망의 섬뜩한 공포까지도 되새기게 해 주는 작품이다.  

결코 충족되지 않는 것이 욕망인 만큼 욕망의 세계에서 구원이란 없다. 때문에 고골의 세계에서는 욕망에 빠진 인간에게 구원의 계기가 필요하다. 하지만 고골은 자신의 문학적 재능 안에서는 그러한 계기를 찾을 수 없었다. 고골 또한 자신의 ‘외투’(창작의 의미)를 강탈당한 ‘불운한 아카키 아카키예비치’가 아니었을까. 

09. 06.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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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고골의 '외투'가 말해주는 것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09-12-19 10:26 
    이번주 주간학구의 '지식인의 서고' 꼭지에 실은 글을 옮겨놓는다. 짧은 분량의 글이어서 고골의 대표작 <외투>에 대해 간단히 적었다(고교 독서평설에서 한번 다룬 적이 있다는 걸 지금 깨달았다!).    주간한국(09. 12. 17) 우리가 욕망 없이 살 수 없다면…  대학에서 러시아문학을 강의하기 때문에 매학기 고정적으로 읽는 작품들이 있습니다. 이른바 ‘러시아 명작’들입니
 
 
반딧불이 2009-06-20 0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코>,<외투>를 하급관리를 통해 관료제를 비판하는 것으로만 이해했었는데, 욕망과 관련지으니 또 다른 이야기가 되는 것 같아요.

로쟈 2009-06-20 08:36   좋아요 0 | URL
네, 그게 제 요점이에요.^^

목동 2009-07-14 2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소설을 낭독해주는 성우의 목소리를 통해 읽었습니다. 낭독자의 생생한 목소리에 매료된 경우라지만, 하급관리로서 그의 소통방법은 정서입니다. 그에게 유일한 위안입니다. 같은 형제의 꿈이 공익성이 없다고 강탈당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고골의 <외투>에서 태어났다는 말이 생각납니다. 틀에 안주한 하급관리지만 그것이 무너지면 자신을 잃게 되던데요.

로쟈 2009-06-21 10:31   좋아요 0 | URL
언제 낭독까지 나왔었나 보군요.^^

돈케빈 2009-06-21 06: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친구와의 서신교환선>을 읽고.. 고골을 러시아 문학의 김구라로 임명하기로 했습니다. ^^;

로쟈 2009-06-21 10:30   좋아요 0 | URL
'김구'로 읽을 뻔했네요.^^;

지별 2009-06-22 15: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골의 3부작 이런식으로 연극을 통해서 그를 만났는데...연출도 독특하고 때론 홀리거나 졸리거나~ 그래도 (뜬금없이) 체홉이 좋아요~

로쟈 2009-06-23 22:29   좋아요 0 | URL
변변찮은 인물들을 다룬다는 점에서 고골과 체홉이 상통하는 면도 있습니다.^^
 

'로쟈와의 인문학 토크'(http://blog.aladin.co.kr/culture/2878079)가 예정돼 있는 날이다. 저녁시간인데, 오후에는 무슨 '토크'를 해야할지 궁리를 잠시라도 해봐야겠다(질문에만 답하면 되는 것인지?) 생각해보니 오늘로써 책이 나온 지(책을 받아본 지) 딱 한 달이 되었다. 이미 '적응'이 되어서 '새로 나온 책'이라기보다는 '원래부터 있던 책'이란 인상마저 든다. 아직 많은 리뷰를 접해보지는 못했지만, 반응 또한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진 않는다(책은 좀 어렵다는 평과 생각만큼 어렵진 않다는 평 사이에 있다). 어떤 눈높이에서 독자를 만날 수 있는지 확인해보는 계기랄까. 눈에 띄는 언론리뷰들을 대충 스크랩해놓았는데, 하나 빠진 것이 있어서 마저 옮겨놓는다. 기사의 경쾌한 속도감이 마음에 든다.  

  

대학내일(09. 05. 29) 로쟈는 읽는다, 고로 로쟈는 존재한다 

인문학 책을 왜 읽어야 하느냐고 물으신다면, 이렇게 답하고 싶다. “사람 잡지 않기 위해서.” 문학 책을, 경제학 책을, 사회과학 책을, 실용서를 왜 읽어야 하느냐고 물으신대도 답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고, 사고가 빈약할수록 주워듣거나 알고 있는 일부 사실만으로 섣불리 판단할 수 있으므로. 몸의 건강을 위해서 고른 영양소를 섭취하듯 정신의 건강을 위해서 책도 골고루 읽을 필요가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인문학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를 하나 더 꼽는다면 ‘생각하는 힘’을 키워주기 때문이 아닐까. 매주 소개하는 책들 중에는 개인적 취향이 담긴 것들도 있지만, 더러는 필요에 의해서 읽는 책들도 있다. 두툼하고, 각주의 압박에 한숨이 절로 나오고, 데리다·푸코 등의 철학자 이름이 친구라도 되는 양 자주 등장하는 책. 주로 인문서나 사회과학 책들의 특징인데, 그런 책들도 여러 권 읽다 보니 어느덧 ‘생각의 결’과 ‘생각의 망’이 촘촘해진 느낌이 든다.  

이번 주에는 한 인문학자의 서재를 들여다본다. 생각의 결과 망뿐만 아니라 폭까지 넓힐 수 있는, 세상을 저공비행하며 인문학적 지식으로 읽고, 보고, 담아내는 일명 ‘겉다리 인문학자’의 서재로 첫 걸음은 가볍게 Go!   

멀미 날 만큼 풍성한 호모 사피엔자의 서재 
로쟈는 누구인가?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는 한 인터넷 서점에서 ‘로쟈의 저공비행’이라는 이름의 블로그로 널리 알려진 ‘인터넷 서평꾼’이자, 대표적인 ‘인문학 블로거’이다. ‘로쟈’라는 이름을 듣고 흔히들 철학자 ‘로자 룩셈부르크’를 떠올린다는데, 본인의 말을 빌리자면 ‘로쟈’는 소설 ‘죄와 벌’의 주인공 ‘로지온 라스콜리니코프’의 애칭이라고 한다. 이 책은 로쟈라는 ID(필명)로 더 많이 알려진 저자가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글을 엮은 블룩(blook, blog+book의 합성어)으로, 1997년부터 2009년까지 쓴 글을 간추려 실은 것이다. 다시 로쟈의 말을 빌리자면, “너무 쉽거나 어렵지 않은 글, 너무 말랑하지도 딱딱하지도 않은 글”을 골랐다는데 인문학과 예술, 영화 등 장르를 넘나들며 펼쳐 보이는 로쟈의 박학다식함에 누군가는 “너무 어렵고, 딱딱하게”읽을 수도 있겠다.  

책은 다섯 개의 서재(카테고리)로 분류되어 있다. 첫 번째 서재 ‘걷어차야지만 자리에서 일어난다’에서는 로쟈가 들려주는 문학 이야기를, 두 번째 서재 ‘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이 있을까요?’에서는 로쟈의 예술 리뷰를, 세 번째 서재 ‘아, 이 겸손한 느릅나무들’에서는 로쟈의 철학 읽기를, 네 번째 서재 ‘내 머리는 불타고 있어요’에서는 로쟈의 지젝 읽기를, 마지막 서재 ‘내 울부짖은들 누가 들어주랴’에서는 로쟈의 번역 비평을 담고 있다. 각 서재에서 다루고 있는 주제들을 보면 알겠지만, ‘호모 사피엔자(Homo Sapienza)’라는 그의 별칭이 절로 떠오를 만큼 로쟈의 관심사는 무궁무진하고, 독서량 또한 엄청나다. 가볍게 첫 걸음을 내딛었다 서재 입구에서 입을 떡 벌리고 주저앉기 십상이다. 지식이 또 다른 지식으로 이어지고, 한 권의  책 이야기가 관련 분야의 여러 권의 책으로 뻗어나가기 때문이다. “‘어린 왕자’에 보면 지리학자가 사는 별이 나오는데, 그는 여행자들이 보고 온 내용을 책에 기록하기만 한다. 즉 그가 하는 건 편력이 아니라 기록이다. 나는 책들의 성좌, 문학과 사상의 ‘지도’를 작성하는 데 취미가 있다.”     

현상의 본질과 이면을 파고드는 인문학의 근성 때문인지 로쟈는 단어와 문장을 꾹꾹 짚어보며 글을 전개해 나간다. 그리고 거기에 시를 즐겨 읽는다는 ‘촉촉한’ 마음이 더해진다. 블로그를 통해 로쟈를 알게 되었다면 책으로도 한번 읽어보자. 그는 “스냅사진으로 찍은 걸 증명사진으로 내놓은 격”이라고 말하지만, 종이 책에는 천천히 음미하며 읽을 수 있는 행간의 매력이 있으니. 마지막으로, 로쟈에게 책은 무엇일까? “내 인생의 빛, 내 허리의 불꽃…나의 지옥이자 연옥이자 천국이며, 나의 연인이자 친구,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나의 무덤.”   

09. 06. 19. 

P.S. 로쟈에 대한 가장 흔한 선입견 중 하나는 '엄청난 독서량'이다. 가장 자주 듣는 질문도 "그 많은 책을 언제 다 읽으세요?"이니까 이게 꽤 단단한 선입견이다. 책에 실은 '독서문답'에서도 사정을 밝혀놓았지만 사실 집중해서 책을 읽을 시간이 별로 없고, 그게 개인적으로는 가장 큰 스트레스 가운데 하나이다(그러니까 '나는 읽는다 고로 존재한다'에 견주면 로쟈는 '가끔' 존재한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 잘 믿어주지도 않는다(간혹 실망한 표정을 짓기도 한다!). 그러니 그냥 "틈나는 대로 읽지요"라고 답하는 게 나을 듯싶다. 하긴 "읽고 쓰고 떠드는 일"로 치자면 대한민국 0.001%쯤은 될 듯하니 너무 빼는 것도 예의는 아니겠다. 단, 읽는 것 자체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 중요한 건 즐겁게, 악착같이 즐겁게 읽는 것이고, 또 그렇게 읽기 위해선 쓰고 떠들 필요가 있다는 것. 그런 걸 나름대로 널리 알린 '공로'가 있지 않은가 한다. '곁다리 책상물림' 로쟈에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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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19 10: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6-19 15: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6-19 16: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6-20 08: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Blanqui 2009-06-22 1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의외의 고차원적 시크 개그센스를 발휘하셨던 로쟈님..뵈어서 반가웠어요!

로쟈 2009-06-22 10:46   좋아요 0 | URL
참석하신 분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지 못해 좀 아쉬웠습니다. 나중에 어디서 뵈면 아는 체해주세요.^^
 

<창작과비평> 여름호에 실었던 글을 옮겨놓는다. 내가 청탁받은 내용은 글의 서두에 적었다. 인터넷상의 인문학활동에 대한 소략한 '보고'라고 볼 수 있겠다. 책이 눈에 띄지 않아서 최종원고를 긁어왔는데, 지면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고유명사 표기 등은 창비식 표기로 돼 있다.  

 

창작과비평(2009년 여름호) 인터넷은 인문학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나

내게 주어진 일차적인 과제는 인터넷 공간에서 다양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인문학적 활동의 의의와 문제점을 짚어보는 것이다. 인터넷 (우주)공간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활동을 조감할 만한 능력을 갖고 있지 않음에도 이런 과제를 떠안게 된 것은 주로 인터넷 공간을 중심으로 활동한다는 이유에서다. 그래봐야 인터넷상에 블로그(서재)를 갖고 있고, 한 인터넷 카페에 자주 글을 올린다는 것이 내세울 만한 활동 이력의 전부다. 치명적인 건 활동반경 바깥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서 두루 알지는 못한다는 것. 시간적인 제약과 능력상의 한계 때문이지만, 사실 두루 안다는 것 자체가 과연 가능하며 또 바람직한 것일까도 의문이다.   

학문의 전문화와 함께 인문학에서조차도 자신의 전공분야에 정통하다는 것의 이면은 흔히 타 분야에 대한 무지와 무관심이기 십상이다. 하지만 이러한 무지는 오히려 권장된다. 거꾸로 모든 분야에 두루 식견이 있다는 것이 ‘얄팍한 박식’과 동일시된다. ‘국가적인’ 석학이 아닌 다음에야 깊으면 넓지 못하고 넓으면 깊지 않다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인 통념 아닌가. 새로운 조어를 쓰자면 ‘인터넷 인문학’에 대한 시각도 그러한 통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듯싶다. 세계적인 석학 움베르또 에꼬(Umberto Eco)도 이렇게 말했다지 않은가. “인터넷에는 내게 필요한 정보가 없다.” 

물론 그렇게 말한 에꼬의 경우에도 잘 꾸며진 온라인 홈피를 갖고 있고, 일반 독자들은 그에 대한 다수의 정보와 지식을 인터넷을 통해서 얻을 수 있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인터넷은 단편적인 지식과 기계적인 정보의 대명사이자 표피적인 앎의 상징물이다. 가령, ‘신지식인’ 이후 지식인 사회에 당혹감을 안겨줌과 동시에 새로운 ‘놀림감’이 된 ‘네이버 지식인’을 도마에 올려놓을 수 있다. “다크써클 없애는 데 브로콜리가 효과적인가요?”나 “‘카노사의 굴욕’에서 카노사가 도대체 뭐죠?”등의 질문에 네이버 지식인은 신속하고도 유익한 답변을 제공해주지만, ‘그’는 아직까지 움베르또 에꼬 기호학의 특징과 의의에 대해서는 질문하지도 답해주지도 않는다. 물론 이런 질문은 올라와 있다. “움베르또 에꼬 지금 살아 있나요? 현존인물이에요?”   

하지만 이런 표피성이 과연 인터넷 공간 자체의 본질과 연관된 것일까? 그것이 ‘사용 공간’인 한에서 문제는 그 사용자들의 의지에 걸려 있는 것이 아닐까? 알다시피, 오늘날 대부분의 편지(메일)를 대신하고 있는 건 이메일이다. 전달의 신속성과 편이성에서 편지는 이메일을 따라잡을 수 없다. 물론 이메일 또한 ‘표피적’이며 보내는 이의 정서와 체온을 전달하는 데 ‘한계’가 있다. 하지만 이메일 사용자들은 그러한 한계를 다양한 방식으로 상쇄하거나 극복하려고 하지 다시금 예전의 편지로 돌아가려고 하지는 않는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메일의 단점보다는 장점과 효용이 더 크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정은 ‘학술 공간’으로서의 인터넷에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지 않을까. 

이미 인터넷 공간은 학술활동의 ‘변방’이 결코 아니다. 대부분의 학술행사 소식과 관련 정보들을 우리는 인터넷으로 접하고 또 공유하고 있다. 대부분의 학술저널이 온라인화됨에 따라 우리는 굳이 도서관에까지 찾아가는 발품을 팔지 않고도 집에 앉아서 관심 있는 주제의 논문들을 읽어볼 수 있다. 그러한 개방성과 공유성이, 말하자면 인터넷 공간의 최대 강점일 것이다. 비록 그것이 아직까지 원하는 만큼의 ‘깊이’를 충족시켜주지 못한다면, 문제는 인터넷에 있다기보다는 우리가 인터넷 공간을 활용하는 방식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니까 ‘온라인 인문학’과 ‘오프라인 인문학’의 대립은 임의적인 유사 대립이다.  

알려진 것처럼 국내에서도 각 대학마다 온라인 강좌 혹은 사이버 강좌가 상당수 개설돼 있다. 수강생이 강의 동영상을 보고 필요한 내용을 숙지한 후 온라인을 통해서 과제를 제출하고 평가받는 식이다. 그리고 이러한 온라인 강좌는 공익을 위해서 선용될 수도 있다. 예컨대, 미국 MIT에서 시작된 강의자료 공개가 점차 확산되고 있고, 유튜브는 하바드대학을 포함한 100여개 대학의 강의를 무료로 제공하고 있다. 비록 영어권 얘기이긴 하나, 학점만 인정받을 수 없을 뿐 누구나 온라인상에서 이름난 교수들의 강의를 들어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국내에서도 현재 몇개 대학이 학교 홈페이지를 통해서 강의 동영상을 시범적으로 일반에 공개하고 있다. 이러한 현실에 비추어본다면, 학술활동에서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구분이 과연 유효한 것인지는 의문이다. 둘은 분명 성격이 좀 다르지만 서로 모순적이라거나 대립적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것 아닐까. 각각의 장단점을 갖고서 서로를 보완해준다고 보는 게 더 타당하지 않을까.  

한걸음 더 나아가보면, 이러한 온라인 강의가 대학보다도 더 활성화돼 있는 쪽은 오히려 대학 바깥의 ‘재야’ 학술공간들이다. 철학아카데미나 연구공간 수유+너머, 문지문화원 사이 등에서 일반 시민을 대상으로 한 인문강좌를 오프라인에서 운영하고 있지만, 아무래도 대학생이 아닌 직장인과 주부들이 보다 편리하게 접근할 수 있는 형식은 온라인 강좌다. 가장 대표적인 온라인 인문학강좌 사이트인 아트앤드스터디(www.artnstudy.com)의 경우에, 유료강의를 듣는 회원만 현재 3만여명에 이른다고 하며, 이는 2001년 6월 서비스를 처음 시작했을 때 300여명과 비교하면 100배 이상 증가한 수치이다. 특이한 것은 대학에서는 폐강되기 일쑤인 철학강좌들이 이곳에서는 최고 인기강좌라는 점이다. 한겨레교육문화쎈터가 운영하는 한겨레e한터(e-hanter21.co.kr)도 300여 강좌에 이르는 인문학 관련 온라인 강좌를 제공한다. 전문 강사들 외에 대학의 현직 교수들도 다수 강의에 참여하고 있는 점이 특징적이다.  

인터넷은 이렇듯 다양한 인문학 강좌를 통해 누구나 인문교양과 지식을 쌓을 수 있는 통로이면서 또한 직접적으로 자신의 지식과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장이기도 하다. 흔히 ‘대중 지성’의 공간으로 지칭되는 온라인 커뮤니티들이 그러한 장으로서 활용되는데, 언론을 통해 널리 알려진 곳으로는 다음까페 비평고원(http://cafe.daum.net/9876)을 들 수 있다. 8000명이 넘는 회원을 거느리고 있는 ‘비평고원’에서 주로 활동하는 회원들은 국내외의 인문학 전공 대학강사나 대학원생들이지만 약사·회사원·군인 등 ‘비전공자’도 적잖게 참여하여 익명적 공간에서 인문학 전반에 걸친 비평과 담론들을 쏟아낸다.  

가령, 창비주간논평을 본딴 ‘화요논평’ 코너에 ‘언어현상학과 시차적 관점’에 관한 철학적 입론이 제시되는가 하면, 뇌물수수 혐의로 검찰의 조사를 받은 노무현 전(前)대통령이 “전두환, 노태우 전대통령의 반열에 올랐다”라는 홍준표 한나라당 원내대표의 시사적 발언이 어떤 함축적 의미를 갖는지 정밀하게 분석된다. ‘비평공간’ 같은 코너에서는 또 신간도서에 대한 소개와 서평이 올라오고, 하이네의 시가 가곡과 함께 자세하게 음미되기도 하며 베를린의 노동절 행사에 대한 현장르뽀가 ‘해외통신’이란 말머리를 달고서 당일에 게시된다. 이런 것이 ‘인터넷 인문학’이 강점으로 내세울 수 있는 현장성과 순발력이다. 모두 저널리즘이나 학술지면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일종의 ‘중간지대’의 담론이라 할 만하다.  

물론 전체 회원수에 비해 자발적인 글쓰기에 참여하고 있는 회원들의 수가 여전히 소수라는 점은 극복해야 할 문제이고, 인문교양과 학술담론의 대중화에 일조하고는 있지만 과연 새로운 학술담론을 창출할 수 있는 지적 ‘프론티어’의 공간도 될 수 있는가는 의문의 대상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러한 현재적 한계를 본질적인 한계로 간주하는 것은 성급한 일이 아닐까. 인터넷은 인문학 활동의 새로운 가능공간이지 미리 앞질러 그 한계를 예단할 수 있는 공간은 아니기 때문이다. 더구나 대학에서는 점점 홀대받고 있는 인문교양에 대한 사회적 수요가 아직도 적지 않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오프라인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긴 하나 노숙자 인문학과 CEO 인문학 ‘열풍’도 바로 떠올릴 수 있다).  

그러니 필요한 것은 “인터넷에는 내게 필요한 정보가 없다”고 말하기 전에 자신이 갖고 있는 정보와 지식을 인터넷 공간을 통해서 기꺼이 다수와 주고받고 공유하려는 ‘의지’를 우리가 갖고 있는지 자문하는 것이겠다. 한데, 그러한 의지를 만약 ‘제도권 인문학’ 혹은 ‘대학 인문학’ 종사자들이 갖고 있지 않다면 그건 혹시 그런 의지를 가질 ‘필요’가 없기 때문은 아닐까. 왜 필요가 없는가? 개인적으론 두 가지 원인을 지목하고 싶다. 하나는 소위 제도권 인문학이 근거하고 있는 물적 토대와 관련되고, 다른 하나는 그것이 그리고 있는 인문학의 상(象)과 관련된다.   

비록 전세계적인 현상이긴 하나 수년 전부터 제기된 한국사회 ‘인문학 위기’의 특수한 원인에 대하여는 모두가 어림짐작하고 있는 바가 있다. 서울대 철학과 백종현(白琮鉉) 교수의 지적대로(백종현, "한국 인문학 진흥의 길", 한국학술협의회 편 <인문정신과 인문학>, 아카넷 2007, 136면.), 1980년대 초반 대학의 입학 정원이 대폭적으로 늘어나면서 사회적 수요와 무관하게 인문학 계열 학과가 우후죽순으로 생겨났고 이에 따라 인문계열 졸업자들이 대량으로 양산된 점이 그것이다. 그로써 대학 졸업자들로 하여금 ‘인문학을 쓸모없는 것’이란 인식을 갖게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더 직접적인 위기의 원인은 대학이 아닌 대학원 졸업자의 초과 배출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당시 학과가 늘어남에 따라 교수 요원의 충원이 필요했고, 이는 학문후속세대에 대한 가수요를 낳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인문학 전공 박사의 수는 포화상태에 이르렀고 대학은 재정을 이유로 교수 충원비율을 최소화했다. 인문학이 ‘배고픈 학문’이란 이미지는 그렇게 해서 굳어진 것이 아닌지. 게다가 그러한 ‘배고픔’을 해결하는 방식으로 인문학 전공자들은 비록 공공성을 위해서 국가가 지원하고 육성해야 할 학문분야도 있지만, 인문학에 대한 새로운 수요를 창출하는 대신에 국가에 손을 내미는 ‘손쉬운’ 방법에 의존했다. 대학의 정규직 교수들은 강의에 정성을 쏟기보다는 논문 편수로 평가되는 연구업적에 더 공을 들였고, 비정규직 교수들은 자세를 한층 더 낮추어 대학 주변에 남는 일에 자족하거나 절망했다. 모두가 ‘지속가능한 인문학’의 새로운 물적 토대를 마련하는 일에 상대적으로 무관심했던 것은 아닐까? 여전히 읽을 만한 국내 인문서가 부족하고 아직 번역되지 않은 국외의 고전이나 교양서가 적지 않은 현실은 생각해볼 여지를 남긴다.    

거기에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인문학인지에 대한 고민도 필요하다. 백종현 교수는 “교양과목으로서 인문학은 모든 시민이 익혀야 하지만, 한 사회에 인문학 전공자는 매우 탁월한 소수이면 족하다. 그리고 그 탁월한 소수는 사회에서 우대되어야 한다.”(146면)고 말하면서 ‘인적자원 관리에 있어서 공정성과 수월성’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대로 따르자면 탁월한 국가석학 몇명의 인문강좌를 TV나 온라인 동영상을 통해서 접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 인문교육 방안이 될 성싶다. 하지만, 인문학을 하는 원동력이 ‘자유 만끽’과 ‘자기만족’이며(145면), 결국엔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 한다면, ‘평범한 다수’의 인문학에 대한 욕구도 그 자체로 존중되어야 하지 않을까. 인문(人文)이란 말이 ‘사람의 무늬’를 뜻하기도 한다면, 인문학의 목적은 다름 아니라 우리가 ‘무늬만 사람’인 동물이 되지 않도록 경계하는 일이다. 대중적/다중적 매체로서의 인터넷을 그러한 ‘과업’에 유용한 수단으로 사용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문제는 우리의 의지다. 

09. 06.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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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제도권 밖 인문학의 양상들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09-09-16 21:31 
    이번주 대학신문에서 '제도권 밖 인문학' 동향에 관해 짚어주고 있는 기사를 옮겨놓는다. <창작과 비평>(여름호)에 내가 실었던 글도 참조하고 있어서 먼댓글로 링크해놓는다.    대학신문(09. 09. 12) 제도권 밖 인문학, 지금 만나러 갑니다 독재정권 시절. 청년들은 소위 말하는 ‘불온서적’을 들고 자발적으로 한데 모여들었다. 제도권 밖 인문학 단체의 시작이었다. 지식에 대한 사회적 규제가 완화된 지금,
 
 
2009-06-18 12: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6-18 12:3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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